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구약 성서

출애굽기 13장 연구: ’중복 기록’에 대한 접근

진실과열정 2019. 3. 2. 12:41

<’중복 기록’에 대한 접근>


성서를 읽다보면 빈번하게 발견할 수 있는 것 중에 하나가 ‘중복 기록’이다. 예를 들면, 쉬운 발견으로 창조에 대한 창세기 1장과 창세기 2장의 기록이 있고,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면 창세기 6-9장은 두개의 이야기가 촘촘하게 얽혀있다. 고대서아시아 문헌을 연구하는 보수적인 학자들은 ‘그쪽’에도 중복기록이 존재하기 때문에 성서가 복잡한 편집이나 난잡한 자료들로 구성되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들은 ‘그쪽’ 문헌들 자체에 대해서 편집과 자료 연구를 시도하지 않고 ‘그쪽’의 최종형태로 단순비교를 한 것이다. 또한 보수적인 문학연구가들은 핵심개념이나 키워드들의 구조와 배치를 조사하여, 수미쌍관이나 교차대구의 아름다움을 ‘찾아내기’도 하지만(노아홍수가 좋은 예), 아쉬운 점이라면 그러한 최종형태를 만들었던 서기관의 관점으로까지 발전하지 못하고 오히려 ‘신적 신비’로 묻어두려는 고백적 신앙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과연 서기관들은 그러한 최종형태를 만들었는가? ‘해석’과 ‘기록’ 그리고 ‘전통’의 미묘한 삼각관계는 화석이 아니라 생명(유기체)이라는 관점으로 여러학자들은 독특한 연구물을 내놓았다. Michael Fishbane(Interpretation of Ancient Israel)이나 Karel van der Toorn(Scribal Culture)은 그 시대의 대표선수들이 아닐까?


출애굽기 13장은 그러한 사례가 될 수 있다. 여기에도 두가지 이야기가 들어있으며, 서기관의 미묘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첫째는 13:1-10이고 둘째는 13:11-16이다. 모두 출애굽과 관련하여 ‘첫째/초태생’의 구별을 다루는 내용이며, 그 종결이 유사하지만 주목할 부분이 분명히 있다(9절; 16절): 바로 “야훼의 토라”에 대한 언급이다.


(출 13:9)
וְהָיָה֩ לְךָ֨ לְא֜וֹת עַל־יָדְךָ֗ וּלְזִכָּרוֹן֙ בֵּ֣ין עֵינֶ֔יךָ לְמַ֗עַן תִּהְיֶ֛ה תּוֹרַ֥ת יְהוָ֖ה בְּפִ֑יךָ כִּ֚י בְּיָ֣ד חֲזָקָ֔ה הוֹצִֽאֲךָ֥ יְהֹוָ֖ה מִמִּצְרָֽיִם׃


(출 13:16)
וְהָיָ֤ה לְאוֹת֙ עַל־יָ֣דְכָ֔ה וּלְטוֹטָפֹ֖ת בֵּ֣ין עֵינֶ֑יךָ כִּ֚י בְּחֹ֣זֶק יָ֔ד הוֹצִיאָ֥נוּ יְהוָ֖ה מִמִּצְרָֽיִם׃


9절은 “(이것이 네게) 네 손의 표식으로, 그리고 네 이마의 기념으로 남을 것인데, 왜냐하면 이로써 야훼의 토라가 네 입에 계속해서 남게 되기 때문이다. 능력의 손으로 야훼께서는 너희를 애굽에서부터 이끌어내셨다.”이며, 16절은 “네 손의 표식으로, 그리고 네 이마에 기념물로 할 것인데, 손의 능력으로 야훼께서는 너희를 애굽에서부터 이끌어내셨다.”이다.


크게 두가지가 눈에 띈다. 첫째는 9절의 ‘지카론’(기념)과 16절의 ‘토타퐅’(기념물)이다. ‘지카론’은 ‘자카르’(기억하다/기념하다)라는 동사의 명사형으로, P가 이 동사를 신적 자비의 표현으로 애용했던 것에 비해(출 2:24; 6:5; cf. 창 8:1), E는 이것을 인간의 신앙으로 말하고 있다(출 3:15). ‘토타퐅’은 일종의 ‘하팍스레고메나’ 즉, 성서에 희귀하게 나오는 단어라서, 그 어원을 찾기 힘들다. 아무래도 신 6:8; 11:18은 출 13:16을 해석한 표현이라고 보여지는데, 신명기의 ‘토타퐅’은 다른말로 ‘메주자’라고 부르는 짧은 말씀이 들어있는 작은 상자이다. 랍비전통은 말씀을 몸에 항상 ‘부착’하기 위해서(유비쿼터스의 조상쯤되겠다), 말씀을 기록한 긴 가죽이나 천조각을 팔에 둘둘 말거나(‘테필림’), 작은 상자(‘메주자’)에 넣고 자신의 이마에 끈으로 묶어서 고정시켰다(고고학적 연구는 W.G. Dever, Did God have a Wife?, 131). 결국, 출 13:16과 비교되는 신명기의 상황을 역추적해보면, 출 13:16의 종교이해는 비교적 후대의 상황임을 유추하게 된다(즉, 기록물이 보편적일 수 있다는 사회정황을 배경으로 깔고 있기 때문에, 왕조이후의 상황으로 보는 것이 낫다).


둘째는, 9절에만 들어있는, “(왜냐하면) 이로써 야훼의 토라가 네 입에 계속해서 남게 되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이다. 사실 ‘야훼의 토라/가르침’이라는 표현은 흔하지 않기 때문인데, 그것들이 나타나는 부분은 포로 후기가 대부분이며(대상 22:12; 대하 12:1; 17:9; 34:14; 스 7:10; 느 9:3), 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나타내기 보다 평행법과 같은 시적인 표현이거나(시 19:8; 사 5:24) 왕조 이후의 책의 시대와 연결되거나(사 30:9), 혹은 서기관에 의한 후대의 추가(암 2:4)에 해당할 뿐이다. 그렇다면, 출 13:9의 ‘야훼의 토라’ 역시 16절의 시대보다 더 후대의 것일까? 단어가 어느 시대에 등장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시대의 산물이라는 법은 없다(사실, 이것이 고대서아시아의 비교문헌을 단순하게 어휘적으로 연구하는 보수적 학자들의 헛점이다; cf. T.L. Thompson, Historicity of the Patriarchal Narratives). 오히려 단어는 시대를 거쳐서 그 의미가 변할 수 있는데, 그 방향은 인류학적인 차원에서 접근하자면, 조금 원시적인 면에서 좀 더 사회적이고 보수적인 측면으로 이동한다(좋은 예는 ‘노예해방’에 대한 출 21:2-6과 신 15:12-18을 비교하는 일이다; cf. Christine Hayes, Introduction to the Bible, 172-77). 그러므로 출 13:9의 ‘야훼의 토라’를 신명기가 말하는 것처럼 ‘어떤 물건’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출 13:1-10의 단위에서 보아야 한다.


출 13:1-10은 ‘첫것’을 “거룩히” 구별하여 야훼의 것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면서(2절), 유월절 기념떡/무교병을 먹는 것이 출애굽의 기념이라고 말하고 있다(3-8절). 결국 여기에서 포인트는 ‘먹는 것’이다(3,6,7절). 고대사회는 음식과 관련하여 독특한 세계관을 형성하며, 공동체의 정체성을 만들어준다(출 22:31; 창 43:32; 레 11; cf. P.D. Miller, Religion of Ancient Israel, 155). 무엇을 어떻게 먹는 행위는 단순한 개인의 기호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집단의 정신이 고스란히 반영되는 일종의 신앙행위인 셈이다. 출 13:1-10은 전체 그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일부를 나타내기 때문에 몇가지 부분은 유추의 과정이기는 하지만, 9절의 “야훼의 토라가 입에 있게”하는 행위는 말씀을 암송하거나 머리에 붙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신앙 안에서 함께 먹는 행위”라고 읽을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좀 더 진행해보면, ‘손의 기호’와 ‘이마의 기념’은 첫양을 잡으며 자연스럽게 나오는 피와 연결될 수 있다(출 29:20). 한편으론 옛히브리어 ‘타우’(X)와 같은 피로 만든 자국이 이마에 그리는 일이 자연스럽다고 하겠다(출 12:23; 창 4:15; 겔 9:4; cf. J. Collins, Introduction to the Hebrew Bible, 360). 문제는 그만큼 ‘문자적으로’ 행동하는 신앙을 읽어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즉, E에게 있어서 ‘인신제사’는 혐오의 대상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출 13:2의 “첫것을 ‘거룩하게(카도쉬)’ 바치는 행위”는 사람이나 짐승 모두에게 요구되는 신앙이었다(출 22:29; 겔 20:25f). 사실, 기독교해석지평에서 ‘모형론’으로 유명한 창 22장의 옛 E자료는, 아브라함이 실제 이삭을 바쳤던 사건으로 말하고 있다(즉, 창 22:11-16a는 편집자의 추가이다; 반대로 이부분이 창 22장의 핵심으로 이해되는 것 자체가, 그러한 해석전통의 생리와 아이러니는 동시에 보여준다고 하겠다; cf. R.E. Friedman, Bible with Revealed).


‘인신제사’는 마치 인디아나존스와 같이 서구인의 관점에서 미개한 문명의 퇴행으로 볼 것이 아니라, 인류학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물론 고고학적으로 다수의 유아가 불에 탄 흔적들이 다수 발견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해석을 놓고, 문자적으로 ‘인신제사’로 볼 수도 있으나(왕하 3:27; 왕상 16:34; cf. J.Collins, 268; T.Thompson, 169), 대부분의 경우에는 유아사망률이 현격하게 높았던 고대사회의 세계관 안에서 접근해야할 필요가 있다(왕상 14:5; 17:17). 다시 말해서 많은 유아들이 성인이 되지 못하고 질병이나 사고로 죽었을 경우, 그 일에 대한 민간신앙의 접근은 엘리트의 그것과 목적과 과정에 있어서 확실하게 달랐을 것이다(이런 차원에서 W.G. Dever가 성서를 ‘마이너리티 리포트’라고 부른 점은 탁월한 관점이다). 물론 큰 차원에서 ‘대신하여’ 나쁜 일을 당했다는 심리적/종교적 의미가 존재하겠지만, 왕실과 엘리트는 그것을 정치적으로 확실하게 이용했고, 민간은 그것을 남은자들을 위한 신적 위로로 삼았다. 사실 그러한 방식으로 현상을 이해하려고 했던 것이, ‘신앙의 기원’이기도 하다. 고대인들은 이런 행위를 “거룩함”(카도쉬)으로 이해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출 13:1-10의 ‘원시적’ 신앙관은 이후의 신앙전통에서는 부자연스럽게 보일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은 출 13:11-16에서 확실하게 나타났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16의 후렴구는 의도적으로 출 13:1-10을 상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지카론’ 대신에 ‘토타퐅’을 사용함으로써 보다 ‘지성적’ 신앙으로 진보하게 되었다. 출 13:11-16에서는 그 관점이 ‘대속’(파다흐, ransom)에 있다(13,15절). 여기에는 ‘카도쉬’가 등장하지 않고, 좀 더 신학화되고 정제된 표현이 등장한다(‘하아바르타’: ‘아바르’의 힢힐형; 출 13:12; cf. 왕하 16:3). 출 13:2이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라는 사람을 원색적으로 나타낸 것과 비교해서, 출 13:12는 ‘모든 첫째것’이라고 하지만, 가축의 수준으로 읽히게 된다. 왜냐하면 이제 ‘인신제사’는 위법/이방인의 것이기 때문이다. 보다 명백하게 13절에서 어린양이 ‘대속물’로 등장한다. 이제는 이마에 피자국을 묻히면서까지 힘들게 ‘먹는 일’을 꼼꼼하게 지키는 행위보다, 기록된 말씀을 몸에 붙이고 또한 나의 행위보다 나를 대신하는 ‘대타’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상징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것이 바로 출 13:11-16의 기록 전승이 요구하는 방향이었다. ((한편, 민 3:49-50의 정당화는, 그 산술적 불가능성[즉, 민 3:43에 의하면 장자가 22,273명이므로, 결국 22,273개의 가정이 있다는 말이고(딸 부자집의 대안은 설득력이 별로 없으며 계산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 결국 각 가정에 최소한 27명의 아들이 있어야! “60만 이스라엘 자손들”을 만들 수 있게 된다]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효력을 끼치고 있다는 점에서, 각각의 징검다리들을 재조사해 볼 필요가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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