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의 딸 미갈은,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대표적인 소재로 언급될만큼, "내러티브의 폭력" 안에서,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에 갇힌 존재로 그려집니다. 일찌기 골리앗의 '죽음'을 대가로 누구에게든 안길 수 있는 무력한 왕의 딸이었으며(삼상 17:25; 타인의 '자유'를 위해 자신의 '구속'을 뒤집어쓴 인생이었죠), 더 나아가 생명 보존의 상징인 양피를 무려, 처음 약속에 더블에 해당하는 200개나 구해야 얻어낼 수 있는(삼상 18:25,27; 200명의 블레셋 여인이 생과부가 된 것은 혹시 미갈의 미모였기 때문이었을까요?), 정말 "생명과 너무 먼" 여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울의 단창을 피해 도망다녔던 다윗을 숨겨주었던 자리에서도, 미갈은 자신의 무의식속에 존재하고 있는 '죽음'의 언어를 숨김없이 드러냅니다(삼상 19:17): "(다윗이) 내게 이르기를, '나를 놓아 가게하라 어찌하여 나로 너를 죽이게 하겠느냐?' 하더이다"
어쩌면 다윗과 여러 모로 어울리는 여인으로는 미갈이 아니라 아비가일일지도 모르겠는데(삼상 16:12,18; 18:30 // 25:3, 특별히 이 둘의 어법은 상당히 비슷한 것 같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다윗이 아비가일을 아내로 맞이하는 이야기의 '부록'으로 미갈은 딴 남자의 품에 안기게 됩니다(삼상 25:44). 그러나 결국, 이후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 남자(발디엘, 삼하 3:15 [참조 시 32:7]) 역시 미갈에게는 '구원'이 되지 못했지요.
단지 미갈은 베냐민 지파를 포섭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였던 걸까요?(삼하 3:1, 6, 13, 19) 그래서 미갈도, 아버지 사울이 이룩하지 못했던 '타도 블레셋'을 다윗이 이루었으며(삼하 5:25), 더욱 그래서 다윗이 일으켰던 새로운 바람에 팔짱만 끼고 지켜보기만 했던 것일까요?
미갈의 어두움은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사건인 '야훼의 궤 예루살렘 입성 사건'에서 그 절정을 보여줍니다. 생명과 죽음이 공존하고 있는 '그 궤' 앞에서, 신앙인은 생명의 빛을 보고 기뻐하며, 그렇지 않은 사람은 죽음의 그늘 가운데 절망하지요. 사무엘하 6장 12절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이야기 단락에서, 12절의 마지막 (히브리어) 단어는 '기쁨으로'(베심하흐)입니다. 다윗은 야훼의 임재를 '심하게' 고대했고(시 132), 그렇기에 야훼 앞에서 잠잠할 수 없었습니다. 힘을 다해 춤을 추었고, 뛰놀며 춤을 추었습니다.
미갈이 왕의 체통을 상실한 다윗을 쏟아붙였을때(6:20; '어떻게 영화로우신 분인지![마흐 니켓바드(카보드)] 방탕한 자가 몸을 드러내는(니게라흐) 것과 똑같군요!'), 다윗은 주체할 수 없는 자기 심장의 뜨거움을 숨기지 않으며, "야훼 앞에" 기뻐하는 신앙의 '생명력'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나를 주권자(나기드)로 삼으셨고, 이렇게 천한 나를 높이실(카보드) 것이오!" 미갈에겐 잉태되는 생명이 없었고, 그것은 그녀가 죽을 때까지 였습니다(미갈에 대한 공식적 언급의 마지막 단어는 '그녀의 죽음'입니다 [참고로 재미있는 사실로, 삼하 17:20의 히브리어 본문은, 사본상의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갈'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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