Preaching/[설교: 얻어 먹은 주의 말씀]

고린도전서 설교(1): 내 믿음의 뿌리는? (고전 2장 5절)

진실과열정 2015. 4. 30. 11:14

제목: 내 믿음의 뿌리는?

본문: 고전 2: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0. 말씀앞에서

 

신학교에서는 많은 것을 배웁니다. 예를 들면, 원래 성경에는 장과 절이 없다는 걸 배웁니다. 지금은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겠지만, 처음 들었을 때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무튼 장과 절은 처음엔 없었고, 아주 오랜 후에 편의상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가 16장으로 되어있지만, 원래 편지이기 때문에, 고린도교회는 이 편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죽 읽어왔을 겁니다. 우리처럼 25절만 읽지는 않았겠죠.

 

마찬가지로, 16장이라고 해서 고린도전서가 16개의 내용으로 딱 떨어진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굵직한 주제들로 묶어서 생각해야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고린도전서의 첫 번째 굵직한 주제는,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들은 것처럼, ‘글로애의 편지를 통해 알게 된, 고린도교회의 분쟁입니다. 분쟁에 대한 내용이 1장부터 4장까지 이어집니다. 참 많죠. 그러고 보면, ‘분쟁이 교회생활과 신앙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임을 다시 알게 됩니다.

 

분쟁을 다르게 표현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좀 낫지~” “그래도, 내가 좀 더 낫지~” 그렇습니다. 분쟁의 근원은, ‘교만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치유와 회복의 목적이 바로, 고린도교회의 교만, , ‘우리의 교만입니다. 여러분,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고린도전서를 1장부터 4장까지 계속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벼는 익을수록 머리를 숙이는데, 사람은 머리가 채워질수록 목이 곧은 백성이 되네!” 지혜와 지식이 나의 삶을 바꾸지 못하고, 오히려 나의 목만 두껍게 바꿔줍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다고 해서 지혜와 지식, 그 자체를 내버린다거나, 전혀 필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고전 5:10에 바울은 신앙인이 세상을 대하는 큰 원칙을 알려주기를, 우리는 세상을 떠나서 사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지혜와 지식을 떠나서 살 수는 없습니다. 역시 고전 1:5,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두고 감사하기를, 지식과 말이 풍족하다라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너무 단순하게, ‘이제부터 지혜와 지식을 무시해버리자!’라고 하면 안 됩니다. 문제는 그리스도 안에있는 지식/지혜인가? 그렇지 않은가?입니다(5).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나눠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지혜는 교만하게 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그런데 여러분, 과연 어떤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혜일까요? 설교를 준비하면서, 고린도전서 말씀을 몇 번이고 읽으면서, 수요예배 포스터의 한 구절이 자꾸만 밟혔습니다. 바로 꼼꼼히 읽고, 삶이 변화되는, 고린도전서 강해라는 말입니다. 정말 그런가? 정말 꼼꼼히 읽으면, 자동으로 삶이 변화될까? 말 그대로, ‘말씀을 꼼꼼하게 잘 공부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혜인가? 혹은 바른 신학을 체계적으로 잘 배우는 것이, 과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혜인가? 책을 10권 읽으면, 세미나를 100번 참여하면,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혜자인가? 사랑하는 여러분, 언제부터 아는 것, ‘많이 아는 것, ‘바르게 아는 것이 기독교를 상징하는 것이 되었을까요? 아는 것믿음과 연결되는 것일까요?

 

바울은, 믿음은 이 아니라 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3:4): ‘너희가 아볼로에게 배워서 알았다고 그게 다가 아니다’ ‘너희가 나 바울에게서 배웠다고 그게 다가 아니다배워서 아는 것,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더 중요한 것이 있어! 바로 삶이야. 그러므로 나의 삶을 카피해라! 나는 너희의 스승이 되고 싶지 않고, 나는 너희의 아비가 되고 싶다. “너희는 나의 삶을 본받는자가 되라!”(4:16)

 

그렇습니다. 물론 잘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신앙은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는, 비밀입니다. 기독교신앙을 충분케 만드는 것은, 능력입니다(2: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오늘의 말씀은 가장 짧지만, 우리의 신앙 전체를 돌아보게 합니다. ‘과연 나의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에 뿌리를 두었던 것일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반성해야 합니다: ‘왜 나는, 나의 믿음을, 하나님의 능력보다 사람의 지혜에 두려고 했을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은 과연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나요? 말씀을 많이 알고, 더 정확하게 알고, 더 깊이 알았던 것이 여러분의 믿음을 좌우하나요? 아니면 하나님의 능력에 뿌리를 두고 있나요? 오늘 성경은 하나님의 능력에 뿌리를 둔 믿음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지도를 보고 여행을 하다가 잘못된 길을 가면, 다시 돌아가서 바른 길을 찾잖아요?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는 어디에서부터 잘못 걸어왔는지 되돌아갈 것입니다. 출발점을 다시 찾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1. 말씀 안에서

 

1)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하는 삶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믿음이다(고전 1:26-31).

 

먼저 어디서부터 잘못 걸어왔는지, 출발점으로 되돌아갑시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가르침은, 언제나 우리를 돌아보게 합니다. 나를 돌아보게 하는 것입니다. 분쟁의 장소에서, 교만이 펑펑 넘치는 그런 장소에서, 나의 어제를 돌아보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과거를 보여줍니다. 127-28절에 보니, 우리의 과거를 다섯 가지나 조목조목 제시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27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 멸시 받는 것들,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우리의 출발점입니다. 우리의 B.C.인 것이지요. ‘세상의 미련한 것들,’ ‘세상의 약한 것들,’ ‘세상의 천한 것들,’ ‘세상의 멸시 받는 것들,’ ‘세상의 없는 것들입니다. 이 말이 믿어지십니까? 내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바로 이런 인생을 살았던 것이 믿어지십니까? 저는 믿어집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무엇이 진리인지 몰랐습니다. 정말 미련했습니다. (재미있게도, 미련하다라는 말이 원어로 모라입니다. ‘몰라로 외워보세요. 뭐가 진리인지 난 몰라’!) 사랑하는 여러분! 단수형이 아니라 복수형에 주목합시다: 우리들 중에 단 한명도 예외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상의’ ‘세상의그러한 미련하고/약하고/천하고/멸시받고/없는 그런 세상을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음을 믿읍시다. 우리의 출발점에 우리의 범죄한 모습 그대로 있는데, 또한 그 출발점에 하나님의 독생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음을 발견합시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출발점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는 다섯 개의 범죄한 과거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30절에 보니, (함께 읽읍시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의로움거룩함구원함이 되셨도다!” 할렐루야! 우리가 미련하고/약하고/천하고/멸시받고/없었던 죄인이었는데,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서 지혜를 얻고, ‘의로움을 얻었으며, ‘거룩함을 받고,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짜를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1: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무엇이 하나님의 능력입니까? 진짜를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능력의 사람입니다. 고린도교회는 가짜를 자랑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지혜를 자랑했고, 결과는 교만이며 분쟁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진짜를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나의 출발점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언제나 바울은 무엇을 자랑해야 하는지를 되새겼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나는 미련자(몰라!)/약한자/천한자/멸시받은자/없는자일 뿐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서, 내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십자가가 능력임을 바울은 정말 확실히 고백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이 선교를 하는 중에, 아테네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에 세상의 모든 철학, 세상의 모든 지혜가 다 있었습니다(소위 말하는 아이비리그). 말씀을 보면, 바울은 그곳에서 진검승부를 한 것 같습니다(17:17-18,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했다; 에피쿠로스철학자와 스토아철학자가 바울과 쟁론했다”). 세상의 석학들과 17:1로 싸웠습니다. 로마세계에서 황제가 신의 아들로 숭배 받는 그런 세상지혜를 두고 싸웠습니다. 말씀을 보면, 바울이 잘 싸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싸움은 잘 싸워도, 그들의 영혼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7장은 몇 사람이 믿었다라는 말로 아테네 선교를 요약할 뿐입니다. 이후에 바울이 고린도로 넘어왔지요. 그 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표현이 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밝히 증거했다.”(18:5) 바울의 태도가 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학을 포함하여(!), 세상의 지혜가 믿음의 뿌리가 되지 못함을 바울은 깨달았습니다. 오직 나의 출발점, 모든 사람의 출발점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믿음의 뿌리가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자랑할 것 많지요! 지금도 입이 근질근질 거리지요! 만나는 분들마다, ‘내가 왕년에’ ‘내가 왕년에입니다. 농담삼아서, 저도 호를 하나 만들까 합니다. ‘왕년 양지웅말입니다. 그런데요. 믿음은 말입니다. ‘왕년이란 호를 떼어버리고, 그 자리에 십자가를 붙이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그 무겁고 무서운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겼으니, 내가 입을 열면 다른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십자가가 내 자랑, 십자가가 내 능력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왕년에란 호를 뗍시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십자가를 붙입시다. (여러분 이시간 중심으로 고백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십자가 밑에서 구원의 은혜를 다시 간구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날 부하게

눈먼 날 볼 수있게 주 내게 행하셨네

호산나 호산나 죽임 당한 어린양

호산나 호산나 예수 다시 사셨네

 

 

 

2) 성령에 이끌리는 삶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믿음이다(고전 2:10-13).

 

이제 우리가 우리의 출발점을 다시 찾았으니, 지도를 보면서 앞으로 정확하게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바로 성령에 이끌리는 삶입니다.

 

기독교신앙의 위대한 선언은,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을 때,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니쉬마트)’를 넣어서, 드디어 생명체, ‘살아있는 존재’(living being)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2:7).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전혀 새로운 기준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그냥 몸을 움직인다고 살았다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사람 안에 하나님의 영이 있어야, 생명을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잖아요(11:25-26): “나는 부활이여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그렇습니다. 예수님 그 자체가 부활이요 생명이므로, 예수님을 믿으면 죽음이 힘을 잃는 것입니다. 몸으로는 기능을 하지 못해서 죽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진짜 죽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활이시기 때문에, 그 부활의 예수님을 믿으므로 우리의 육체는 썩을 것이지만, 결국 다시 살 것입니다’. 또한 계속해서,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예수님을 믿으면, 생명이 영원히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죽음그 자체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영원히 참 생명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제일 처음으로 하신 일이 바로 성령을 주셨습니다(20:22):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빚으시고 생기를 넣어서 참사람을 만드신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주셨고’, 성령을 받은 제자들, 참생명을 받은 제자들이 진짜 믿음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신앙은 전혀 새로운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전혀 새로운 기준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 핵심에는 진리의 영, 생명의 영, 곧 성령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있음을 믿고, 그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신앙인입니다(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한가지를 물으면서 설교를 계속 진행하고자 합니다. (마음으로 답해보세요) 여러분은 육에 속한 사람인가요? 아니면 신령한 사람/성령의 사람인가요? 만약에 여러분이, ‘신령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고린도전서 강해는 여러분들에게 전혀 필요치 않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는 육에 속한 사람을 위해서 썼기 때문이지요: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3:1)

 

그렇습니다. 우리는 육에 속한 사람을 불신자이고, ‘신령한 사람을 신자라고 생각하지만, 고린도전서에서는 다른 기준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믿음이 약한 형제/자매입니다. 이들에게 성령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습니다! (고전 3:16!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중요한 것은 믿음이 장성했느냐 아직 어린아이같으냐가 아니라, ‘생명그 자체가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죄사함과 구원을 경험했느냐의 문제입니다. 이후에 우리의 믿음이 연약해질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고 내안의 생명을 의심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구원거룩한삶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면, 날마다 우리의 구원을 의심하게 됩니다. ‘이렇게 살고 있는데, 내가 구원받았는가?’를 평생고민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누구도 날마다 떳떳하게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바울도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자라고 말씀하였습니다(2:12). 이 말은, 우리의 행함이라는 그 어떤 기준을 놓는다고 해도, 우리의 구원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의 심장을 이식수술받은, 생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믿으십니까?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변화한 사람들입니다. 믿으십니까? 하나님의 소유되었다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도장이 찍혀있다고 말씀하십니다(고후 1:22):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믿으십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순간 성령이 우리 안에 영원히 살고 계십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육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만하고 분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육체를 떠날 수가 없지만,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이후에 바울은 몸의 부활을 말하면서, 앞으로 우리에게는 신령한 몸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고 소망을 줍니다. (기대하십시오!) 아무튼 그런 신령한 몸의 부활이 있기전에, 육의 몸을 가진 우리들은 언제 어디서나 넘어질 수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있지만, 성령의 능력에 따라 살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고린도교회의 문제였지요. 또한 우리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문제를 구원의 문제와 연결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바울은 신앙인의 삶을, 생명체가 성장하는 것으로 빗대어 가르치고 있습니다. 간난아기가 하루만에 갈비를 뜯고 자동차 몰고 할 수 없잖아요. 그런걸 요구할 수도 없잖아요. 간난아기는 날마다 똥오줌 못가립니다. 시도때도 없이 젖달라고 웁니다. 젖먹이면, 똥싸고 오줌쌉니다. 아장아장 걷가가 넘어져서 머리깨지고 피나고 그럽니다. 어린아이가 지나간 자리는 언제나 전쟁터입니다. 그게 바로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어린아이에게는 너 왜 그랬어!’라고 하면 안됩니다. 간난아기에게 너 왜 똥싸고 오줌싸고 그래?’하면 안됩니다. 오히려 10가지 잘못해도 1가지 잘한 것을 칭찬해주는 것이 어린아이에게 좋은 것입니다.

 

말씀을 계속 읽으면서 저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왜냐하면, ! 이 말씀이 바로 나에게 주신 말씀이구나! ! 바로 내가 어린아이구나! ! 바로 내가 육신에 속한 자였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100가지 잘못한 나의 모습 품어주시고, 한가지 잘했을 때 하나님 나라에서 크게 기뻐하시네!

 

할렐루야! 이제 우리가 부족하지만, 성령에 이끌리는 삶, 곧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믿음의 삶에 대해서 경험적으로 몇가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예배가 성령에 이끌리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수요일, 금요일 이렇게 평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 성령에 이끌리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최근에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월요일/금요일 이렇게 단 이틀만 합니다. (어디서 뭘하는지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실텐데 다 잊어버리시고 제가 드리려는 초점만 생각해보세요.) 7시간씩 하는데, 평소엔 정말 널널합니다. 그런데 언젠가 금요일에 말그대로 눈코뜰새없이바빴습니다. 제가 일하는 법을 잘 몰라서 그랬던 겁니다. 아무튼 화장실 한번 못가고, 물병 하나를 세 번 나눠서 먹었더니 7시가 되었던 겁니다. 그날 그 금요일에 솔직히 걱정이 들더라구요. ‘! 내가 금요기도회에 갈 수 있을까?’ ‘! 이런 날은 주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처럼,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하지 않으실까?’라는 마음이 들더라구요. 그런데 내 안에서 뭔가가 말씀하십니다. ‘기도는 네가 하니? 아냐. 기도는 내가 해. 그러니 기도회에 가자.’ 정말 아무런 힘이 없었지만, 무릎을 꿇으니깐, 그리고 그제서야 하나님, 나의 힘으로 기도하지 않고, 성령의 힘으로 기도하게 나의 마음을 만져주시고, 나의 마음을 열어주세요하니, 기도가 되더라구요.

 

사랑하는 여러분, 전쟁같은 수요일을 보내고 오셨습니다. 맨정신으로 우리가 어찌 예배를 드릴까요? 우리의 힘으로 어떻게 예배를 드릴까요? 우리 힘으로 예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의 은혜와 성령의 힘으로 예배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만져주셔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하며 찬양할 수 있게 합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기도하게 하시며, 말씀이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오늘 정말 대단하십니다. 오늘 여러분은 정말 성령에 이끌리는 믿음의 삶을 사셨습니다!

 

한가지만 더 고백하고자 합니다. 앞서 우리는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전혀 새로운 가치관의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방식은 움켜쥐면, 부자가 되고 내가 기쁘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식은 나눠주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방식은 나의 힘으로 세상을 악착같이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지만, 하나님의 방식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세상을 부유하게 살아가는 법을 믿어지게 합니다(고후 9:6-15).

 

어제 칙필라라는 패스트푸드점으로 외식을 갔습니다. 새은이가 이런 말을 합니다: “아빠, 감사합니다. 아빠가 열심히 일한 돈으로 이런 맛있는 것을 먹네요~” 여러분, 우리 모두가 정말 열심히 일한 돈으로 자녀를 먹이고 입히며, 생계를 유지합니다. 돈은 언제나 부족하기만 하고, 언제나 아쉽기만 합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 십일조를 떼어내는 것, 이것이 바로 성령에 이끌리는 삶이 아닐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매번 못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언젠가 단 한번이라도 성령이 내 마음을 두들기실 때, ‘사랑하는 자여, 나는 네가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으로 깨닫기를 원한다그 목소리가 들릴 때, 땀과 눈물이 가득 담긴 돈에서 십일조를 떼어낼 수 있는 그런 선택을 해내길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인이 앞으로 나아가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성령의 이끌림에 순종하는 삶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러려면, 날마다 선택을 해야 합니다. 내가 주인 삼은 것들을 내려놓는 선택입니다. 내가 그동안 소중하게 여겨왔던 세상의 방식들을, 십자가 앞에서 나의 주인되신 예수님앞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힘으로 할 수 없으니,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 함께 고백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함, 연약함을 아십니다. 그러나 이 시간만큼 중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은 들으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강함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되신 주 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주사랑 거친 풍랑에도 깊은 바다처럼 나를 잠잠케해

주사랑 내 영혼의 반석 그 사랑위에 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