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 설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ㅇㅇㄱ vs ㅇㅇㅇ
핵심본문: “예수를 따라가니라(avph/lqon ovpi,sw auvtou/)”(막 1:20b)
0. 말씀 앞에서
오늘 저는 예수님의 12제자 중에 한사람인, 야고보의 삶을 소개할 것입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핵심제자 3명 중에 한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야고보. 사실 야고보는, 베드로와 요한에 비교할 때, 그리 유명하지 않습니다. 베드로처럼 두각을 나타내지도 않았고, 요한처럼 복음서를 기록하지도 않았지요. 그렇지만 말씀을 읽으면서, 야고보의 삶에 역사했던 놀라운 은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야고보가 생생하게 경험했던 예수님, 성령님, 그리고 하나님 말입니다. 오늘 그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설교를 준비했지만, 이 자리에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보잘것없는 사람이 말을 전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사람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래서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 모든 것이 낮아져야 합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로 내가 새롭게 되고, 제자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것은 나의 힘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합니다. (기도)
1. 말씀 안에서
1) 야고보와 예수님: 그는 과연 무엇을 버렸는가?
가장 먼저, 야고보가 경험했던 예수님을 생각해봅시다. 첫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는 과연 무엇을 버렸는가?’ 말씀은 야고보와 예수님의 첫 만남을, 짧지만 강력하게 보여줍니다(막 1:19-20):
19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이 짧은 구절이 얼마나 깊은 인상을 남겼는지, 많은 화가들은 저마다 멋진 그림을 그렸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간 모습에서, 화가들은 열광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이 부르시니, 그가 아버지 세베대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어쩌면 야고보는 아브라함처럼 보였을 겁니다. 먼 옛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정든 고향을 뒤로 두고 미지의 땅 가나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던 장면이 겹쳐집니다.
말씀을 보면, 야고보와 요한이 형제이고, 세베대라는 사람의 아들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①아버지 세베대는 품꾼들을 고용할 정도로 보통 이상의 어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말씀과 연관시켜 보면, ②3년 동안 예수님과 제자들의 재정 후원을 해줄 정도로 넉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마 27:55-56). 어느 정도 돈이 많았을까요? 다른 말씀엔, ③아들 요한이 ‘대제사장과 아는 사이’라고 합니다(요 18:15). 돈이면 제사장직분도 사고파는 시대였기 때문에, 우리는 세베대라는 사람이 생각보다 엄청난 부자였고, 정치권에까지 손이 뻗쳤던 것을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베대를 생각할 때, 저는 간단히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갈릴리 수산시장 대표이사’. 야고보에게 아버지 세베대는 닮고 싶은 영웅이겠죠. 말씀을 보면, ‘아들’이란 말이 원어에는 없습니다. 원어로 본다면, 그냥 ‘세베대의 야고보(VIa,kwbon to.n tou/ Zebedai,ou)’입니다. 물론 이런 표현은 통상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뜻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세베대와 야고보가 얼마나 가까운지를 잘 보여줍니다. 아버지와 장남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지요. 가업을 잇고, 가문의 영광을 책임지는 것이 바로 야고보입니다. 또한 앞에서 잠깐 살펴본 것처럼, 야고보의 앞날은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까지 보장된 탄탄대로였습니다. 그런 야고보가 갑자기 등장한 예수님 때문에, 아버지가 줄 수 있는 재산과 명예, 권력을 다 버린 겁니다. 제가 그림을 좀 그릴 줄 알면, 얼굴들에 집중해서 작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남겨진 아버지 세베대의 망연자실한 얼굴, 뭔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으며 성큼 걸어오는 야고보의 얼굴, 그리고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예수님의 뒷모습.
이후의 말씀을 보면, 야고보는 12명의 제자들 중에, 순서상으론, 넘버2였습니다(막 3:16-17):
16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17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새로운 이름을 더하셨습니다. 바로 ‘보아너게’입니다. 그런데 이 보아너게라는 이름은 두 번 다시 사용되지 않습니다. 시몬이 ‘반석’을 뜻하는 베드로로 바뀌고 나서, 시종일관 ‘베드로’로 불렸던 것과는 달리, 야고보와 요한은 ‘보아너게’라고 불리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베드로’는 제자의 삶에 긍정적인 면을 상징하지만, ‘보아너게’는 부정적인 면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보아너게는 ‘우레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쉽게 말해서 야고보는 목소리가 큰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에서 통하는 법칙이 있잖아요: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긴다.” 그래요. 야고보는 언제나 이겨왔던 사람이었습니다. 이기기 위해서 수단방법 가리지 않았죠. 자신의 목적에 걸림돌이 있으면, 그걸 부셔버리는 사람입니다(참조, 막 9:38-39).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눅 9:51-56): 예수님이 3년 동안의 공생애 사역을 마치고,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의 어떤 마을이 길을 막았습니다. 그러자 야고보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우리가 불을 명해서 하늘로부터 내리게 해서, 이 마을을 멸망해버립시다!” 짧은 말이지만, 엄청난 확신이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면 불이 떨어진다!’ 어떤 사람이 감히 이런 생각을 해낼 수 있는 걸까요? 야고보는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좀 더 깊이 파헤쳐봅시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마지막 길에서, 결국 야고보의 속내가 드러납니다. 예루살렘에 가까워질수록 12제자들은 더욱 민감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 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들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 메시야이다!” “예수님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이다!”(눅 24:21)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하지 않았나!”(요 6:15; 참조, 요 11:48) 그러므로 내가 예수님과 더 가까워져야만 한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 내내 “서로 누가 크냐하고 논쟁하고” 있었습니다(막 9:34). 그런 제자들 속에서 베드로가 손을 들고 말합니다(막 10:28): “예수님, 아시지요.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습니다!” 순간, 속으로 쾌재를 부른 몇 명이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합니다(막 10:29): “그렇다. 나와 복음을 위해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나 버린 자는...” 이렇게 말씀하실수록 탈락자는 늘어만 갑니다. 누가 승리의 주먹을 쥐었을까요? 우리가 아는 한 ‘아버지’를 버렸던 사람이 과연 누구입니까! 야고보와 요한이 최후 승리를 만끽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조용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30절):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받을 것이다.” 뭔가 잘못되었습니다. ‘아버지’만 쏙 빠져 있습니다. 누구 들으라고 한 말일까요? “야고보야, 네가 나를 위해 박해를 받을 수 있겠느냐? 네가 1등되려고 하는데,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30b-31절).
야고보는 주춤했지만, 주눅 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더 노골적으로 나갑니다(막 10:35-37): “예수님, 예루살렘에 가시거든, 제가 우편에 앉읍시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주님, 우의정 자리는 제겁니다. 야고보는 정말 믿었던 겁니다. 내가 예수님 덕분에 높은 사람 한 번 되보자! 대제사장의 말 한마디에 날아가는 새가 떨어지지 않은가! 정말 나도 높아져서 명령만 하면 하늘에서 불을 내려보리라! “예수님, 아시죠? 접니다. 야고보에요! 제가 아버지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어요. 앞날이 창창했잖아요! 그냥 자리만 떡하니 지키면, 아버지를 이어 갈릴리 수산시장 회장되고, 또 정치에도 입문할 수 있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다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다구요. 그러니, 우의정 자리는 저에게 주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인가요(막 10:43-45):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동안 잘 그렸던 그림이 갑자기 이상해집니다. 미소를 머금었던 야고보의 얼굴이 일그러집니다. “네? 뭐라구요? 아니 예수님, 이러면 안되지요. 아니, 이 양반이 세상을 헛살았나? 이것 좀 봅시다. 내가 왜 아버지를 버렸는데! 내가 왜 고향을 버리고 이런 고생을 하는데! 내가 왜 창창한 미래를 버렸는데! 내가 왜 집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이 거지같은 삶을 3년이나 살았는데! 이게 다 예수님때문아닙니까? 메시야인 당신이 뭔가 나에게 주어야지죠!”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욥 1:9) 내가 왜 이 고생하면서 교회를 다니고, 이 신앙을 지키겠어요! 예수님이 내 사업을 지켜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직장을 지켜주어야지요. 예수님, 내 자녀들 좋은 대학가게 해주셔야지요. 내 건강, 내 학위, 내 명예! 예수님이 내 성공의 보증수표잖아요. “내가 어찌 까닭없이 주님을 따랐겠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제자의 삶이란 또 무엇일까요? 야고보는 과연 무엇을 버렸던 걸까요? 그리고 우리는 또 무엇을 버렸던 걸까요? 야고보는 분명 버렸습니다. 왜요? 더 큰 것을 붙잡기 위해서, 작은 것을 버렸습니다. 불행히도 ‘더 큰 것’은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 야고보는 예수님을 버립니다(막 14:50). 자기 목숨이 예수님보다 더 크기 때문이지요. 얄굿게도 ‘버리다(avfi,hmi)’라는 말은, 야고보가 아버지를 버릴 때 썼던 것과 똑같은 단어입니다(막 1:20).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도 똑같이 버리셨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버리셨습니다. 가장 쓸모없는 것을 잡기 위해서, 가장 위대한 것을 버리셨습니다. 몇일전 성가대 연습을 하면서 나왔던 말이 ‘벌레’였습니다. 징그럽고 곁에 두기도 싫은 존재입니다. 나의 삶에 아무짝에 소용이 없는 존재입니다. 벌레는 말 그대로 벌레입니다. 손도 안대고 그냥 신발 던져서 잡는 게 벌레입니다. 가장 쓸모없을 때, 우리는 대표적으로 ‘벌레보다 못하다’고 합니다. 예수님 앞에, 한 마리 벌레와 내가 있다면, 나는 어떤 존재일까요? 벌레는 거짓말 안하잖아요. 벌레는 간음하지 않잖아요. 벌레는 사기치지 않고, 벌레는 남을 저주하지 않잖아요. 그래요. 나는 벌레보다 못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아무런 까닭도 없이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너를 아무 이유없이 사랑하신다. 그래서 독생자를 이 땅에 주셨다. 네가 죄인되었을 때, 네가 죄인 중에 괴수였을 때, 네가 아무짝에도 쓸모 없을 때, 내가 너를 위해 죽음으로, 하나님이 너를 아무 까닭도 없이 사랑하고 있음을 확증하실 것이다”(요 3:16; 롬 5:8).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유월절을 앞둔 한밤중에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잡아갔고,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골고다 언덕에 예수님을 매달은 십자가가 세워졌습니다. 제자들 중에, 야고보의 동생, 요한만이 그 자리를 지켰을 뿐입니다. 요한은 야고보를 찾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어.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던거야. 우리는 오해했었지. 그분이 다윗처럼 전쟁으로 로마를 물리칠 것이라고 말이야. 그런데 우리의 진짜 적은 로마가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를 가로 막았던 우리의 ‘죄’였고, 죄의 결과인 ‘사망’이었어. 그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문제이지.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대신 죽으신 거야. 단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말이야”(요 15:13).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19:30): “다 이루었다!” ‘야고보야,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을 다 이루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야고보는 주저앉고 맙니다. 내가 버렸다고 자랑했던 것들이, 실상은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했던 바벨탑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나는 더 큰 것을 바라고, 주를 좇았지만, 예수님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단지 나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던 겁니다. 그동안 야고보는 예수님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남겼던 빵과 물고기를 보았고, 그분을 따랐던 수많은 사람들의 행렬을 보았던 겁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 아니라, 그분을 찬양했던 칭송의 소리를 들었던 겁니다. 십자가를 본 것이 아니라, 화려한 성전의 높은 자리를 보았던 것입니다. 신앙이 무엇인지요! 예수님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어버린 가짜 신앙이 확연하게 드러났습니다. 바로 십자가 아래에서, 야고보의 거짓 신앙의 옷은 낱낱이 벗겨졌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숨을 곳을 찾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그를 위한 치유였습니다. 거짓의 옷이 벗겨지고, 예수님의 보혈의 옷이 야고보를 감싸주었습니다. 이기적이고 허물 많은 그의 더러운 죄를 눈보다 더 희게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야고보를 새롭게 만들어줍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게 해줍니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삶을 새롭게 하시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삶을 새롭게 하네.” 그리고 야고보는 고백합니다: 예수님, 이젠 주님만 볼래요. 내게로부터 눈을 들어, 이젠 주님만 볼래요. 예수님이 나의 유일한 목적입니다. 드디어 야고보의 얼굴엔 참된 미소가 꽃폈습니다.
2) 야고보와 성령님: 변화를 구경만 할 것인가? 변화를 체험할 것인가?
예수님은 약속하셨던 것처럼 부활하셨습니다(막 8:31; 9:31; 10:34). 부활하신 예수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사십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거듭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행 1:3). 이 땅에 속하지 않은, 아니 이 땅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거룩한 모습’으로 변하셨습니다. 야고보는 한 가지 사건을 생각해낼 수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되었던, ‘변화산사건’입니다(막 9장).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후에, 변화산에서의 그 모습이 무엇을 의미했던 것인지, 비로소 깨닫게 된 겁니다(9:2,9):
2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 9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그 때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야고보만을 데리고, 장차 부활하셔서 ‘거룩한 모습’으로 변하실 것을 미리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거룩한 모습’을 통해, 야고보는 ‘변화산사건’을 기억했고, 이것은 3년 동안 경험했던 하나님의 나라를 새롭게 깨닫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으로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원천은 바로 기도에 있습니다. 변화산에서 내려오자 예수님은 벙어리귀신 들린 아이를 만납니다. 아무도 고칠 수 없었지요. 예수님이 그 귀신을 쫓아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귀신을 어떻게 좇아냈냐구?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지냐구?’ 바로 기도이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막 9:29).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다! 찾는 이가 찾을 것이다!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다!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0,13) 그렇습니다. 변화는 성령의 결과이며, 성령의 원천은 바로 기도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시며, 유일한 열쇠는 하나님의 영(성령)이며, 그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기도밖에 없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제자들은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 기도에 힘쓰기 시작했습니다(행 1:14). 처음엔 쉽지 않았지요. 모인 사람들이 마음을 같이해서 오직 기도에 힘쓰는 일이 생각처럼 쉬웠겠어요?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이유 때문에, 저런 이유 때문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어떨때는 갑자기 기도가 막히는 것 같기도 했지요.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납니다. 목은 쉬고 지쳐갔습니다. 목청이 좋다던 야고보 역시 며칠이 지나니까, 쇠소리만 걸걸하게 울렸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은 한소리들 하곤 했죠. “적당히 좀 하라구!” 그러나 그들은 쉬지 않고 기도해야 했습니다. 사람보면 안되고, 환경보면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을 기대하며 나아가야했습니다. 나의 생각과 욕심으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하신 성령을 사모해야 합니다. 오직 성령께서 가르쳐주시고, 기도할 바를 알려주시며, 순종하겠다고 아뢰는 것입니다. 처음엔 힘들지만, 어느 순간 내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나를 인도하고 있음이 느껴졌습니다.
열흘쯤 되었을까요? 100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좁은 다락에 모여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합니다. 웅성웅성하면서, 기도를 하며 성령을 구할 때, 하나님은 그들의 속사람을 만지셨습니다. 내가 얼마나 죄인이었는지, 내 속에 거룩한 성령을 담기엔, 내 속사람이 참으로 더럽고 추한 사람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탄식이 나왔지요. 오! 하나님, 용서해주세요. 저같이 더러운 사람이 감히 거룩한 성령을 모시다니요. 하나님 저를 태워주세요. 여기저기에서 울음이 터졌습니다. 하나님, 저 때문에 예수님이 오셨던 거군요. 하나님, 저를 믿고, 저에게 하나님 나라를 맡기시려고 하는 거군요. 하나님! 저의 힘으로 할 수 없어요, 하나님의 능력을 주세요! 기도가 터져나왔어요. 그것은 사람이 만들어낸 기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절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호소! 중심이 들어있는 충성의 맹세! 그것은 바로 찬양이었습니다.
그 순간, 하늘의 문이 열렸습니다. 성령이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더니, 불의 혀같이 갈라져서, 기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였습니다(눅 9:54의 역전!). 할렐루야!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겁니다(행 2:4). 제자들의 속사람이 뜨거워졌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벅찬 감동으로 그들을 이끌었습니다! 기쁨과 감사! 환호성과 박수가 여기저기에서 터져나왔습니다. 그들은 밖으로 나가서 성령의 인도하심대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그리스도/메시야이심을 증거했습니다. 그들 중에 야고보가 있었습니다. 목소리는 여전히 쇳소리를 냈지만, 그것은 하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논리가 아니라, 성령이 말씀하시니, 하늘의 메시지가 선포된 것입니다. 성령으로 변화된 사람들을 통해, 한사람 두사람, 삼천명 오천명이 주님께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님은 그들을 변화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겁니다: “야고보야, 너는 이제 사람을 낚는 어부이다. 저 죄악의 바다 속에 죽어가는 사람들, 그 불쌍한 사람들을 건져내어 살려라!” 사랑하는 여러분! 변화를 보기만 할 겁니까! 변화를 직접 체험하시겠습니까! 성령이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오직 기도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3) 야고보와 하나님: 하나님이 예비하신 길에 ‘예’할 수 있는가?
이제 야고보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룹니다. 예수님을 따릅니다. 야고보가 가는 길이 예수님이 걷던 길입니다. 그분은 낮은 곳에 임하셨고, 죄인들과 함께 계셨으며, 눈물을 닦아주고, 친구가 되어주셨지요. 이제는 야고보도 예수님처럼, 이웃을 섬깁니다. 과거의 야고보는 호시탐탐 넘버1을 노렸지만, 이제는 아무런 욕심이 없습니다. 더 이상 그가 사는 이유는 넘버1에 있지 않았습니다. 야고보가 사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있으니, 내 삶이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현장이 되었으니, 그거 하나만으로 만족하고 감사했습니다. 은혜잖아요.
성령의 역사로 복음의 세력이 커진 만큼, 사단의 저항도 격렬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복음을 확장시켰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방법입니다. ‘칼’이 아닌 ‘피’가 복음의 문을 엽니다. ‘논쟁’이 아닌 ‘용서’가 성령의 역사입니다. 예루살렘에 머물렀던 복음은, 스데반 집사의 순교를 통해서, 사마리아로 퍼졌습니다(행 8:4-5). 어느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헤롯이 교회를 해하려고 한다(행 12:1). 누군가가 스데반처럼,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 한다. 누가 그 길을 가겠는가? 순간 침묵이 따랐습니다. 베드로는 안 돼. 걔는 넘버1이야. 요한은 아직 너무 어려. 마태가 있어야 우리 살림도 챙기지. 새로 사도가 된 맛디아도 안 돼. 아버지 하나님, 저 야고보가 여기 있습니다. 그동안 넘버2였는데, 이번만큼은 제가 1등이 되고 싶네요. 베드로를 살려주시고, 대신 저를 받아주세요. 내가 걷고 싶은 길보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길이 더 좋습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길에 ‘예’하고 싶습니다. 비록 그 길이 좁고 험할지라도, 이제는 그길 걷겠습니다: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행 12:2) 교회사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유세비우스는 이런 일화를 소개합니다: 사형장에서 야고보는 최종변론을 했다. 자신의 삶을 말하고, 예수님, 성령님,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고백했다. 그러자 야고보를 결박해서 재판석으로 이끌었던 사람이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외쳤다! “나도 그리스도인이오! 나도 같이 죽겠소!” 야고보는 그에게 ‘주의 평강이 있기를’이란 진심어린 한마디를 전했다. 그리고 그 둘은 같은 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예수님과 부둥켜안았다. 사랑하는 여러분, 야고보의 경험은 여기까지입니다.
2. 말씀이 삶으로
성경엔 예수님의 12사도들 중, 두 명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사람은 예수님을 버리고 자살로 끝난 유다입니다. 그리고 또 한사람은 처음엔 예수님을 버렸지만, 십자가 사랑을 깨닫고 돌아와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순교한 야고보입니다. 유다가 죽고 세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야고보가 순교한 다음 세상은 변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더욱 넓어졌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의 순교이후, 하나님은 바울과 바나바에게 1차 선교를 명령하셨습니다(행 13:2-3).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자의 삶’이란 내용 자체가 힘들었지만, 너무 은혜스러웠습니다. 준비기간중에 들었던 많은 설교의 메시지들이 저에게 주신 말씀들이었습니다: ‘나는 99인가 1인가? 나는 과연 성령으로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받는 사람인가? 요한의 아들 시몬아, 정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너 정말 행복을 꿈꾸지 않느냐?’
야고보란 이름을 지켜보면서, 그 야고보가 다름 아닌 우리들 자신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했던 수많은 야고보들이 다 여기에 모여있잖아요. 저는 특별히 오늘 제목을 007 vs 000으로 지었습니다. 뜬금없지만, 야고보란 이름에 007을 붙여보니, ‘양공복’이 됩니다: 양지웅! 공부해서, 복받으려고? 이 물음이 계속 저의 폐부를 찌릅니다. 네가 여기 있는 목적이 무엇이냐? 네가 사는 이유가 무엇이냐? 복이냐! 그게 전부냐? 그래서 눈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 예수님만 보게 도와주세요. 성령충만을 주세요. 하나님 예비하신 길 따라갈 수 있는 믿음을 주세요: 하나님, 000을 주세요. 양지웅, 공부하고, 봉사해라. 너의 공부와 너의 모든 과정의 결과로, 값없이 봉사해라. 낮은 곳에 거해라.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라. 병든자를 돌아보라.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라.
오늘 이시간을 통해서, 야고보의 경험이 바로 여러분의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①비록 처음엔 예수님이 주시는 복을 찾아서 교회에 왔지만, 이제는 예수님 자체가 복임을 깨닫고, 십자가만이 유일한 자랑이 되는 그런 삶말입니다. ②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성령을 사모하고, 부단히 기도하는 기도의 용사가 되시기 바랍니다. 직장과 사업, 남편/아내 그리고 자녀들, 그리고 나 자신의 문제 이 모든 것은 기도가 없으면 풀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③예수님을 따라서, 죽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내가 죽는 것이 유익하다”는 바울의 말처럼(빌 1:21), 내가 죽고 내 안에 주님이 사는 놀라운 신앙의 비밀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을 고백하고 싶습니다:
나의 시선이 예수님을 향하게 될 때,
나는 그분의 성령으로 충만케되고,
드디어 나의 삶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거룩한 나라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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