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메시지” ------ (4)
- 레위기 -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나?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레위기 20장 26절)
1. 말씀 앞에서: 오해
마가복음 12장 18-27절에서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특별한 가족법인 ‘고엘’제도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골탕 먹일 작정이었습니다. 즉 신명기 25장 5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아들을 낳지 못하고 남편이 죽을 경우에 그 아내는 남편의 형제에게서 자손을 얻게 되어서, 자손이 끊어지지 않도록 만들어준 법이었습니다. 이를 “형제된 의무” 혹은 ‘고엘제도’라고 하는데, 사두개인들은 이 법을 볼 때, 만약 부활하게 된다면 이 여자는 누구의 남편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한 것이지요.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부활하게 되면, “하늘에 있는 천사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25절).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예수님을 얕보려는 의도나 순수한 호기심 자체를 문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문제의 본질을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27절). 왜냐하면 그들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24절).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당시에는 종교적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내세운 것도 분명히 신명기의 말씀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두개인들에게 예수님은 대꾸할 가치조차 없는 자세로, “너희가 진짜 성경을 알지 못하고 있구나!”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성경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그 시작에서부터 이미 대답하고 있던 것입니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18절에서부터 이미 그들은 성경도 하나님도 몰랐던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보기도 전에 이미 “부활이 없다”고 마음에 정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해는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오해는 나의 이해력이 딸려서 생겨난 것도 아닙니다. 오해는 이미 마음속에서부터 뿌리내려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미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로 결정했다’라는 자세가 오해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성서를 연구하면서, 많은 분들이 레위기의 말씀에서 이와 같은 오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즉 레위기가 가장 어려운 말씀이어서, 연초에 새로운 결심으로 성서를 읽다가도 레위기 말씀에서 그만 중도하차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레위기가 제일 어렵다’는 것이지요. 저는 이것이 오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레위기는 어려운 말씀이다’라고 이미 마음에 정해놓았기 때문에, 성서에 대한 오해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사실 레위기만큼 집중이 쉬운 말씀도 없습니다. 레위기의 공간은 다른 말씀들에 비해서 가장 좁습니다. 창세기의 배경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이집트까지이고, 출애굽기의 배경이 이집트에서 광야까지로 넓다면, 레위기의 배경은 한 장소인 시내산입니다(레 27:34). 그리고 레위기의 시간 역시 다른 말씀들에 비해서 가장 짧습니다. 아무리 길게 잡아도 한 달을 넘지 않습니다(출 40:17; 민 1:1). 정리하면, 한 달도 되지 않는 기간 동안에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이 기록된 것이 바로 레위기인 것입니다. 정말 집중이 쉬운 말씀이 아닙니까! 심지어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 즉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씀이 바로 레위기에서 뽑은 것임을 생각한다면(19:18), 우리는 레위기에 대한 오해를 이제는 벗어야만 할 것입니다.
우선적으로 레위기는 ‘레위인’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모세오경에서 레위기가 제일 짧게 레위인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레 25:32-34). 사실 유대인들은 모세오경의 세 번째 책의 제목을 ‘그리고 그(여호와)가 부르셨다’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은 특정하게 제목을 만들지 않고 레위기 1장 1절을 제목으로 정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로 쓰인 본래 성서가 헬라어로 번역되면서 제목이 만들어졌고, 그 제목을 지금까지 이어받았던 것입니다. 아마도 헬라어 번역자들은 레위기에서 레위인이 가장 짧게 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제사법이 나와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러한 제사를 집전하는 사람들이 다름 아닌 레위인들이기 때문에, 아마도 이 책의 제목을 레위기라고 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오해의 시작입니다. 왜냐하면 레위기는 우리에게 제사법을 가르치기 위해서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단순하게 생각해서, 예수님께서 레위기의 말씀을 압축하시면서 “이렇게 제사하라”라고 하지 않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레위기를 단순히 제사의 방법들이 자세하게 기록된 백과사전으로 오해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레위기의,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리고 그가 부르셨다’라는 책의 중요한 의미를 ‘이미’ 간파하신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 레위기 말씀을 통해서 그것을 나누고 싶은 것입니다.
2. 말씀 안에서
여호와께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이는 레위기 1장 1절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레위기에 접근하는 방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그렇습니다. 사실 레위기는 매우 자세하면서도 반복되는 제사 규칙들, 자질구레한 생활 방식들, 지켜야할 절기들로 이루어져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시대의 기독교인들은 레위기의 어떠한 부분들도 ‘문자 그대로’ 지키지 않는다는 겁니다. 어느 예배에서도 어린양을 잡아서 불태우지 않으며(4:35), 어느 누구도 돼지고기를 부정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11:7), 어느 목사님도 자신을 의사로 여기지 않으며(13:3), 어느 교회도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지 않습니다(23:4). 안식년과 희년 역시 일반적으로 ‘말씀으로만’ 규정된 내용으로 만족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25:4,10). 정말 우리는 레위기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읽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까 드렸던 질문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여기에서 ‘무엇’에 해당하는 것은, 물론 문자 그대로 준행해야만 하는 자질구레한 내용들도 있겠지만, 우리는 문자 그대로의 내용을 초월한 신학적인 의미가 있음을 깨닫게 되어집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음대로 해석한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선 예수님께서 올바른 해석을 보여주신 것이며(이웃사랑의 정신), 뒤 이어 바울 사도의 글에서 예수님의 해석이 확장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갈 3:24). 그러므로 우리도 레위기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려는 자세에서 벗어나서, 그 내면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듯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를 깨달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을 노골적으로 표현하십니다: “내가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20:26). 왜냐하면 원어에서 ‘소유’라는 말이 없기 때문인데, 이 표현을 보다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내가 널 내꺼로 살도록 하려고”가 되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것 같지만 큰 차이가 있습니다. 초점은 ‘살도록’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생명 없는 물건(소유품) 정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함께 살아가도록 요구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출애굽기의 ‘함께 하심(동거/연합/교제)’의 레위기식 표현일 뿐입니다. ‘임마누엘’의 정신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다음의 구절들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지 않겠습니까?(11:45; 22:33; 25:38):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너희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자니 나는 여호와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려고 또는 가나안 땅으로 너희에게 주려고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너희 여호와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함께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신앙의 대원칙은 결과적으로 꼬리를 무는 현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바로 ‘거룩한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할 것은, ‘거룩함’ 자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룩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한 최소한의 준비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레위기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누리기 위한 몇 가지 내용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레위기는 두 개의 이야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열린 길이며(1-16장), 후반부는 하나님 안에서의 거룩한 삶의 정체를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17-27장). 여기에서 레위기의 모든 내용들을 다룬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언제나 그렇지만), 숲 속에서 나무 한그루의 멋을 충분히 느끼는 동시에, 멋진 나무들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길을 잃지 않고 숲을 품을 수 있는 능력일 것입니다.
성서에 대한 열정을 식어버리게 만드는 일등 공신은 무엇보다도 레위기 1장부터 이어지는 자질구레한 의식들일 것입니다. 오경의 구약 제사에 대한 연구서에 의하면, 레위기가 제의적인 내용을 압도적인 차이로 가장 많이 담아내고 있다고 합니다(창[8.7%] 출[14.34%] 레[60.53%] 민[19.95%] 신[8.65%]). 레위기를 읽으면 60%가 제사 의식을 말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레위기는 상황을 묘사하는 방식 보다, 규칙을 나열하는 방식으로 기록되어있기 때문에(96%!), 다른 말씀들과는 달리(창[13%] 출[61%] 민[70%] 신[8%]), 상당히 피부에 와 닿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이는 자세한 숫자만 모를 뿐이지, 가르쳐주지 않아도 누구나 아는 사항일 겁니다.)
그렇다면, (불면증 환자에게는 예외가 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이 많은 제사법들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의 길은 언제나 열려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은 제사를 통해서 여호와께 나아갈 수 있다는 ‘열린 문’에 대한 확신을 가지라는 겁니다. 우리는 제사에 대해서, 다섯 가지의 제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배우게 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이며, 둘째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기 위한 것 그 자체를 위해서입니다.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는 모두 죄와 관련이 없습니다. 이들 제사는 오히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들 제사를 “향기로운 냄새”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번제[1:9,13,17], 소제[2:2,9,12; 6:15,21], 화목제[3:5,16]). 이에 반해서 속죄제와 속건제는 모두 죄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들 제사는 범죄해서 부정하게 된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다시 정결하게 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 제사법은 하나님의 열린 마음을 보여주는 좋은 거울이 됩니다. (이제 보다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나의 예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향기가 되며, 또한 예배 자체가 범죄한 내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열린 통로가 된다는 깨달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실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함께 할 수 있어지기’를 원하십니다.
2) 임마누엘의 살아가기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제사 자체에 있지 않음을 다시금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관계를 중시하십니다. 이는 우리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물음을 던지게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그분과 교제한다는 것은 일종의 자기 최면이며, 그것이 바로 영지주의적인 태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요? 레위기는 다른 말씀들보다 열정적으로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라고 선포합니다(10:3; 11:44,45; 19:2; 20:26):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19:2)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함이라는 속성에 대해서 성서가 말하는 것 이상으로, 즉 철학적이나 관념적이나 미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삼가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위 ‘고상한 것’으로 변질시킬 위험이 다분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약시대의 바리새인들이 그러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막 7:5). 오히려 레위기는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해서 말하면서, 하나님 자신의 거룩함의 정체를 드러내 보여주기 보다는, 반대로 인간의 상태를 진단하는 방식을 선택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거룩하기 때문에, 우리도 부정과 정결에 대한 구별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라는 가르침인 것입니다(11:47; 15:31). (이러한 부정과 정결에 대한 이분법적인 사고에 대해서 인류학자들은 참으로 다양하며 그럴듯하게 해석을 제시해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레위기의 후반부의 말씀을 학자들은 ‘성결법전’이라고 부릅니다(26:46).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것은 자신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구별된 존재라는 정체성의 확립입니다. 이렇게 구별된 존재로서 자신을 지켜나가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소극적인) 자세가 되는 것입니다(20:26):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그러나 성결법전은 보다 적극적인 거룩을 가르칩니다. 만민 중에서 구별되었다는 것은 단지 그들의 생각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 속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결법전은 철저하게 인간관계에서의 삶을 다룹니다. 거룩은 “시각장애인 앞에 걸림돌을 놓지 않는” 것이며(19:14),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는” 것이며(19:32),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는” 것이기(19:18)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거룩은 윤리적인 것만으로 제한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거룩은 하나님께 대하여 최고의 것을 (그것이 예물이건 절기이건) ‘지켜서’ 드릴 수 있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거룩은 코람데오의 삶이며, 달리 말해서 ‘임마누엘의 살아가기’입니다(20:7):
“너희는 스스로 깨끗케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성결법전’과 코람데오 그리고 임마누엘. 우리는 이러한 도전에 급격히 좌절하게 됩니다. 레위기 20장 7절을 직역하자면 더욱 그러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거룩하라 그리고 거룩하게 살아라. 왜냐하면 나는 야웨 너희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레위기의 전반부인 ‘예배’ 하나만으로도 힘들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레위기의 후반부는 정말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정도로 ‘무서운 율법주의자’에게나 어울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레위기의 말씀에서 복음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두 번째 속성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분이 우리를 “거룩케 하는” 여호와입니다(20:8):
“... 나는 너희를 거룩케 하는 여호와니라”
8절에서는 ‘왜냐하면’과 같은 이유가 나와 있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은 최종적으로 선언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김칫국을 마셨던 셈입니다. 하나님은 인간 스스로 거룩하게 될 수 없음을 아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몇 번이고 자신이 우리를 거룩케 하시는 분이라고 거듭 강조하십니다(21:8,15,23; 22:9,16,32). 그렇다고 우리가 두 손 두 발 모두 놓는 것은 성서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성서는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실제적인 삶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출 31:13). 임마누엘의 살아가기는 우리가 살아가야만 하는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임마누엘의 살아가기는 그분이 우리를 살아가게 만든다는 확신에서 시작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인 것입니다.
3. 말씀이 내 안에서
지금까지 우리는 레위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요구’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역시 하나님은 우리의 만남을 원하십니다. 그 만남은 언제나 열려있으니, 그것은 하나님을 향해서 열려있고, 또한 이웃을 향해서도 열려있습니다. 사실 레위기의 말씀은 시간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현대의 그리스도인에게 실제적이지 않은 부분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목사 안수를 위해서 위임제를 할 수도 없으며(7:37의 위임제는 사실 8장에서 뒤늦게 나옵니다), 어느 교인도 100% 순면 옷만 입을 순 없을 겁니다(19:19). 레위기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준행하는 것은 고대 종교의 실상을 모르는 무지의 소치이거나(16:8; 17:7), 혹은 비참한 율법주의로 그칠 것입니다(21:11). 그러므로 우리는 레위기를 신앙적으로 읽어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오늘의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거룩이라는 개념과 그리 친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예언서들에서 수많은 예언자들의 비판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이스라엘은 거룩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예레미야는 레위기를 부정했을 정도로, 그 당시의 ‘부정’을 극대화합니다(레 7:38; 렘 7:22):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라 명하신 날에 시내 산에서 이같이 모세에게 명하셨더라”
“대저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욱 완벽한 법이 아니라, 법의 정신입니다(렘 7:23):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시면서, 법의 정신을 완벽하게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명과 인간의 유전 사이의 구별을 잘 보여주셨습니다(막 7:1-23). 부정한 것은 사람들이 만지거나 먹거나 해서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인 것이기에 그 때나 지금이나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정결한 마음인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부정한 것을 만짐으로써 법의 정신을 구현하셨고(막 1:40-41; 5:41), 반대로 부정하다고 규정된 사람이 예수님을 만지는 것에 대해서 칭찬하셨습니다(막 5:25-34). 왜냐하면 레위기의 정신은 소극적 구별이 아니라, 적극적 구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보호하기 위해서 구별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으로 하여금 구별된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구별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제사장 된 우리는, 새로운 차원에서 적극적인 분별의 능력과 함께 세상을 가르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10:10-11). 바로 예수께서 보여주신 ‘임마누엘의 살아가기’로 말입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막 1:41)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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