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aching/[설교: 얻어 먹은 주의 말씀]

고린도전서 설교(2): 한몸의 비밀(고전 6장 13b-14절)

진실과열정 2015. 4. 30. 11:20

제목: 한몸의 비밀 ("바울, 몸을 위해 매를 들다!")

본문: 고전 6:13b-14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0. 말씀을 기다림

 

새힘이와 새은이는 매일 성경을 조금씩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도 가까이하고, 한글도 배워서 좋은 것 같습니다. 어느날 새은이가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해주면서 이러는 겁니다: “아빠, 가인은 강했고 아벨은 약했어? 가인이 아벨을 죽였어요. 아빠, 성경을 쓰면 참 좋은데, 가끔씩 서로 미워하고, 막 죽이고 하는 부분이 나오면, 깜짝 놀라고 정말 슬퍼요.” 사랑하는 여러분, 어린아이도 말씀을 읽다가, 순간 무섭거나 두려운 내용이 나오면 이런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사실, 저 역시 오늘 우리의 말씀인 고린도전서를 읽다가, 새은이와 같이 반응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고린도전서 5장과 6(일부분)을 살펴볼 겁니다. 요즘 나온 성경책이라면, 5장 처음에 색깔 있는 글씨로, “성적 부도덕아니면, “음행한 자를 판단하다라고 제목이 붙여있을 겁니다. 51절만 읽어봐도 숨이 턱 막힙니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첫줄을 달리 표현해보겠습니다: “내가 확실히 듣기로, 너희들 안에 포르노가 있구나!” 그렇습니다. 말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기 마련인데, ‘포르노라는 말은 누가 봐도 부정적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51절에 포르네이아라고 씁니다. 그렇습니다. ‘성적으로 옳지 않은, 해서는 안되는 일’(sexual immorality)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5-6장에서 포르노4번이나 나옵니다.

 

사실 고린도하면 성적문란함으로 악명이 높습니다. 그래서 영어사전을 보면, ‘corinthianize’라는 말도 있는데, 그 의미가 문란한 삶을 살다((archaic) to live a promiscuous life)’입니다. 여러 주석가들이 항상 하는 말이, “고린도는 오늘날의 뉴욕이다. LA이거나 라스베가스이다입니다(G.D. Fee 1987: 3). 여기에서 저는 잠깐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분명, 고린도는 루이빌은 아니겠다.” (아니, 더비가 있는 이번 주만큼은, 고린도일 수도 있겠죠.)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인 고린도전서 5-6장은 음란마귀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말씀은 교회의 비밀, 즉 한몸의 비밀에 대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일관되게 교회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교회생활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상황들을 사례별로 정리해 놓은 것 같지요. 그러나 속을 보면, 바울은 하나의 큰 그림을 염두하고 있습니다: 바로, “교회의 치유와 회복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비전이 있었습니다. 치유된 교회, 회복된 교회인 거죠. 그래서 그는 고전 1:5-9에 그의 비전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너희는 모든 지식에 풍족해, 너희는 모든 은사에 풍족해, 너희는 모든 면에서 책망할 것이 없어, 너희는 항상 예수님과 교제(참예)

 

그런데, 정작 고린도전서 말씀을 읽어보면, 교회의 현실은 정반대라는 것을 곧 알게 됩니다. 지금까지 1-4장에서 고린도교회의 지적 교만을 살펴보았습니다(“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노라”[4:19]). 앞으로 우리는 고린도교회가 모든 은사에 풍족하지 않았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12-14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12:31]). 그리고 고린도교회는 모든 면에서 책망받을 일이 많았습니다(5-11; “너희 안에 포르노가 있다!”[5:1] “내가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11:22]). 마지막으로 고린도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 하지 못했습니다(15;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15:12]). 정말, 고린도교회는 치유가 필요하고 회복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린도전서를 이렇게 이해하려고 합니다. 수술실의 고린도교회 수술의 과정이 이렇습니다: 먼저 마취를 합니다. 지혜와 지식이 풍족하다고 착각했던 교회의 머리를 마취시킵니다(1-4). 이어서 배를 가르고 여기저기에서 암세포들을 걷어냅니다(5-11). 그리고는 성령의 은사들로 채워넣어줍니다(12-14).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신 것처럼, 고린도교회도 신령한 몸에 대한 부활신앙을 갖게 됩니다(15). 이것이 바로 수술실의 고린도교회입니다. 물론, 수술실의 의사는 하나님입니다. 보조가 바울입니다. 19절에, “하나님은 미쁘시다하셨습니다. 신실한 의사라는 말입니다. 믿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도저히 변화시킬 수 없는 고린도교회를 치유하고 회복시킬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도 치유하고 회복하기를 소망합니다.

 

 

1. 말씀을 알아감

 

, 이제 마취가 성공적으로 끝이 났으니(1-4), 본격적으로 암세포들을 걷어내도록 합시다. 우선 정상세포와 암세포를 구분해야 합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적당한 수의 세포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포는 에너지를 흡수해서 세포분열이라는 것을 합니다. 정상세포는 이러한 과정에서 임무를 완수하고 죽습니다. 그런데 암세포는 에너지를 먹고 분열한 다음, 죽지 않는 겁니다. 계속해서 세포분열만 하니까, 몸이 필요한 에너지를 다 잡아먹고, 필요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수술실의 고린도교회에도 정상세포와 암세포가 있습니다. 이것을 약한자(the weak)’강한자(the strong)’로 부르겠습니다. 사실 고린도서를 읽어보면, 정말 약한자와 강한자가 나옵니다(8:9). 그런데, 여기에서 약한자들은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약한자들의 편이 되었지요(8:13). 문제는 강한자입니다. 필요한 에너지는 다 잡아먹고, 실제론 교회에 필요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그룹인 거죠. ‘강한자는 정말 강했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했고, 신분적으로도 높았죠. 그리고 아는 것도 많았고, 종교적인 경험이나 체험도 있었습니다. 정말 그들은 여러모로 강한자였습니다. 반대로 약한자는 실제로 가난했고, 천했으며, 배운것도 없고, 종교적으로 잘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로마사회는 강한자약한자의 관계로 이루어졌는데, 바로 강한자의 도움으로 약한자가 살아가는 모양새입니다. 실제로 고고학자들이 도시를 파보고 참 중요한 점을 알아냈습니다(Crossan & Reed 2004: 321): 광장(시장:아고라)에 큰 집이 있는데, 그 집의 바깥쪽에 작은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습니다. 그 집의 노예들이나 고용된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장사를 하거나 생활하는 공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이 고린도에서 유대인의 회당에서 전도하는 일을 그만두고,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에서 오늘날 예배당과 같은 모임을 가졌다고 합니다(18:7). 그림을 보면(그림 1), 큰 집의 중앙에는 넓은 뜰이 있어서, 20-30명 정도의 사람들이 충분히 모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행 18:8에는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주를 믿었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온 집이란 자기 수하에 있는, 쉽게 말해서 노예들이나 세들어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강한자가 믿음에 바로서면, 즉 순기능을 해서 참 좋은데, 반대로 그렇지 않으면, 이런 환경에서 엄청난 일들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겁니다.

 

 

결국, 고린도전서 51절의 적합한 상황은, 이런 강한자가 정상세포가 아니라, 암세포가 된 겁니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바울의 전도로 예수님을 알고 믿게 되었지요. 그래서 온 집이 주를 믿었을 겁니다. 그런데 부유했기 때문에, 아내가 여럿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젊은 여자 노예를 아내로 삼습니다(Crossan & Reed 2004: 322). 그런데 아버지가 죽었고, 그 아들이 아버지의 아내를 취한 것입니다. ‘강한자에게 제어장치/브레이크가 없었기 때문에, 폭주기관차처럼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른 겁니다.

 

결국 수술실의 고린도교회는 첫 번째 암세포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습니다. 여기에는 두 개의 메스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열쇠였습니다. 교회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필요한 두 개의 메스란, 첫 번째로 새로운 노예라는 메스이고, 두 번째로 새로운 성전이라는 메스입니다(N.T. Wright 2013: 1373). 이것을 바울은 5-6장을 정리하면서 이렇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19너희 몸(교회)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교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 교회는 새로운 노예입니다 (고전 5:7-8; 6:12,20).

 

먼저 새로운 노예라는 메스를 들었습니다. 이게 뭔 소린가 싶을 텐데요, 우리는 모두 입니다. 다르게 말해서, 우리 모두는 세계관/가치관에 지배를 받는다는 겁니다. 정상세포는 그리스도의 세계관에 지배를 받습니다. 반대로 암세포는 세상의 세계관에 지배를 받습니다. 여러분,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1:1),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1: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꾼이다!”(고전 4:1) 그렇습니다. ‘크리스챤이란, 그 말 자체가, ‘그리스도의 것’, ‘그리스도의 영향 안에 있는 자’, ‘in Christ’입니다. 예전에는 세상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예수님의 종인 겁니다(2:2-3). 이것이 바로, ‘새로운 노예라는 메스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노예였다가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것이 출애굽기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의 완전한 메시지는, 출애굽(rescued from old slavery)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종이 되는 것입니다(4:22-23; 23:25; 19:6).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은 영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상징적인 의미로 다가옵니다. 세상의 권세, 죄의 권세에 눌려 종이 되었다가, 유월절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자유를 얻었고, 이제는 그분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옛노예에서 벗어나, 새노예가 되어야 합니다. 옛왕을 버리고, 새왕을 따라야 합니다.

 

옛노예가 무엇입니까? 옛왕이 무엇입니까? 실제로 고린도에서는 왕이 있었습니다. 질서가 있었고, 사탄적 세계관이 있었습니다. 바로 로마제국이 만들어놓은 거짓 세계관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2000년전의 고린도에 와있다면 깜짝 놀랄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짓 세계관/옛노예를 부추기는 것들이 사방에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건축물에는 하나같이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로마 황제는 신의 아들이다!” “아우구스투스는 구원자이다!” 글을 못읽는 사람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에, 로마황제를 신으로 묘사한 조각들이 여기저기에서 나옵니다. 심지어 모든 동전들이 시저, 신의 아들, 우리의 구원자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거짓 세계관에 물들게 됩니다.

 

로마가 만들어놓은 세계관은 간단합니다. “전쟁을 통해 정복을 하고, 세계에 평화를 준다입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팍스 로마나의 요약입니다. ‘이 최고이며, ‘지식이 최고라는 겁니다. 한마디로 양육강식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왜곡된 생각들을 만들어 냅니다. 바로 강한자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설명을 돕기 위해서 몇 개의 그림을 준비했습니다. 첫 번째 그림은, 로마의 황제가 세계를 정복했음을 알리는 조각품입니다(그림 2; Crossan & Reed 2004: 269). 여기에서 황제는 옷을 벗고 있는데, 왜냐하면 신은 옷을 입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주목할 점은, 지배를 받은 나라를 여자로 표현했다는 겁니다. 로마 황제가 만들어놓은 가정법률이 있는데, 지나치게 가부장적이며 남성중심적입니다. 성에 대한 왜곡이 어떻게 일어날지 상상할 수 있겠죠. 두 번째 그림은, 당시의 거짓 세계관을 노골적으로 보여줍니다(그림 3; Crossan & Reed 2004: 260). 남자의 성기를 만들어 놓고는, “행복은 여기에!”라고 적어놓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겉으로 보이는 성적인 모습에만 주목하면 안됩니다. 본질을 보아야 합니다. 본질은, “강한자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는 세계관입니다. 우리는 얼마전에, 땅콩 하나 때문에, 이륙하려던 비행기가 다시 돌아온 사건을 알고 있습니다. 그 본질이 무엇입니까? 땅콩 하나입니까? 아닙니다. 자신이 강한자이고, 너희들은 약한자라는 세계관을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강한자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강한자의 암세포입니다.

 

강한자는 경제적으로 부유했고, 사회계급으로 높았으며, 무엇보다도 아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4장까지 그렇게 헛된 지혜의 교만을 깨우쳐주었던 것입니다. 어찌되었건, ‘강한자는 지식적으로도 많이 알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논리에 따라서, ‘강한자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이들은 플라톤의 이원론을 배웠습니다. 사람에게는 육체와 영혼이 있는데, 영혼만이 구원의 대상이며, 육체는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지식을 통해서, 그 어떠한 한계도 없는 자유를 얻는 것이 영혼의 구원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랑스럽게 자신들의 구호를 외쳤습니다. 그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612절과 13절에 나옵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것 저것 다 폐하실 거이다!”

 

처음 두 개는 같은 말입니다. 자신들이 강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다는 겁니다.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는 것? 내가 강하니까 괜찮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들은 육체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음식물은 우리의 영혼을 위한 것이 아닌 배만 채우는 것이라고 낮게 보았습니다. “음식물은 우리의 썩을 배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의 배도 역시 썩을 음식물을 위해서! 그러므로 결국 하나님이 음식물과 배 모두 없애버리시고, 우리의 영혼만 남겨놓으실 것이야!” “죽으면 썩을 몸, 아낌없이 사용하자!” 이것이 바로 강한자의 왜곡된 세계관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이 구원파의 단적인 모습입니다. 이들은 구원을 받았으니, 우리가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자랑합니다. 윤리적인 삶이 없이, 영혼의 구원을 강조한 왜곡된 세계관인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새로운 노예라는 메스를 들고, 잘못된 세계관을 제거합니다. “그렇지 않아! 너희가 강하지만, 너희의 강함을 그렇게 사용해서는 안 돼!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모든 것을 해서는 안 돼! 그것은 교회에 도움이 안 돼!” 네가 한꺼번에 계단 두 개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그렇게 해버리면, 다른 사람은 함께 할 수 없잖아!(우 쉼페레이) 설령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나는 내 능력으로 다른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지 않겠어!(우크 엑수시아스테소마이)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몸을 하찮게 여기신다고? 절대 그렇지 않아! 우리의 몸은 음란을 위한 것이 아니야. 예수님을 몸의 부활로 살리셨던 능력의 하나님이 우리를 신령한 몸의 부활로 살리실 것이란 말야!

 

그렇습니다. ‘새로운 노예라는 메스는 거짓된 세계관을 잘라내고, 새로운 세계관을 집어넣어 줍니다. 말씀의 세계관입니다. 그리스도의 세계관입니다. 내가 강한자라 할지라도,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갖는, 그런 그리스도의 세계관입니다(2:6-11). 예수님의 피값으로 산것임을 명심하는 세계관입니다(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아까 집의 그림을 보여드리면서, 아고라라고 했습니다. 아고라는 시장을 말합니다. 물건을 사고파는 곳이지요. ‘값으로 산 것이라는 말이 바로, ‘아고라조라는 동사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고린도교회는, 즉 이런 아고라에 자리 잡은 큰 집에서 모임을 가진 교회는 깨달아야 했습니다. ! 우리가 여기(아고라)에서 사고팔고하면서 주인이 바뀌는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의 값으로 산 것이 되었구나(아고라조)!’ 이제 우리의 주인/왕은, 예수님이구나!

 

2) 교회는 새로운 성전입니다 (고전 6:14-19).

 

이제 두 번째 메스인 새로운 성전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성령이 거하시는 전’(holy temple)이라고 가르쳐줍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6:19)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3:16)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후 6:16) 그렇습니다. 교회는 새로운 성전입니다.

 

우리는 건물이 교회가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령의 전임을 믿고 살아가는 일입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모일 때에, 주님이 함께 계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으로는 떨어져 있더라도,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고 계심을 믿고, 서로 위로하며 격려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령의 전임을 믿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비록 육신으로는 고린도교회와 떨어져 있지만,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다(고전 5:3)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곳에 거룩하지 못한 것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일찍이 에스겔 예언자는 이것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우상들이 가득했고, 이스라엘이 음란에 빠지자(16) 말씀은, ‘하나님의 영광(카도쉬)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빠져나왔다라고 가르쳐줍니다(8:4; 9:3; 10:4; 10:18; 11:10; 11:23). 결국 음란한 이스라엘과 더 음란한 유다를 치유하고 회복하시는데, 그 방법은 부정한 것을 태워서 소멸시키고 뉘우치게 해서 다시 돌아오게 하는 겁니다(24:11). 그러면서 하나님은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바로 오홀라와 오홀리바라는 여인의 비유를 쓰신 겁니다(23): 오홀라는 그녀의 장막/성전이라는 뜻이며, 오홀리바는 나의 장막/성전이 그녀에게 있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을 떠나버렸지만, 하나님은 치유하고 회복하셔서, 다시 믿는 자 안으로 들어오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역시 고린도교회를 같은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집에 거룩하지 못한 것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에스겔이 부정한 것을 태워서 소멸시켰던 것처럼, 바울은 말 그대로 묵은 누룩을 내어버려야 한다고 가르칩니다(고전 5:7). 다시 말해, 바울은 음란의 문제로 고린도교회의 거룩함을 훼손시킨 강한자를 내어 쫓으라고 가르칩니다(고전 5:13):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씀이 있다고, 이제 우리가 우리 눈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내보내는 무기로 삼으면 안 될 것입니다. 혹은 부유한 사람이나 권력이 있고 배운 것이 많은 사람들은, 모조리 강한자라고 생각해도 안 될 것입니다. 앞에서 사도행전에서 좋은 경우를 본 것처럼, 중요한 것은 재산이 많고 적고, 배운 것이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 마음의 태도입니다. 그 마음이 교만하면, ‘강한자인 겁니다. 누룩을 넣으면 빵이 빵빵하게 커지잖아요. 이처럼 교만이라는 말뜻이 능력은 없으면서 속에 헛바람만 가득찬(puffed up) 상태입니다. 묵은 누룩을 내어버려야 하듯이, 그 마음에 교만함으로 빵빵하게 찬 강한자를 징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징계의 목적은 영혼의 구원입니다(5:4-5): 4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5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을 자세하게 설명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교만을 치유한 것처럼, 고린도교회의 교만도 치유하실 것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강한자를 미워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가지 사례만 생각하면 하나님의 방식을 이해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다윗왕을 생각해봅시다. 다윗왕! 그는 다른 남자의 아내를 취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강한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속에 헛바람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예루살렘에서 내쫓으셨습니다. 수많은 어려움을 겪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받아주셨습니다. 저는 이 방식이, 우리의 약함을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훈육이라고 생각합니다.

 

 

2. 말씀을 살아감

 

, 이제 첫 번째 수술과정이 끝났습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 그리고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라는 거짓세계관에 의해 만들어진 암세포를 걷어내고, 정상세포를 넣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다하더라도, 함께할 수 없다면 안하는 것이 낫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다하더라도, 나의 선택으로 다른 사람이 피해를 받는다면 아는 안할 것이야그리고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육신은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만드신 우리의 몸이야.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의 몸도 다시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리실 거이야!”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세계관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의 제목을, “음란마귀로 잡지 않고, “한몸의 비밀로 잡았습니다.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2:1), 우리도 비밀을 깨달으며 그 비밀을 굳게 잡고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1) 우리는 세상의 노예가 아니라 예수님의 노예라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2) 우리의 모임이, 우리의 교회가 성령이 계시는 집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거룩함의 능력을 경험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6:19-20): 19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