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구약 성서

에스겔

진실과열정 2016. 3. 5. 23:10

기원전 622, 예루살렘에서는 두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첫번째는 성전에서 '율법책'이 발견되여, 요시야 왕이 대대적인 개혁을 일으킨 것입니다(왕하 22:8). 많은 학자들은 이 책을 '신명기법전'(12-26)이라고 이해하고 있으며, 요시야의 종교개혁의 내용과도 거의 일치합니다(12:2-3 // 왕하 23:4-14). 두번째는 성전에서'' 살아가는 한 제사장에게서 '에스겔'이 태어나게 됩니다(1:1). 이렇게 볼때, 에스겔을 '요시야 세대(Josiah kids)'라고도 부르며 밝게 개인 내일을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한 세대도 가지 못해서 유다는 바벨론이란 나라에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597, 비록 역사적인 부분에 문제가 있지만(Niels P. Lemche 2008: 116, 154), 열왕기하에 의하면 야훼 하나님의 성전은 훼파되고(24:13) 바벨론 포로 역사가 시작하게 됩니다(28:1-4). 그 때 에스겔은 25세의 나이에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갑니다.


(레위인) 제사장 사역과 관련되어, 나이의 변화에 대해서(8:23-2625세부터, 4:330세부터)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유대인들은 5년의 차이를 도제기간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전쟁으로 인구가 줄었기 때문이라는 견해보다 합당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에스겔은 거룩한 제사장으로서 첫걸음을 걸어야할 때, 바벨론이란 우상의 나라로 첫걸음을 걷고만 셈입니다. 이 얼마나 애궂은 운명입니까! 아마도 그와 많은 사람들은 날마다 "바벨론의 여러 강변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을" 것입니다(137). 피눈물로 삶을 포기하려할때, 고향에 있다면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는 30세에, 그는 하나님의 이상을 보게 됩니다. 드디어 (제사장인) 그의 예언자적 사역이 시작한 것입니다.


에스겔은 포로로 잡혀간 (엘리트) 무리들이 던진 질문에 신적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무리들-아마 '비천한 자'가 아닌 '권세 있는 자'입니다(왕하 24:14-15)-"아비가 먹은 신포도 때문에 우리 이빨이 시리다"라고 투덜거렸습니다(18:2). 이것은 속담으로, 므낫세가 저지른 악행으로 인해서 왕국이 멸망하게 되었다는, 많은 지도층의 현실 이해를 반영하는 것입니다(왕하 23:26-27). 이는, 신명기적 역사가(Dtr)의 역사관을 원색적으로 풍자한 것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결국, (욥기에서도 드러나고 있지만, '잘하면 복, 못하면 벌'이라는) 신명기적 신학으로만 모든 것을 보는 것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여겼던 엘리트 무리들에게, 유다의 멸망은 "공평치 않은" 것이었습니다(18:25). 자신들은 깨끗했는데, 선왕(혹은 환경?)의 잘못으로 이렇게 산다면, 정녕 "주의 길은 공평치 않은" 것이지요(18:29; 33:17).


그러므로 에스겔은 하나님의 이상을 통해(8:3) 정말 그들은 깨끗했는지 확인하게 됩니다. 정말 엘리트들은 '공평한 하나님'을 입에 담을 자격이 있었던 것일까요? 아무도 몰랐겠지만, 정말 일반 백성들 (혹은 비천한 자들)은 몰랐겠지만, 에스겔은 '거룩한' 성전에서 자행되는 '더러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성전 안엔, "투기의 우상, 아세라"가 있었고(8:5), 이집트 영향을 받은 "가문의 영광, 마르제악"이 있었으며(8:12), 메소포타미아에서 "물 건너온 풍요신, 담무즈 제의"가 있었고(8:14), 참 빛이신 야훼(24:17; 3:38)"등지고 새로운 태양을 섬겼던"(8:16) 가증함이 있었습니다. 예언자에게는 헛된 묵시뿐이었고, 제사장에겐 율법이, 장로에겐 모략이 없었습니다(7:26). 그들은 정결한/깨끗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더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22:23-31). '더러움'은 히브리어로 '할랄(hll)'이라는 단어로(이는 '찬양하다''할랄'과 다릅니다), 에스겔에서 무려 70번이나 등장합니다(또한 우상['길룰']39번 등장합니다). 이러한 완벽한 '더러움'앞에 의인 삼총사(노아, 단엘, )도 두손두발 들고 맙니다(14:14).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겼던 유다의 '선민사상', 그들의 뿌리가 가나안에 있음을 고발당하면서 처절한 부끄러움만 남기게 됩니다(16:3, 45-46). 이제 그들은 침묵해야 합니다.


이제 에스겔이 풀어야할 신학적 혹은 정치적 문제는 이것입니다. 과연 '성전붕궤'는 어찌된 일인가? 시온의 야훼는 바벨론의 마르둑에게 무릎을 꿇은 것인가? 에스겔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야훼가 진 것도 아니요, 성전도 붕궤된 것이 아닙니다. '더러움'으로 가득한 성전을 야훼 스스로 떠난 것입니다. 독특한 제사장 임직 의식을 거친 에스겔은(1:4-3:15) 야훼의 '이동성(mobility)'에 눈을 뜨게 됩니다. 성전 바로 "거기에 있었던" 하나님의 영광이 서서히 떠나는 장면은(8:4 -> 9:3 -> 10:4 -> 10:18 -> 11:23 => 11:10), 정말 참담한 마음으로 읽어내려가는 또 하나의 '십자가'가 아닌가 싶습니다. 결국, 야훼 하나님은 스스로 성전을 떠난 것이며, 그분은 성읍의 동편 방향인(!) 에스겔의 포로공동체에 와 계신 것입니다(바로 에스겔의 독특한 제사장 임직식에서 나온 것처럼). 물리적 성전은 붕궤하였지만,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은 성소 문을 지키는 제사장적 '파수꾼'이 되어서, 제사장의 사역 곧 "깨우치는/가르치는" 일을 하게 됩니다(3:17; 18:20). 좀 어렵게 말해보면, Dtr'이름신학'으로 성전붕궤를 해결하려고 할때(왕상 8:29-30), 에스겔(P)'부정(추방)/정결(회복)'의 신학으로 이를 풀어낸 것입니다(24:6,11). 그리고 사실 성전은 보다 (P의 개념에 맞게) 완벽한 청사진으로 제시됩니다(40-48). 이 부분은 많은 점에서 P의 시내산 계시(24-31)와 유사합니다(J. Blenkinsopp 2009: 134f). 결국 이것이지요: 새로운 모세로서 에스겔이, (40:1을 보면, 573) 이제 50세가 되어서 사역을 그만두어야 할 에스겔이, 광야에서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겁니다. "모세가 받았던 성막의 청사진처럼, 나도 새로운 성전의 청사진을 받았다!" 당연한 수사법입니다. 그러니 이제 백성들은 이제 깨닫고 부지런히 움직여야 합니다.


두번째 이슈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제 여기에 와 계시는데, 그럼 과연 누가 참제사장인가?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은 대부분이 엘리트 계층입니다. 거기엔 왕족도 있고, 전쟁 용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신적 메시지를 전합니다: "아무도 없다." 이스라엘의 목자는 "자기만 먹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34:2). 목자는 없습니다(34:5). 제사장인 에스겔은 범죄한 나라의 역사를 되짚어봅니다. 40일은 40년이므로(4:6), 에스겔은 요시야 개혁 이후 40년의 유다의 역사를, 그 목자 없었던 역사를, 몸으로 짊어집니다(627-587). 그리고 사울이 왕이 되고난 이후 390년의 이스라엘/유다의 역사를, 역시 그 목자 없었던 역사를, 몸으로 짊어집니다(1020-627). 이스라엘 왕국은 그 시작부터 '죄악'의 역사였던 것입니다(4:4). 이렇게 볼때, 포로기간은 정결케되기 위한 '필요악'으로서의 한 과정이었고, 이 과정에서 오만했던 열방의 교만은 철저하게 무너지게 됩니다(비록, 두로에 관한 예언은[26:7-14] 성취되지 못했고(!), 이는 애굽으로 바뀌게 됩니다[29:17-20]). 결국 다음 세대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들은 '사독계열의 레위제사장'뿐이었습니다(44:15; 48:11). 상당히 폐쇄적인 제사장 이데올로기가 반영되었다고 보이지만(특별히 44장의, 에스라-느헤미야의 그것과 놀랍도록 일치하는 부분과 왕이 '멜렉'이 아닌 '나시'로 단순한 제사물품준비자로 격하된 부분[45:17; 46:12]에서), 전반적인 그림은 "공평함(!)"입니다(45:10). 참된 에덴이 회복되어, 생명의 ''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오게 됩니다(47:9,12). 회복될 시온이야말로 에덴이며(2:13의 기혼은 예루살렘 성전의 샘물입니다), 그 시온으로 떠났던 야훼의 영광은 다시 돌아옵니다(43:4,5; 44:2). "야훼 임마누(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였던 하나님이, "야훼 샴마(내가 거기에서도 너희와 함께 있다)"로 다시 돌아온 겁니다(48:35). 70번이나 '더러워진'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한가지 방법은 야훼였습니다: "너희가 나를 야훼인줄 알리라"라는 표현이 에스겔에서 70번 등장합니다. 백성의 모든 허물은, 하나님이 모두 거두어주십니다.


모든 것이 하루 아침에 날라가버리고 허무한 광야에서 삶을 저주할수밖에 없을때, 에스겔은 우리를 진단하고 치유합니다. 우리의 허물이 너무나 더러웠음을 보여주고, 내가 나의 주인될 수 없음을 깨닫게해주며, 이제 그리스도의 보혈로 "돌로된 심장이 살로된 심장으로" 바뀌면서(36:26) 정결케됨을 확신케하고, 결국 하나님이 보다 더 큰 영광으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겔 37장 첫부분의 언어적 대칭구조('대언''살다'; '/생기'''의 관계)와 뒷부분의 한 임금 아래에서 회복될 유다와 요셉의 연합은, 말씀으로 인해 개인과 민족이 회복될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소망의 약속입니다.



(후기. 개인적으로 에스겔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인자'(사람의 아들)라는 개념은, 예언자에 대하여 신명기적 역사가가 '하나님의 사람'(이쉬 하엘로힘)에 대한 '대안적' 명칭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에스겔이 이스라엘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이데올로기적 맥락이 두드러지는 또 다른 패턴인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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