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사기 -
이 땅에서 우리는 무엇이 될 수 있는가?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 17장 6절)
1. 사사기서 서론(2:10-19)
1) 진정한 역사성을 가진 이스라엘: 신명기적 역사
이스라엘 민족은 역사적인 민족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오늘만 살아가는 민족이 아니라, 어제를 반성하면서 내일을 준비하는 민족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 이 말을 다시 생각해보면, 세상의 다른 민족/나라들 역시 역사적인 사람들이라고 해야합니다. 우리나라 역시 ‘5000년의 역사를 가졌다’고 하면서 자부하지 않습니까. 사실 어느 민족이 역사가 없겠습니까? 단지 몰라줘서 그럴뿐이지요. 유독 교회에 나오면 이스라엘만을 듣고 배우니까, 이스라엘만이 완전한 민족이구나 하는 인식이 부지불식간에 생겨난 겁니다. 이스라엘도 그 안에 더러운 정치적 탐욕과 암투가 있었고, 입에 담을 수 없을 만한 추악한 사건들이 있었습니다(우리는 사사기서에서 그 한 장면을 볼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들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역사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풀어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을 역사적으로 이해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하면서 말입니다. 자신들의 역사에서 활동했던 하나님으로 믿고 섬겼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역사적인 민족이라는 말은, 다른 모든 민족들과 공통점이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인 차이점이 분명히 존재하는 말인 겁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 ‘독특한’ 역사적인 관점이 있는 민족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도 역사적인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역사적인 사람들이겠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특별히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역사를 풀어가는 ‘영적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과거에 속했던 모든 죄악의 더러운 것들을 용서받는 거룩한 경험을 간직한 사람들입니다. 또한 죄악된 세상에서 만족과 기쁨을 얻으려했던 세속적 삶과 결별하고, 성령님과 동행함으로 하늘의 가르침과 인도함을 받는 생생한 생명력을 경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내일의 소망을 꿈꾸면서,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성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바로 우리들이 이러한 ‘독특한 역사적인 신앙인’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스라엘과 역사성에 대해서 말씀드린 것에, 한 가지만 덧붙이길 원합니다. 조금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구약성서를 이해하는데 너무나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집어야만 합니다. 앞에서 저는 이스라엘이 ‘독특한’ 역사성을 가진 민족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이 독특성은 구체적으로 나타나는데, 바로 구약성서에 ‘역사서’라는 부분이 없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역사라는 말 대신에 ‘예언서’라고 불렀습니다. 쉽게 말해서 그들은 역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른 민족들이 풀어가는 방식과 전혀 다르게 이해했던 겁니다. 그들만의 ‘독특한’ 사상은,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현재/미래를, 역사 대신에 ‘예언’으로 풀어갔던 겁니다. (이 예언이 무당이 점치는 차원에서 단순히 내일 일을 말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그들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들의 조상들이 살아갔던 과거의 이야기로 만들어갔던 것이 아니라, 예언 곧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 구현되어갔는가’에 대한 반성적 회고로 삼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본래 구약은 세 부류로 나뉩니다. 토라(Torah, 오경), 예언서(Nebiim), 그리고 성문서(Ketubim, 거룩한 글들) 말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구약을 각 구성의 앞글자를 따서 타나크(TNK)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부르면서, 그들은 인간의 역사로서의 역사가 아닌, 신의 역사로서의 ‘예언’의 세계를 살았노라고 확신했던 겁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될 것입니다(눅 24:44): “...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토라)과 선지자의 글(예언서)과 시편(성문서)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그래서 45절이 이렇게 요약하는 겁니다: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ta.j grafa,j)을 깨닫게 하시고.” 결론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이해했던 성서관-단지 인간의 세계를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신의 세계를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자아정체성-을 우리가 깨달을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2) 이스라엘의 역사: Up and Down
예언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전기예언서와 후기예언서입니다. 히브리어로 기록된 원어성서를 보면, 전기예언서와 후기예언서는 4권씩 나뉩니다. 전기예언서는 여호수아서, 사사기서, 사무엘서, 열왕기서가 있고, 후기예언서에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12소예언서가 있습니다. 본래는 이렇게 전해졌다는 것만 알아두시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이 전기예언서(여호수아서, 사사기서, 사무엘서, 열왕기서)에는 독특한 신학이 들어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말 그대로 ‘역사’로 풀어쓴 것이 아니라, ‘예언적 역사’로 이해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 공동체에 어떻게 실현되었는지에 대한 반성적 검토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특별히 신명기로 집중됩니다. 곧 신명기에서 말씀하신 내용,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할 새로운 계약의 정신이 이스라엘의 운명을 결정짓는 결정적인 요인인 것이지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지정하신 곳(예루살렘)에서 야웨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늘의 복을 풍성히 받을 수 있으며, 그 반대의 경우-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신을 섬기면-엔 멸망하고 이방인들의 종이 된다는 약속의 말씀이, 이스라엘의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전기예언서를 ‘신명기적 역사’라고 통찰력 있는 분석을 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이러한 약속의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 얼마나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는지를 점검하면서, 단지 역사의 민족이 아닌 ‘하나님 말씀의 민족’이라는 독특한 역사의식을 가졌던 겁니다. (이러한 영적 깨달음은 우리의 인식에 큰 도전을 줍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아가면서 ‘하나님 말씀의 사람’이라는 의식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매 주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약속의 말씀이 나의 삶 속에서 얼마나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는지를 점검/확인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영적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아무튼 이러한 신학적인 방식으로 성서의 핵심메시지를 읽어가는 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사기서라는 ‘전기예언서의 두 번째 말씀’ 앞에 서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적 역사를 회고하면, 간단히 up & down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완만한 굴곡 수준이 아니라, 잘나갈 때는 엄청 잘나가지만, 어려울 때는 한없이 어려웠다는 겁니다. (이 역시 영적으로는 중요한 깨달음입니다. 영적인 세계는 천국 아니면 지옥입니다. 중간은 없지요. 하나님의 나라 아니면 사단의 나라 이 둘 중의 하나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엄청난!’ 고백을 했지만, 반대로 예수님께 ‘사단’이라는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마 16:15-23].)
전기예언서는 이러한 up & down으로 그려집니다. 여호수아서는 up입니다. 말씀에 순종함으로 한 번에 가나안을 정복하는 승리의 모습을 보여주지요. 사사기서는 반대로 down입니다. 사사기서 후반부에 보이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을 때 그러한 세계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음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사무엘서는 up을 보여주지요. 다윗을 통해서 드디어 약속의 땅의 핵심인 예루살렘에서 통치를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열왕기서는 down을 보여줍니다. 나라의 분열과 최종적으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멸망하는 처참한 운명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up & down으로 이스라엘의 전기예언서는 그 신학적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왜 up & down 일까요? 이제는 up의 타이밍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들의 역사를 반성하면서 기록했던 이 시기는 이제는 up이 되어야 한다는 소망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처참하게 신앙을 깨달은 그들이 다시금 하나님께서 주시는 up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지옥 같은 down의 환경에서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다시금 하나님이 주시는 up을 기대하며 기도하는 삶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느 타이밍에 살고 있나요? up인가요? down인가요? up이라면 하나님께 감사의 삶을 계속 살아가십시오. 영적으로 교만하지 말고, 바울이 경고했던 것처럼,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십시오[고전 12:10]. 만약 여러분이 down에 있다면, 소망을 가지십시오.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삶을 구원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신실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가르치실 것이며, 다시금 우리의 삶을 up으로 바꾸실 것입니다.)
3) 사사기서의 패턴
이제 마지막으로 사사기서에 대하여 간략한 사전 정보를 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제목부터 살펴봅시다. ‘사사기’란 과연 무슨 뜻일까요? 사사들에 대한 기록이겠지요. 그렇다면 ‘사사’란 과연 무엇일까요? 사사? 십육!?
히브리어로는 샤파트(jp;v')라고 합니다(제목은 복수형으로 쇼페팀[~yjip.vo)]입니다). 이 말은 한 가지 뜻으로 제한될 수 없는, 풍성한 언어입니다. 이 말에는 ‘다스리다/구원하다/결정을 내리다/판결을 내리다/심판하다’라는 다양한 뜻이 들어있습니다. 영어에서 이 샤파트를 재판하는(judge) 것으로 국한시켰고, 우리말 성서도 영어를 따라서 ‘판관’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가톨릭에서 보는 공동번역은 ‘판관기’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사사기서 자체를 읽어보면, 사사들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로 전쟁 영웅이었습니다. 사사가 등장하게 된 이유는, 재판을 위한 것도 아니고, 어떠한 중요한 사안에 결정을 내리기 위함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이방 민족이 이스라엘을 괴롭히니까,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켜서 승리를 거둔 ‘구원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사기는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영웅이 될 수 있는가?” 과연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어주시는가? 어려운 환경을 이겨낼 수 있는 구원자란 과연 어떠한 사람인가? 그러한 사람이 과연 내가 될 수 있는가? 그렇습니다. 사사기서는 이러한 거룩한 신적 사명에 대한 초청인 것입니다. (이 부분은 다음 시간에 사사들을 직접 살펴보면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사사에 대해 그 정체를 알게 되었다면, 그 다음으로 사사기의 패턴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수많은 구원자/전쟁 용사가 있었습니다. 내용이 많이 때문에 대사사 6명, 반대로 내용이 얼마 없기 때문에 소사사 6명 이렇게 총 12명의 사사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들은 하나 같이 지역의 영웅이었습니다. 전쟁 용사로, 각자의 지역에서 이방 민족의 억압을 이겨내고 하나님의 구원을 선사한 인물이었습니다. 후대의 역사가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영웅들의 정보를 모아서 하나의 패턴으로 잡았습니다. 바로 신학적인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 메시지가 사사기 2장에 나옵니다(10-19절):
10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11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12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 곧 그 사방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아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13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14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여 그들로 노략을 당케 하시며 또 사방 모든 대적의 손에 파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치 못하였으며, 15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매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 16여호와께서 사사를 세우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내게 하셨으나, 17그들이 그 사사도 청종치 아니하고 돌이켜 다른 신들을 음란하듯 좇아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 열조의 행한 길을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치 아니하였더라. 18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사사를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 하셨고 그 사사의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이어늘 19그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돌이켜 그 열조보다 더욱 패괴하여 다른 신들을 좇아 섬겨 그들에게 절하고 그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
반복되는 패턴이 이 짧은 말씀에서 요약되어 있습니다. 아마 분위기는 어둡고 절망적으로 보입니다. 첫 번째로 시작은 믿음을 가졌던 세대의 죽음입니다(10절). 이것은 출애굽기 1장 6,8절을 기억나게 합니다. 요셉을 알았던 왕들이 죽게 되자 이스라엘에게 어두움의 그늘이 찾아왔던 것처럼, 믿음을 가졌던 세대가 죽게 되자 역시 이스라엘에게 영적 어두움이 찾아오게 됩니다. 우리 보다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합시다. 10절에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h,ªyrEx]a; rxeøa; rAD' ~q'Y"w:)”에 동그라미를 쳐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세대’라는 말에 우리는 이미 무엇인가 눈치를 채게 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부분은 “알지 못했다(W[d>y")-al{)”라는 말입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했고, 그분이 하셨던 구원의 사역을 알지 못했던 세대가 일어났던 겁니다. 이 말은, 우리가 단순히 세대간 갈등의 요인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시대엔 어땠는데, 너희들은 왜 그러냐? 라는 근거구절이 아니라는 겁니다. 말씀이 내가 아닌 남을 판단하려는 도구로 전락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구절을 오직 나에게 국한해야 합니다: ‘나는 첫 사랑을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는 사람인가? 나는 처음에 가졌던 열정과 순수함을 지금까지도 변치 않고 품고 있는 일꾼인가? 나는 하나님을 지금까지 경험하고 있는 생생한 신앙인인가?’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알다’는 단지 지적 동의가 아니라, ‘야다([d;y")’ 곧 부부가 함께 잠을 자고 서로를 알아가는 것과 같은 경험적 앎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이러한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며 영적으로 무기력한 또 다른 나’가 발견된다면, 우리는 회복의 영을 위해서 철저하게 기도해야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믿음이 죽게 되자, 그 대신 우상이 들어가게 됩니다. 11-13절까지 긴 내용으로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이 죽으면, 신앙의 불이 꺼지고, 결국 “하나님을 버린다”는 겁니다(hw"åhy>-ta, Wbúz>[;Y:w:). 그 빈자리에 바알과 아스다롯이 대신하게 됩니다. 아주 오묘하게 성서는 이러한 현상을 눈에 보기 좋게 말합니다: “섬기고(Wdßb.[;Y:w:)”와 “버리고(Wbúz>[;Y:w:)”를 찾아서 동그라미 쳐보시기 바랍니다. 각각 두 번씩 나옵니다. 이게 그 발음이 참 비슷합니다. 아바드(db;[')/아자브(bz:[')! 그리고 주목해서 보시면, ‘섬기다’가 바깥쪽으로 나와 있고, ‘버리고’가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성서를 연구하다보면, 이런 표현들이 종종 발견됩니다. 뭐냐 하면 중요한 부분들은 안쪽에 넣는, 매우 기술적인 표현방식인 겁니다. 성서는 말하는 겁니다. 중요한 것이 바로 여호와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중앙에 위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이스라엘이 그 하나님을, 중앙에 위치하는 하나님을 ‘버렸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지만, 실상은 하나님은 버려진 존재였던 겁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아바드와 아자브는 그 차이가 발음 하나 차이였던 것처럼, 하나님을 버리는 것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내 중앙에 모시지만, 실상 아주 작은 부분들에서 하나님을 버리는 행위들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은 진노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맹렬한 불을 일으킵니다. 14-15절에서 “진노”와 “재앙”에 동그라미를 쳐보십시다. ‘진노하다’라는 말의 원래 표현은 ‘코에 불이 나오다(hw"hy> @a:Ü-rx;YI)w:)’입니다. 매우 원색적인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이 표현이 제일 많이 나오는 성서가 딱 두 곳 있습니다. 바로 사사기서이고(2:14,20; 3:8; 10:7), 민수기입니다(11:10; 12:9; 25:3; 32:10,13). 우리는 하나님께서 감정을 가진 인격적인 분이라는 점을, 매우 안타까운 상황에서 발견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불은 재앙으로 구체화됩니다. “재앙”은 하나님의 변덕스러움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과의 계약 조건 속에서 신실하심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15절에는 이는 “말씀하신 것과 같고(hw"ëhy> rB<åDI 'rv,a]K;()” “맹세하신 것과 같다(hw"ßhy> [B;îv.nI rv<±a]k;w>)”라고 거듭 말하고 있는 겁니다(밑줄을 쳐봅시다). 우리 신명기 29장 24-28절을 읽어봅시다. 여호와의 진노가 얼마나 “크고 열렬”한지를(27절에 바로 ‘코에 불이 나오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진노하심이 변덕이 아닌 우리와의 약속에 철저하게 신실한 증거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신앙에 ‘책임’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책임’입니다. 전인격적인 책임 관계 속에서 생활하는 것이 바로 신앙인 겁니다. 혹시 우리 중에 이러한 신앙의 책임을 비통하게 경험하신 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것은 철저하게 개인적인 말씀으로 국한시켜야지, 남을 진단한다고 잣대로 들이대면 안 됩니다. 바로 무익한 욥의 친구가 될 뿐입니다.) 그런 분이 있다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크고 열렬한 진노를 경험해서 영적으로 심한 괴로움을 겪게 되었다면, 위로받으시길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변덕이 우리를 괴롭게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맹세대로 신실함을 보여주신 것으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설 때, 우리가 가졌던 모든 괴로움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바꾸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셔서 사사를 세워주십니다. 16-18절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16절에 “사사를 세우사(~yji_p.vo) hw"ßhy> ~q,Y"ïw:)”에 동그라미를, 18절 끝에 “부르짖으므로(groaning, hq'a'n>)”에 동그라미를 쳐봅시다(사실, 사사기가 독특하게 표현하는 ‘부르짖음[cry]’에 해당하는 히브리어[q[z/q[;c']가 아니지만). 하나님은 사사를 세워주셔서, 이스라엘을 “건져냈고([vy)” “구원([vy)”하셨습니다. 잠깐 동안, 그러니까 사사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평안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사사가 죽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렇습니다. 다시 다람쥐 쳇바퀴 도는 양, 반복되는 겁니다. (아마 지난 시간 여호수아서를 말씀 드리면서, 평안이 있은 후에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었던 것으로, 바로 하나님이 지정하신 곳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에 있다는 점을 기억하신다면, 이스라엘이 그러한 상황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이, 구조적인 문제라는 점으로 간파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사사시대의 신학적 진단입니다. 그들의 복잡하고 다양한 역사를 이러한 신학적 눈으로 요약한 겁니다. 1)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의 등장, 2)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을 섬김, 3) 하나님의 명렬한 진노와 재앙->사방 대적의 손에 잡히게 됩니다. 4) 하나님께 회개하고 부르짖으니, 하나님이 사사를 세워 구원하신다. 이러한 현상이 한 번으로 끝났으면 좋았을 것을! 19절은 이러한 현상이 사사시대 이스라엘의 이상한 패턴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돌이켜 그 열조보다 더욱 패괴하여 다른 신들을 좇아 섬겨 그들에게 절하고 그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
이제 말씀을 정리합시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사사기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을 들으셨습니다. 매우 불편한 말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입니다. 그래서 굳이 말하자면, ‘불편한 진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책 제목이지요). 이스라엘 역사의 up이 아닌, down을 지켜보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냉철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만 up & down을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공동체 역시 up & down을 살아가는 겁니다. 우리가 여호수아서에서 up을 경험했다면, 이제는 사사기서에서 down을 경험하고 대비하며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겁니다. 저는 이후 두 번의 설교를 통해서, 사사기가 묻는 중요한 질문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무엇이 될 수 있는가?”입니다. 이 질문은 두 번의 설교에서 다음의 두 가지 질문으로 구분됩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영웅이 될 수 있는가?”(삿 3-16장) 그리고 “이 땅에서 우리는 악당도 될 수 있을까?”(삿 17-21장)입니다. (사실 이 제목은 사사기 연구를 하다가 읽은 책에서 얻은 것입니다: Antony F. Campbell, SJ., Joshua to Chronicles: An Introduction, 100; 필립 짐바르도, [루시퍼 이펙트], 49) 아무쪼록 말씀이 우리의 신앙에 도전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시다. 그 말씀에 우리의 신앙이 바로 설 수 있도록, 좋은 영적 기회로 삼읍시다.
2. 이 땅에서 우리는 영웅이 될 수 있는가?(삿 5:8-9)
1) 이스라엘의 크고 작은 영웅들
사사기서의 첫 번째 주요한 메시지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영웅이 될 수 있는가?” 그렇습니다. 사사기서의 첫 번째 메시지는 바로 이런 질문에 대한 신학적 대답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기억하는 조상들의 역사는 다름 아닌 영웅의 역사였음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게 됩니다. 바로 전 세대의 인물인 여호수아로부터 시작해서 거꾸로 올라가면 민족의 지도자 모세, 그리고 이방인으로 애굽 대제국의 총리까지 올라갔던 요셉,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야곱, 그 위로 이삭, 그리고 민족의 아버지 아브라함까지 올라갑니다. 이스라엘이 기억했던 민족적 정체성은 다름 아닌 위대한 영웅들의 일대기였던 겁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영웅은 오늘날 영화에서 보는 초인간적인 슈퍼히어로[슈퍼맨]를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영웅이라고 해서 그들의 삶이 흠과 티가 없이 완벽한 삶을 살았던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충분히 영웅으로 기억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이 당면한 과제가 생깁니다: “그들처럼 우리도 영웅이 될 수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을 푯대로 삼아서 살아갈 수 있을까? 믿음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서 삶의 여러 환난을 극복해나갈 수 있을까? 하나님의 성품에 따르는, 정의와 인애로운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 그들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을까? 과연 우리도 그들처럼 영웅이 될 수 있을까?
아쉽게도 앞서 살펴본 말씀에서와 같이, 이스라엘은 전체적인 면으로 볼 때, 조상들이 살았던 영웅적인 삶의 모습을 닮아가는 일에 실패하고 맙니다. 그 단적인 예가 삿 1장에서 9번이나 반복되는 “쫓아내지 못하였다(vyrIAh al{)”라는 말에서 발견됩니다(19,21절, 27절부터 33절까지 매절에서 나옵니다). 사사기 1장은 이스라엘의 영웅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끝이 납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단 지파가 ‘반대로’ 아모리 사람들에게 쫓겨남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34절). 우리말로는 똑같은 ‘쫓아냄’이지만, 여기에서 사용된 히브리어는 ‘라하쯔(#x;l')’라는 말로, ‘억압/압박을 받다; 압제/학대를 당하다’라는 보다 심한 상황을 말하는 단어입니다(2:18; 4:3; 6:9; 10:12). (이 단어는 놀랍게도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했을 때, 그 때 상황을 말해주었던 바로 그 단어입니다![출 3:9에 강조적으로 두 번이나 나옵니다; “괴롭게하는 학대”] 애굽의 학대로부터 벗어나려했던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똑같이 학대를 받는 현실인 겁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영웅’ 여호수아의 바통을 이어받은 이스라엘 민족의 현주소가 바로 이것입니다. 위대한 영웅에서 학대받는 민족.
그러나 하나님은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새롭게 하시기 원하셨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신앙의 유산을 올바르게 전수하지 못했던 중요한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크고 작은 영웅들을 세워주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들이 사사기 3장부터 16장까지 등장하는 크고 작은 사사들입니다. 성서 연구자들은 대(大)사사와 소(小)사사로 구분하곤 합니다. 이것은 사사들이 대단한 사사와 별로 대단치 않는 사사가 있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 성서에 기록된 분량에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편의상 붙인 것입니다(예언서에서도 대예언서/소예언서 구분하곤 하는데, 같은 원리입니다. 그러나 저는 후에 중요한 차이점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잠깐 시간을 내서 성서를 펼쳐놓고 직접 사사들을 찾아볼까요?) 대사사들로는 3장에 ‘옷니엘’(9절)과 ‘에훗’(15절)이 나옵니다. 특별히 여기엔 사사라는 말 대신에 ‘구원자’라는 말이 눈에 띕니다. 4-5장으로 가면 유일한 여자 사사인 ‘드보라’가 나옵니다(4:4). 이어서 6-9장까지 매우 긴 내용의 주인공으로 ‘기드온’이 등장합니다(6:12). 주목할 점으로, 이 부분에서도 기드온은 ‘구원자’로 소개된다는 점입니다(6:36). 다음으로 11-12장에 ‘입다’가 나옵니다(11:1). 입다는 “큰 용사(lyIx;ê rABæGI)”로 소개됩니다. 마지막으로 영웅의 대미를 장식하는 삼손이 13-16장에 등장합니다. 이 삼손은 다른 사사(영웅)들과는 달리 탄생이야기부터 죽음까지 전생애가 나오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 가운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부분은, 영웅됨의 근원이 인물 자체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신에 감동되어야” 구원할 수 있고, 영웅처럼 지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13:25; 16:20). 이렇게 대사사들은 (1) 옷니엘, (2) 에훗, (3) 드보라, (4) 기드온, (5) 입다, (6) 삼손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소사사들을 살펴봅시다. (다시 삿 3장으로 와야 합니다.) 소사사들로는 3장에 ‘삼갈’(31절)이 나옵니다. 정말 짧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넘겨서 10장에 이르면 ‘돌라’(1절)와 ‘야일’(3절)이 나옵니다. 그리고 12장에 오면, ‘입산’(8절), ‘엘론’(11절), 마지막으로 ‘압돈’(13절)이 사사로 활약합니다. 정말 사사에 대한 언급이 짧습니다. 정리하면, 소사사들로는 (1) 삼갈, (2) 돌라, (3) 야일, (4) 입산, (5) 엘론, (6) 압돈이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대사사 6명, 소사사 6명으로 총 12명의 사사(영웅)들이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들이 바로 압제 당했던 이스라엘에서 활약했던 크고 작은 영웅들이었던 겁니다. 과연 이들은 어떻게 영웅이 될 수 있었을까요? 주변의 적대적인 민족들에게 받았던 엄청난 압제들을, 이들은 과연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요? 성서를 주목해서 보면, 모든 사사(영웅)들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단어(동사형)가 나옵니다. 바로 ‘일어나다(~wq)’입니다(달리다 굼[Taliqa koum], 막 5:41). 그런데 이 동사가 두 가지 형태로 나오는데, 바로 사역형(힢필)과 능동형(칼)입니다. 쉽게 말해서, 사역(힢필)형이라 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구원자/영웅/사사로 ‘들어 세우셨다([:yvi²Am hw"ïhy> ~q,Y""w:, 3:9)’는 말이고, 능동(칼)형이라 하면, 어떤 사람이 ‘스스로 일어나서(~q'Y"w:, 10:1)’ 사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어떠한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세움을 받은(사역형) 영웅이 ‘대사사’로 나와 있으며(3:9), 자기 스스로 일어나서 사사가 되었던(능동형) 영웅은 ‘소사사’를 언급할 때 나왔다는 점입니다(10:1,3).
우리는 사사기서에서 12명의 영웅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들이 다 같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6명과 6명으로 놀랍게 나뉩니다. 이들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위에서 언급한 한 가지 기준으로 생각해본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영웅이 된 것인가 아니면 자기의 욕망으로 영웅이 된 것인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바로 ‘일어나다(쿰)’라는 동사형으로 분간할 수 있던 겁니다. 이들 12명은 똑같이 활동을 멋들어지게 했을 겁니다. 그러나 성서는 소사사들은 그와 동시대의 사람들의 기억으로 그치도록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어떤 수를 쓰더라도 ‘돌라’가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했는지를 전혀 알아낼 재간이 없다는 겁니다(10:1-2). 반대로 우리는 겁쟁이 기드온을 들어 쓴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해서는, 영화를 만들어 낼 정도로, 자세하게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서는 4장에 걸쳐서 기드온에 대해서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누가 이 땅에서 영웅이 될 수 있을까요? 모두가 영웅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한 가지 차이점은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 욕망으로 일어나는 사람은 작은 영웅으로 그치지만, 하나님에 의해서 자격 없는 사람이 들어 쓰임을 받게 될 때 그는 큰 영웅으로 대대에 걸쳐 기억된다는 겁니다. 오! 이 가르침은 우리의 교만을 얼마나 명쾌하게 지적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손길을 얼마나 사모하게 하는 것일까요!
2) 영웅이 되고 싶은가? 즐거이 헌신하라!
사사기에 들어있는 12명의 영웅들만 연구해도 그 분량이 엄청납니다. (제가 사사기 4-5장에 관심이 있어서 연구된 글을 모았더니 책 한권이 나왔습니다!) 이 시간에 모든 영웅들의 행적을 살펴보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목적에도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사기서가 보여주는 영웅들의 신학적 메시지를 잘 드러내고 있는, 사사기 4-5장의 드보라에 초점을 맞추어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그 많은 영웅들 중에서 드보라를 선택한 이유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성서학자들의 일치된 견해 중에 드보라의 노래, 곧 삿 5장이 성서에 포함된 내용들 중에 시대적으로 가장 앞선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가장 오래된 자료들로 출 15장과 신 33장이 있습니다. 모두 시문으로 되어있지요). 다시 말해서 사사기는 사사들이 살았던 시절에 기록된 말씀이 아닙니다. 앞에서 잠깐 언급한 적이 있지만, 다시 말하면, 기록된 것 자체는 한 500년 후입니다. 쉽게 말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억들이 반성적으로 기록된 것이지요. 그렇지만 삿 5장에 대해서만큼은 그 어휘와 내용 자체가 사사시대를 거의 완벽하게 반영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드보라의 노래에 대한 연구가 엄청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첫 번째 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하나님이 쓰시는 영웅에 대한 중요한 메시지가 선포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앞으로 우리가 살펴볼 것이지만, 드보라라는 여자 영웅을 통해서 하나님은 사사시대의 영웅들과 그 시대를 전혀 새롭게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말씀의 자리에 들어가도록 합시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드보라에 대한 이야기는 사사기 4장에 나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본문은 가나안 땅의 북쪽 지방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등장하던 비슷한 시기에 대규모의 헬라(그리스)인들이 배를 타고 가나안과 주변 지역에 침략하게 됩니다. 이들은 철로 된 무기라는 앞선 문명을 내세워서 가나안의 해안지대를 쉽게 점령하고 내륙지방도 호시탐탐 노리게 됩니다. 성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블레셋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4장에 시스라(ar's.ysi)라는 군대장관이 나오는데, 이 이름은 전통적인 가나안 식의 이름이 아니었기 때문에, 유력한 성서학자들은 시스라가 해양민족 곧 블레셋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Itamar Singer, “Egyptians, Canaanites, and Philistines,” FNTM, 320). 아무튼 시스라는 이스라엘에 큰 위협을 주는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었습니다. 철병거가 900대나 있어서 20년 간 이스라엘을 억압했다고 하니(3절), 그 세력이 얼마나 위대한 것이며, 그 인물이 또 얼마나 위협적인지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무엘상 12장을 보면, 사무엘이 민족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서, 자신들이 이 가나안에서 너무나 많은 위협을 받았다고 되짚어봅니다. 수많은 위험과 대적들이 있었지만, 사무엘은 그 대적들 중에서 단 한사람의 이름만 언급합니다. 바로 하솔 군장 시스라입니다(9절): “... 여호와께서 그들(이스라엘)을 하솔 군장 시스라의 손과 블레셋 사람의 손과 모압 왕의 손에 붙이셨더니...”
이러한 상황에서 여자 예언자 드보라(ha'êybin> hV'äai hr"Abd>)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됩니다(4절). 드보라는 에브라임 사람으로 사실 이곳은 문제가 생기는 하솔과는 상당히 먼 거리의, 어쩌면 상관없는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전통적으로 이스라엘은 벧엘과 단으로 불리게 되는데[왕상 12:29], 남쪽으로 벧엘이요 북쪽으로 단이라는 말입니다. 벧엘 바로 밑에 예루살렘이 있지요. 그런데 드보라는 벧엘 근처의 사람이고, 하솔은 단 근처입니다. 그러니 부산 사람이 평양 바라보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러나 드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고 북쪽 지역의 문제에 관심을 돌리게 됩니다. 하솔이란 곳은 북쪽의 납달리 지파와 스불론 지파에 위치한 곳이기 때문에, 납달리 사람 바락(qr'B')을 부릅니다. “하나님이 시스라와 그 병거를 네 손에 붙이실 것이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고 무리를 이끌고 전쟁하라!” 그런데 바락은 한 가지 조건을 붙입니다. 나 혼자서는 가지 않고, 드보라 당신이 같이 가야 나도 가겠다는 겁니다. 바락은 말씀이 아닌 사람을 붙잡았던 겁니다. 그러자 드보라는 이렇게 답합니다(9절): “좋다. 나도 가지. 그러나 기억해라. 전쟁에서 승리는 거두겠지만, 영광은 네가 아닌 여자가 얻을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철병거를 가진 시스라라 한들 도저히 이스라엘 백성을 상대로 이겨낼 수 없었습니다. 시스라의 군대는 대패했고, 시스라만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도망을 칠 수 있었습니다. 어디 피신처가 없나하고 찾다가 야엘(l[ey")이라고 하는 여인의 장막에 들어가게 됩니다. 시스라는 야엘의 호의를 입게 됩니다. 음식을 먹고 나니 이제 전쟁에 지쳐 잠이 들게 되지요. 그러자 야엘은 장막 말뚝으로 시스라를 죽이게 됩니다. 곧 시스라를 쫓던 바락이 야엘을 찾아옵니다. 바락은 아무 말을 하지 않지만, 야엘은 이렇게 말합니다(22절): “오라, 내가 너의 찾는 사람을 네게 보이리라.” 바락은 여인의 손에 죽임을 당한 블레셋의 군대 장관 시스라를 그냥 쳐다볼 뿐입니다.
이러한 전쟁의 자세한 내용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오게 됩니다. (외경 중에 유딧서라는 책이 있는데, 그 내용이 드보라/야엘의 이야기와 매우 유사합니다. 이는 아마도 드보라의 이야기가 이스라엘에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졌는가를 반증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이 말씀을 찬찬히 읽어보면, 영웅이 필요했던 시기에, 과연 누가 영웅이었으며, 어떤 사람이 영웅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중요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말씀드렸던 바와 같이, 가장 오래된 노래로 사사기 5장의 드보라의 노래도 예부터 전해져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누가 영웅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사사기서의 신학적 메시지를 정리하고자 합니다. 저는 사사기 5장과 관련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누가 영웅이 될 수 있을까요? 그건 생각보다 정말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즐거이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웅이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직업적인 운동선수들이 은퇴하면서 자신의 등번호가 영구히 결번(다른 사람이 그 번호를 쓸 수 없는 겁니다!)되는 영광을 누리는 것처럼, 여러분의 이름이 하나님의 나라에 지워지지 않는 황금으로 박혀있기를 소원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즐거이 헌신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우리가 잠깐 살펴본 사사기 4장은 전쟁의 장면을 아주 교훈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교훈적이라는 말은 사사기 4장의 말씀이 전쟁 상황을 신문기자가 사진을 찍듯이 생생하게 전달하지 않고, 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반드시 깨달아야만 하는 것을 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4장을 읽어보면, 전쟁 자체의 장면은 단 1절로 그칩니다(15절): “여호와께서 바락의 앞에서 시스라와 그 모든 병거와 그 온 군대를 칼날로 쳐서 패하게 하시매...” 그렇습니다. 전쟁 준비와 작전, 전술과 전황. 이 모든 것은 필요치 않습니다. 오히려 4장은 전쟁 이전과 이후의 상황을 보여주는데 더 많은 관심을 둡니다. 바로 무엇입니까? 전쟁 이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즐거이 헌신하지 못했던 남자 바락과 전쟁 이후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즐거이 헌신했던 여자 야엘을 보여줬던 겁니다. 8절을 보면, 바락이 얼마나 즐거이 헌신하지 못했는지를 말해주지요: “만약 당신이 나와 함께 간다면 나도 가고, 만약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않는다면 나도 가지 않겠습니다(%lE)ae al{ yMiÞ[i yki²l.te al{ï-~aiw> yTik.l'_h'w> yMiÞ[i ykiîl.Te-~ai).”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세계에서, 말씀의 세계에서, ‘만약’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락이 즐거이 헌신하지 못했다는 것은, 원어를 보니, 두 번이나 사용된 ‘만약’이라는 단어에서 드러나는 겁니다. 이러한 바락의 불신으로 드보라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앞서 잠깐 말씀드린 것이지만, 9절에 네가 이제 가는 일로는 “영광을 얻지 못할 것이다(^ªT.r>a;p.Ti( hy<÷h.ti( al{).” 보다 직접적인 뜻은 ‘명예’입니다(신 26:19). 전쟁의 선봉에 섰던 대장에게 가장 궁극적인 결과가 바로 명예입니다. 그런데 즐거이 헌신하지 못한, 다시 말해서 부르심에 전적으로 순종하지 못한 용사에게, 명예가 사라지게 된 겁니다.
이에 반하여 전쟁 이후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즐거이 헌신했던 야엘은 바락의 명예를 대신 받게 됩니다. 다시 22절을 보십시오: “바락이 시스라를 따를 때에, 야엘이 나가서 그를 맞아 가로되, ‘오라 내가 너의 찾는 사람을 네게 보이리라.’ 바락이 그에게 들어가 보니 시스라가 죽어 누웠고 말뚝은 그 살쩍에 박혔더라.” 이스라엘의 전쟁 수장인 바락은 아무 말을 못할 뿐입니다. 오직 여인 야엘만 말을 할 뿐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야엘의 명령을 받는 존재로 나올 뿐입니다. 바락은 여인의 손에 죽임을 당한 블레셋의 군대 장관 시스라를 그냥 쳐다볼 뿐입니다. 전쟁의 시작은 드보라에게서 시작했고, 전쟁의 마지막은 야엘에게서 끝이 납니다. 이것이 야엘의 복이었습니다.
사사기 5장의 위대한 노래는 즐거이 헌신한 사람이 받는 복의 약속과, 반대로 즐거이 헌신하지 않는 사람이 받는 저주의 약속이 들어있습니다. (5장은 너무 어려운 말씀이지만, 중요한 메시지에 맞추어서 필요한 구절만 설명하겠습니다.) 8-9절을 봅시다: “무리가 새 신들을 택하였으므로 그 때에 전쟁이 성문에 미쳤으니, 이스라엘 사만 명 중에 방패와 창이 보였던고, 내 마음이 이스라엘의 방백을 사모함은 그들이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신하였음이라. 여호와를 찬송하라.” 이 말씀은 중요한 메시지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이스라엘의 문제(전쟁)가 생겨난 이유는, 무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새 신들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그러한 전쟁이 벌어져서 이스라엘이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8절 하반절에 나온 “이스라엘 사만 명 중에 방패와 창이 있었던고?”라는 말은, 사실 원어를 보면 ‘사만 명’이 아니라, ‘40 씨족(@l,a,Þ)’을 말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민수기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대략 50개 정도의 씨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40 씨족이라 함은, 이스라엘 민족을 달리 말하는 표현이었던 겁니다(Norman K. Gottwald, Tribes of Yahweh, 274; Baruch Halpern, Law and Ideology in Monarchic Israel, 52). 그러므로 이것을 보다 알기 쉽게 표현한다면, “그들이 새 하나님을 선택한 결과, 그 때에 전쟁이 닥치게 되었지만, 이스라엘의 어떤 부족이 전쟁을 할 수 있었던고?” 아무도 할 수 없었고, 단지 적대세력의 억압을 당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9절이 중요한 메시지가 됩니다: “(아무도 나설 수 없는 상황에서) 내 마음이 이스라엘 방백을 사모함은 그들이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신하였음이라. 여호와를 찬송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이 어디에 집중하고 있는지, 우리는 이 짧은 구절에서 명백히 확인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신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소중히 보시는 겁니다. “스불론은 죽음을 무릅쓰고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 백성이요 납달리도 들의 높은 곳에서 그러하도다.”(18절) 14절부터 18절까지 드보라는 하나님의 전쟁에 즐거이 참여했던 지파를 축복하고 있습니다. 에브라임이여! 베냐민이여! 마길(므낫세)이여! 잇사갈이여! 당신들은 복된 자로다! 왜냐하면 당신들이 하나님을 돕는 백성이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여러분이 이러한 축복을 받길 바랍니다. (바로 여러분이 드보라가 되십시오: 5:12의 언어유희; 드보라는 ‘깨우치는 말씀’)
마지막으로, 우리는 23절에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거듭 그 거민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도다.” 메로스가 무엇인지 학자들은 명쾌한 답을 내놓고 있지 못합니다. 그들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없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은 역사에서 사라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메로스라는 존재를 자세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이 왜 사라졌으며, 왜 중요하지 않은 존재가 되었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저주를 받은 이유만이 기억될 뿐입니다. 여호와를 돕지 않는 것, 즐거이 헌신하지 못한 태도, 부르심에 거부하는 불신앙, 하나님의 나라보다 자신의 일과에 만족하려는 안일함. 사랑하는 여러분,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여기 계시는 모든 분들은 신앙의 명예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드보라의 노래는 다음과 같이 놀라운 말씀으로 끝을 맺습니다(31절): “주를 사랑하는 자는 해가 힘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충심으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주를 사랑하는 자가 되십시오. 즐거이 헌신하는 자가 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으십시오. 해가 힘있게 돋음 같은 영광과 명예를 누리십시오. 바로 여러분이 드보라와 야엘이 되십시오!
3) 영웅에 대한 새로운 이해
사사기는 영웅의 세계로 우리를 초청하는 신앙의 도전장입니다. 사사기를 표면적으로 읽으면 12명의 큰 영웅과 작은 영웅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사기를 깊이 있게 읽으면 새로운 영웅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사사기는 12명의 영웅들만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사사기 말씀이 영웅들을 보여준 이유는, 단순하게 이스라엘의 과거사를 찬란하게 채색하기 위함도 아니요, 또한 유치하게 그들의 영웅담을 들으며 대리만족을 느끼라는 목적도 아니었습니다. 사사기서는 일종의 극장인 셈입니다. 엄격한 가르침과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율법 조항들을 기록한 딱딱한 목록집이 아니라, 무엇이 신앙인의 삶인지에 대한 가치관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가치관의 극장’이란 말입니다(Richard D. Nelson, “Judges: A Public Canon for Public Theology,” Word&Word 29:4 [2009], 397-406).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영웅의 가치관을 말하는 신앙의 세계로 우리를 초청하기 위함입니다.
저는 이 시간 영웅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즉 성서적 이해를 여러분께 풀어드리기 원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사기를 깊이 연구하다보면 알 수 있는 것인데, 사사기의 기록자는 이들 영웅들을 완벽한 영웅이 아니라 너무나 흠이 많고 부족한 사람으로 나타내고 있다는 겁니다. 사사들 가운데 가장 많은 분량을 가진 두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기드온과 삼손입니다. 기드온은 6장부터 9장까지 총 4장에 걸쳐 등장하며(9장은 아들 아비멜렉으로 간접적으로 그 영향력이 끼치는 영역입니다), 삼손은 13장부터 16장까지 역시 총 4장에 걸쳐 등장합니다(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전생애가 들어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총 21장의 사사기서에 두 사람이 8장을 차지하니, 거의 40%에 해당하는 분량입니다(엄밀하게 말해서, 사사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3-16장만을 생각한다면, 57%에 이를 정도입니다!). 기드온과 삼손이 사사를 대표한다고 충분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영웅들의 이면에는 완벽함 보다는 허술하고 미약한 약점들로 가득함을 알게 됩니다.
기드온은 부정적인 셀프이미지를 가진 사람입니다. 내면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지요. 전문적인 용어로 ‘자아존중감(Self-Esteem)’이라고 합니다. 기드온은 자아존중감이 낮은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바로 의심과 공명심(功名心)입니다. 첫 번째로, 기드온은 참으로 의심이 많았습니다. 성서를 찬찬히 읽어보면 기드온은 ‘밤의 사람’으로 나옵니다. 그의 행동은 철저하게 은닉자의 삶입니다(삿 6:11, 27; 7:10; 그런데 사실 이것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일종의 풍자입니다[6:2]). 그러한 삶의 배경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지 않았다는 의심이 뿌리 깊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6:13). 그래서 많은 사사들 중에 유독 기드온에 대해서만 하나님은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겠다(%M"+[i hy<ßh.a,)”라고 확신의 말을 하십니다(6:16). 영웅들이 가질법한 담대함이 기드온에겐 너무나 부족했습니다. ‘임마누엘’의 약속을 받았음에도 기드온의 의심은 가시질 못했고, 그 유명한 양털시험이 시작됩니다(6:36-40): 양털이 젖고 사면 땅이 마르면 내가 믿겠나이다. 이번엔 반대로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이 젖으면 내가 믿겠나이다. (심지어 전쟁을 벌인 그 시점에도 기드온은 확신치 못해서, 밤[!]에 적진에 들어가 적군의 자멸적인 꿈 이야기를 듣고서야[7:9-14] 드디어 전쟁의 칼을 듭니다.) 두 번째로, 기드온은 공명심이 높았습니다. 공을 세워서 자신의 이름을 높이려는 욕망이 컸다는 것이지요. 자아존중감이 건강한 사람은 어떠한 일을 완수하고, 공을 동료들에게 돌리거나 혹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아존중감이 낮은 사람은 작은 일에도 자신의 이름이 널리 전파되기를 바랍니다. 기드온이 그러했습니다. 성서를 주목해서 보면, “내 손으로”라는 표현이 종종 등장함을 알게 됩니다: “... 내 손으로(ydI²y"B.)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시거든, ...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 내가 알겠나이다.”(6:36-37) 우리가 ‘기드온의 300용사’라는 말을 종종 하곤 하는데, 여기엔 기드온의 공명심을 경고하는 일종의 훈육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본래 3만 2천명이나 되는 엄청난 대군을 거부하시고 300명으로 줄였던 이유가 바로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yLi( h['yviîAh ydIÞy")” 할까 조심스러워했던 겁니다(7:2). (불행하게도 기드온의 공명심은 전쟁 이후 적장 세바와 살문나를 추격하면서 생겨난 충돌에서 드러납니다[8:6-7]. 이후 기드온이 아들의 이름을 ‘아비멜렉(%l,m,(ybia])’으로, 그 뜻이 ‘나의 아버지는 왕이시다’로, 지은 것은 또 하나의 공명심의 한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자아존중감이 지극히 낮았던 기드온과 반대로, 삼손은 자아존중감이 너무 높았습니다. 자아존중감이 긍정적인 차원을 초월해서, 삼손은 자아존중감이라는 기준 자체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자기 스스로가 하나님이 되는, 자신의 말이 곧 하나님의 말이며 자신의 행동이 곧 하나님의 행동이 되는 사람이었던 겁니다. 지나친 긍정은 부족함만 못하다는 것이 삼손에게서 드러나는 교훈입니다. 삼손은 태어나면서부터 신적인 제약 속에 살 것을 주문받은 운명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바로 나실인의 삶이지요(13:7):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죽을 날까지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하더이다(At)Am ~Ayð-d[; !j,B,Þh;-!mi r[;N:ëh; hy<åh.yI ~yhil{a/ ryzIÜn>-yKi()” 주목할 점은 말씀 자체가 탄생과 죽음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유독 삼손에 대해서만은 탄생과 죽음의 기사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삼손이라는 용사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해있는 ‘유한한 존재’로서 하나님의 사람(진정한 나실인!)이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삼손은 자아존중감이 지나치게 높아서, 유한한 존재로 부르심을 망각하고, 하나님께 속하기를 거부한 욕망의 사람이 되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삼손이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유한한 존재로서의 부르심(13:4,14)을 아주 손쉽게 거역한 장면을 기억합니다. 바로 자신의 손으로 죽인 사자의 사체 속에 들어있는 벌꿀을 아무렇지도 않게 먹었던 것입니다(14:9). 그것이 죽음 안에 들어있는 달콤한 유혹이라는 것을 모른 채 말입니다. 결정적인 것은 삼손은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신 목적에 살고 있는가를 점검하면서 자신의 길을 부지런히 찾기보다, 어디에 아름다운 여인이 있는지 만을 부지런히 찾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삼손과 드릴라라는 비극으로 사사기의 영웅은 대종말을 맞게 되는 겁니다. 정말 아이러니한 점은, 사사기에서 삼손은 단지 힘만 센 ‘마초맨’이 아니라, 신비로운 수수께끼를 낼 수 있는 지혜가 완비된 거의 완벽한 영웅이었다는 점입니다(14:4,12). 그렇게 지혜로웠던 그가, 정작 자신이 잠든 사이에 머리가 밀리우고 하나님의 영이 떠나셨던 것을 “그가(강조!) 깨닫지는 못했다([d:êy" al{ aWhw>)”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대표적인 사사(영웅) 기드온과 삼손을 간략하게 살펴보았습니다. 물론 이들은 위대한 신앙인입니다. 성서의 전통은 이들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삼상 12:11; 히 11:32). 그러나 사사기서 자체가 말하려고 하는 일차적인 메시지는 엄연히 ‘비판적’입니다. 영웅이긴 하지만, 그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사사시대는 down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평가는 영웅들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되었던 겁니다. 정리하면, 사사기서는 신학적인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사사(영웅) 시대에 대한 ‘예언적 역사가’의 평가인 셈입니다. 그것은 바로, 비록 영웅들에 의해서 간간히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사사시대는 ‘혼동의 시대’였다. 다시 말해 ‘질서가 파괴된 세계’였다 라는 겁니다. 사사들에 의해서 몇 년 동안은 “그 땅에 평화가 있었(#r<a'Þh' jqoïv.Tiw:)”지만(3:11,30; 5:31; 8:28), 그 사사가 죽으면 다시 혼동이 찾아왔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사기서의 가장 어두운 시대를 살펴볼 것입니다. 사사기는 “이 땅에서 우리는 무엇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묻는 책이라고 말씀을 드린바 있습니다. 사사기의 많은 부분(3-16장)은 “우리도 영웅이 될 수 있다”고 도전합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사사기의 적지만 중요한 부분(17-21장)은 “우리가 악당도 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일단 우리는 사사기의 앞부분을 확실하게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영웅이 될 수 있습니다. 즐거이 헌신하는 당신이 바로 영웅입니다. 영웅은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약점 있는 사람을 쓰셨습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약점을 극복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건강한 자아존중감을 가지고 즐거이 헌신하게 될 때, 바로 여러분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웅이 될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보여주신 회복의 시간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우리는 그 자세한 사건을 요한복음 21장에서 보게 됩니다. 명백히 요한복음은 20장에서 끝이 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새로운 비전을 주시고 성령을 부어 주시며[20:21-22], 마지막 절에서는 정말 끝을 맺는 분위기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끝나면 절대로 사도행전으로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건강치 못한 자아존중감을 가졌던 대표적인 신앙인, 다시 말해서 우리를 대표하는 베드로를 회복시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아침을 먹이시고 따뜻한 숯불 앞에서 온전한 자아존중감의 회복으로 이끄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회복의 자리는 불편한 것일 수 있습니다. 아니오. 정말 불편한 자리입니다(요 21:17). 활활 타올랐던 불길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지금 마주하고 있는 숯불조차 그의 얼굴을 확 달아오르게 할 정도로, 지금 이 자리는 베드로의 치부가 완전히 드러나는 자리였습니다. 예수님이 치사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회복이란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복은 아름다운 꽃밭에서 진행되지 않습니다. 회복은 참혹한 무덤에서 떠오르는 햇살입니다. 회복은 무릎을 꿇었던 곳에서 일어서는 새힘입니다. 바로 지금 이 자리가, 바로 당신의 그 황폐한 마음이 회복의 자리인 것입니다.)
3. 이 땅에서 우리는 악당도 될 수 있는가?(삿 17:6; 21:25)
1) 망령된 일, Dismembered Body.
사사기서가 전달하는 두 번째 중요한 메시지는 이런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악당도 될 수 있는가?” 이 땅에서 영웅이 될 수 있지만, 그와 동시에 이 땅에서 악당도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사사기의 메시지입니다. 물론 우리는 여호수아부터 열왕기서까지 큰 그림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예언적(신명기적) 역사’라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사시대는 up이 아닌, down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비록 불편하겠지만, ‘악당 이스라엘’을 볼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섬나라 불구경도 아니요, 단순한 지적 탐구도 아닙니다. 철저히 신적인 메시지입니다. 우리 역시 ‘이 땅에서 영웅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악당도 될 수 있음’을 되돌아보게 하는 철저한 반성인 것입니다.
과연 어떤 사건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바로 본문에 그 힌트가 들어있습니다(20:6b): “...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행하였음을 인함이로라.” 그렇습니다. 바로 ‘망령된 일’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삿 17-21장의 큰 이야기 안에 이 단어가 무려 네 번 나옵니다(19:23,24; 20:6,10). 이 말은 히브리어로 말하면, 느발라흐(hl'b'n>)인데, 구약성서에서는 여러 곳에서 언급되어 있으며, 한 결 같이 왜곡된 인간관계, 다시 말해 성적 질서가 깨어지는 상황을 보여줍니다(TDOT IX: 167-9): 족장시대에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 사람에게 강간을 당했던 상황(창 34:7), 통일왕국시대에 다윗의 아들 암논이 배다른 딸 다말을 겁탈한 사건(삼하 13:12), 분열왕국시대에 예루살렘 사람들이 그 이웃의 아내와 행음했던 일이었습니다(렘 29:23). 이 구절들에서 바로 느발라흐라는 ‘망령된 일’이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특별히 공통된 표현이 들어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중에 망령된 일을 행하도다(lae(r"f.yIB. hl'Þb'n>W hM'îzI Wf±[')”라고 하면서, ‘이스라엘’이 연관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마땅히 신의 자녀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명기를 통해 하나님과 신성한 약속(계약)을 맺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신명기를 보면, 인간관계가 깨어지는 최종적인 단계를 성적으로 문란해지는 것으로 보며, 그렇기에 이스라엘 중에 성적문란을 근절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신 22:21에 성적으로 문란한 상황을 규정하면서(우리말 성서는 느발라흐를 “창기의 행동”으로 번역하면서), 엄중한 죽음으로 형벌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망령된 일’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 대한 죄악을 말하는 것입니다(HALOT). 그러므로 충격적인 점은 위에서 언급했던 구절들은 하나 같이 그 결과가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세겜 사람들은 몰살당하게 되고(창 34:25), 암논 역시 압살롬에게 죽임을 당합니다(삼하 13:32). 예레미야에 의하면, 예루살렘 멸망의 이유는 바로 ‘망령된 일’ 때문이었습니다(렘 29:21,23; “바벨론 왕이 너희 목전에서 그들을 죽일 것이라. ...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망령되이 행하여, 그 이웃의 아내와 행음하였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점은 히브리어 단어 자체가, ‘망령된 일(hl'b'n>)’과 ‘시체(hl'ben>)’를 말하는데 같은 자음(hlbn)을 쓰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위에서 말씀드렸던 “이스라엘 중에 (해서는 안 되는) 망령된 일을 행했다”라는 탄식은, 곧 이스라엘에 죽음의 형벌이 닥칠 수밖에 없음을 예견하는 탄식과 같은 말이었던 겁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망령된 일’은 예언적(신명기적-말씀의!) 역사를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큰 죄악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저지른 ‘죽음’의 죄악은 구체적으로 과연 무엇일까요? 전체 본문은 개인적으로 읽어보시고, 특정 부분만 선택적으로 읽어가면서, 대략적인 내용만을 정리해드리겠습니다. 삿 17-21장에는 사사들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악당이 등장합니다. 왜냐하면 사사기는 우리가 영웅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악당도 될 수 있음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악당에 더 가까울 수 있다는 경고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삿 17-21장은 사사/영웅들이 등장하지 않은 대신에, 악당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의외의 등장인물에 우리는 놀라게 됩니다. 문제의 시작이 다름 아닌 제사장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삿 17-21장은 크게 두 개의 사건을 말해줍니다. 첫 번째 사건은 17-18장에 나옵니다. 왕국을 이루어 예루살렘이 수도가 되기 전까지, 이스라엘의 중심지는 에브라임 지역이었습니다. 이 에브라임 지역에 미가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비교적 넉넉한 살림을 자랑했습니다. 자신의 집에 ‘신당(~yhi_l{a/ tyBeä)’도 만들고, 에봇과 드라빔을 만듭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을 제사장으로 삼아서 종교활동을 합니다. 뭔가 이상하지요. 가관인 것은, 미가가 어머니(혹시 들릴라는 아닐까요? “은 일천 일백”을 볼 때 말입니다[16:5; 17:3])에게 횡령한 은으로 우상을 만들기도 했다는 겁니다. 종교가 법도를 벗어나 뒤죽박죽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4절 ‘신상’, 5절 ‘신당’, ‘에봇과 드라빔’, ‘제사장’에 밑줄을 쳐봅시다). 그러던 중에, 베들레헴의 레위인이 먹고 살 곳을 찾아 길을 나서다 미가의 집에 들어가게 됩니다. 미가가 연봉을 제시하면서 이 레위인을 영입하게 됩니다. 아무래도 자기 아들이 미덥지 못했는지, 돈으로 제사장을 사는 겁니다(10절, “나를 위하여[!] 제사장이 되라.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식물을 주리라”에 밑줄을 쳐봅시다. 11절, “레위인이 ... 만족히 여겼으니”에 동그라미를 쳐봅시다). 지금 여러분은 제사장이 돈으로 고용된 현장을 보고 계십니다(제사장의 말을 볼까요? “미가가 여차여차히 ... 나를 고빙/고용[ynIrE§K.f.YIw:]하였다[18:4]”) 그리고 미가가 이렇게 배를 두드립니다(17:13): “레위 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웃기는 짬뽕이지요. 일이 평탄케 될 줄 알았지만, 사건은 복잡하게 흘러갑니다. 단 지파가 아직도 땅을 분배받지 못하고 있습니다(18:1). 땅을 정탐하던 5명의 특공대가 라이스라는 평온한 땅을 찾게 되고, 덤으로 미가의 집에서 활동하고 있는 레위인 제사장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제사장에게 자문을 구하는데, 아리까리한 답을 듣고 갑니다(18:5, 우리말 성서는 “여호와 앞에 있다”라고 되어있어서, 적극 찬성을 받은 것으로 되어있지만[NIV는 approval로 번역함], 원어[hw"ëhy> xk;nOæ]는 ‘야웨의 맞은편/반대편’의 뜻으로, 호의적이면서도 동시에 비호의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반대로 말하면, 단 지파는 이러한 미묘한 차이를 ‘어리석게도’ 읽어내지 못했다는 겁니다!). 이제 단 지파가 라이스를 점령하기 위해서 전군이 움직이는 길에 미가의 집에서 ‘훔친’ 은으로 만든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을 모두 ‘빼앗아’ 갑니다. 더 나아가 ‘고용된’ 제사장도 ‘데려가려’ 합니다(18:19):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미가의 말과 똑같습니다![17:10]).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의 한 지파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어느 것이 낫겠느냐?” 제사장은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편으로 너무나 쉽게 발걸음을 옮깁니다. 미가는 불평해보지만, 단 지파의 위협에 입을 다물고, 닭 쫓던 개 취급을 당하고 맙니다(26절, “단 자손이 자기보다 강한 것을 보고”). 미가는 하나님이 복 주실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모든 것을 빼앗기고 결국 손해 본 장사만 했던 겁니다. 그런 다음 단 지파는 라이스라는 평화로운 땅을 잔인하게 불살랐고(27절), 그 이름을 단으로 바꾸었으며, 미가에게서 빼앗은 우상을 보관하게 되었습니다(31절). 이스라엘의 마지막 가나안 점령의 기사가 우상을 보관한 지역으로 끝나고 만 것입니다. 자신의 집에 신당을 짓고 거기에 온갖 종교적 물품을 갖다 두는 어리석은 시대,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된 신앙인지를 몰라서 단지 종교의 흉내만 내던 시대, 돈으로 제사장을 사고파는 시대, 반대로 제사장이 돈과 명예/권력을 보고 발걸음을 정하는 시대, 주먹이 정의가 되는 동물적인 시대. 바로 이 시대가 ‘망령된 일’이 벌어졌던 사사시대였습니다. 주목할 점은, 17-18장에 나오는 베들레헴은 남쪽이고, 에브라임은 중앙이며, 단은 최북단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사건은 이스라엘 전역에 만연되어 있는 ‘망령된 일’의 전조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17-18장이 풍자적이고 인생의 아이러니한 점을 묘사하고 있다면, 19-21장은 이제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의 ‘망령된 일’을, 즉 인간관계의 파멸, 성적 질서의 문란의 장소를 보여줍니다. 여기에서도 제사장으로 시작합니다(이는 19:29에서 암시되고 있습니다). 역시 에브라임에 살던 어떤 레위 사람이 나오는데, 이 레위인이 첩을 두었습니다(19:1의 “첩[vg<l,êypi]”에 동그라미를! 왜 첩을 두었을까요? 본처가 불임했기 때문일까요? 이유는 나와 있지 않지만, 앞으로의 이야기를 보면, 바로 성적인 쾌락을 누리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첩이 행음하고 고향으로 도망을 갑니다(그 남편에 그 첩이라고 해야겠습니다). 넉 달이 지났는데도 잊질 못해서, 레위인은 첩을 찾으러 베들레헴으로 먼 길을 떠납니다. 여자를 찾고 집으로 돌아가려 하니, 여자의 아비가 함께 먹고 마시자고 하면서, 무려 5일 동안 레위인의 발걸음을 막는 겁니다(반대로, 5일 동안 에브라임의 사역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밤에 길을 나서는데, 잠을 자야겠는지라 (10-12절에서 나오는 것처럼, 하인의 말대로 여부스에서 거하면 될 것을[성서는 “여부스는 곧 예루살렘이라”고 하면서,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외인의 성읍”이라고 폄하하고 있습니다) 기브아라는 곳에 가서 유숙할 곳을 찾게 됩니다(18절): “그(제사장)가 그(한 노인)에게 이르되, 우리는 유다 베들레헴에서 에브라임 산지 구석으로 가나이다. 나는 그곳 사람으로서 유다 베들레헴에 갔다가 이제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인데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는 사람이 없나이다.” 어떤 노인(그도 역시 본토인이 아니라, 우거하는 사람입니다. 제사장이 동족이라고 기대했던 곳에서, 보기 좋게 퇴짜를 맞는 첫 번째 장면입니다)의 도움을 받아 잠을 청하는데, 한 밤중에 난리가 납니다(19:22, “보라!” hNEhiw>). 기브아 성읍의 “불량배들”(l[;Y:©lib.-ynE)b., 원어로 본다면 “벨리알의 자손들”로 ‘사악한 자들’입니다)이 나타나서 그 남자를 내놓으라는 겁니다(후에 보겠지만, 이들이 바로 엘리 제사장의 아들을 일컫는 말이기도 합니다[삼상 2:12]. 이들은 신명기 말씀에 의하면[13:13, “잡류”] 무서운 심판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그 이유가 놀랍게도 남색을 하겠다는 겁니다(22절, “우리가 그를 상관하리라[WN[,(d"nEw>]” 우리는 여기에서 남성과 남성 사이에 일어나는 성적 관계와 그 권력의 복종 관계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남성과 남성이지만, 곧 남성과 ‘여성화된 남성[힘이 빼앗긴 남성]’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자 노인이 말합니다(23,24절): “망령된 일(hl'îb'N>h;)을 행치 말라. 대신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을 주리다.” 결국 노인과 처녀 딸, 제사장과 그 첩 중에서 가장 힘이 없는 사람이 희생을 당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첩이 희생양이 됩니다(25절): “그 사람(레위인!)이 자기 첩을 무리에게로 붙들어내매, 그들이 그에게 행음하여 밤새도록 욕보이다가 새벽 미명에 놓은지라.” 밤새 욕을 당한 여인은 어떻게 되었을까요?(28절) 구약은 히브리어로 된 것이 있고, 헬라어로 된 것이 있습니다(70인경이라고 합니다). 헬라어로 된 구약성서는, 히브리어에는 없는 한 문장을 첨가하고 있습니다: “o[ti h=n nekra,(for she was dead)” (그 이유는, 우리말에는 ‘시체’라는 말이 있지만, 히브리어는 그러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h'x,Q'YIw:], 상황을 보다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여인의 시체를 가지고 왔습니다(29절, “그 집” <-18절의 “여호와의 집”). 이곳에서, 여호와의 집에서, 레위인 제사장(!)은 평소에 제사에서 소와 양을 잡던 제의용 칼을 취해서(창 22:10), 그 여인의 시체를 쪼갭니다. (우리말로 “찍어 나누다[xtn]”라는 말은 레위기에 등장하는 제사용어입니다[레 1:6].) 그 작은 여인의 시체에게서 12 덩어리를 만들어서 각 지파에 보냅니다(삼상 11장과 대조됩니다! 제사장의 어리석은 행동임을 우리는 20:5,6에서 나오는 그의 위증행위들[“기브아 사람”이라는 말의 원어는 바알레 하기브아[h['êb.GIh; yleä[]B;]로 “기브아의 군주들”인데, 사실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19:22] 그들은 “벨리알의 아들/불량배”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망령된 일”은 본래 제사장 자신을 남색하려던 것인데[19:24] 그는 자신의 첩을 강간한 것으로 돌려 말함으로써[20:6] 혹시나 있을 자신의 체면의 문제를 벗어나고 있습니다]에서 더욱 확실히 알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스라엘 지파가 분노합니다(20:10): “우리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백에 열, 천에 백, 만에 천을 취하고 그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예비하고 그들로 베냐민의 기브아에 가서 그 무리의 이스라엘 중에서 망령된 일을 행한 대로 징계하게 하리라 하니라.” 그런데 베냐민 지파가 기브아 사람을 끼고 돕니다. 결국 이스라엘 온 지파와 베냐민 지파가 전쟁을 벌입니다. 내전이 벌어진 것입니다. 베냐민 지파가 거의 몰살당하고 겨우 600명만 목숨을 부지하게 됩니다(20:47의 “베냐민 육백 명”).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이스라엘 지파가 뉘우칩니다. 이스라엘의 한 지파를 영원히 없앨 순 없다! 그런데 그들은 이미 약조를 했습니다. 자신들의 딸을 베냐민 사람에겐 주지 않겠다고 말입니다(21:7). 그런데 불행하게도 방법이 없습니다. 유일한 방법은, 어디에서 자신들과 상관없는 사람들의 딸을 잡아와서 베냐민 남자들에게 주는 겁니다. 그래서 야베스 길르앗에 사는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젊은 처녀 사백 명을 구합니다(12절). 아직도 부족합니다. 그래서 해마다 실로에서 벌어졌던 여호와의 절기에 실로의 여인들이 그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나올 것이니, 그 때 춤추는 여인들을 납치해서 아내로 삼는 겁니다(23절). 결국, 천인공노할 부녀자 납치사건으로 사사시대는 종말을 맺습니다. 제사장이 첩을 둔 사건이, 이스라엘 전체를 어떻게 만들었는지요! 최초의 토막시해사건이 성서에 나오며, 여자를 얻기 위해 한 마을을 진멸하는 사람들의 잔인함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려했던 순결한 처녀들이 느닷없이 납치를 당해서 운명이 바뀌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19장부터 21장까지 긴 내용의 결론은, 여자의 몸이 산산조각 났던 것처럼, 순결한 처녀의 꿈이 산산조각 났던 것처럼, 말 그대로 이스라엘의 총체적인 분열(“dismembered body”)로 끝을 맺습니다(21:24): “그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그곳을 떠나 각각 그 지파, 그 가족에게로 돌아가되 곧 각각 그곳에서 나와서 자기 기업으로 돌아갔더라.”
공평과 정의가 실종된 자리, 그 빈자리에 힘이 자리를 잡는 시대. 사회의 가장 미약한 존재인 여성이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는 시대. 무엇보다도 종교가 물질 앞에 굴복하며, 음란 앞에 무너져 내리고만 시대. 바로 이것이 사사시대가 종결하는 “망령된 일”의 실재였습니다.
2) 나쁜 시스템, Dismembering Body
지금까지 우리는 이 땅에서 영웅이 될 수 있지만, 그와 동시에 이 땅에서 악당도 될 수 있다는 사사기의 두 번째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이제 저는 사사기서의 두 번째 신학적 메시지를 분석하기 원합니다. 사사기서가 전달하는 두 번째 메시지, 곧 “이 땅에서 우리는 악당도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 이제는 우리 자신을 보다 정직하게 대면하기 원하는 겁니다. 짧게 본문을 읽어봤지만, 우리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악당이 뭡니까? 우리는 죄인 중의 괴수도 충분히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의 목적은 우리를 좌절시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찔러 쪼개어 드러나게 하며, 결과적으로 바로 잡게 하기 위함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어느 구절이건 은혜요 선물입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 역시 은혜요 선물입니다. 단지 험악한 세상을 한탄할 것이 아니라, 성서가 가르쳐주는 신학적 분석의 메시지를 통해서, 우리 사회를 다시 보는 거룩한 신적인 렌즈를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저는 여러 가지 복잡하게 꼬여있는 말씀을 풀어가면서, 두 가지만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종교의 타락입니다. 두 이야기 모두 그 발단은 종교의 타락으로 시작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말씀은 직접적으로 도전합니다. 제사장이 타락하면, 이스라엘은 멸망한다! 목사가 타락하면, 세계는 종말이다! 목사가 물질을 기준으로 만족을 느끼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17:11) 목사가 더 높고 더 권위 있는 자리를 사역의 목적으로 삼는다면 어떻게 될까요?(18:19) 목사가 성적으로 부도덕하면 어떻게 될까요?(19:1) 목사가 교회를 섬기는 일을 제쳐두고, 엉뚱한 일에 매달려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19:8) 목사가 교회에서 하는 거룩한 일을, 자신의 분을 풀기 위해서 사심을 표출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19:29)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 멸망합니다. 세계는 종말입니다. 교회는 이보다 더 큰 위기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첫 번째 타락이야기(17-18장)의 제사장은 제일 마지막에 와서 그 신분이 드러납니다(18:30): 바로 모세의 손자 요나단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다름 아닌 ‘모세’의 손자가 이러한 신앙적 추태의 주범이었다는 겁니다(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논리에도 맞지 않고, 히브리어 원문의 상태가 문제가 있지만[마소라본문에는 모세가 아닌, 므낫세로 나와있습니다]1, 내러티브의 흐름을 그대로 쫓아가 보도록 합시다). 이 구절은 종교의 추락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본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충격이 큽니다. 세계적인 대학자 한스 큉은 [그리스도교]라는 책에서, 기독교 2000년의 역사를 세밀하게 추적한 후에, 이렇게 글을 맺습니다: 기독교는 신약교회의 본질이 와해된 역사입니다. 즉 신앙의 평등성과 윤리성이 정치와 권력세계 안에서 변질된 역사입니다. 교회지도자가 교황이 되면서 물질과 권력에 놀잇감이 되고, 결혼금지법을 만들어 왜곡된 성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시대의 윤리적 기준이 상실된 이유로, 교회의 책임을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그래서 한스 큉은 이제 다시 기독교적 책임을 지고 “인류 전체를 위한 구속력과 결속력 있는 윤리, 곧 세계윤리[p.962]”를 제시해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종교의 타락, 바로 이것이 붕궤의 원인이라고 말씀은 제시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러한 문제를 단지 목사만의 것으로 제한하기보다 더 일반화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기 때문입니다(벧전 2:9). 본문에서 우리는 미가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제사장은 아니었지요. 어찌보면 평신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의 뜻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미카여후(Why>k")ymi), 곧 “누가 야웨와 같을꼬?”라는 말로, 야웨가 최고의 하나님이라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또한 단(!D")) 지파라는 이름의 뜻은 ‘의로운 판단’입니다(창 30:6). 단 지파는 자신들의 이름의 가치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진을 쳤던 곳을 “마하네단(!d"ª-hnEx]m;)” 곧, ‘단의 진지’라고 이름 짓기까지 했던 겁니다(18:12). 참으로 멋지고 훌륭한 이름이지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멋진 이름을 가진 신앙인이, 정녕 무엇이 진정한 신앙인지 모르고 있으며, 잘못된 가치관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물질과 명예를 잣대로, 주먹과 칼을 기준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물질을 기준으로 만족해하지 마십시오. 물질의 기준에 우리가 일희일비하게 될 때, 우리는 물질의 노예가 됩니다.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권세에도 연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에 최선을 다해 집중하십시오. 성적으로 정결한 삶을 사십시오. 교회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개인의 사심을 드러내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입니다.
종교와 관련해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사사시대는 종교의 한계를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제가 신명기와 여호수아서를 말씀드리면서, 중요한 원칙을 지적한 바가 있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평화를 누리게 된 이후, 마땅히 이어져야할 과정이 있다는 겁니다. 신 12:10-11에, 하나님이 “너희에게 안식을 주사 너희로 평안히 거하게 하시면,” 하나님이 택하신 곳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나안을 정복하고 평안히 거하게 되자, 24장에 이제는 “여호와만 섬기자.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라고 선언합니다. 그렇습니다. 평화는 예배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사사시대는 평화가 예배로 연결되지 못했습니다. 사사시대는 한 결 같이, “그 땅이 몇 년 간 태평하였더라(#r<a'Þh' jqoïv.Tiw:)”고 말하면서 끝이 납니다(3:11,30; 5:31; 8:28). 평화가 예배의 자리로 더 나아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사시대의 평화는 길어야 40년에 그칩니다. 사실 40년은 이스라엘의 특정 기간(한 세대)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사/영웅들이 활동해서 이스라엘이 평화를 누렸지만, 그것은 기꺼해야 한 시대뿐이고, 앞으로 더 큰 환란이 닥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바로 영웅들이 평화를 선사한 이후,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의 자리까지는 이어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바로 사사시대의 한계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며, 그에 감격해서 매 주일 하나님의 전에 모여서 예배하는 이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자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일을 마주하게 된다 할지라도, 예배의 자리만큼은 포기하지 마십시오. 1억을 준다한들, 예배의 자리와는 바꾸지 마십시오! 대통령의 자리를 준다한들, 여러분이 드리는 이 예배의 자리와는 바꾸지 마십시오! 예배는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자리입니다. 만약 예배를 다른 것으로 바꾸게 된다면, 하나님 역시 다른 것으로 바꾸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남북으로 갈라져서, 다윗의 후손이 남왕국을 통치하고, 반역자의 후손이 북왕국을 통치했을 때, 북왕국의 지도자들은 야웨의 예배를 다른 우상의 예배로 바꾸고 맙니다. 바로 그 장소가 남쪽의 벧엘이고 북쪽의 단입니다(왕상 12:28-29). 바로 여기에 나와 있는 단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언적 역사의 기록자는, 이 사건을 그냥 단순한 과거의 에피소드로 볼 수 없었습니다. 삿 18:30에 흔적을 남겼던 겁니다: “단 자손이 자기를 위하여 그 신상을 세웠으니 ... 이 백성이 사로잡히는(hl'G") 날까지 이르렀더라.” 사로잡히는 날? 바로 북이스라엘의 멸망의 날입니다(왕하 17:23). 그렇습니다. 예언적(신명기적) 역사가는 북이스라엘의 멸망이 우상숭배에 있음을 철저하게 고발했던 것입니다. 먼 옛날 조상들이 저지른 참 신앙의 혼동, 참 예배의 혼동이 단에 뿌리를 박아 놓았고, 그 뿌리가 결국 나라의 붕궤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드립니다: 만약 우리가 예배를 다른 것으로 바꾸게 된다면, 하나님도 역시 우리를 바꾸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된 예배의 자리를 지키십시오!
두 번째는 오늘의 구절인 삿 21:25에서 찾아낼 수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에 왕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삿 17-21장에 들어있는 잘못된 권위 구조를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사시대는 힘이 곧 정의라는 시대 곧, 동물적인 사회구조가 정당화되고 있는 시대를 보여줍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사사시대는 힘의 ‘위계질서’는 있어도, ‘사회’라는 조직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겁니다. 상호 이익을 위해서 주고받는 호혜성의 원칙이라는 것이 있어야 사회입니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는 사사시대는 오직 힘이 모든 것을 빼앗는 일방적인 세계였습니다. 힘이 이성적인 판단과 세계적인 윤리를 제압해버렸기 때문에, 사사시대는 잘못된 시스템의 온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은 올바른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는, 나쁜 시스템을 고발하는 겁니다. 나쁜 시스템에 의해서 운영되는 사회일 경우, 어떻게 붕궤하는지를 우리는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삿 17-21장은 나쁜 시스템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이 붕궤되는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줍니다. 저는 이러한 붕궤 현상을 보다 전문적인 용어로 설명하기 원합니다. 그것은 바로 ‘탈개인화’, ‘비인간화/도덕적 해이’, ‘행동하지 않는 악’입니다. 이러한 말은 너무나 생소하게 들립니다. 사실 이런 말들은 사회심리학자들이 사용하는 전문용어입니다. (전문용어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생각을, 마치 자기네들만 아는 것처럼 포장해 놓은 것일 뿐입니다.) 이런 말들을 처음 들어봤을지 모르지만, 그 현상은 이미 우리의 삶에 깊숙이 침투하고 있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사사기를 읽고 연구하면서, 수많은 주석들과 여러 책들을 접했는데, 그 가운데 [루시퍼 이펙트]라는 책에서 오늘 본문이 말하는 사회적 구조적 문제를 발견했고, 그에 대한 또 하나의 접근 방법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스탠포드 대학의 사회심리학 교수인 필립 짐바르도라는 학자가 1971년에 행했던 모의실험의 내용과 분석 결과를 발표한 것입니다.2 이 실험은 모의감옥 실험[SPE: Stanford Prison Experiment]입니다. 사전 조사를 통해 지극히 정상인 대학생/일반인을 모집해서, 임의로 한편은 수감자로 또 다른 한편은 간수로 지정합니다. 여기에 몇 가지 ‘나쁜 시스템의 조건들’을 만듭니다. 수감자의 이름 대신 번호를 부여하고, 간수는 제복에 색안경을 써서 양쪽 편 모두 신분이 철저하게 사라지게 합니다. 그리고 연구자가 가끔씩 간수들에게 압력을 가해 감옥의 질서를 잘 잡아보라고 독려합니다. 그랬더니, 단 5일 만에 모의감옥에 ‘탈개인화’, ‘비인간화/도덕적 해이’, ‘행동하지 않는 악’과 같은 현상이 발생했고, 어떤 사람들은 심한 정신이상까지 보이게 되었습니다. 결국 2주로 계획했던 실험이 5일 만에 중단합니다. 이러한 실험이 대단치 않을지 모르지만, 이 실험은 사회심리학 분야에서는 표준연구서가 되었고, 영화로 두 번이나 제작되었으며, 미국의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필수과정으로 공부하는 내용이 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몇 년 전[2003년] 이라크의 아부그라이브[‘이상한 아버지들의 집’] 교도소에서 일어났던 미군의 이라크인 학대 사건을 조사하는데, 이 실험의 연구가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이 책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첫 번째로, ‘탈개인화’란 말 그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고유한 개인의 가치가 상실되는 것을 말합니다([루시퍼 이펙트], 458-67). 쉽게 말해서, 여러분의 고유한 이름 대신에 번호나 ‘그/그녀’가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행동을 저지르는 개인에게서 고유한 특성이 제거되면, 그 사회가 어떻게 될까요?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개인이 숨겨질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익명성입니다. 극히 단순한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운전을 하면서 교통신호를 위반하는 것입니다. 간단합니다. 수많은 다른 운전자들은 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신호대기가 긴 교차로의 도로에 담배꽁초가 수북하게 쌓이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행위자가 숨겨지기 때문입니다. 나의 이름 대신에, 차번호가 대신하기 때문에, 검게 도색된 차유리 안에 내가 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탈개인화’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름을 부여하셨던 창조의 선한 시스템이 왜곡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은 탈개인화를 효과적으로 보여줍니다. 처음엔 행위자들의 이름들이 소개됩니다: 제사장은 그 이름이 요나단이고, 에브라임 사람으로 미가가 나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말씀을 읽어보면, 이젠 사람들의 신분이 사라집니다. 19장을 보면, “어떤 레위 사람”이 나옵니다. 그의 이름은 끝까지 감추어집니다. 그렇기에 그는 첩을 둘 수 있었고, 심지어 그 첩을 토막낼 수도 있었습니다. 누가 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기브아의 깡패들을 봅시다. 그들 역시 이름이 없습니다(그래서 20:13에 문제가 쉽게 해결될 수 없던 겁니다). 그들은 깊은 밤에 찾아옵니다(19:16, 25). 왜냐하면 서로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상황, 즉 탈개인화된 상황에 범죄는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비인간화/도덕적 해이’란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인간으로 대우해야만 하는 윤리적 원칙/질서를 깨뜨리는 것입니다([루시퍼 이펙트], 467-75). 쉽게 말해서, 사람을 똑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겁니다. 이게 우리의 삶에 얼마나 깊이 들어있는 현상인지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언어에 이러한 비인간화, ‘나는 사람이지만 너희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영어에 ‘검둥이(nigger)’라는 말이 있습니다. 흑인을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 사회적인 범죄자로 낙인을 찍는 경멸적 표현입니다. 우리말에는 특별히 장애를 가진 분들에게 이러한 표현이 많이 들어있습니다(육체나 정신이 건강하다는 것이 잘못된 기준으로 세워진 것이지요). 대표적인 것이 ‘병신(病身)’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말 그대로 ‘몸에 질병이 있다’입니다. 감기에 걸리면, 바로 병신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이 말은 육체적 혹은 정신적으로 장애를 가진 분들을 비하하는 말로 사용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단순한 예이지만, 우리는 나도 모르게 사람을 똑같은 사람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은 ‘비인간화’를 보여주며, 그 결과 벌어지는 ‘도덕적 해이’ 현상을 보여줍니다. 단 지파는 “한가하고 평안한 백성”들을 칼날로 진멸합니다(18:27). 이것은 성서가 말하는 거룩한 전쟁(헤렘)도 아니고(오히려, 하나님의 전쟁에 전적으로 위배됩니다[신 20:10-14]), 전적으로 ‘비인간화’ 곧 단 지파가 사람을 똑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아서, 저지르는 도덕적 해이를 보여주는 겁니다. 나는 사람이지만, 너희는 벌레이다! 19장에 나온 이름 없는 제사장의 비인간화도 그렇습니다. 그는 첩을 잊지 못했습니다. 4개월 후 찾아 나선 것을 보면 압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등한 인간으로 사랑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19장 26절을 보면, 그들의 관계가 이렇게 나옵니다: “여인과 그 주인”입니다. 그렇습니다. 첩은 철저하게 성적 노리개였던 겁니다. 나는 사람이지만 너는 벌레이다. 기브아의 깡패들이 보여주었던, 집단 강간이 바로 비인간화요, 이후에 벌어진 여성 납치 사건 역시 비인간화로 말미암은 도덕성 상실의 예입니다. 여자를 얻기 위해서, 한 마을을 모두 몰살시키는 어처구니없는 행위 말입니다(21:10).
마지막으로 ‘행동하지 않는 악’이란, 말 그대로 방관자를 말합니다([루시퍼 이펙트], 475-82). 어떠한 긴급한 사태가 발생할 때, 목격자가 많을수록 누군가가 개입해서 도움을 주는 가능성은 급격하게 낮아지는 현상입니다. 미국에 한 실험이 있었습니다. 이름하여 ‘선한 사마리아인 실험’입니다. 한 신학교에서 성직자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학생들을 상대로 한 실험으로, 중요한 설교(주제가 선한 사마리아인입니다)를 위해 급한 발걸음을 내딛는 신학생 앞에 긴급한 도움을 요구하는 상황을 제시합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돈을 걸겠습니까? 놀랍게도 90퍼센트의 신학생은 “착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설교를 하러 바삐 가느라,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있는 눈앞에 있는 기회를 그냥 치나쳐 버리고” 말았습니다(479).
역시 오늘의 본문은 이스라엘 사회의 ‘행동하지 않는 악’ 곧 방관자의 모습을 고발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아는 상황에서, 그 뜻을 역행하는 것을 보고도, 용기 있게 정당한 반응을 보이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회의 거대한 힘의 시스템에 압도되기 때문이지요. 바로 17-18장에 나오는 제사장이 그러했습니다. 단 지파가 미가의 집에서 귀한 종교 용품을 훔치자 제사장은 “당신들 뭐하는 짓이요?”라고 묻습니다(18:18). 이웃의 물건을 훔치는 것은 분명히 10계명을 위반하는 일입니다(신 5:21). 그러나 단 지파의 위협에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을 주장하지 못합니다(삿 18:19):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잠잠하라. 네 손을 입에 대라.” 오히려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는 길을 선택합니다. 이러한 방관자의 모습은, 앞서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성서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서 영원한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 19-21장에서도 역시 방관자가 등장합니다. 이는 바로 기브아의 방관자입니다. 이들은 자기들 중에 “비류”, 곧 불량배/깡패/벨리알의 자녀들이 있음을 알고 있으며, 이들이 가끔씩 지나가는 객에게 폭력을 일삼고 심지어 남색까지 강요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침묵함으로 방조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불량배들이 레위인을 요구했을 때, 기브아의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했을까요? 또한 회중의 장로들이 처녀들을 납치해서 필요를 채우라고 명령을 내렸을 때(21:16), 그 주위의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일이라고 왜 막지 못했던 것일까요? 이스라엘의 방관자들 때문입니다.
사사시대는 나쁜 시스템의 상황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사악해져 가는지를 보여줍니다. 계속된 전쟁과 억압, 아무리 평화가 찾아와도 예배로 확장되지 못하므로 늘 피해의식으로 눌린 삶만 살뿐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계속적으로 사사라는 영웅이 등장했지만, 그 내면은 더욱 피폐해질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건강한 삶의 원리가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장소, 하나님의 창조 섭리가 왜곡된 시대였습니다. 개인이 사라지자, 대신 등장한 익명성의 사회로 이스라엘은 범죄가 숨겨지는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힘이 있는 자들은 사람을 벌래 취급하며 비인간화의 행태를 보입니다. 반대로 힘이 없는 자들은 방관자가 되어, 마치 거대한 배가 침몰하고 있음에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죄악을 저지르게 됩니다.
놀랍게도, 예언적 역사가는 이러한 사회를 정확하게 진단합니다. 바로 나쁜 시스템의 문제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이스라엘의 문제는 미가라는 사람이 악인이기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제사장이 불량 제사장이라서가 아니라는 겁니다. 단 지파와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태생적으로 질이 나쁜 부류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사기는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17:6; 18:1; 19:1; 21:25). 이것은 그 때가 나쁜 시스템이 운영되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평가는, 지금까지 일어난 사건이 순전히 개인적으로 일탈된 동기나 가학적인 충동에서 힘없는 여인을 학대하고 성폭행했으며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주장을 잠재워줍니다. 오히려 성서는 새로운 그림을 보여줍니다. 바로 다양한 인간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그림말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악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악한 시스템에 갇힌 순진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악한 사람만을 정죄했던 겁니다. 그러나 예언적 역사가는 시스템을 평가합니다. 그것이 바로 삿 17-21장의 통찰력입니다. 정말 놀랍게도, 수 천 년 전에 기록된 이 말씀의 연구보고가, 지금까지 제가 제시했던 [루시퍼 이펙트]의 결론과 같습니다! 스텐포드 대학의 사회심리학자는 이러한 문제의 원인을, 본질이 나쁜 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조직의 나쁜 시스템에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했기 때문입니다(403, 482-6).
다시 말씀 드립니다. 왜 ‘시스템’을 말씀하는가 하면, 삿 17-21장의 말씀은 ‘어떤 나쁜 한 사람의 사회적 일탈’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언적 역사가는 냉철한 분석가였습니다. 이것은 조직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기 때문이다!” 그 특징으로 ‘탈개인화’, ‘비인간화’, ‘도덕적 해이(모랄 해저드)’, ‘행동하지 않는 악’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명석하게 분석했던 겁니다. (물론 삿 17-21장에 나오는 이 내용은, 마치 신문기사처럼 어제 일어났던 일이 오늘 신문으로 보는 방식으로 기록되지는 않습니다. 사사시대에 발생했던 이 일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기억으로 남았다가, 왕조시대의 ‘신명기적 역사가[예언적 역사가]’가 반성적 차원으로 이스라엘의 과거를 기록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후대의 역사가의 눈에, 사사시대의 이러한 문제의 원인은 간단했습니다. “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시대가 다르니 시대를 이해하는 눈도 달랐던 것인데, 이후의 세대가 과거를 평가했던 중요한 단서로서, ‘왕이 없는 부족/가족적 조직의 위험성’을 강조했던 겁니다.3) 우리는 이후에 사무엘서를 통해서 ‘누가 지도자가 될 것인가?’라는 새로운 신학적 메시지를 듣게 될 것입니다. 아무튼 좋은 시스템에 대한 도전은 현재 우리교회에 실제적인 경고로 들리기 충분합니다. 좋은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다면, 수 없이 많은 성도들이 탈개인화될 것입니다. 이름도 모르고, 그분이 누구인지 도통 모르게 될 것입니다. 당파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만 참 신앙인이고 너희는 거짓 신앙인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다른 차원의 ‘비인간화’가 진행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나는 아무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내 갈길 만 갈거야!’ 라는 방관자들이 생겨날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사사시대의 퇴행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down의 시대를 보여주는 사사기의 말씀을 반면교사로 삼아서, 보다 건강하고 up된 교회가 되기 위해 실제적인 사항들을 준비해야 하겠으며, 이러한 영적인 필요성에 온 성도가 일심해야 하겠습니다.
4. 이 땅에서 우리는 무엇이 될 수 있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사사기 말씀을 오랜 시간 읽고 묵상하며 연구하는 중에 한 그림을 계속 마음에 떠올렸습니다. 그것은 M.C. 에셔(Escher)가 그린 그림입니다(“Circle Limit IV”). 이 그림은 역설을 보여줍니다. 선과 악이 빈틈없이 맞물려 있는 끊임없는 긴장 말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무엇이 될 수 있는가?” 우리는 영웅이 될 수도 있고, 악당도 될 수 있습니다.
저는 말씀을 정리하면서, 이러한 복잡한 우리의 삶을 단순히 ‘육신과 영의 대결’(롬 8:5)로 요약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물론 틀리지 않는 말씀이지만, 무게중심을 사사기에 두려고 합니다.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저는 말씀을 통해서 몇 가지 기도제목을 발견했습니다. 첫째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전혀 새로운 것에 넘어지지 않습니다. 매번 실수하는 것에 넘어집니다. 악순환은 그처럼 익숙한 것이며 또한 그만큼 위협적인 대상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어떠한 악순환의 고리가 있다면, 그것을 끊어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두 번째는 헌신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즐거이 헌신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나약한 자들을 통해서 거룩하고 위대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을 경험하는 전율이 간절히 필요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화의 기도입니다. 내 자신이 얼마나 쉽게 악인이 될 수 있는지를 애통해 하는 겸손의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내면적으로 또한 외면적으로 건강한 조직으로 탄탄해지도록 성숙해지는 과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가 성화되어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끝
- Steve Weitzman, “Reopening the Case of the Suspiciously Suspended Nun in Judges 18:30,” CBQ 61 (1999): 448-60; Josiah Derby, “Who was Jonathan son of Gershom in Judges 18:30?,” JBQ 30, 3 (2002): 191-5. [본문으로]
- 필립 짐바르도, [루시퍼 이펙트], 이충호․임지원 역 (서울: 웅진지식하우스, 2007) [본문으로]
- Gale A. Yee, “Ideological Criticism: Judges 17-21 and the Dismembered Body,” Gale A. Yee ed., Judges and Method: New Approaches in Biblical Studies (2nd ed.,; MN: Fortress Press, 2007), 138-6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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