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에서 멀리 떨어져있지 않은 이스르엘(Jezreel)이란 곳에는 북이스라엘 왕의 여름왕궁이 있었습니다(J.J. Collins 2004: 297). 비옥한 땅이었기에 권력을 가진 자라면 누구라도 자기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던 그런 땅이었습니다(왕상 21). 왕하 9장을 보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야[12f절]) 예후가 이스르엘의 이세벨--개들의 먹이가 되죠--을 시작으로 전무후무한 '피의 숙청'을 일으키게 되죠. 아마도 대중은 나봇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예언자 엘리야의 심판이, 오랜 시간이 지나서, 무섭게 실현되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왕하 9:25f).
역사는, 신문기사와 같은 그날의 사건 모음집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의미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혹은 다른 말로 ('만들어진' <- 'invent'라는 개념보다, 기억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추가되고 덮어쓰여진'은 어떨까요) "기억"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어찌되었건, '이스르엘'은 북이스라엘의 기억에 지워지지 않는 사건이요 의미였음에 분명합니다.
호세아 1장 4절엔 이스르엘이 등장하죠. 여러 번역들을 읽어보면, 그 배경이 예후의 '피의 숙청'에 대한 "윤리적/도덕적" 차원의 잔혹함을 비판하는 맥락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개정)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
(새번역) 주님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셨다. "그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고 하여라. 이제 곧 내가 예후의 집을 심판하겠다. 그가 이스르엘에서 살육한 죄를 물어서 이스라엘 왕조를 없애겠다."
(공동번역) 야훼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셨다. "아기의 이름을 이즈르엘이라고 하여라. 나는 오래지 않아 예후가 이즈르엘에서 죄없는 사람들을 죽인 죗값을 예후 왕조에 갚아 이스라엘 나라를 멸망시키겠다."
(NRSV) And the LORD said to him, "Name him Jezreel; for in a little while I will punish the house of Jehu for the blood of Jezreel, and I will put an end to the kingdom of the house of Israel."
(TNK) and the LORD instructed him, "Name him Jezreel; for, I will soon punish the House of Jehu for the bloody deeds at Jezreel and put an end to the monarchy of the House of Israel."
이러한 이해의 초점에는, 비록 하나님이 예후에게 아합 왕조의 심판을 맡기시긴 했지만, "야훼를 위한 열심"이 지나친 예후가 무리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왕하 10:16). 그래서 호세아가 이스라엘의 상황을 "강포하여 피가 피를 뒤대임"이라고 평가한 것도 이해가 됩니다(호 4:2).
문제는, 이러한 '윤리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 행한 일을 평가하는 것이 옳은가 라고 질문을 던지는 (제 생각에 극소수인 것 같은데) 분들이 있다는 겁니다. 이런 거죠: '예후는 하나님이 시키신 일을 했을 뿐이다. 그것도 아주 잘(왕하 10:30).' 예후가 잘못한 것은 '윤리적 잔혹함'이 아니라, 그도 역시 '우상숭배'를 했기 때문이다(왕하 10:29,31)라고 이들은 접근합니다.
사실 호세아와 고멜과의 개인적인 '가정사'는, 분명 이스라엘의 영적 간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라는 것을, 오늘날 단지 '형이상학적인 지성적 혹은 감성적 현상'으로 생각하여, 고대로부터 발생한 종교의 '물질적이고 동시에 영적인 차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호세아의 비판이 지적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현주소를 잘못 짚게됩니다. 다시 말해서 호세아의 비판에는 종교적 혼합주의에 대한 도전도 있었지만(호 2:16f; 누가 진정한 '바알'[세계의 주인]이냐?), 그와 함께 정치 엘리트들을 향한 경고도 있었습니다(호 12장; 누구와 조약을 맺을 것인가?). 예언서가 윤리와 정치 혹은 '인간의 본질'과 관계없이 해석될 때, 후기예언서는 전기예언서의 과오를 반복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종교가 폭력을 정당화시키는 또 하나의 여호수아서를 만들고 마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