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무엘서 -
누가 왕이 될 것인가?
다윗이 크게 군급하였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삼하 30:6b)
1. 걸레 신앙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무엘상 16장 7b절)
1) 좋은 신앙을 찾아서
우리 모두는 좋은 신앙을 가지고 싶어 합니다. 기왕 신앙생활을 하는 데, 그럭저럭 하는 것이 아니라, 후회 없는 신앙을 하고 싶은 것이지요. 비록 좋은 신앙을 향한 우리의 노력이 부족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신앙성장에 힘을 쓴다면, 우리는 어제보다 나은 신앙인, 일 년 전 보다 더 좋은 신앙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의 선언으로 말씀을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올 한해 ‘참 좋은 신앙’을 가져봅시다!”
그런데 이 ‘좋다’라는 기준이 사실 애매합니다. 내가 볼 땐, 영 아닌 것 같은데 목사님에게는 좋은 신앙이라고 칭찬을 받습니다. 또 반대로 내가 볼 땐, 참 좋은 신앙인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그 집사 신앙 개떡 같아!”). 그렇습니다. 이 ‘좋다’라는 기준이 애매합니다. 왜냐하면, 기준이 정해져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하면, 사람의 눈과 사람의 감정, 그리고 지성이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시청한 텔레비전 프로에서 ‘고음으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나왔습니다. 일반인 2명이 나와서 상당히 고음으로 노래를 부르더군요. 그 때가 저녁식사 시간이었는데, 식사 중에 저희 아이들이 따라하고 난리가 났습니다. 전문가가 아닌 제가 볼 때도, 상당히 높은 음으로 잘 불렀습니다. 다음으로 게스트에 있던 그리 유명하지 않은 가수도 참여해서 높은 음의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제가 볼 땐, 가수가 아닌 일반인 2명이 훨씬 높은 음으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전문가수인 서수남씨가 최고상을 일반인 2명이 아니라, 가수에게 주었습니다. 그 이유를 들어보니, 이들 두 사람은 단지 가성으로 불렀기 때문에, 자기 목소리가 아닌 부자연스러운 노래가 되고 말았다고 평가했던 겁니다. 자신의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야 되는데, 억지로 고음을 내기 위해 가성을 사용하는 것은 좋지 못한 노래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비전문가가 보면 뭐가 좋은지 모르지만, 전문가가 볼 때, 좋은 것에 대한 기준과 그 답이 나왔던 겁니다.
오늘 저는 사무엘서를 통해서 ‘좋은 신앙’을 발견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기준이 아닌, 말씀이 기준으로 하는 좋은 신앙 말입니다. 사실, 사무엘서에서도 ‘좋음’의 기준이 단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알고 있는 삼상 16:7을 보도록 합시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나바트)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라아)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라아),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라아).”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과 사람, 둘 다 ‘보다’라는 말로 되어 있지만, 히브리어로 된 성서는 우리에게 섬세한 차이점을 보여줍니다. 원래 ‘보다’는 히브리어로 ‘라아’이지만,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라는 표현에서 하나님은 ‘나바트’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이 단어는 ‘무엇인가를 찾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설명하면, 앞 절에서 사무엘은 사울을 대신할 왕을 선택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비교우위점’을 찾으려 했던 겁니다. 즉, 엘리압이 다른 형제들보다 나은 점으로 ‘용모와 신장’을 찾았던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인지 찾지(나바트) 말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왕이 되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이와 같이, 좋은 신앙은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좋은 신앙은 내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평가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피조물로써 하나님 앞에서 평가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피조물 자체를 봅니다. 그 피조물의 중심을 보는 겁니다(삼상 16:7b). 이 구절에서 나온 ‘중심’이란 단어가 히브리어 ‘레브’인데, 그 뜻은 마음이고 심장입니다. 우리의 중심이,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심장이 하나님의 평가 기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내가 뭐가 좋은지를 생각하지 맙시다. 그러한 비교를 통해 신앙의 우위를 얻으려는 생각을 버리십시다.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가 되어서, 나 스스로 좋은 신앙이 됩시다.
2) 좋은 신앙: 걸레 신앙
사무엘서의 전체 주제는 “그럼 누가 왕이 될 것인가?”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좋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에 대한 신학적 대답인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저는 신명기적 역사(예언적 역사)를 말씀 드렸습니다. 신명기의 예언의 말씀이, 여호수아-사사기-사무엘서-열왕기서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러한 틀 안에서, up-down-up-down의 구조로 이어진다고 했습니다. 사무엘서는 up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연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좋은 신앙’이라고 평가하셔서, 이스라엘의 up을 이루시는가를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무엘서가 말하고 있는 ‘좋은 신앙’의 특징을 한 단어로 정리하면, “걸레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말은 듣기에 썩 유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흔히들 생각하는 부정(不淨)함의 대명사로 ‘걸레부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은 ‘걸레 같은’이라는 표현을 써야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신앙은, 걸레 같은 신앙이 아니라, 걸레가 되는 신앙을 말합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주님은 우리를 소금과 빛으로 부르셨지, 소금 같으라고 빛 같으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입니다. 모방이 아닌 본질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믿음의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만 번지르르 흉내 내는 것에서 돌아서서, 경건의 참된 능력이 발휘되는 변화된 신앙의 맛을 경험하도록 합시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걸레신앙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무엘서의 말씀을 찾아 읽으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신 경륜을 배울 것입니다. 바로 걸레 같은 신앙을 가진 인물을 버리시고, 걸레신앙이 있는 자를 쓰십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up으로 역사하심을 보겠습니다.
이 시간에는 사무엘서의 큰 그림을 그려보고자 합니다. 사무엘서는 우리들에게 걸레 같은 신앙인 두 명과, 걸레신앙인 두 명을 보여주면서, 큰 그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 엘리에서 사무엘로
사무엘서가 소개하는 걸레 같은 신앙인은 엘리입니다. 그는 제사장입니다. 이 엘리 제사장은 이스라엘의 실패한 역사를 대표합니다. 히브리어 성서는 실패한 엘리의 신앙과 삶을 보다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은 실패한 제사장 엘리를, 흔히 말하는 차원에서 ‘아! 실패한 사람이었구나! 그런가보구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인 ‘걸레신앙’에 확실하게 불합격되었음을 명확히 말하고 있다는 겁니다.
엘리는 부정하고 부패한 제사장이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제사장은 희생제물을 통해서 백성의 죄를 정결하게 해주는 제사를 인도하는 사람으로,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기에 제사장은 자신의 관심을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쏟아 부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는 하나님의 영광이나 사람들의 죄가 우선이 아니었고, 자신의 배에 온통 관심이었습니다.
사무엘상 2장 13-14절은 당시에 드려졌던 제사의 관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제사를 드리려고 제물을 가져와 삶으면, 제사장의 사환이 세 살 갈고리로 드려진 고기의 어떤 부분을 취하였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말 성서에 “관습”이라고 된 단어는 히브리어로 ‘미쉬파트’라고 하는데, 바로 정의/규칙/권리라는 뜻입니다. 맞습니다. 제사장들은 드려진 고기의 일부를 요구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였습니다(신 18:3). 그러나 15-16절은 그 정의가 무너지고 있음을 고발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정의를 제사장이 “억지로” 바꾸고 있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베하즈카(하자크)’를 쓰는데, 바로 제사장들의 힘으로 관습을 바꾸었다는 말입니다. (13절의 ‘관습[정의]’이 16절에 ‘억지로[무력]’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물론, 이것은 제사장의 사환의 행위이고 엘리의 두 아들을 고발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죄를 엘리에게 돌리고 있습니다(삼상 2:29-30):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카보드)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카보드)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카보드)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황금률을 선언하십니다. 중요한 점이라면, 본문은 히브리어 ‘카보드’라는 단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걸레 같은 신앙을 버리시고 걸레신앙을 사용하신다는 점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걸레 같은 신앙을 버리십니다. 그 과정이 매우 놀랍습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맙니다. 그 전쟁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상징인 법궤를 빼앗기며, 이스라엘의 제사장인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힘을 썼던 불한당들이 힘으로 망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활용하시는 역사의 진리임에 분명합니다. 이후로 패배의 소식과 법궤의 강탈 소식을 들은 엘리 역시 앉던 자리에서 넘어져 목이 꺾여 죽고 맙니다. 설상가상으로 모든 혈연관계가 단절이 되고만 상황에서, 엘리의 며느리가 아들을 출생하여 이름을 부여하는데, 그 이름이 바로 ‘이가봇’입니다: “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기 때문이며.” 여기에서 ‘이가봇’은 히브리어로 ‘이 카보드’입니다. ‘카보드’는 ‘영광’이고, ‘이’는 ‘없다’라는 뜻입니다. 전쟁에 지고 법궤를 빼앗겼기에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말씀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의 생각보다 엄청나며 치밀합니다.
‘카보드’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영광’이고 두 번째는 ‘무겁다/중하다/귀하다’입니다(그래서 삼상 2:29-30에서 ‘중히/존중히’가 히브리어로 ‘카보드’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 것일까요? 엘리는 하나님의 영광(카보드)을 자신의 것을 삼았던 겁니다. 앞선 하나님의 평가에서, 엘리는 무엇을 중히 여기는지, 과연 무엇이 카보드이어야 하는지를 실패했던 겁니다. 더 나아가 엘리 자신이 카보드가 되었던 겁니다. 카보드의 충격은 바로 엘리의 죽음의 순간에 발견됩니다. 삼상 4:18은 엘리가 죽은 이유를 다음과 같다고 말합니다: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 여기에서 “비대한”이 히브리어로 ‘카보드’입니다(무겁다!).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카보드)을 자신의 몸에 가득 채웠던 제사장, 그것이 영광인 줄 알고 살았던 거짓 신앙인, 그런데 실상 바로 그것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비대함’(카보드)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걸레 같은 신앙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지 않고, 나 자신이 영광을 누리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중요하지 않고, 내가 더 중요하게 된 신앙입니다. 내가 높아지는 신앙, 나의 이름이 선전되는 신앙, 나의 경력이 자랑되는 신앙, 나의 섬김이 훈장이 되어버린 신앙입니다. 나의 영혼이 세속적인 ‘카보드’로 무거워지게 될 때(카보드!), 우리는 경고의 사인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카보드’가 내 것 인줄 착각하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걸레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에서 사무엘로 바꾸신 하나님의 역사에서 우리는 정확하게 걸레신앙의 원리를 간파해야 하겠습니다. 사무엘은 걸레신앙이었습니다. 영광(카보드)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하나님께만 돌리도록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되돌아보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무엘서를 통해서 사무엘의 일관된 걸레 신앙 몇 가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로 사무엘은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려고 부단히 애를 쓴 사람이었습니다. 우선 블레셋과의 전쟁을 살펴봅시다. 삼상 7:6을 보면, 사무엘이 “다스린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샤파트’인데, 바로 사사의 활동을 지칭하는 특정 표현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무엘은 사사 시대에 특정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것처럼, 제사장의 차원을 뛰어넘어 민족적 지도자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삼상 7:12에 대승을 거두고, 돌을 취해 세운 후,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짓습니다(‘에벤’은 돌이고, ‘에제르’은 도움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셔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이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이후 사람의 영광이 될 뻔한 시점에서 놀라운 겸손의 자세가 아닐 수 없습니다(극적인 골을 넣고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대승을 거두고 사사의 영광이 아닌, 에벤에셀을 세우는 것이 바로 걸레 신앙인의 실천입니다. 나의 삶에 이뤄지는 승리 후에,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려고 그 방법을 찾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걸레 신앙인입니다.
두 번째로, 사무엘은 자신의 영향력도 억지로(‘힘으로!’) 넓히지 않았습니다. 삼상 7:16-17절을 보면, 사무엘의 활동무대가 나옵니다. 벧엘, 길갈, 미스바, 라마에서 사무엘은 활동하였다고 합니다. 이 지역은 바로 베냐민 지파의 땅입니다. 상당히 좁은 지역이라는 점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역사하는 인정받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앞선 사건에서처럼, 대승을 거두고 그의 영역을 넓힐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전국 순회 간증 집회나 더 나아가 해외 원정 집회까지도 충분히 가능한 수순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자신의 영향력을, 자신 스스로가 충분한 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넓히지 않았습니다. 저는 고고학에 관심이 많아서 자료를 조사해보았는데, 사무엘이 기거했던 라마라는 곳의 고고학 발굴 결과를 연구하고 도전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라마를 발굴했던 연구자들이 한결 같이 말하기를, 별로 건질 것이 없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는 진실로 자신을 위해서 쌓아두지 않았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무엘 그는 철저히 ‘카보드’로부터 멀리했습니다. 영광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역을 그만두는 고별 설교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면서, 영광을 취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삼상 12:3):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언하라 내가 누구의 소를 빼앗았느냐 누구의 나귀를 빼앗았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누구의 손에서 받았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 하니.” 사무엘이 자신 있게 외치는 이 한 단어에 주목해 보십시오: “여호와 앞에서!” 내가 영광을 취하지 않았도다! 당시에 습관(미쉬파트)가 있었음에도, 그것조차 나는 취하지 않았도다! 철저하게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렸도다!
사무엘, 그는 수건이 될 수 있는 자리에서, 수건이 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영광이 자신의 것이 되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를 쓰고 또 쓴 신앙인, 그가 바로 걸레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하나님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취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물질,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행동. 이 모든 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하지 맙시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을 마땅히 하나님께 드립시다. 하나님의 물질을 드립시다. 하나님의 계획을 드리고, 하나님의 행동을 드립시다. 우리에게 사무엘의 신앙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내가 죽고 하나님이 살게 하옵소서!
4) 사울에서 다윗으로
이제 사울과 다윗을 비교해봅시다. 사울이 걸레 같은 신앙입니다. 걸레 같은 신앙은 하나님이 버리십니다. 사울이 버림받은 이유는, 물론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삼상 15:22-3):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그러나 말씀을 더 깊이 읽어보면, 사울이 불순종하게 되었던 근본적인 원인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사울 자신이 걸레였던 것을 잊고, 수건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의 불순종을 지적하기 전인, 삼상 15:17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사무엘이 지적하는 점은, 다름 아니라, 사울이 자신의 ‘작음’을 망각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작음’은 히브리어로 ‘카톤’입니다. 이 단어가 후에 다시 한 번 등장하게 됩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일깨워주고자 했습니다. ‘사울아, 네가 얼마나 작은/미천한/보잘것없는 존재였음을 아느냐?’ 정말 사울은 스스로 자격이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냐민 지파는, 사사기를 통해 아는 바와 같이, 반란군의 후예로 결딴이 난 지파였습니다. 미래가 없고 희망을 상실한 지파였습니다. 그러한 지파의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울을 ‘작았기’ 때문에 쓰셨는데, 사울은 이 ‘작음’을 망각한 겁니다.
사울이 지도자로 부름을 받았던 때는, 아버지의 암나귀들을 찾으려고 방방곡곡을 돌아다닐 때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인의 나귀를 찾는 하찮은 일을 했던 때였고, 천한 종이나 하던 일을 서슴없이 해낼 수 있었던 때였던 겁니다. 왜 그는 이러한 하찮은 일을 했던 것일까요? 그 일이 아버지의 일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왕이 된 이후, 그런 일은 하지 않는 겁니다. 자신이 작은 자가 아니라는 거지요! ‘나는 작지 않다!’ 삼상 15:30에 사울의 외침을 보십시오!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카보드!)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 사울이 ‘카톤’을 잃고 ‘카보드’에 집착하니, 곧 자신의 걸레 됨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에 집착하게되니, 그는 버림을 받았던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다윗을 봅시다. 다윗은 걸레신앙인이었습니다. 다윗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보다 철저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원어성서를 보면 얼마나 하나님께서 치밀하게 다윗을 쓰시는지 확인하게 됩니다.) 저는 이 시간 몇 가지만 대표적으로 보겠습니다.
앞서 우리는 사울이 “작을 때(카톤)” 지도자로 부름을 입었다고 읽었습니다(삼상 15:17). 사무엘서는 이 작은 단어를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바로 다윗을 가리킬 때, 그 단어가 나옵니다(삼상 16:11):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카톤)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말씀은 단순한 ‘막둥이’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다윗이 철저하게 낮은 사람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낮은 이였습니다. 모두가 싫어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을 초청했을 때, 그는 먼 광야에서 아버지의 양을 치는 일, 다시 말해 모두가 싫어하는 일을 했던 겁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서를 보면 걸레 다윗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윗은 높아지는 것에 철저히 경계합니다. 이스라엘의 걸레가 되기로 결심한 겁니다. 가장 좋은 예는, 그가 왕이 되고 여호와의 법궤가 다윗 성에 들어올 때 보였던 행동입니다. 성서는 왕의 체통을 지키지 않고 기뻐 즐거워하며, 철저하게 작은이로 남아 있으려한 다윗을 보여줍니다(삼하 6:13-4).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작았을 때(카톤) 부르신 하나님의 의중을 결코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삼상 6:21-22):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사람들이 나를 낮고 천한 일을 한다고 손짓해도 좋다! 제발 체통 좀 지키라고 하지만, 난 더 낮아질 수 있다! 걸레였던 나를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이시기에, 나는 끝까지 걸레신앙을 지킬 것이다!
5) 걸레 신앙인이 됩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걸레가 됩시다. 사실, 우리의 신앙이 가장 뜨거웠던 때가 바로, 내가 걸레가 되었던 그 때 아니었습니까? 나의 낮아짐으로 성도들이 높아지고, 나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고 주님을 높여 드릴 때, 우리의 신앙이 뜨겁지 않았나요? 걸레는 사실 수건에서 시작합니다. 아마 여러분은 처음에 곱고 귀했던 수건신앙인이었을 겁니다. 그러다가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배우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다름 아니라, 바로 수건인 내가 버려지고 교회를 위해 걸레가 되어야 된다는 것을 깨달았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일 낮은 일을 했습니다. 걸레가 된 겁니다.
걸레는 제일 더러운 일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제일 손이 많이 가고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걸레입니다. 우리교회는 지금 걸레를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쓰실 대는 수건을 쓰지 않습니다. 걸레를 씁니다. 모세가 그랬고, 바울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걸레로 만들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멋지게 닦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교회가 바로 이런 교회가 됩시다: 수건(새신자)이 걸레가 되어, 더럽고 낮은 곳을 감당하는 십자가의 증인으로 거듭나는 교회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걸레가 됩시다. 첫째로, 나를 살찌우기 위한 교회로 인식하지 맙시다. 내가 버려지고, 내가 손해 보는 교회가 됩시다. 예배를 마치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십니까? 나보다 더 먼저 타야할 사람이 있음을 깨닫고 행동으로 보이십시오. 걸레 신앙입니다. 오늘은 식당의 줄이 유난히 길어 보입니까? 나보다 더 먼저 먹여야 할 사람이 업는지 찾으시고 양보하십시오. 걸레 신앙입니다. 문제가 생긴 성도 곁에 아무도 가지 않습니까? 걸레는 물이 엎어지면 주저 없이 내 던지는 존재입니다. 주저 없이 내가 기도로 덮어주고 눈물을 닦아주는 걸레가 되십시오. 둘째로, 내가 작아지는 교회가 됩시다. 재직의 직분을 가지고 있습니까? 예배가 끝나면 부지런히 입구로 나와 줄을 서서, 성도를 안아주고 격려하는 재직이 되십시오. 걸레 신앙입니다. 제일 불편한 주차 자리를 내 것으로 만드십시오. 걸레 신앙입니다. 매 주일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체통도 상관치 않고, 눈물 가득한 얼굴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예배가 이런 것이라는 걸 보여주십시오. 진정한 걸레 신앙입니다.
그렇습니다. 걸레신앙은 내가 죽는 것이고, 주님이 사는 것입니다. 내가 없어지고 주님만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신앙은 예수님이 최종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빌립보서는 신약의 걸레신앙을 대표합니다(빌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을 따르는 여러분, 우리 모두 걸레가 됩시다. 걸레신앙을 회복합시다. 그럴 때, 이스라엘이 사무엘과 다윗을 통해 up이 된 것처럼, 우리교회 역시 여러분의 걸레신앙을 통해서 up의 역사를 만들어갈 것입니다.
2. 걸레 다윗(삼상 16:18)
“소년 중 한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을 본즉
수금을 탈 줄 알고 용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이다’ 하더라.”
(사무엘상 16장 18절)
1) 이름 없는 한 사람의 추천: 하나님의 추천
사무엘서는 사무엘상 31장과 사무엘하 24장 총합해서 55장이나 되는 상당히 긴 말씀입니다. 어떠한 숲에 우람한 나무가 55그루가 있다고 할 때, 한 그루 한 그루를 살펴보는 것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큰일임에 분명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책임지고 연구하여 가르치는 목회자의 도움이 참으로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저는 이 시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어렵지 않으며, 우리가 꼭 짚어가야 할 부분들을 언급하면서, 사무엘서라는 숲을 보여드리기 원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무엘서의 큰 그림을 통해, 걸레신앙이라는 신적 메시지를 다시금 선포하기 원합니다.
이 큰 그림은 사실 너무나 간단한 제목으로 정리됩니다: “누가 왕이 될 것인가?” 앞선 사사기서의 핵심 메시지인, “왕이 없으면, 이 땅에서 우리는 깡패가 된다.”라는 제목에 대한 대답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누가 왕이 될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사무엘서는 신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누가 과연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서 왕이 될 것인가? 그래서 이스라엘을 up으로 이끌어 갈 것인가?”에 대한 답을 주는 말씀입니다. 과연 누가 왕이 될까요?
우리는 지난 시간을 통해서 자기의 배를 채웠던(카보드[영광]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던) 엘리를 죽이시고, 반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렸던 사무엘을 부르신 하나님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또한 낮은 자리에서 섬김의 참된 가치를 깨닫지 못한 사울을 폐위시키고, 끝까지 걸레로 낮은 자리를 섬긴 다윗을 세우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면서 ‘걸레같은 신앙’이 아닌 ‘걸레신앙’이 사무엘서가 말씀하고 있는 좋은 신앙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다시금 가슴에, 우리의 중심에 그 사실을 새겨넣도록 합시다: “내 영혼아 걸레신앙이 되자! 내 중심아 걸레 신앙이 되자!”
이제 우리는 걸레 신앙의 대표자인 다윗을 보다 집중적으로 알아보려고 합니다. 다윗은 성서에 등장하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참으로 탁월한 신앙인임에 분명합니다. 단적으로 다윗이 등장하는 말씀의 분량만 계산 해봐도 구약의 모세와 신약의 예수님에 버금가는 상당한 분량이 다윗을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단적인 예가 사무엘하 22장에 나오는 다윗의 고백이 시편 18에 그대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신앙을 공부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과제가 될 것입니다. 또한 동시에 이러한 다윗의 걸레 신앙을 배워서 나의 신앙생활에 모델로 삼는다면, 참으로 복된 신앙이 될 것임에 믿어 의심치 않게 됩니다.
이 시간 저는 독특한 방법을 통해 다윗의 걸레 신앙을 말씀 드릴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읽은 본문을 사무엘서 전체로 확대시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은, 이름 없는 한 사람이 다윗을 추천한 내용의 근거를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구절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수많은 주석들과 연구논문들을 찾아봐도 역시 별다른 언급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성서를 꼼꼼히 읽으며 기도하고 가슴에 말씀을 받으니, 하나님께서 지혜와 영감을 주셨습니다. 바로 오늘의 이 말씀, 다시 말해서 이름 없는 한 사람의 고백을 통해서 소개된 다윗이라는 사람의 신앙이, 바로 걸레신앙이며, 그러한 다윗의 걸레신앙이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볼까요? “소년 중 한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을 본즉 수금을 탈 줄 알고 용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이다 하더라.” 이 내용은 다윗이 바로 앞 단락인 11절에 ‘막내(카톤!)’로 소개되어 기름부음을 받은 이후, 세상에 최초로 발을 내딛는 순간을 말해줍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는 것처럼, 하나님이 부리신 악령으로 번뇌케 된 사울 왕이 음악치료를 받으려고 사람을 찾는 중에, 사울의 부하 중 한 사람이 다윗을 소개한 겁니다. 그런데 말씀을 조금만 깊이 보면, 16절에, 신하들이 사울에게 “수금을 잘 타는 사람을 구하면” 나을 것이라고 일러주고, 그래서 17절에, 사울은 “수금을 잘 타는 사람을 데려오라” 했습니다. 포인트는 지속적으로 ‘수금을 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름 없는 한 부하가, 18절에서처럼, “내가 수금을 탈 줄 아는 사람을 안다”고만 했으면 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을 세상에 소개하면서, 이 이름 없는 사람을 통해서, 단지 음악적 기술만 있는 사람으로 나타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서 등장하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18절은 이름 없는 한 사람의 단순한 추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딱 들어맞는 다윗의 신앙을 보여주며, 그 신앙이 바로 걸레신앙임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말씀의 세계로 들어가도록 합시다.)
2) 다윗에 대한 평가 - 4가지
하나님은 다윗의 신앙을 4가지로 정리하십니다: “용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 어떻습니까? 여기에서 다윗의 신앙을 발견할 수 있나요? 사실 어렵습니다. 그냥 단순한 사람 소개정도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말 성서를 읽으면 너무나 쉽게 지나가버리고, 또한 그 의미도 대수롭지 않게 보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구절의 번역은 그래서 실망스럽습니다. 영어 성서의 번역만 봐도 원어에 충실하게 나타내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무엘서 전체에서 소개하고 있는 다윗의 신앙이 바로 이 한 구절에서 농축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대하면서 하나씩 살펴봅시다.
① 용기: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자신에 대한 존귀한 자아정체성
첫 번째는 “용기”입니다. 개역 성서는 “호기”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lyIx;ø rAB'gI(깁보르 하일)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존귀한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우리가 단지 전쟁터에서 찾아볼 수 있는 차원의 용맹함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그 사람의 본질을 말하는 겁니다. 좋은 예가 룻기에 나오는 보아스입니다. 이 보아스를 소개할 때, 바로 “유력한 자” 곧 ‘깁보르 하일’이라고 말합니다(룻 2:1). 이방인 여자 룻이 보기에, 보아스는 존귀한 사람이었지요.
그렇다면, 다윗이 존귀한 사람이라는 뜻은 뭘까요? 그것은 바로 다윗이 비록 막내이기는 했지만, 그래서 고대사회에서 막내는 기업을 이을 수 없고 아무런 혜택도 받을 수 없는 말 그대로 천한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다윗 자신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스스로에게 존귀한 자아정체성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나는 비록 막내지만, 나는 비록 걸레지만, 그래서 낮고 천한 일을 하지만, 그렇다고 나 자신의 본성이, 곧 하나님께서 나 자신을 천하게 만드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나를 ‘깁보르 하일’ 다시 말해 존귀한 자로 만드셨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을 거울로 자신을 판단하면, 상위 3% 이하의 사람들은 좌절하고 맙니다. “나는 낮고 천한 존재인가봐, 내가 뭐하러 세상에 태어났는가!” 그래서 세상의 97%는 상위 3% 앞에서 두려워하며 세상의 법칙에 굴복하고 맙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울로 자신을 봅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귀하게 만들어진 피조물임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가졌던 신앙의 비결입니다. 우리 한 번 따라해봅시다: “나는 하나님이 만드신 존귀한 자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존귀한 자라는 건강한 자기정체성’이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온 군대가 골리앗 앞에서 두려워 떨 때, 다시 말해 상위 3%의 사람 앞에서 굴복하고 있을 때, 다윗은 분연히 일어났던 겁니다. 그리고 다윗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삼상 17:26, 36): “골리앗?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일 뿐이다! 나? 나는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의 군인이다!”
‘깁보르 하일’ 하나님 안에서 스스로를 존귀케 여기는 신앙이 걸레신앙의 출발점입니다. 그렇습니다. 걸레는 더러운 일을 하지만, 스스로를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걸레는 더러운 일을 하지만, 스스로는 존귀케 여겨야 하는 겁니다. 이러한 믿음은 우리의 상황을 전혀 다르게 바라보게 돕습니다. 나의 환경이 어렵고 비참하다고 나라는 존재가 낮고 천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걸레신앙인은, 어떠한 환경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나의 환경이라고 한다면, 그 자체를 존귀하게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그러했습니다. 다윗의 환경이 어떠했냐면, 다윗은 이스라엘의 돌밭위에서 양을 쳤습니다. 그가 만졌던 것은 날카로운 칼도 아니요 단단한 방패도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손에 익숙한 나무 지팡이와 물매가 전부였습니다. 놀랍게도 상위 3% 골리앗과 대결하기 위해 무기를 준비하는 광경에서, 다윗은 철저하게 자신의 환경에서 선택합니다(삼상 17:40). 우리말에서는 눈치 챌 수 없지만, 히브리어 원어는 치밀하게 ‘그의’라는 접미어를 “손(Ady"B.)”과 “막대기(Alq.m;)” 그리고 “돌을 고르는 것(Al-rx;b.YIw:)”에 붙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존귀하기 때문에, 비록 자신의 일이 천하다 할지라도, 자신의 환경 역시 존귀하게 여겼던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그동안 너무 세상을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하셨습니까? “이 나이에 나는 뭐했나?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사나?” 물론 필요한 고민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 하나님을 기준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존귀한 자’로써의 자아정체성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할렐루야! 오늘 이 밤에 그리스도의 보혈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는 것을 경험하십시오. 오늘 이 밤에 ‘깁보르 하일(존귀한 자)’이라는 건강한 자아정체성을 회복하십시오!
② 무용: 보석함이 아닌 먼지 속에서 섬기게 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라!
두 번째는 “무용”입니다. 개역 성서도 역시 “무용”이라고 했는데, 춤을 잘 추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hm'²x'l.mi vyaió(이쉬 밀하마)라고 하는데, 그 뜻은 ‘전쟁의 사람’입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훈련 받은 용사’로 오해하게 되는데(사실 많은 주석서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사무엘서를 계속 읽어보면 모순이 됩니다. 왜냐하면 골리앗을 죽이겠다고 일어난 다윗에게 사울 왕은, 삼상 17:33에서, “너는 못해, 너는 소년이고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이쉬 밀하마!)야”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하지만 사실, 삼상 16:18에 나온 이 ‘이쉬 밀하마’라는 단어가, 바로 골리앗을 똑같이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의 뜻은 사무엘서 전체를 비추어 볼 때, 비로소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이 용사라는 말은, 더 정확히 말해 다윗은 ‘전쟁을 통해서, 자신이 감당해야만 되는 일을 이루었고, 결국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웠다’라는 뜻입니다. 보다 설명이 필요하겠습니다.
다윗은 ‘존귀한 자’였습니다. 그렇다고 다윗이 ‘나는 존귀한 자야! 그래서 험하고 궂은일은 이제 하지 않을거야!’라고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보석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보석함 속에서 고이 보관되기를 거부하고, 이 시대에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서 자신이 감당해야할 삶의 자리를 헤치고 걸어갔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걸레는 보석함에 있지 않습니다. 걸레는 먼지 속에서 자신의 사역을 깨닫습니다. 온갖 궂은일들 속에서 걸레는 진정한 걸레로서의 자신의 부르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아마도 여러분들은 다윗의 고난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사울 왕이 나라대 나라의 전쟁에서나 필요한 군사력을 이끌고 단 한 사람 다윗을 찾아내려고 했던 그 일들을 아마 아실 겁니다. 저는 걸레신앙을 초점으로 이 사건을 보니, 명쾌하게 답이 나왔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다윗을 일찍부터 왕으로 삼으려고 기름을 부으셨건만,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생고생을 하게 하신 것일까? 그렇습니다. 다윗을 걸레로 만드시려고, 다윗을 보석함이 아닌 먼지투성이의 자리에 내놓으신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여러분 가운데 ‘아! 이런 환경에서는 도저히 더 이상 스스로 존귀하다고 생각할 수 없다!’고 말하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가슴에 새기십시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람을 쓰실 때, 절대 보석함에 있는 수건을 쓰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철저하게 걸레로 만들어서, 하나님의 손 안에 맞게 만드시며, 그래서 철저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깨닫게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을 낙담시키는 환경이 닥친다면, 오히려 감사하십시오! ‘오! 하나님 드디어 나를 쓰시고자, 나를 걸레로 만드시는군요!’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성서를 꼼꼼히 읽으면서 다윗의 변화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역시 히브리어 성서에서만 발견되는 것인데, 그것이 뭐냐면, 처음에 다윗은 자신의 어려운 환경을 부정하고 그 해결책으로 사람의 도움을 찾곤 했었습니다. 그러한 어려운 환경이 바로 삼상 19장부터 시작합니다. 아내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도망가고, 제사장에게 얻은 음식으로 배를 채웁니다. 이방인 앞에서 침을 흘려 미친 척하면서 목숨을 부지하고, 절친 요나단의 도움으로 고되고 험한 도망자의 생활을 가까스로 견뎌냅니다. 이렇게 어려운 환경을 부정하고 사람의 도움을 찾던 다윗이, 그 환경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고, 결국 환경을 부정하지 않으며 사람을 해결책으로 신뢰하지도 않는 참된 신앙인으로 거듭나게 되었던 겁니다.
그 장면이 바로 삼상 30장에 나옵니다(6절):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사실 이 말씀은 엄청난 신앙의 도약을 보여주는 놀라운 구절입니다. 히브리어로 사무엘서를 죽 읽고 연구해가면서, 제가 딱 한 군데 별 다섯 개를 쳤던 부분이 있는데 바로 이 구절입니다. “다윗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사실 몇 주 전에 담임목사님께서 이 본문을 주제로 설교를 하신 적이 있었는데, 저는 그때 머리가 곤두서는 놀라운 감동을 느낀바 있습니다.)
이 구절이 왜 대단한가 하면,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다윗은 험한 환경 속에서 불평과 하소연, 또한 사람을 피난처로 삼는 신앙을 보였습니다. 마땅히 모든 사라들이 보이는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런데 이제 삼상의 마지막에 와서, 드디어 다윗은 “스스로” 환경을 이겨내는 법을 배웠던 것입니다. 이 구절을 히브리어로 직역하면, “다윗이 그의 하나님 야훼 안에서, 스스로 힘을 내었다(qZEåx;t.YIw:)”입니다(영어 번역인 NRSV은 이렇습니다; But David strengthened himself in the LORD his God). ‘이젠 불평이나 하소연하지 않겠어, 이젠 사람을 나의 도움으로 삼지도 않겠어! 내가 하나님 안에 있으니,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믿고 힘을 내리라!’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너무나 어려운 환경 때문에, 신앙생활 자체도 후회스럽고,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무거움에 짓눌려서,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도움을 삼고자 하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겨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이러한 환경으로 내보내신 것은 우리를 벌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를 진정한 걸레로 만드셔서,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법을 깨닫게 하시며, 결국 하나님의 일에 온전히 쓰임을 받게 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도 결국 이겨낸 다윗처럼 승리하실 것입니다. 여러분도 다윗처럼, “크게 어려울 때에,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믿음을 가지고,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힘을 얻어 용기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보석함이 아닌 먼지 속에서 섬기게 하신 하나님을 신뢰하여, 내 안의 믿음이 다시 불일 듯 살아나는 이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③ 구변: 섬김의 말로 상대방을 높여라.
세 번째는 “구변”입니다. 개역 성서도 역시 “구변”이라고 했는데, 쉽게 생각하면 ‘말발이 좋다’라고 여길 것입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rb"ßD" !Abïn>(네본 다바르)라고 하는데, 그 뜻은 “통찰력 있게 말을 한다”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다윗이 똑똑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상의 것을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걸레신앙을 가진 사람의 생각과 그 말이 어떠한지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저는 히브리어로 성서를 읽으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말이 다른 사람들의 것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대화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었는데, 바로 섬김의 말입니다. 섬김의 말, 걸레신앙의 특징이지요.
다윗의 섬김의 말은 삼상 20장에 나오는 다윗과 요나단의 대화에서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아쉽게도 우리말성서는 찾아내기가 쉽지 않지만, 히브리어를 보면 다윗의 섬김의 대화를 확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섬김의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반복해서 말하는 겁니다. 같은 단어를 한 번 더 말해주는 겁니다. (잔소리는 아닙니다!) 예를 들면, 3절에 “밝히 알고([d;y" [;doy")”는 본래 ‘야다’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옵니다. 5절에 “모시고 앉아(bveae-bvoy")”는 역시 ‘앉다’가 두 번 나온 겁니다. 6절에 “자세히 묻다(ynIdeq.p.yI dqoP')”는 ‘묻다’가 두 번, “허락하라 간청하다(la;v.nI laov.nI)”는 ‘간구하다’가 두 번입니다. 7절에 “노하면(hr,x/y< hrox')”은 ‘화를 내다’가 두 번입니다. 놀랍게도 요나단은 그냥 필요한 동사 하나만 쓰지만, 다윗은 하나면 될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하면서 대화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섬김의 언어의 단적인 예입니다. 상대방을 높이기 위해서 내가 더 낮아지는 언어를 쓰는 태도이지요. 말이 짧은 사람치고 겸손한 사람 찾아보기 힘이 듭니다. 우리 한글이야말로 높임말일수록 점점 길어지지 않습니까? “밥 먹어! 식사하세요. 진지 잡수세요.”
어떻게 보면, 다윗은 통상적인 문법대로 살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만 하면 이해하는 말을 굳이 두 번이나 쓰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걸레신앙인이기 때문입니다.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는 섬김의 언어가 바로 이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같은 사람들이라면, “여러분 예배합시다”라고 말하겠지만, 다윗은 “여러분 예배를 드립시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배라는 말 자체에 드림이 들어있기 때문에 예배하다가 문법적으로 맞지만, 걸레신앙인 다윗은 하나님을 높이기 때문에 두 번이나 반복해서 ‘예배를 드린다’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지요. 아시는 것처럼, 야고보서 3장을 보면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하였고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6,8절). 그렇습니다. 말 잘하는 것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더욱 우리는 다윗의 걸레신앙을 나의 모델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섬김의 말로 나보다 남을 더 좋게 말하는 입술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 중심의 말이 아니라 상대방 중심의 말을 하게 될 때, 우리의 입술이 바로 다윗의 ‘네본 다바르’ 곧 “통찰력 있는 입술”이 될 것입니다.
놀랍게도 신앙인의 언어는 좋은 영향력을 끼칩니다. 앞서 다윗의 노래인 삼하 22장의 고백이, 시편 18편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윗의 섬김의 언어가 사람들이게 좋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입니다. 좋게 기억되는 말! 도저히 잊어버릴 수 없는 나의 마음을 벅차게 만드는 섬김의 말! 그렇습니다. 좋은 언어는 기억되고 남겨집니다. 사람들의 생각에 좋은 영향력을 끼치며, 더 나아가 사람들이 행동하게끔 만듭니다. 선한 말의 힘이 여기에 있는 겁니다. 이제부터 우리 깊은샘수원교회가 섬김의 언어 운동을 벌입시다. 서로 높여주는 섬김의 언어를 통해서 도전과 기쁨이 넘쳐나는 교회가 되도록 합시다!
④ 준수한 자: 걸레신앙은 걸레신앙인을 만든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준수한 자”입니다. 개역 성서도 역시 “준수한 자”라고 했고, 쉬운성경을 보면 재밌게도 “잘 생겼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다윗이 꽃미남이라는 것이 아닙니다(물론 삼상 16:12를 보면 맞는 말이지만). 단지 앞선 내용처럼 다윗의 외적인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ra;To+ vyaiä(이쉬 토아르)라고 하는데, 그 뜻은 “모양을 갖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사람들이 사실 잘 생겼던 것 같습니다. 만국공통이지요. 그런데 저는 말씀을 연구하면서, 다윗을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백마 탄 왕자님으로 소개하기 위한 내용이 아니라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단순한 다윗의 외모를 말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사사시대 동안 무너졌던 이스라엘을 일으키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Up시키기 위해서, 걸레신앙인 다윗을 선택하시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다윗 ‘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다윗과 같은 “걸레신앙의 모양을 갖춘 사람”을 찾고 계신다는 점을 깨닫게 된 겁니다.
사실 잘 생겼다는 말은 삼상 16:12이 맞는 표현입니다(보기에 좋다: yairo+ bAjå). 오늘 본문에서 다윗과 관련하여 가장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이 말은, 다름 아니라, 그러한 걸레신앙의 모양을 갖춘 또 한 사람을 준비시키기 위함입니다. 그 사람은 바로 다윗의 아내가 될 아비가일입니다.
아비가일은 본래 나발의 아내입니다. 이 나발은 양이 삼천에, 염소가 칠천인 어마어마한 갑부였습니다(삼상 25:2). 그러므로 나발이 얼마나 거만하고 교만했었는지를 쉽게 예상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나발이 부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윗의 부하들이 틈틈이 나발의 재산을 지켜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7절). 그래서 다윗은 나발에게 도움을 구할 자격이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이 나발이 다윗을 모욕하고 비난을 하는 겁니다(10절: “주인[사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다윗이 참지 못하고 칼을 들고 나발을 멸하러 가는 길에,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아주 지혜롭게 행동합니다. 음식을 준비하고 다윗을 만나 땅에 엎드려 절하고 용서를 빕니다(18,23절). 결국 다윗은 칼을 거두지요. 후에 나발이 이 소식을 듣고 놀라 자빠져 죽어버리고, 다윗은 아비가일을 아내로 거두게 됩니다.
매우 단순한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엔 걸레신앙과 관련해서 마지막으로 너무나 중요한 진리가 숨어있습니다. 사무엘상하 전체를 통틀어서, 다윗을 소개할 때 나왔던 ‘이쉬 토아르’라는 표현이 바로 아비가일에게 나왔던 겁니다(삼상 25:3; “용모가 아름답다”). 하나님은 걸레신앙의 모양을 갖춘 다윗의 짝을 준비해 놓으셨던 겁니다!
저는 히브리어를 읽으면서 3절에서 깜짝 놀랐고, 계속 읽어가면서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앞서 다윗의 겸손의 언어 습관, 즉 반복해서 말을 하는 걸레신앙인의 언어습관이 아비가일에게 똑같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25장 28절에 “세우시리니(hf,[]y:-hfo[')”는 ‘세우다’가 두 번 나옵니다(그래서 앞에 “반드시”라고 번역한 겁니다). 계속해서 “싸움을 싸우심이요(~x'l.nI tAmx]l.mi)”가 나옵니다. 29절에,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rArc.Bi hr'Wrc.)”입니다. 아비가일! 걸레신앙인 맞습니다(25:41): “아비가일이 일어나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이르되, 내 주의 여종은 내 주의 전령들의 발 씻길 종이니이다 하고”
사랑하는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저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렇다! 하나님이 다윗 한 사람만을 걸레신앙인으로 등장시키기 않으셨고, 또 다른 걸레신앙인을 만나게 하셨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렇습니다. 걸레신앙은 전파되어야 합니다. 다윗이 걸레신앙인이니, 다윗의 사람들이 걸레신앙인이 되는 겁니다. 아비가일을 보십시오. 또한 다윗의 부하들을 보십시오. 다윗의 용사들은 주인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가며 철저하게 섬겼던 진정한 걸레신앙인들이었습니다. 다윗이 걸레신앙인이었기에, 그가 만나는 사람이 걸레신앙인이 된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 이렇게 소원합시다: “하나님, 내가 걸레신앙인이 되게 도와주소서! 하나님, 내가 걸레신앙의 전파자가 되게 도와주소서!”
3) 다윗: 걸레신앙인
이제 말씀을 정리합시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Up을 이룩한 전무후무한 신앙의 영웅입니다. 분명히 우리가 본받고 기도해야할 신앙의 모델입니다. 그런데 그 모델이라는 것이, 바로 걸레신앙인이라는 점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자신에 대한 존귀한 자아정체성을 확인하십시오(용기). 보석함이 아닌 먼지 속에서 섬기게 하신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무용). 섬김의 언어로 상대방을 높이십시오(구변). 그리고 걸레신앙인으로서 새로운 걸레신앙인을 만드십시오(준수한 자).
사랑하는 여러분, 걸레신앙인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물론 다윗도 넘어진 적도 있었습니다. 교만하고 악한 마음을 들을 때도 있었습니다. 엘리와 사울이 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셔서 도우셨고, 결국 귀한 걸레신앙을 지켜냈습니다. 여러분도 걸레신앙을 끝까지 지켜나가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심을 믿고 나아가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에게서 바로 이런 걸레신앙이 보이지 않았습니까? 제자들을 위해서 손수 발걸레를 들고 먼지나는 발가락 사이를 정성껏 닦으셨던 예수님이 바로 걸레신앙의 완성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또한 다윗을 신앙의 모델로 여기는 우리들은 이제 새롭게 결단해야 되겠습니다.
내 마음에 주를 향한 사랑이
나의 말엔 주가 주신 진리로
나의 눈에 주의 눈물 채워주소서
내 입술에 찬양의 향기가
두 손에는 주를 닮은 섬김이
나의 삶에 주의 흔적 남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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