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aching/[설교: 성서의 메시지]

[07] 여호수아: 승리란 무엇인가?

진실과열정 2010. 9. 28. 13:20

 

- 여호수아 -

승리란 무엇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신 고로

여호수아가 이 모든 왕과 그 땅을 단번에 취하니라.”

(여호수아 10장 42절) 

 

 

1. 여호수아: 위대한 제자(수 11:15; ~같이 ~도, !kew> rv,'a]K;)

 

  1) 여호수아서: 신앙의 역할 모델

 

    여호수아서는 많은 신앙인의 사랑을 받았던 책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정복해가는 역동적인 모습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기도 하고, 우리의 시대를 향해서 거룩한 비전을 세우기도 합니다. 아마 여러 가지 그림이 떠오를 것입니다.

 

    여리고 성이 칼과 창으로 무너지지 않고, 말씀에 순종해서 “크게 소리를 질러 외치니”(6:20) 무너졌다는 장면에서 자신도 모르게 환호성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는 동시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그려보게 될 것입니다. 매일 마다 하루에 한 번씩 침묵으로 여리고 성을 돌고, 일곱째 날에는 일곱 번을 돌고 제사장이 나팔을 불 때 온 백성이 크게 외치라는 명령이 내게 들렸을 때, 과연 나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하고 나의 신앙을 다시 점검해보는 것입니다. 나라면 끝까지 순종했을까? 아니면 단군신화의 호랑이처럼 중도에 포기하고 그만 두었을까? 그러면서 이스라엘의 순종을 다시금 가슴에 새기게 됩니다.

 

    또한 갈렙이란 사람도 떠오르게 됩니다. 갈렙이란 사람이 비록 나이가 85세의 할아버지이지만, 45년 전에 모세가 약속했던 가나안 땅을 끝까지 부여잡고, 결국 가나안의 가장 위험한 지역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말씀을 읽으며(14:12-14), 거룩한 신앙 앞에서 일종의 경외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갈렙이 얻어낸 이곳이 헤브론이란 곳으로, 사실 아브라함이 거주했던 곳이며(창 35:27) 더 나아가 다윗이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곳이기도 했습니다(삼하 5:3). 정말이지 이러한 신앙의 깊은 유산이 있는 곳은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갈렙의 신앙은 참으로 경외감을 갖게 합니다. 이렇게 말씀을 읽으면서, 내가 바로 여호수아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싶다, 갈렙과 같은 신앙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을 먹게 되는 일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사실 여호수아 자체가 우리에게 신앙의 역할 모델로 주어진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찬양했던 것처럼, “여호수아 본받아 앞으로 가세! 우리 거할 처소는 주님 품일세!” 여호수아서는 신앙의 모델로 후대인들에게 주어진 말씀인 것입니다.

 

    저는 여호수아서를 세 번에 걸쳐서, 그 신학적 메시지를 전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여호수아라는 인물을 통해서, 여호수아서가 우리에게 말씀하는 메시지를 들어보겠습니다.

 

  2) 여호수아: “야웨가 구원하신다!”

 

    일단 여호수아라는 이름 자체의 뜻이 중요합니다. 여호수아([;vuäAhy>)란, ‘야웨’라는 신의 이름과 ‘구원하다/자유케하다/도와주다’라는 뜻의 호세아([;veîAh)가 결합된 말입니다. 그래서 ‘야웨가 구원하/자유케하/도와주신다’라는 뜻이 됩니다. 이 이름은 모세가 새롭게 만들어준 이름입니다(민 13:16).

 

    이 이름은 이스라엘에서 보편적인 이름이기도 하였습니다. 야웨라는 신명과 결합되기도 했고, 빠지기도 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선호했던 이름이었습니다. 이렇게 너나 할 것없이, 여호수아라는 이름을 선호하긴 했지만, 그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정말 ‘야웨의 구원을 경험하며 살았는가’는 확정적이지 않습니다. 이름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삶으로 나타났는지의 여부가 더 중요한 것이지요.

 

    우리에게 교훈이 되는 것은, 8세기에 이 이름을 가졌던 두 사람이 있었다는 겁니다.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의 이름이 호세아였습니다(왕하 17:1,6). 자신의 이름이 ‘야웨가 구원한다’였지만, 실상 그는 자신의 시대에 수도인 사마리아가 정복되고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앗수르라는 나라에 끌려가서 노예가 되는 것을 지켜볼 뿐이었습니다.

 

    한편, 같은 시대에 호세아라는 이름의 예언자가 있었습니다(호 1:1). 그는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것을 몸소 실천해 보였던 예언자로 유명합니다. 당시에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면서 영적으로 간음하게 되자, 하나님은 예언자 호세아를 통해서, 지금 이스라엘의 현실을 거울삼아 보여줍니다. 바로 호세아로 하여금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취해서 그 여자를 끝까지 사랑하라는 명령을 주신 겁니다. 호세아는 말씀에 순종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자신의 삶을 통해서 완전히 보여준 것입니다. 호세아인 내가 음란한 아내를 끝까지 사랑했던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비록 영적으로 간음했을지라도 다시 돌아오기만 하면 우리를 받아주시고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이스라엘이 포로 시절을 거치면서 이 이름이 ‘예수아’로 짧아지게 됩니다. 우리가 구주로 믿고 섬기는 그리스도 예수의 히브리식 이름이 바로, 이 ‘예수아([;vuäy>)’입니다(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헬라어: 예수스[VIhsou/j])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그렇습니다. 이 여호수아라는 이름 자체는 참으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살게 될 것인데, 그 시작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여호수아라는 이름이 대표적으로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나안 땅은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정복하는 것입니다.

 

    내가 잘나서 가나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힘이 세고 지혜가 있어서 약속의 땅을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 시간에 보다 더 살펴보겠지만, 여호수아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전쟁’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전쟁이 아닌, 하나님의 전쟁의 결과로,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여호수아서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전쟁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전쟁을 수행했던 여호수아를 발견해야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름대로 ‘하나님이 나의 도움이 되신다’는 말씀을 철석같이 믿고, 실제로 그대로 살았던 신앙인의 모델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여호수아서의 전반부 말씀(1-12장) 중에서 몇 가지를 찾아보면서, 신앙인의 역할모델을 곰곰이 생각해볼 것입니다. 말씀을 찾아보면 볼수록, 아마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자꾸 눈에 그려질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 신앙인의 역할 모델, 역할 모델 하는데, 바로 이런 것이 역할 모델, 다시 말해서 닮아가는 것이구나!’라는 말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3) 여호수아: “모세의 아바타”

 

    첫 번째로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에 정탐을 보냅니다(수 2:1). 이것은 민수기 13장에서 모세가 12명의 정탐꾼을 보낸 것과 같습니다.

 

    두 번째로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넙니다(수 3:16).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넜지요. 출애굽기 14-15장에 나옵니다. 놀라운 점은, 16절에 보면 넘치는 요단 강물이 그치고 “쌓였다(dnE)”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단어는 댐을 이루었다는 말로, 구약에 딱 3번 나오는 매우 희귀한 단어입니다. 출 15:8에 나오고, 시 78:13에 나오는데, 시편은 출애굽의 사건을 다시 회상하는 것이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하면 “쌓였다”라는 말은 여호수아서와 출애굽기에서만 나오는 매우 신중한 단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넌 사건은, 모세가 홍해를 건넌 것에 견주어서 이해하도록 의도된 표현이라는 겁니다(4:23):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 마르게 하사 너희로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로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세 번째로 여호수아는 유월절을 지킵니다(수 5:10-12). 역시 마찬가지로 모세는 출애굽을 하면서 애굽에서 유월절을 처음으로 지키게 됩니다(출 12). 모세의 유월절로 시작했던 이스라엘의 출애굽이, 여호수아의 유월절로 드디어 그 결실을 맺게 되는 겁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여호수아가 유월절을 지키자, 광야 40년 동안 내렸던 만나가 그쳤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로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고, 그 절대적인 겸손의 표현으로 신을 벗습니다(수 5:13-15). 우리는 모세가 출애굽기 3장에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역시 신을 벗는 모습을 기억하게 됩니다(출 3:5). 정말 여호수아는 모세의 삶을 재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호수아 본문을 보면, 여호와의 군대장관은 여호수아에게 다른 말을 하지 않습니다. 만남의 목적이나 더 나아가 가나안 땅 정복에 대한 자세한 계획 같은 것도 듣지 못합니다. 단지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라는 말만 듣습니다. 그 이유는 다시 말하지만 간단합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삶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섯 번째로 여호수아는 전쟁을 승리로 이끕니다. 그런데 그 방식에서 단창, 곧 짧은 칼을 하늘로 높이 들면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수 8:18). 이 장면은 모세가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싸울 때 지팡이를 높이 들어 승리를 얻었던 사건과 비슷합니다(출 17:8-13). 지도자의 손이 높이 들릴 때, 승리를 거둔다는 방식이 모세와 여호수아에게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로 여호수아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합니다. 바로 아모리 사람과의 전쟁에서 태양과 달이 더 이상 운행하지 않고 멈추게 된 것입니다(수 10:12-13). 해가 져서 밤이 되면 적군이 도망치기 때문에, 전쟁을 승리로 장식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게 된 거지요.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 그랬더니 태양과 달이 멈추는 것입니다. 14절에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다(lae(r"f.yIl. ~x'Þl.nI hw"ëhy>)”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히브리어 원어로 같은 표현이 출애굽기에서 나옵니다. 바로 모세가 출애굽을 하자 애굽의 군사들이 철병거를 이끌고 추격을 벌입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모세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그러자 애굽의 군사들에게는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광명이 임합니다(출 14:20). 바로 이 장면에서 여호수아서와 같은 말씀이 등장합니다: “여호와가 그들(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는도다(~h,Þl' ~x'îl.nI hw"ëhy>).” 이러한 표현은 성서에 여기에만 나옵니다. 이제 왜 이러한 특별한 표현을 써가면서, 이 둘을 닮은꼴로 만드는지 느낌이 올 것입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로, 여호수아는 유언을 남깁니다(23-24장). 이것은 바로 모세의 유언과 맥을 같이 합니다(신명기). 신명기 마지막 장인 34장에서 모세가 죽을 때, 그를 표현했던 단 하나의 수식어가 있었는데, 바로 “여호와의 종(hw"±hy>-db,[,( hv,ómo)”이라고 했습니다(5절). 마찬가지로 여호수아가 죽을 때, 그를 표현했던 단 하나의 수식어가 등장하는데, 바로 모세의 수식어, “여호와의 종(hw"+hy> db,[,ä !Wnà-!Bi [;vuîAhy>)”이었습니다(수 24:29).

 

    이렇게 볼 때, 여호수아는 모세의 삶은 완전히 재현하는 삶을 살았음을 새롭게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설교를 시작하면서, 여호수아 자체가 신앙의 역할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고 말씀을 드린바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여호수아 본받아”라고 찬양을 하고, 그 신앙인을 본받기를 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여호수아의 어떤 것을 본받아야 하겠는지를 이 시간 명쾌하게 생각하고자 하는 겁니다. 우리는 여호수아의 무엇을 본받아야 할까요?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여호수아의 삶 자체가 말해줍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제자의 삶을 100% 구현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복사판이었던 겁니다. 제자가 어떠한 것인지를 여호수아가 몸소 보여준 것이지요. 우리는 바로 이러한 여호수아의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철저한 제자의 삶! 스승의 신앙을 자신의 삶에 그대로 구현해내는 삶! 바로 이것이 여호수아가 보여준 신앙의 정신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의 삶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 속에서, 모세의 활동이 겹쳐지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과연 여호수아는 어떠한 사람이기에 이처럼 모세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시종이었습니다. 항상 모세와 함께 있었기에, 그를 보고 배우며 닮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이러한 점을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선언합니다(수 11:15): “여호와께서 그 종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하였고, 여호수아는 그대로 행하여 여호와께서 무릇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하나도 행치 아니한 것이 없었더라.” 모세가 하나님께 100% 순종하며 헌신하는 신앙을 보였습니다. 이것이 여호수아에게 역할모델이 되었던 겁니다. ‘아! 나는 모세에게서 신앙을 배운다! 나는 모세에게서 믿음을 배운다! 위기를 닥칠 때 모세는 기도를 했다. 나도 위기가 닥칠 때 모세처럼 기도를 해야지. 어떠한 명령에도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했다. 나도 하나님이 어떠한 명령을 내리시든지 간에 순종을 해야 겠다.’

 

    그렇습니다! 여호수아의 역할모델로 모세가 있었기에, 여호수아는 참된 신앙의 제자로 후대의 사람들에게 ‘본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칭송받게 되었던 겁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여호수아서를 읽으면서, 후대의 사람들이 여호수아를 본받도록 신앙의 도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역할모델의 신앙을 따라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호수아가 얼마나 모세를 닮고 싶어 했는지, 출애굽기의 한 사건을 보면 여러분이 깜짝 놀라게 됩니다. 출애굽기 33장을 보면, 이스라엘의 진 바깥에 여호와의 회막(성막)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구름 기둥으로 임재하셔서 모세와 대면하면서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모세의 만남을 보고, 그 만남이 끝나면 모세와 백성들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진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출 33:11) 원어를 읽어보면(lh,ao)h' %ATïmi vymiÞy" al{ r[;n:ë !Wn-!Bi [;vuÛAhy>), 여호수아는 성막 안에서 나갈 생각을 통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신도 모세처럼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싶은 거룩한 욕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모세의 100% 제자가 될 것인데, 나도 모세와 같이 하나님을 대면하여 깊은 만남을 가져야 하겠다! 그러므로 청년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회막을 떠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이러한 자세가 제자의 자세 아닙니까? 철저하게 스승의 신앙을 재연하는 삶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인정한 것입니다(민 27: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신에 감동된 자이다.” 할렐루야! 그래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모세에게 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깊은 대화를 나누십니다. 그런데 방식은 다릅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겁니다. ‘여호수아야, 내가 말씀을 네게 주겠다. 그러므로 네 입에서 이 말씀이 떠나지 않게 하렴.’ 그게 바로 나와 대면하여 말씀을 나누는 것이다(수 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와 같이 하나님과 대면하는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자의 자세를 완벽하게 이룬 사람, 그가 바로 여호수아였던 것입니다.

 

  4) 깊은샘수원교회: 제자화에 목숨을 거는 교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누구를 보면서 신앙을 배우고 있습니까? 여호수아에게 모세가 있듯이, 디모데에게 바울이 있듯이, 여러분에게도 신앙의 역할모델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완전한 신앙의 복사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깊은샘수원교회가 목숨을 거는 게 있습니다. 바로 제자화입니다. 완전한 신앙의 복사본을 만들어내는 사역인 것입니다. 먼저 여러분이 완전한 복사본이 되십시오.

 

    저는 설교하는 목사로서 우리 담임목사님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저는 담임목사님께서 매시간 설교를 전하실 때마다 사전에 하나씩 하나씩 꼼꼼하게 타이핑치고 파일로 정리하며, 완벽한 설교문을 작성하시는 모습에 감탄을 마지하지 않습니다. 물론 설교문을 완벽하게 작성해야 좋은 설교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 자체가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설교자로써 정성껏 설교를 준비했다는 자신의 사역에 대한 성실성이 여기에서 보인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저 역시 설교문을 작성하려고 애를 씁니다. 처음엔 너무나 힘들었지만, 매 주일마다 경외감을 가지며 목사님의 모습을 보며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철저하게 그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목사님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이 이러한 신앙의 역할모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교회가 성장하고 발전하게 될 텐데, 여러분이 바로 백부장 천부장 같은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많은 새신자들이 바로 여러분의 신앙을 보면서, ‘아! 내가 이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잘했구나! 내가 0장로님에게 신앙의 열정을 배우고, 내가 0안수집사님에게 섬김의 정신을 배웠어, 내가 0권사님에게 기도의 호흡을 배웠고, 내가 0집사님에게서 예수님의 사랑을 배웠어’ 그렇습니다. 바로 여러분이 신앙이 모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가르쳤던 말씀을 인용하면서 마치겠습니다(딤전 4:12,15):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십시오.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여러분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십시오.”

 

 

2. 새로운 시작(수 21:43-45)

 

  1) 성취의 하나님: 모든 것이 성취되었다(Everything was fulfilled)!

 

    우리는 흔히 어떠한 목적한 바나 바라는 일이 이루어진 것을 두고, ‘소원성취’ 했다고 말합니다. 명절을 보내면서 많은 사람들이 소원성취 하라는 덕담을 주고받게 됩니다. 이스라엘에게도 반드시 이루어야만 하는 소원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소원성취 해야만 하는 절대적인 목적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처음 약속하셨던 것으로, 수 백 년이 지나면서도 잊어버릴 수 없는 이스라엘의 민족적 푯대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땅의 약속’입니다.

 

    우리가 모두 아는 바와 같이,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땅의 약속을 하십니다(1,7절): “...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보여줄) 땅(&'a<)r>a; rv<ïa] #r<a'Þh'-la,)으로 가라 ...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taZO=h; #r<a'äh'-ta, !TEßa, ^ê[]r>z:"l.)...” 원어를 읽어보면, ‘네 자손(씨앗)’이라는 단어가 강조(도치)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이 약속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면 누구라도 ‘자신의 것’으로 삼으면서, 간절하게 바랐던 민족적 숙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민족적 숙원사업이 몇 년 만에 성취된 줄 아십니까? 30년? 50년? 100년? 놀라지 마십시오. 성서에 흩어져 있는 정보들을 조사하면, 아무리 짧게 잡아도 대략 750년(250[창 25:7; 35:28; 47:9; 50:22]+430[출 12:40]+45[수 14:10])이나 됩니다. 넉넉하게 잡으면 거의 1000년 가까이 이릅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주겠다’는 약속이 크게 잡아 1000년 만에 성취되었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말해서, 1000년 동안이나 이스라엘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창 47:9).

 

    이것은 성서를 조금만 깊이 묵상하면 그 놀라움을 주체할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만드실 때, 그 사람은 흙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내용은 창 2:7에 나오는데, 그 표현이 매우 놀랍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십니다(hm'êd"a]h'ä-!mi rp'[' ~d"ªa'h'(-ta, ~yhiøl{a/ hw""hy> rc,yYIw:). 옛말에 사람이 흙에서 나와서 흙으로 돌아간다 하지 않습니까? 간단히 말해서 죽은 사람은 땅에 묻히기 때문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러한 말이 생겨난 겁니다. 그런데 성서는 보다 명쾌하게 가르쳐주고 있지요. 바로 히브리어로 사람이 ‘아담’(~d"ªa')이고 흙이 ‘아다마’(hm'êd"a])입니다. 즉, 흙과 사람이 떨어질 수 없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물론 여기엔 하나님의 영이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어내기는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자신이 밟고 서 있을 수 있는 땅이라는 존재가 생명 그 자체로 인식되었던 것입니다. 반대로 말해서 사람에게 땅이 없으면 그것은 바로 저주였습니다. 그래서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은 단지 ‘실낙원(파라다이스의 상실)’이 아니라, 인간 존재가 의존하는 땅의 상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실례로, 여러분은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라는 구절을 아실 겁니다(신 21:23). 그 이유는 그의 시신이 땅과 구별되어/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땅으로 곧 자신의 출발점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진정한/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땅이라는 것은, 오늘날에도 참으로 애증의 관계이기도 하지만, 그 옛날에도 사람들에게 본질적인 대상이었습니다. 결국, 에덴동산에서부터 땅을 상실한 사람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땅의 약속을 받게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서에서 땅의 회복은 출발점의 회복을 말하며,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회복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000년이 넘게 이 땅의 약속이 한걸음씩 진행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회복의 역사를 읽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소원이 드디어 성취되는 말씀이, 바로 여호수아서입니다. 여호수아서는 토라(오경)에 이어서 새로운 이스라엘의 위대한 시작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그 시작을 선언하면서 중요하게 전달되는 메시지가 바로, ‘땅을 주리라’는 약속의 성취입니다(수 21:4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열조에게 맹세하사 주마하신 온 땅을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다 주셨으므로, 그들이 그것을 얻어 거기 거하였으며(Hb'( Wbv.YEïw: h'Wvßr"YIw:)!” 이어서 45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일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aB'( lKoßh;)!”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비록 약속이 더디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절대로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유대인들이 자신의 히브리어 성서를 영어로 번역한 것[TNK]이 있는데, 거기엔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Everything was fulfilled).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성취되었습니다. 드디어 모든 것이 성취되었다. 생명의 시작인 땅이 회복되었다. 이제 새롭게 하나님의 역사를 시작하자! 바로 이곳에, 앞서 신명기에서 배웠던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자! 지난 시간에 여호수아가 모세 신앙의 복사판이라고 말씀을 드렸던 바와 같이, 이제 가나안에 세워질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는 말씀에 순종함으로 올바르게 세워지는 것임을 여호수아서는 보여주는 겁니다. 이 땅의 새로운 시작은 철저하게 모세의 율법에 순종함으로 세워졌다는 이스라엘 민족의 자의식을 함양시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수아서가 말하는 위대한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때에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 우리의 모든 것을 이루어주십니다.)

 

  2) 승리의 하나님: 모든 대적을 이기셨다!

 

    여호수아서는 승리의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본문 44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사방에 안식을 주었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반대로 말해서 그 전에는 이스라엘의 사방에 대적들로 가득 차 있었음을 뜻합니다. 동서남북 어디를 봐도 우호적인 사람들은 없고, 온통 대적들만 가득했습니다. 여호수아서는 크게 세부분을 나뉘는데, 처음 부분이 1-12장으로 가나안땅의 정복 전쟁을 말합니다. 두 번째인 13-22장은 정복해서 얻은 땅을 제비 뽑아 나누는 내용입니다. 마지막 23-24장은 여호수아의 고별 설교입니다. 이 처음 부분의 제일 마지막 장인 12장은 그동안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승리를 거둔 왕들의 목록을 소개합니다. 12:24를 보면,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물리친 왕이 “도합 삼십 일 왕”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의 경기도와 강원도를 합쳐 놓은 크기 밖에 안 되는 작은 땅 덩어리에 왕이 무려 31명이나 있었다는 겁니다. 완전히 춘추전국시대라고 하겠지요. 사실 이 시대는 역사적으로 매우 혼동의 시기였습니다. 전문적인 용어로 ‘아마르나 시대’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이때의 이집트 제국의 수도가 아마르나였기 때문입니다. 원래 이집트가 세계의 평화를 지켰지만, 이집트의 수도가 아마르나라는 곳에 있었을 때는 그 평화가 사라졌던 것입니다. 호랑이가 죽으면 온갖 들짐승들이 판을 치는 격입니다. 그러니 그 좁은 땅에 31명이나 되는 왕들이 가나안을 온통 혼란스럽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러한 와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 겁니다.

 

    31은 매우 의미심장한 숫자라고 생각합니다. 그 좁은 땅에 31명의 대적들이 가득하듯이, 우리의 일상도 대적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한 달 31일 내내 우리는 이 험한 세상에서 치열한 싸움을 싸우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전쟁터에서 하나님이 승리를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한 번 44절을 보면, 유독 3번이나 반복되는 표현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바로 ‘모든(lK')’이라는 단어입니다(우리말로 ‘사방’이 바로 모든 방면입니다). 여기에서 ‘모든’은 이스라엘의 대적을 뜻합니다. 이스라엘이 만나는 모든 것이 적대적이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승리를 주셨다고 본문은 선언합니다(44b):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모든 대적을 그들의 손에 붙이셨음이라(~d"(y"B. hw"ßhy> !t:ïn" ~h,êybey>aoæ-lK' tae).”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31명의 왕들에게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수아서의 두 번째 메시지입니다. 전쟁을 누가하는가에 대한 신학적 대답인 겁니다. 전쟁은 이스라엘이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자신의 힘으로는 그 어떤 나라도 정복할 수 없었습니다(10:42):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신 고로 여호수아가 이 모든 왕과 그 땅을 단번에 취하니라.” 그렇습니다. 싸움은 하나님의 싸움이었던 것입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7장에 나오는 아이성 전투입니다. 이 아이성은 매우 작은 성이었습니다. 7:3,4에 보면, 정탐꾼이 “그들은 소수니” 우리들 중에 “삼천 명만”으로 족히 정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8:25를 참조하면, 아이 사람 총 인구는 12,000명 정도입니다. 60만의 이스라엘 장정의 눈에 볼 때, 아이성은 말 그대로 ‘아이’와 같았던 겁니다(히브리어로도 아이[y[;ú]라는 말은 ‘폐허’를 뜻합니다). 그런데도 놀랍게, 이스라엘은 대패를 당하고 맙니다. 그 이유는 앞에 있었던 여리고성 전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던 아간이라는 사람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멸하라고 하신 말씀에 불순종했던 아간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하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비록 아이성이 약했지만 이스라엘은 승리하지 못했던 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깨우쳐줍니다(7:11,12): “이스라엘이 범죄하였기 때문에 ... 내가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한 것이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 무엇인가 착각했던 겁니다. 가나안을 정복하는 일은 이스라엘 자신들만의 힘이나 능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인데, 그것을 모르고 단지 자신들의 많은 수를 의존했던 겁니다. 이스라엘은 다시금 깨달아야만 했습니다. 바로 가나안의 처음 전쟁에서 배운 가나안 정복의 대원칙 말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는 승리를 거둔다는 원칙입니다. 가나안에서 대표적인 성이 바로 여리고인데, 그 육중한 성은 이스라엘의 칼과 창으로 무너뜨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여리고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의 결과로 얻은 승리의 상징이었습니다. 일주일동안 길고도 힘든 순종의 길을 걷고 난 후, 제사장의 나팔을 따라 크게 외칠 때 무너졌던 성이 바로 여리고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몸으로 배웠던 승리의 법칙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가나안의 전쟁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믿음과 감사함으로 숟가락을 드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다시 말씀드리지만, 44절 하반절이 가나안 정복에 대한 단 한 줄의 정직한 평가입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모든 대적을 그들의 손에 붙이셨음이라(~d"(y"B. hw"ßhy> !t:ïn" ~h,êybey>aoæ-lK' tae).”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싸우는 매일 매일의 전쟁은 여호와께서 하시는 것임을 신뢰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스라엘이 언제나 경험했던 승리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뒤에는 애굽의 철병거가 위협하는 진퇴양난의 순간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출 14: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두려워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홍해로 나아가는 것이 이스라엘의 전쟁이었던 겁니다. 나머지는 하나님이 다 하십니다. 또한, 18만 5천명의 아시리아 대군이 예루살렘을 몇 겹으로 에워싸고 있을 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왕하 29:34): “내가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두려워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하는 일이 히스기야 왕이 해야 하는 전쟁이었습니다(사 37:4).

 

    그렇습니다. 우리가 싸우는 매일의 전쟁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의 왕이신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여호와께서 모든 것을 평정하시기까지, 우리는 오직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바로 여호수아서가 가르쳐주는 전쟁의 법칙이었던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여호와의 승리를 경험하십시오. 하나님이 승리를 여러분의 손에 넘겨주시는 것을 경험하십시오.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말씀에 순종함으로 담대하게 걸어가십시오. 신뢰하십시오. 죽음도 우리를 막을 수 없습니다.

 

  3) 평화의 하나님: 하나님의 안식을 누려라.

 

    마지막으로 본문에 숨어있지만 매우 중요한 단어인 ‘안식’이라는 것을 짚어봐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씀을 드린 여호수아서의 메시지인 ‘땅의 회복’ 그리고 ‘승리하시는 하나님’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44절 상반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사방에 안식을 주셨다(~h,l' hw"Ühy> xn:Y""w:).”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온 땅에서 평화롭게 살게” 된 겁니다(쉬운성경). 아담이 다시 아다마로 돌아온 것이며, 31명의 왕으로 혼동스러웠던 가나안이 평정된 것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거하게 되면서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바로 가나안 땅을 12지파에 따라 분배함으로써 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여호수아서는 크게 세부분으로 나뉘는데, 그 두 번째 부분(13-22장)이 바로 ‘땅의 분배’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이 안식은 일차적으로는 ‘땅의 회복’이며 이차적으로 ‘사방의 대적들로부터’ 평화이며,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공동체의 완전한 회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엄청난 재산을 12명의 형제들이 유산으로 받는 장면 말입니다. 큰형은 큰형대로 할 말이 많을 것입니다. ‘아우들아! 내가 너희들을 위해서 얼마나 희생했는지, 너희들이 더 잘 알지 않니!’ 동생들 역시 지지 않겠지요. 아마도 재산을 나누는 축복의 장소는 다툼과 분열의 저주받은 곳으로 변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21장!)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안식을 누렸다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우리는 결정적인 한 구절을 찾아서 읽어야 하겠습니다(14:1,2):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땅에서 취한 기업 곧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족장들이 분배한 것이 이 아래와 같으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그들의 기업을 제비 뽑아 (아홉 지파와 반 지파에게) 주었으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의 포인트는 제비뽑기가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가 포인트입니다. 왜냐하면 각 지파가 제비를 뽑지만, 유다 지파 중에 갈렙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땅을 갖기로 했기 때문입니다(14:12). 대원칙은 여호와의 명령입니다. 그리고 소원칙이 제비뽑기입니다.

 

    이 제비뽑기(lr:ÞAgB.)는 성서에 공평과 평화를 유지하는 하나님의 좋은 방법이기도 합니다. 잠 18:18에 “제비뽑는 것은 다툼을 그치게 하여 강한 자 사이에 해결케 하느니라”라는 말씀이 있는 것처럼, 제비뽑기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지파들이 다툼이나 원망이 없게 했던 것입니다(12번째 사도인 맛디아도 이러한 방식으로 뽑혔습니다[행 1:26]). 생각해 보십시오. 강한 자가 좋은 땅을 얻고 약한 자가 나쁜 땅을 얻게 된다면, 이것이 전에 있었던 가나안의 31왕들과 무슨 차이가 있다는 말입니까! 이스라엘 12지파들 중에서도 잘나가는 지파도 있었고 못나가는 지파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공평과 정의라는 하나님의 원칙을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셨던 겁니다.

 

    물론 제비뽑는 것이 모든 것의 해결은 아닙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첫 번째 원칙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먼저라는 거지요. 그래서 잠 16:33에는 또한 이와 같은 말씀이 있는 겁니다: “사람이 제비를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여호수아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유다 지파는 상당히 잘 나갑니다. 물론 이것을 이해하려면 (신명기적 역사라는 것에 대한) 상당한 배경지식이 있어야겠지만, 한 눈에 봐도 유다에게 배당된 영토가 상당히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갈렙이란 사람도 본래 이방인이지만(14:6), 유다 지파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매우 잘나가는 대표적인 사람으로 나오게 됩니다. 이렇게 잘 나가는 유다 지파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제비뽑기의 상황을 만드십니다. 바로 시므온 지파가 제비를 뽑았는데, 그게 유다 지파의 기업 중에서 나왔던 겁니다. 말씀은 이렇게 평가합니다(19:9): “시므온 자손의 이 기업은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 취하였으니, 이는 유다 자손의 분깃이 자기들에게 너무 많으므로 시므온 자손이 자기의 기업을 그들의 기업 중에서 얻음이었더라.” 할렐루야!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오묘한지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나라인 겁니다. 공평과 정의가 활동하는 나라! 하나님의 뜻이니, 제비를 뽑으며 그 결과에 전적으로 순복하는 백성들인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허락하신 ‘안식’의 내용입니다. 하늘 아래 공평과 정의가 아우르는 세계인 것입니다. 놀라운 점은 이 안식, 곧 평화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의 길로 이끈다는 점입니다. 신명기 12장을 보면, 땅을 얻어 안식을 누릴 때에,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곳에서 예배를 드릴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10-11절):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 거하게 될 때, 또는 여호와께서 너희로 너희 사방의 모든 대적을 이기게 하시고 너희에게 안식을 주사 너희로 평안히 거하게 하실 때에,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한 곳을 택하실 그곳으로 나의 명하는 모두 가지고 갈지니...” 이 말씀을 읽어보면, 10절은 오늘의 본문 여호수아서와 그대로 일치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중요한 점은 바로 땅을 얻고, 안식을 누리고 난 후, 이스라엘은 예배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호수아는 자신의 사역을 다 마치고 백성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24:15):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hw")hy>-ta, dboß[]n: ytiêybeW ykiänOa')!” 다른 누가 무엇으로 유혹한다 할지라도, 나만큼은 그리고 나의 가속들만큼은 여호와의 충성스러운 종이 되겠다는 선언을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는 참된 장소가 바로 예배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시대에 성전을 세우게 하지 않습니다. 단지 성막으로 족하였습니다. 아직 하나님의 때가 아니었던 것이지요. 여호수아가 죽고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한 번 진정한 안식이 이스라엘에 다가옵니다. 바로 다윗과 솔로몬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다시 한 번 땅을 회복시키며, 공평과 정의를 이루고 그 결과 하나님이 택하시는 그 곳 예루살렘 성, 곧 시온 성에 하나님의 전을 세우게 됩니다. 신명기 12장의 말씀이 최종적으로 실현되는 것이지요. 땅의 회복과 공평과 정의를 이룩했던 다윗이지만, 그는 평화(샬롬)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의 손에는 항상 피가 묻혀있었기 때문이지요(대상 22:8). 오직 “평강의 사람” 곧 솔로몬이 후계자가 되어 성전을 건축해야 합니다(대상 22:9-10):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저는 평강의 사람이라. 내가 저로 사면 모든 대적에게서 평강하게 하리라.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저의 생전에 평안과 안정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 저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지라.” 마치 모세와 여호수아가 멋진 콤비가 되어 위대한 한 세대를 보여주었던 것처럼, 다윗과 솔로몬 역시 최고의 명콤비가 되어 이스라엘 역사에 전무후무한 세대를 보여주게 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땅에서 공평과 정의를 누리며, 그 속에 주의 전을 세우며 예배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새로운 시작의 청사진이었던 것입니다.

 

 

3. ‘오늘을 위한’ 여호수아서(수 23:8)

 

  1) 성서의 영향력

 

    우리는 성서가 하나님을 계시하는 말씀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지극히 먼 옛날에 활동하셨던 과거의 하나님에 대한 계시가 아니라, 마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이셨던 것처럼, 말씀으로 계시된 하나님 역시 ‘지금 여기에!’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계시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성서가 우리의 세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서를 읽으면서 단지 무엇인가를 새롭게 아는 지식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는 사건이 발생해야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깨달은 말씀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어야 하는 거지요. 마땅한 말입니다. 성서는 인간 세계에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성서의 영향력이라는 것이 그동안 ‘편파적인’ 수단으로 사용되어 오지는 않았는지 묻게 합니다. 쉽게 말해서 ‘아전인수’ 식의 성서해석으로, 우리 편에 유리하게 혹은 시대 상황에 편리하게 ‘써 먹은 것’ 말입니다. 예를 들면, 가톨릭교회는 마 16:17-19에서 나오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해석하면서, 베드로를 초대 교황의 자리에 앉히고 더 나아가 자신들에게 사죄의 권리가 있다고 주장합니다(Marshall D. Johnson, The Evolution of Christianity [New York: Continuum: 2005], 34-75-77). 그래서 개신교가 1500년대에 만들어진 가톨릭의 적자라고 백안시(白眼視) 합니다. 말씀을 조금만 더 읽어봐도, 그리고 그 말씀을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말씀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사회에서 ‘편파성’이란 것은 해결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톨릭만 그럴까요? 불행하게도 기독교 역사도 이러한 ‘아전인수’식 성서 해석에 자유롭지는 못했습니다. 왜 이런 불쾌한 이야기를 드리는가 하면, 바로 여호수아서 말씀이 기독교 역사에서 ‘유리하게 써 먹었던’ 도구였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의 표면적 메시지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자유롭게 된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들을 전멸/몰살하고 그 땅에서 평화를 누리며 대대손손 멋지게 살아간다! 이 얼마나 활기찬 메시지입니까! 1620년 종교의 자유를 찾아 뉴잉글랜드에 상륙한 메이플라워호의 기독교인들이 바로 이러한 생각을 가졌습니다(Alister E. McGrath, Christianity's Dangerous Idea [New York: HarperCollins, 2007], 153). 문제는, 역사란 언제가 그렇듯이,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너무나 간단히 성서가 말하는 가나안 사람들과 동일시되었다는 겁니다(Michael D. Coogan, The Old Testament: A Historical and Literary Introduction to the Hebrew Bibl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6], 206). 순진한 믿음이라고 하기에는 그 파급효과라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90% 이상이 죽음을 당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서가 우리의 역사 속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키스 W. 휘틀럼, [고대 이스라엘의 발명]이란 책을 읽고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영향력에 둔감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우리가 이미 ‘승자의 편’에 서 있다고 여기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승자와 우리가 동일시되면서, 그들의 역사를 우리의 것과 똑같게 만드는 것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떠한 일을 처리해 나갈 때, 편리한 이해관계를 만들어 줍니다. ‘신의 가호’가 있으니,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단 말입니까?

 

    그러나 이것은 여호수아서를 대하는 정직한 방법이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여호수아서는,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약속했으니 어떠한 방법이건 할 것 없이 취하기만 하면 그만이다’는 주장을 옹호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들’과 ‘우리’라는 대결적인 구도 역시 바람직한 그림은 아닙니다. 여호수아서는 신실함의 차원을 묻는 말씀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삶 가운데 얼마나 신실한 분이신가를 말해주며, 역시 우리가 그분 앞에 얼마나 신실해야 할 것인지를 묻는 ‘현재적’인 메시지인 겁니다(24:15).

 

    그렇습니다. 여호수아서는 그들의 메시지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메시지인 겁니다. 유독 ‘오늘까지(hZ<)h; ~AYðh; d[;Þ)’라는 표현이 4장부터 시작해서 16장까지 거의 매장에서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4:9; 5:9; 6:25; 7:26; 8:28; 9:27; 10:27; 13:13; 14:14; 15:63; 16:10). 역사는 과거를 보증으로 현재를 합리화하는 이념적 도구가 아니라, 현재를 혁신해 나가기 위한 과거의 기억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