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E. 8세기의 이스라엘의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이 시기는 팔레스타인에 강대국 앗수르의 손길이 잠시 거두어진 기간으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각기 국권의 회복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 방향은 무엇보다도 경제성장이라는 구체적인 모양으로 진행되었다. 그렇다고 앗수르의 지배에서 완전히 독립한 것은 아니었다. 왕국이 경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앗수르의 대규모 경제체제의 일부에 속해서 일종의 경제 협력을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두 왕국은 경제구조의 변화로 인한 후유증을 겪고 말았다. 외형적으로는 황금기를 보내는 것 같았지만, 바뀐 경제구조에서 나타난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으로 인해, 내부적으로 심하게 곪아가는 증상이 나타나고 말았다. 즉, 초기 이스라엘이 출현하면서 그 근간을 이루었던 ‘평등적 위기분산 방식’의 사회구조 패턴이 왕조시대에 이르러 급격하게 ‘계획적 집약농업역학’ 사회구조로 바뀌어져 갔고, 급기야 8세기에 이르러 겉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악화된 것이다.
위의 내용을 조금 더 상세히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초기 이스라엘은 후기 청동기시대(LAB)에서 초기 철기시대(Iron I)로 넘어가는 어간에(B.C.E. 1200-1000년) 팔레스타인의 중앙 고지대에서 출현했다. 이들의 기원이 어떠하든지 이들이 남긴 고고학적인 자료들의 분석을 종합하면, 초기 이스라엘은 고지대의 척박한 농경지를 개간하기 위해 공동으로 노동력을 집중시키는 집단을 형성했으며, 다양한 토지 조건을 가축과 곡식의 혼합 영농으로 적응했고, 농업의 실패를 대비할 수 있도록 다양한 곡식들을 재배하는 위기분산전략을 채택하면서, 궁극적으로 ‘평등주의적’ 작은 촌락 사회를 이루며 안정화되었다.
그러나 어느 사회든 인구가 증가하고 유휴재화가 쌓여갈수록 권력은 집중되기 마련이다. 평등주의적 초기 이스라엘 사회는 ‘재분배자’인 추장제를 거쳐 결국 피라미드식의 왕권사회로 변천되어졌고, 이에 따라서 인구는 골고루 퍼져있는 반면에, 재화들만이 도시로 집중하는 부조화가 생겨나고 말았다. 특별히, 국력이 가장 최우선 목표인 왕실에서는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외국과의 교역을 체결했다(이는 다윗의 통일왕국 이래로 계속되어진 현상이었다). 수출품을 조달하기 위해서 왕실은 전통적 농업방식을 무리하게 뜯어고쳤고(대하 26:10), 특성화된 농작물에 집중하면서 위험부담이 높은 포도와 올리브 등의 과수재배에 이스라엘 농민들은 말 그대로 위기집중에 노출되어 버렸다. 이것을 ‘집약농업정책’이라고 부른다.
시간이 지나면서, 왕실이 요구하는 목표를 채우지 못한 농민들은 작은 땅을 담보물로 내어 빚이라도 내어가면서 근근이 생활했으며(‘임대자본주의’), 권력자들과 결탁된 법정의 잘못된 선고로 인해서 농민들은 손에 아무것도 쥘 수 없었으니(사 1:23; 미 2:9), 그들은 부재지주들의 ‘대토지화(latifundialization) 전략’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결국, 더욱 악화될 경우(대부분이 그러했지만)엔 소작농이나 채무노예(debt-slave)로 전락하는 것이 부지기수였다.
내부적으로 썩어 들어간 고목이 되어버린 왕국은 거센 바람을 지탱할 그 어떠한 힘도 없었다. 예언자들의 핏발선 외침은 고목이 완전히 고꾸라진 후에야 사람들의 뇌리를 지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때는 너무 늦은 후였다. B.C.E. 722년 북이스라엘은 살만에셀 5세(Shalmaneser V, B.C.E. 727-722년)에게 완전히 멸망당하고 이만 칠천 명 이상이 포로로 잡혀갔다(왕하 15:8-18:6). 포로로 잡혀가지 않은 상당수의 피난민들은 남유다로 피신하여 목숨을 구했지만, 그들 대부분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민초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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