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51편에서 다윗은 자신의 상태를 "꺾으신 뼈와 통회하는 마음"이라고 표현합니다(8,17절). 히브리어로는 모두 같은 단어(다카흐)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8절에 하나님이 다윗의 뼈를 부숴버리셨으며, 17절에 다윗은 그 상태를 산산히 부서진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8절에서 다윗의 철저한 수동적 자세에 주목하게 됩니다. 첫단어[당신으로 내가 듣게하소서]의 주체는 하나님이요, 마지막 단어[당신이 꺾어버린] 역시 하나님이 가지고 있습니다.)
시편 51편은, 그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나단에게서 신적 징계를 받고 난 이후를 맥락으로 잡고 있습니다.
히브리어의 내러티브는, 밧세바와 동침한 이후(삼하 11:1-5) 다윗의 행동이 '치밀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3번 '보냅니다'(6절, 샬라ㅋ흐). 그리고 3번 '안부'를 묻습니다(7절, 샬롬). 왜냐하면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를 전장에서 돌이켜서 '물타기'를 하려고 작정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야의 대답은 '신적(혹은 내러티브적) 치밀함'을 보여줍니다: "내가 내집에 가리이까? '먹으려고' '마시려고' '(내 여자와 같이) 누우려고'" 다윗은, 전우들과 함께 숙면을 취했던 우리야와 달리 죄악의 밤을 보낸 이후(11:13-14), 아무도 모르게(?), '피 흘린 자'(16:7)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결국 우리야는 전사하였고, 우리야의 전사를 알리는 사자에게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일로 걱정하지 마라"(25절). 이 말의 히브리어식 표현은 이렇습니다: "이 일이 네 눈에 나쁘게 보지 마라." 11장의 마지막 구절은, 놀랍게도, 다윗의 말을 뒤집어 엎어버립니다(27절): "그 일이 야훼의 눈에 나빴다."
죽은 아들 다음으로 태어난 아들에게 다윗은 '솔로몬'이란 이름을 주었지만(12:24), 하나님은 그 이름을 '여디디야'로 부르셨습니다(25절). 다윗은 이제 정말 '평안'을 누리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7:1). 그래서 성전도 건축하려고 했지요(신 12:10-11). 한마디로, 아들 솔로몬은 아빠 다윗과 '다른'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바램이 있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아들의 이름을 '사랑'(히브리어 '도드')으로 만들어버리면서, 다윗(dwd)과 여디디야(야훼가 사랑하신다)가 같은 이름이 되게 하셨습니다. 여디디야는 '다윗 주니어'가 된 셈이지요. 반대로 생각하면, '솔로몬' 아니 '여디디야'는 다윗을 향한 야훼의 '치밀한 파괴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다윗의 유언에는 삼하 11장의 뼈에 사무친 후회를 들을 수 있습니다[W. Breuggemann 2002: 47f].)
이제 히브리어 내러티브는 다윗을 뒤집어 엎어버리는 야훼의 '치밀하심'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특별히 다윗의 '말'을 이용하십니다.
1) 다윗을 꾸짖는 나단의 말에는 숨은 일화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처들을 네 품에 두었다"(12:8). 네 주인(사울)의 처들을 주었다? 이전 왕의 아내를 얻는 것으로, 새로운 왕조의 시작을 알리는 것은 고대 역사의 보편적인 일이었지요(왕상 2:22). 바룩 할펀은 다윗의 첫째 아들 암논의 어머니가(삼하 13:1), 본래 사울의 아내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상의 깊은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고 주장합니다(B. Halpern 2001: 87). 어찌 되었건, 첫째 아들은 '괴악한(느발라흐, 삿 19:23)' 일을 행하고, 맞아 죽고 맙니다. 다말이 옷을 찢은 것처럼(13:19), 다윗도 왕의 옷을 찢습니다(31). 이 찢어짐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죠.
2) 압살롬이, 비록 살인죄가 있지만, 다시 왕실로 돌아와서 결국 반역을 일으켜서 죽임을 당하기까지, 내러티브는 엄청난 분량으로 짜여져 있습니다(삼하 13-19장). 그러나 다윗이, 드고아의 지혜로운 여인의 화법에 넘어가서 '말해 버린' 내용처럼("네 아들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14:11), 압살롬의 사인(死因)은 그의 평생의 자랑(14:26) 자신의 머리 카락이었습니다: "압살롬의 머리털이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요압이 상수리나무 가운데서 아직 살아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니..."(삼하 18:9,14). 자신의 허영심이 죽음을 초래한다는 도덕적 교훈도 가능하지만(M.Sweeney 2012:229), 역시 다윗의 '말'을 있는 그대로 이용하시는 야훼의 '치밀하심'이 드러난다 하겠지요. 한편, 여기에서 등장하는 '상수리나무'가 '여신'(하엘라흐)으로도 가능하기 때문에, 여신이 압살롬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움켜잡아버린 모습까지도 '상상할' 수 있겠습니다.
3) 압살롬과의 원치않는 전쟁에서 다윗은 '적을 살리라'라는 말도 안되는 부탁을 자신의 군사들에게 요청합니다(삼하 18:5):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 히브리어는 '레오메르 레아트_리 라나아르 레압살롬'으로 '두운법'을 발견할 수 있는데, 여기에선 이스라엘 민중은 찾아볼 수 없죠. '너그러이'라는 말이 전치사 '레'+'아트'인데, 어찌되었건 그 '자음'이 19장 4절에서 나옵니다(히브리어 본문은 5절): "그 왕이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라아트)'"입니다. 다윗은 압살롬아 하면서 엉엉 울였죠. 백성을 생각하지 않은 지도자의 사심에(삼하 19:6), 야훼는 '치밀하게' 다윗의 '말'을 있는 그대로 이용하십니다.
4) 압살롬이 죽고, 그러니까 다윗에게서 등을 돌린 적들이 패배하고 난 후, 다윗은 대역죄인의 우두머리였던 아마사를 등용하여 군대장관이 되게 합니다(삼하 17:25; 19:13). 거의 삼국지 수준이죠. 문제는 다윗의 '말'입니다(19:13):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네가 요압을 대신하여 항상 내 앞에서 군장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라노라". 다윗은 새로 등용된 '낙하산' 아마사에게 3일만에 군사를 모집하라는 불가능한 임무를 주었고, 이를 빌미로 낙마한 요압은 '형' 아마사를 죽이고 맙니다(20:8-10). 결국 요압이 이스라엘 온 군대의 장관이 되었고(20:23), 다윗의 약속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지요. 사무엘하 21, 24장의 재앙은, 비록 21-24장의 문학구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떨어진 약속에 대한 야훼의 '치밀하심'은 아닐까요? "벌 위에 벌"
다윗은 나단의 책망이 있기전에, 자신의 운명을 미리 말하였습니다: "4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삼하 12:6) 물론 억지로 끼워맞추는 무리한 읽기이지만, 히브리어 내러티브 안에 들어있는 치밀한 흐름은, 신앙에 있어서 '이야기의 힘'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이야기는 세계관을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가정의 파멸이라는 비극 속에서도, 국가의 분열이라는 절망 속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인생은 야훼 앞에 없습니다. 만약 고대 사회의 세계관에 따라서 다윗이 도망길에 '언약궤'를 메고 갔다면 정말 돌이킬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삼하 15:24-26). 그는 하나님 앞에 꼼수 버리기를 포기했고("unconventional logic", B.Halpern 2001: 44), 대신 은혜(헨), 와 기쁨(하파쯔//헵찌바)을 구했습니다(삼하 15:25,26절). 감람산에서, 마치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선한 뜻을 구할 때(31절), 하나님은 후새를 보내셔서 하나님의 원대로 되게 하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뼈를 '부숴' 버리고, 마음이 '부숴'지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한 영혼이 겪는 죄의 짐의 무게가 무엇인지를 경험했던 것이지요. 다윗의 시편은 예배가 어떠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철저하게 나만을 위해 살았던 삶의 폐혜, 내 생각보다 더 치밀하게 나를 감싼 하나님의 포위, 나를 드러내고 은혜를 구할 때 멸시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회복. 그러므로 역대기 역사가가 사무엘서의 상처를 치유하는 자세는, 역사가의 횡포만이 아니라, 그들의 '희망 가득한 진실(hopeful truth)'임에 분명합니다(W.Breuggemann 200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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