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명기 -
우리는 무엇을 배우며 또 무엇을 남겨야 하는가?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신명기 29장 30절)
1. 말씀 앞에서
1) 위대한 유언
신명기라는 말씀은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저의 이 말을 듣고, “그럼 다른 말씀은 덜 중요한가?”라고 생각하실 수 있겠습니다.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중요하지 않는 말씀은 어디에도 없지요. (제가 들은 유익한 표현을 빌어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식사를 할 때, 거기에는 다양한 먹을거리가 있습니다. 밥과 국, 고기나 김치, 계란말이와 콩장, 젓갈이나 김 등의 음식을 먹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모든 것을 다 먹고, 우리는 한결같이 “밥 잘 먹었다”라고 말합니다. 밥과 국, 고기나 김치, 중요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결같이 “밥 잘 먹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같은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처럼 중요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지만, 우리가 구원의 간증을 할 때,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유독 요한복음의 말씀들(요 1:12; 3:16; 14:6)을 인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엇인가 대표적인 말씀들이 존재하는데, 바로 그런 말씀 중에 신명기라는 말씀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입니다. 세계 유수의 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신명기는 “구약의 신학적 중심”이고(Brueggemann), “구약의 허리”이며(von Rad), “구약에서 가장 ‘신학적’인 책”(Reventlow)입니다. 가장 쉽게 말씀을 드리면, 우리는 신명기에서 ‘잘 믿으면 복 받고, 잘 안 믿으면 벌 받는다’라는 신학을 배우게 됩니다. 이것이 신명기 신학의 대표적인 요약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 신명기 이후의 말씀 대부분(신명기적 역사; 예언서)이 이러한 신명기 신학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신명기가, 신약에서는 요한복음이 대표적인 말씀인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후에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무엇보다 신명기라는 제목을 생각해봅시다. 그 이름의 말뜻이 무엇입니까? 신명기: 신의 명령을 기록한 것? 한자어를 풀어보면, 거듭하여 되풀이할 신(申), 명령할 명(命), 기록할 기(記)입니다. 그러므로 되풀이 된 명령의 기록이 바로 한자어 신명기라는 이름입니다. 우리가 중요한 말이라고 할 때, 흔히 신신당부(申申當付)한다 하지 않습니까? 거듭 거듭 어찌하라고 단단히 부탁한다는 말이지요. 신명기라는 책 제목을 붙이면서, 거듭해서 되풀이 된 명령으로 이 말씀을 이해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십계명이 출애굽기에서 나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20:1-17). 그리고 출애굽기에서는 원시적이라고 할 수 있는 기본적 명령들이 여러 군데 나옵니다. 이것을 계약법전이라고 하는데, 십계명 이후인 출 20:22부터 23:19까지입니다. 세장정도밖에 되지 않는 비교적 적은 명령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십계명이 신명기에서 다시 거듭해서 나오고 있는 겁니다(5장). 그리고 다음으로 보다 체계적이고 포괄적인 명령들이 아주 자세하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신명기 법전이라고 하는데, 신 12장부터 25장까지 이어집니다. 14장에 해당할 정도로, 방대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신명기라는 우리말 성경의 제목은 나름 잘 붙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원어가 이해하는 제목 역시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원어는 “엘레흐 핫데바림(~yrIªb'D>h; hL,aeä)”입니다. 번역하면, “그 말씀들이 이러하다”라는 뜻입니다. 더욱 간단히 말하면, 신명기의 히브리어 원어의 제목은 ‘말씀들’입니다. 모세의 설교이고 권면입니다. 보다 좁혀 말하면, 이 말씀은 모세의 유언입니다. 민수기의 광야 40년의 방랑의 터널을 통과한 후, 이제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둔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남긴 고별 설교인 셈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란 양 떼를 무서운 이리 가운데 보낸 목자의 심정으로, 그러나 모세 자신은 가나안으로 들어 갈수가 없어서, 내심 걱정이 가득한 절절한 마음으로 한 마디 한 마디를 정성껏 쏟아 부은 피맺힌 호소인 것입니다. 모세의 마음이 너무나 강력하게 들어있기 때문에, 반대로 신명기라는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의 깊은 사랑을 받았던 것입니다.
신명기를 통해 모세의 유언을 읽으면서, 우리는 어떠한 유언을 남겨야 할 것인지를 반성해보곤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후손들에게 무엇은 남겨야 할까요? 어떤 부모님이 돌아가시게 되자, 모든 자녀들을 불러 모았다고 합니다. 이제 유언을 남길 시간이지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자녀들아. 받아 적으라. 통장의 비밀번호는 ……”이라고 했다고 합시다. 과연 이것을 신앙인의 유언이라고 자부할 수 있을까요? 아마 여러분들 중에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을 모르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1929년에 출생해서 1993년 죽은 미국의 영화배우로, 로마의 휴일(1953)이라는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세계의 요정이었습니다. 그녀는 영화배우 일을 하면서 부와 명예를 모두 얻었지만, 만년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유니세프(UNICEF: 국제연합아동기금) 사역에 참여하게 됩니다. 집 없는 아이들에게 쉴만한 안식처가 되어주고, 가난해서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진정한 삶의 지혜를 가르쳐주는 참된 스승이 되었던 것이지요. 그러한 헵번이 아들에게 이러한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입술을 가지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런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봐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어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갖고 싶으면 하루에 한 번
어린이가 손가락으로 너의 머리를 쓰다듬게 하라.
아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으면
결코 너 혼자 걷고 있지 않음을 명심하라.
사람들은 상처로부터 복구되야 하며,
낡은 것으로부터 새로워져야 하고,
병으로부터 회복되어져야 하고,
무지함으로부터 교화되어야 하며,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결코 누구도 버려서는 안 된다.
기억하라… 만약 도움의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
네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걸 발견하게 된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
이 유언은 오드리 햅번이 숨을 거두기 일 년 전, 크리스마스이브 때에 아들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유언을 남기는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통장의 비밀번호일까요? 한 손은 너 자신을 돕고, 다른 한 손으로는 다른 사람을 도우라는 말일까요? 과연 무엇이 이러한 유언을 남기도록 만들까요? 저는, 바로 기독교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기독교 정신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써 과연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를 진중하게 생각하는 신앙인의 정신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사람으로써 과연 무엇을 남겨야 하는지에 대해서 역시 깊이 묵상하는 신앙인의 영성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명기 혹은 ‘모세의 말씀/유언’이란 이 책은, 우리에게 이것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무엇을 배우며 또 무엇을 남겨야 하는가?” 우리는 신명기 말씀에서 모세의 유언을 통해서 신앙을 배우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신명기 말씀에서 신앙인인 우리가 또한 우리의 후손들에게 무엇을 남겨야 하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저는 신명기 말씀을 원어로 읽고 또 읽고, 또한 수 십 권의 주석과 연구서들과 씨름하면서, 나름대로 한 구절을 뽑아보았습니다.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29:29)
120년을 후회 없이 살았던 모세가 자신을 되돌아보며, 또한 젊고 새로운 이스라엘 군대를 바라보며 하는 말입니다. 40년을 당시 최고의 나라였던 에굽의 왕자로 보내고, 또 40년을 살인자란 오명을 뒤집어 쓴 채 일개 목자와 미디안 사람의 남편으로 살고 끝날 것만 같더니, 이제 마지막 40년을 출애굽이란 지상 최대의 구원 사건의 주인공으로 사역하게 하시는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를 가르쳤던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것 자체가, 오묘한 일이며, 그렇기에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일이로다! 그런데 그 속에서 하나님은 온전히 비밀리에 역사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한 오묘한 일들 중에서 자기 자신을 계시하셔서,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지, 또한 무엇이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일인지 계시하신 것입니다. 광야에서 원망하며 불순종했던 일들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행위가 진노를 일으킨다는 것을, 그들은 뼈저리게 배운 것이고, 또한 이방인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고 말씀에만 순종함으로써 당시 강대국이었던 바산 왕 옥을 물리친 것을 통해서 또한 그들은 몸소 순종의 위대한 역사를 배운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이스라엘은 우리가 그냥 세상에서 살다가 사라지는, 한낮 이슬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책임지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신실성과 말씀의 능력의 증인이 되는 소금과 빛의 존재라는 것을 배우고, 또한 전수했던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는 비밀로 하시는 일들이 있소. 그러나 어떤 일들은 우리에게 알려 주셨소. 그 일들은 영원토록 우리와 우리 자손의 것이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모든 율법의 말씀을 지켜야 하오.”(쉬운성경)
사랑하는 여러분, 유언은 우리가 죽어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유언을 현재화시켜서 우리가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아쉬움을, 우리의 억울함을, 차마 눈을 감지 못하는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유언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들이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 우리의 조상이 우리에게 전수해 준 복음의 비밀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후손이 반드시 순전하게 전해 받아야만 하는 기독교 영성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모세의 유언은 그만의 유언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유언을 이어받은 것이며, 야곱의 유언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또한 이 모세의 유언은 여기에서 그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유언으로 이어지는 것이며, 또한 예언자들과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이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유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또 한 번 확실하게 나타납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20) 할렐루야!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므로 디모데야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허탄한 이야기를 좇는 사람들에게 바른 교훈, 곧 말씀만을 전파하라(kh,ruxon to.n lo,gon).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유언을 현재화 하십시다. 바울 사도의 유언을 우리가 받읍시다. 복음을 현재화하고, 또 그 복음을 후세에 전합시다. 여러분이 바로 모세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여러분이 바로 바울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2) 위대한 죽음
마지막으로 모세의 죽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죽음을 얼마나 위대하게 여기시는지를 말씀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34장 5-8절에 모세의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를 보면, 그는 (5절) 여호와의 말씀에 따라서 죽었다고 합니다. 물론 5절의 말씀은 가나안으로 모세가 들어가지 못하고 모압 땅에서 죽었음을 말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에서’ 죽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7절에서 죽음 자체의 명령도 말씀하셨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 이십 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그렇습니다. 통상 성서에서 사람이 죽을 때는 기력이 쇠한다고 말합니다(욥 17:1). 사람은 기력이 쇠해서 죽게 되는 겁니다. 모세가 단지 말씀대로 모압에서 죽었기 때문이었다면, 7절과 같은 말씀은 필요치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5절에서 죽음 자체도 명령을 따른 위대한 신앙인의 죽음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생명력이 충분한 모세에게 죽음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죽음까지도 받아들입니다. 왜요? 그는 최후에 자신을 ‘여호와의 종’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민족의 지도자가 아니요. 위대한 예언자가 아니요. 이스라엘 군대의 총사령관이 아닌, 여호와의 종이었기 때문에, 명령을 따른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입니다.
모세의 죽음은 하나님의 특별대우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그를 장사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것은 히브리어 원어에서 발견되는 놀라운 표현입니다. 우리는 한글로 번역된 말씀을 읽기 때문에, 모세가 장사되었다는 수동태 형식으로 읽지만(주어가 모세이고, 그 주어가 어떻게 되었다), 원어를 보면 ‘그분’이 모세를 묻습니다(AtÜao rBo'q.YIw:). 놀라운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6절 하반절이 말이 됩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묻어주었기 때문에,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가 없는 것”입니다. 이 구절이 왜 중요하냐면, 후대의 사람들이 이것을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해서, ‘그들’이라는 주어를 일부러 집어넣었을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육신이 아니실진대 어찌 모세를 묻어 주겠느냐 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렇기에 하나님의 종, 모세의 죽음이 위대한 죽음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직접 그의 죽음을 챙기실 만큼 그의 삶이 위대했고, 또한 그의 죽음이 위대했던 것입니다. 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전혀 남의 일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했던 스데반 집사가 죽음의 현장에서 자신을 맞이하기 위해서 자리에 일어서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두 팔을 보지 않았습니까!(행 7:55) 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현장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의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로다!” 할렐루야! 그리고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7-8) 충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성도 여러분, 위대한 죽음으로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죽음을 직접 챙겨주실 것을 바라며, 그 위대한 죽음과 영광스러운 상급을 바라며, 오늘 하루를 죽음으로 살아가십시오.
마지막으로 8절에서 우리는 또한 놀라운 죽음의 차이를 발견합니다. 모세가 죽자 이스라엘 자손이 기한이 맞도록 삼십 일을 애곡했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여긴 죽음처럼, 백성들도 역시 귀하게 여겼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내용이 바로 아론의 죽음에서 나옵니다(민 20:29). 겉으로 보면 정말 유사하게 보이지만, 두 명의 지도자를 떠나보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묘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아론의 죽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온 회중 곧 이스라엘 온 족속이 아론의 죽은 것을 보고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였더라.
!ro=h]a; [w:ßg" yKiî hd"ê[eh'ä-lK' War>YIw:
`lae(r"f.yI tyBeî lKoß ~Ayë ~yviäl{v. !roh]a;-ta,( WKÜb.YIw:
이 구절을 보다 원어에 가깝게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온 회중이 아론의 죽은 것을 보고,
이스라엘 온 집이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였더라.
아론의 죽음에 있어서 포인트는 ‘온’ 회중과 이스라엘 ‘온’ 집입니다. 두 번 나오지요. ‘모든’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아쉬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십 일을 애곡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죽음에 대해서는 조금 미묘한 차이를 보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애곡하는 기한이 맟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
~Ay= ~yviäl{v. ba'ÞAm tboïr>[:)B. hv,²mo-ta, laeór"f.yI ynE"b. WKb.YIw:
`hv,(mo lb,aeî ykiÞb. ymeîy> WmêT.YIw:)
역시 이 구절을 보다 원어에 가깝게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후손이 모압 평지에서 삼십 일 동안 모세를 애곡했다
모세를 아쉬워하며 애곡하는 날들이 끝났다.
모세의 죽음에 있어서 포인트는 ‘애곡’입니다. 애곡이란 단어가 두 번 나오며, 그것이 특별한 ‘기간’으로 선포되어서, 순전하게 애곡하는 시기로 이스라엘이 보냈다는 의미를 말합니다.
아론과 모세의 죽음을 비교하면 이렇습니다. 아론의 죽음을 두고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슬퍼했습니다. 한편 모세의 죽음을 두고는 ‘모든’이란 말은 없습니다. 대신 ‘애곡했다/슬퍼했다’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아론은 정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인기에 병합한 지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백성이 요구하면 서슴지 않고 황금을 모아 송아지도 만들었던 사람입니다. 백성이 모세를 거부하니, 나서서 모세의 지도권에 도전했던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아론을 친근하게 여겼고, 자신들의 말을 잘 들어주기 때문에 그의 죽음에 모든 사람들이 슬퍼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원문 그대로를 주의 깊게 읽어보니, 그의 죽음에 모든 사람이 아쉬워했던 것이지, 슬픔 자체에는 무게를 두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반대로, 모세는 인기와는 벽을 쌓은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최우선적으로 생각했던, 어찌보면 외골수적인 지도자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보통 사람들이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함이 있었습니다.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내려온 그의 얼굴엔 광채가 나서, 오히려 백성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피했다고 말합니다(출 34:30; 한편, 이 광채라는 말이 후대에 잘못 해석되어서 ‘뿔’이 되었는데, 차후에 설명해드리고자 합니다). 결국 모세는 인기에 병합한 지도자가 아니었기에,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선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충심으로 그를 따랐습니다. 그의 말 한 마디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것이지요. 그렇기에 그가 죽었을 때, 모든 사람들이 슬퍼하지는 않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진심으로 충심으로 가슴을 찢으며 애통했던 것입니다. 아론의 죽음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들은 삼십 일 동안 슬퍼하면서 자신의 일상생활을 꾸려나갔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죽음에 대해서는 어떤 사람들은 이 ‘삼십 일’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애통하기만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에 들어있는 미묘한 두 죽음의 차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오늘 신명기를 말씀드리면서, 그 깊이와 넓이가 얼마나 풍요로운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몇 번 연속해서 신명기를 풀어드려야 하겠습니다. 다시금 정리하고픈 것은, 첫째 신명기는 모세의 유언이다. 그것이 얼마나 간절한 것인지, 또한 우리가 어떠한 유언을 배워야 하며 후손에게 남겨주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바로 우리가 유언을 현재화시키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두 번째로 신명기는 모세의 죽음을 말합니다. 그는 죽음까지도 명령 받았기에 순종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한 죽음은 하나님도 손수 묻어주실 정도로 고귀한 죽음이며, 또한 비록 모든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을지언정, 진정 그 신앙의 정수를 깨달은 후손들은 그 죽음을 정녕 애통하며 그 죽음의 정신을 배워나간다고 했습니다. 확신하건데, 바로 우리 깊은샘수원교회가 신명기의 정신을 배우고 또한 후세에 전달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이 모세의 유언을 할 것이며, 또한 모세의 죽음을 죽을 것입니다.
2. 말씀 안에서
신명기가 모세의 유언으로 어제와 내일을 이어주는 참신앙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모세의 죽음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그러한 신앙인의 죽음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를 말씀 드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신명기의 중심 메시지를 들으려 합니다. 바로 우리는 무엇을 배우며 또 무엇을 남겨야 하는가? 라는 질문의 내용인 것입니다. 신앙인이 반드시 배워야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것을 배우려고 합니다. 또한 배운 신앙의 유산을 우리들의 후손에게 아름답게 남겨야만 합니다. 100년, 200년 신앙의 거목으로 굳건한 교회가 되도록 귀한 신앙의 유산을 남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서 이 점을 함께 생각해봅시다.
신명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입니다. 신명기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명쾌하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을 배우고, 또한 하나님 섬기는 것을 남기도록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두 번째는 사람입니다. 신명기는 다른 어떤 말씀들보다 사람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합니다. 우리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기본적인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실제로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등등의 일들을 풀어주면서, 우리 사람이라는 존재가 무엇인지를 배우며, 또한 이러한 정신을 후대에 가르치도록 한 것입니다.
물론 이 모든 말씀을 요약하면, 예수님의 가르침과 같이, 첫째는 하나님 사랑이요 둘째는 사람 사랑입니다: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지요(마 22:37-40). 그러나 우리는 보다 더 자세히 말씀을 상고하고자 합니다. 이미 알고 있는 말씀들이지만, 다시 집중해서 살펴보도록 합시다.
1)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 섬기는 것을 남겨라.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 섬기는 것을 후대에 남겨라. 그렇습니다. 이것이 신명기의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신명기를 연구했던 학자들 모두 한결같이 말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신명기의 설교방식이 당시의 강대국이 약소국과 맺었던 조약의 형식과 매우 유사하다는 겁니다. 저도 수많은 책들을 보면서 그분들의 견해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강대국은 약소국과 충성의 조약을 맺게 됩니다. 마치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우리나라가 중국이란 강대국과 맺었던 조약을 생각하면 됩니다. 아주 먼 옛날, 강대국과의 조약에는 이러한 내용들이 있었습니다: 첫째로 강대국 대왕의 이름(정체)을 밝힙니다. 둘째로 강대국이 베풀어준 과거의 일들을 회상합니다. 셋째로 약소국이 지켜야할 법적인 조항들을 열거합니다. 넷째로 조약에 대한 주의사항들을 언급하는데, 바로 정기적으로 낭독하고 문서로 잘 보관해 둘 것을 명령합니다. 다섯째로 증인을 세우는데, 여기엔 각 나라의 신과 자연과 같은 대상을 세웁니다. 마지막 여섯째로 계약을 합니다. 조약을 잘 지키면 복이 내려지만 반대로 조약을 어기면 저주를 받게 될 것을 약속하는 겁니다.
아마 신명기라는 말씀을 전체 읽어보지 않은 분들이라도, 마지막에 말씀을 드린, 순종하면 들어가도 나가도 복을 받지만(28:6), 불순종하면 들어가도 나가도 저주를 받는다(28:19)는 말씀을 쉽게 떠올리실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신명기는 당시의 강대국과 약소국의 조약 형식과 딱 맞아 떨어집니다. 실제로 4:45; 6:20에 나오는 단어 중에 ‘증거하신 것’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당시에 강대국과 약소국이 했던 ‘조약(tdoê[eh'()’이라는 단어입니다: “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증거(tdoª[eh' hm'ä)와 말씀과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이뇨? 하거든”(6:20) 사랑하는 여러분, 혼동스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서에 있는 내용이 세상의 것과 비슷하다고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신앙의 터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이 되는 종교입니다. 세상 밖에서 소금과 빛이 되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 살면서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이 기독교인이라는 겁니다. 이 세상이 돌아가는 법칙 속에서, 즉 물질만능과 약육강식 그리고 효율최우선의 법칙이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세상 속에서, 물질과 함께 영성이 있다는 확신으로 또한 약육강식이 아닌 강육약식이 되는 섬김의 실천으로 그리고 효율보다 신적 권위에 순종하는 전혀 다른 하늘의 세계에 속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신명기가 당시의 강대국과 약소국의 조약 형식을 빌려 왔다는 것은 새로운 차원의 신앙을 바라보게 합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민족이었습니다. 나라가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결국 나라를 이룰 것입니다. 왕을 세우고 지방장관을 세우며 관청을 통해 세금을 걷고 무기를 만들고 전쟁을 준비할 것입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세상이 돌아가는 지극히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는 법칙’에 따라서 이스라엘도 움직일 것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약소국이 되면, 강대국과 앞서 말씀드린 조약을 세우게 될 것이라는 거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다른 하늘의 세계에 속한 삶의 방식을 보여주신 겁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영원한 강대국은 이 세상에 있지 않고, 바로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이라는 선언인 것입니다. 강대국과 약소국의 조약 형식을 그대로 닮은 신명기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배웠던 것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이름(정체)을 배웁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이시다”(6:4) 이 말씀은 원어로 읽어볼만 합니다: dx'(a, Ÿhw"ïhy> WnyheÞl{a/ hw"ïhy> lae_r"f.yI [m;Þv. 둘째로,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로운 역사를 기억하게 됩니다(6:12):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라.” 신명기의 앞부분 10장을 읽어보면 출애굽기부터 민수기까지의 굵직한 내용들이 들어있는데, 이것은 괜히 같은 내용을 반복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40년 동안 하나님이 베풀어주셨던 은혜를 잊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셋째로, 이스라엘이 지켜야할 법들이 제시됩니다. 그 내용이 상당히 방대합니다. 12장부터 26장에 이르기까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엄청난 법률들이 나와 있습니다. 이를 신명기 법전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신약에서 말하는 율법으로 오해하지 말기 바랍니다. 우리를 얽매려고 주신 무거운 짐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이렇게 말합니다(30:11,14) :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이 내용은 후에 신명기의 두 번째 메시지를 다룰 때 언급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 살이의 대원칙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조약의 주의사항이 나옵니다. 아까 정기적으로 낭독하고 또한 복사해서 소중히 보관하라고 했습니다. 신명기에서도 동일합니다(17:18-19):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복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다섯째로, 증인들이 있다고 했지요.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웁니다(30:19; 31:28):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 너희 지파 모든 장로와 유사들을 내 앞에 모으라. 내가 이 말씀을 그들의 귀에 들리고 그들에게 천지로 증거를 삼으리라.” 마지막으로, 순종할 때는 한없는 복을, 반대로 불순종할 때는 무서운 저주를 받게 됩니다(28:1; 28:15):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 (그러나)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다.”
지금까지 어려운 내용들을 너무나 잘 들어주셨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스라엘은 이제부터 영원히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하나님의 속국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모세는 이렇게 어려운 방법으로, 그러나 그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방식으로 전달했던 것입니다. 나라가 세워지고, 새로운 왕이 자리에 오를 때, 이스라엘이 배웠고 또 후대에 전달했던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이 세상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가치관에 따라 살지 않고, 오직 한 분 하나님의 속국으로 존재할 것이다!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과 너희와의 관계를 배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너희와의 관계를 배우고 전수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것을 배워라. 하나님 경외하는 것을 배우고 전수해라!
이러한 원칙은 신약에서도 발견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회복하는 것 인줄 착각하게 됩니다. 그러자 주님은 명쾌하게 이렇게 가르쳐주십니다(행 1:6-8): 세상과 너희와의 관계는 “하나님의 권한이니 너희가 알바 아니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세상과 나와의 관계가 중요하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이다. 성령충만함으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생명력 넘치는 온전한 하나됨(at-one-ment)을 이루게 될 때, 신앙의 폭발력 있는 권능이 나타나서,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구속한 주님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이것이 신명기의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배우고, 그것을 후대에 전수하는 교회가 되어라! 입니다.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한 노하우를 배우고 전수하는 곳이 아닌, 성령충만을 배우고 성령충만을 전수할 수 있는 곳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2) 사람살이를 배우고 이웃을 내 몸 같이 섬기는 것을 남겨라.
신명기의 두 번째 메시지는 사람살이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어떠한 사람살이의 원칙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고, 그것을 후대에 가르쳐서 칭찬받는 국가가 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율법은 사람을 얽매는 올무가 아닙니다(4:5-6):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규례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이는 너희로 들어가서 기업으로 얻을 땅에서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함인즉,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그렇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선물이자 은혜고, 세상에 대한 도전이며 위대한 삶의 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떠한 사람살이를 배우고 또 후손에게 전해야 할까요? 12장부터 26장까지의 신명기법전이라는 방대한 율법을 간단하게 정리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저는 대표적인 한 말씀만 소개하고자 합니다. 바로 십일조에 대한 말씀입니다. 아마 이 말씀은 여러분이 처음 듣는 내용일 될 것입니다. 14장 22절부터 29절은 십일조에 대해서 매우 자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선 그 내용을 읽어봅시다:
“22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23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24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25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으로 가서, 26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소나 양이나 포도주나 독주 등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27네 성읍에 거주하는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이니 또한 저버리지 말지니라. 28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29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긴 말씀이지만, 조금만 집중하면 그 내용과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아마 기억나는 구절로, ‘포도주나 독주’를 먹어도 되는구나 하고 26절에만 동그라미를 치면 안 됩니다. 오히려 말씀의 포인트는 십일조 자체가 아니라, 그 실천 방식입니다. 즉 말씀의 포인트는, 이 십일조가 이스라엘에 매년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실천하는 하나의 위대한 축제였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열심히 일하고 거둔 소산물의 십일조를, 하나님이 택하신 곳(예루살렘)에 와서 (23절 말씀처럼) ‘먹고’ 또 소와 양의 처음 난 것도 ‘먹습니다.’ 만약 거리가 멀면 돈으로 가져가서 그 돈을 가지고 택하신 곳까지 와서 사서 ‘먹는’ 것이 바로 십일조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그렇기에 말 그대로 먹고 마시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위대한 축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조금 더 살펴보면, 포인트가 더 깊숙한 곳에 들어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소산의 십일조를 ‘먹는’ 축제인데, 과연 ‘누가’ 먹는가? 라는 문제인 것입니다. 너의 것을 레위인과 객, 고아와 과부들로 먹어서 배부르게 하라. 27,29절의 말씀이 포인트인 겁니다. 이들은 사회적 약자를 의미합니다. 기업이 없는 자들이며(레위인, 객), 또한 기업을 상실한 자들입니다(고아와 과부). 하나님은 바로 사회적 약자를 돌아보는 삶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사람살이라고 규정하신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신명기법전에서 이 부분만 집어낸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까 저는 신명기법전이 12장부터 26장까지라고 말씀을 드린바 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사회적 약자를 돌아보라는 명령은, 다시 말해서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객을 배부르게 먹이고, 기업을 상실한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라는 명령은, 신명기법전 곳곳에 들어있습니다. 그 시작인 12장에도 나오며(12:12,18), 그 마지막인 26장에도 나옵니다(26:12-15). 물론 중간에도 엄청 많이 나옵니다(14:22-29; 16:9-12,13-15; 24:17-18,19-22). 그 이유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을 배우고 동시에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를 후손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은 단순합니다. 사회적 약자가 그 약함에도 불구하고 배고프지 않는 세상입니다.
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를 유토피아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유토피아라는 말은 ‘없는(우) 장소(토포스)’라는 뜻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여기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해보십시오(눅 17:21):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이 말씀은 ‘너희 속에’ 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에게 하신 대답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물으니, 그에 대한 대답인 겁니다. 바리새인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원어를 보면 ‘-중에’라는 뜻입니다. 바리새인들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존재하는 것인데, 그들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며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을 비판하신 겁니다. 이 말이 무엇입니까? 바리새인들에게는 율법의 신앙이 있었습니다.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율법의 신앙을 제1원칙으로 삼은 겁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거꾸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즉 복을 받았다면 순종했기 때문이요 저주를 받았다면 불순종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객이라면 고아라면 과부라면 다시 말해서 저주를 받았다면, 그 이유가 자신이나 조상이 불순종했기 때문이라고 답을 내렸던 겁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은 사회적 약자를 돌아볼 필요 자체를 느끼지 못했던 겁니다. 결국 그들은 사회적 약자가 그들 중에 있지만 돌아보지 못했고, 따라서 그들을 돌아볼 때 이뤄지는 ‘그들 중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지 못했던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사회적 약자가 없는 곳이 아닙니다. 객과 고아와 과부가 엄연히 존재하는 곳입니다. 사회적 약자가 넘쳐나는 곳이며, 그들이 우리 중에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사회적 약자가 스스로 나 자신이 약자로 느끼지 못하는 돌봄이 있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나와 남이 사는 곳이 아니라, 나와 내 형제가 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15: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사실 이러한 명령은 후에 예언자들이 사회를 진단하는 중요한 기준이기도 하였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사야가 선포한 외침을 들어보십시오(사 10:1-2): “불의한 법을 공포하고, 양민을 괴롭히는 법령을 제정하는 자들아, 너희에게 재앙이 닥친다! 가난한 자들의 소송을 외면하고, 불쌍한 나의 백성에게서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들을 노략하고, 고아들을 약탈하였다.” 아주 놀랍게도, 이사야는 나라의 멸망 기준이 사회적 공의에 있다고 보았던 겁니다. 이사야가 볼 때, 유다는 멸망의 기준을 족히 채우고 말았습니다. 과부들을 노략했고, 고아들을 약탈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회가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지, 신명기 말씀과 이후의 계속된 성서의 일관된 목소리를 통해 신중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등만 잘사는 나라가 아니라 꼴등도 당당하게 사회의 일원으로 활동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나라의 가치를 배우고 전달해야 하는 겁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에 자살률 1위라고 합니다. 30분에 한 명씩 하나님이 주신 천하보다 귀한 목숨을 버리는 나라입니다. 더욱 슬픈 사실은 자살률이 급등하고 있는 연령층이 10대의 학생들과 20대의 청년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볼 때, 우리나라에서 배울 것도 없고 남길 것도 없다는 겁니다. 과연 무엇으로 우리나라를 회복시킬 수 있을까요? 과연 무엇을 배우게 하고 또한 무엇을 남기도록, 이 나라의 10대와 20대를 이끌어 주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꿈을 심어주고, 그 나라를 위해 귀한 땀을 흘리는 삶의 가치를 가르쳐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임시적인 것도 아니며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놀라운 비전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부자들이 지갑을 털어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현실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은, 하나님 나라의 대표적 사건인 겁니다. 오병이어의 하나님 나라에서 사람들은 “다 배불리 먹었다”고 말씀은 증언합니다(막 6:42). 또한 이러한 정신은 초대교회로 이어져서, 가난한 성도를 돕기 위해 일곱 집사가 특별히 세워지게 됩니다(행 6:1-6). 교회의 직분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봅시다. 하나님 나라의 대원칙을 깨달은 바울은, 하나님의 놀라운 비전이 결국 교회라는 한 몸에서 성취되었다고 선포합니다(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당신과 내가 두 사람이 아닌, 주안에 한 몸이 되는 사람살이. 바로 이것이 세상의 방식에 대한 하늘의 대안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신명기의 두 번째 메시지인 것입니다.
3. 말씀이 내 안에서
1) 남용과 오용
저는 신명기의 신학적 메시지를 시작하면서,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 바로 신명기라고 말씀드린바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인물인 모세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을 가르쳐주고 있으며, 또한 우리들 사람살이의 대원칙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의 영향력은 이스라엘 역사뿐만 아니라 이후의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도 엄청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위대한 말씀을 앞에 두고 한편으로는 기쁨과 감격으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정말 말씀에 대한 경외감을 갖게 됩니다.
또한 이렇게 영향력이 엄청난 중요한 말씀이기에, 이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지켜나가는 일이 요구됩니다. 사실 신약시대에 바리새인들이 이 신명기의 말씀을 오해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만을 고집했기 때문에, 신명기에서 율법들 하나하나를 뽑아 총 611개의 지켜야할 명령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히브리어는 각 글자가 숫자가 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ㄱ’이 1, ‘ㄴ’이 2, ‘ㄷ’은 3이런 식이지요. 그런데 토라(hr"ÛAT)라는 각 글자를 더하면, 611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T은 400, A는 6, r는 200이고, h는 5입니다. 합하면 611이 되는 겁니다). 더 나아가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옷 끝에 여러 가닥의 실을 꿰어 만든 술로 형상화시켰는데, 바로 옷에 611개의 술을 만들어 단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내 몸을 감싸고 있다는 것이지요. 참으로 대단하긴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그들의 이러한 행위를 칭찬하기시기는커녕 오히려 ‘화있을진저’라고 저주하셨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막 7장에서, 바리새인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으면 법을 어긴다고 정했습니다. 이것이 부정한 손이라는 거지요(5절).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외식자로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전통)을 지키는구나! 너희의 전한 유전(물려받은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헛되게)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는구나!”(6,7,13절)
말씀을 읽고 지킨다는 차원에서 바리새인들은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잘못한 것은 말씀의 정신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깊은 사상을 깨닫지 못하고, 겉모양의 문자적 행위만을 꾸몄다는 거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간 신명기 말씀의 깊은 사상을 깨닫고자 합니다. 율법은 하지 말라는 규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하라는 권면이자 독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적극적으로 토라의 가르침을 듣고 후대에 전수합시다: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섬기고 사랑하자! 그리고 공동체를 한 몸으로 섬기고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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