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aching/[설교: 성서의 메시지]

[03] 출애굽기: 하나님은 나를 위해 무엇을 하셨나?

진실과열정 2008. 1. 26. 09:26

“성서의 메시지” ------ (3)


- 출애굽기 -

하나님은 나를 위해 무엇을 하셨나?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출애굽기 19장 4절)

 

 

 


1. 말씀 앞에서: 불가능성에 대한 고민


    오늘 우리가 생각할 주제는 이겁니다: ‘신은 과연 어떤 분인가?’ 다시 말해서 ‘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입니다. 사실 이런 주제는 거대하다 못하며,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정도로 부담스럽습니다. 우리 인간이 ‘네 자신을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신을 운운한다는 것은 하룻강아지나 하는 버릇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성서는 다른 것을 말하지 않으며, 성서가 말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신은 바로 이런 분이다!’라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서에서 무엇보다도 ‘신의 정체성’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부담스러우며 또한 불가능하게만 여겨지는 이 주제가, 신앙인이라면 누구에게나 도전이자 사명으로 제시되어야만 하는 것임에 확신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의 정체성’을 탐구할 것입니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800년 전, 중세신학자 중에서 최고의 업적을 남긴 토마스 아퀴나스(1225? - 1274d) 역시 ‘신의 정체성’을 탐구했으며, 그 업적은 [신학대전Summa Theologica]라는 책으로 남겨졌습니다. 여기에서 ‘숨마Summa’라는 말은 원래 갖가지 주제들에 관한 참고 서적들에 대해서 붙여졌던 명칭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백과사전식으로 대상을 분류해서 그 부분들에 대해서 참고 서적까지 이용하면서 ‘완벽한’ 정보를 정리하는 것입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신의 정체성에 대한 완벽한 정보 정리’ 그러나 1273년 12월 6일, 토마스 아퀴나스는 미사 도중 “이상한 변화를 느끼고” [신학대전] 집필을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800년 전에 일어난 한 개인의 심리적인 변화에 대해서 아무런 정보도 없으며, 객관적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무튼 ‘신의 정체성’은 위대한 신학자도 완성하지 못한 일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단순한 방식을 선택하려고 합니다. ‘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출애굽기가 말하는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모든 성서의 각 권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출애굽기를 통해서 ‘그분이 무엇을 하셨는가? 왜 그 일을 하셨는가? 어떻게 하셨는가?’라는 질문을 할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을 통해서 우리는 ‘신의 정체성’의 작은 부분을, 그러나 성서의 핵심이자 근간을 이루는 부분을, 다룰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행동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행동의 의도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런 모든 일들이 자신의 사람들에게 끼친 영향을 통해서도 자신을 계시합니다.



2. 말씀 안에서


    출애굽기는 신약성서 복음서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가장 많이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최근엔 뮤지컬로도 소개되었지요). 무엇보다도 1956년에 만들어진 ‘십계The Ten Commendments’가 최고인 것 같습니다. 모세를 연기한 찰톤 헤스톤이 무수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갈라진 홍해 사이로 걸어가는 장면은, 아직도 저의 기억에 남아있을 정도로 압권이라고 생각합니다(제가 최초로 극장문을 나섰던 영화였다고 기억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출애굽기를 읽고 연구하며 묵상할수록, ‘갈라진 홍해 사건’ 보다 멋진 장면은 한 두 개가 아니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던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되는 “이 큰 광경”(3:3)의 산 증인이었던 떨기나무(그 발음이 ‘시내’산과 매우 유사함[신 33:16]) 불꽃(3장),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7:15; 9:1,13; 10:3)이 보여준 위대한 열 가지 재앙 속에서 모세와 바로간의 불꽃 튀는 타협과 모세의 최종적인 승리(7-12장, 특별히 12:31), “주의 콧김”(15:8)에 홍해가 갈라져서 이스라엘이 건너고 “주의 바람”(15:10)에 홍해가 덮어져서 바로의 군대가 몰살당하는 상황에서도 타올랐던 야훼의 불기둥(14-15장, 특별히 14:24), 무조건적 순종을 위한 열 개의 금지목록을 선언하시기 위해 “불 가운데서 강림하신”(19:18) 야훼 하나님(20장), 일곱 번의 말씀하심으로 성막 건축의 창조 기사와의 연관성을 암시한 “맹렬한 불”(24:17)같은 야웨의 영광(25-31장), 동시에 “방자한”(32:25) 백성들의 성화에 못이긴 아론이 송아지 신 앞에서 내둘리는 가당치 않은 변명으로서의 “불”(32장, 특별히 32:24), “인자와 진실”(34:6)로 백성의 패역함을 용서하시며 다시 주신 증거의 두 판을 가져 내려왔던 모세의 “광채”(34:30), 성막의 모든 기구가 완성된 후에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친히 보았던 “불”(35-40장, 특별히 40:38).


    정말이지 출애굽기의 한절 한절의 말씀은 인상 깊은 구원의 드라마입니다. 저는 특별히 ‘불’이라는 이미지로 출애굽기의 주된 내용들을 정리해보았습니다. 이 불은 많은 것을 상상해낼 수 있습니다. 아가서 8장 6절은 상상력의 한계를 더욱 넓혀줍니다(“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야웨의 불과 같으니라”). 아가서와 함께,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질투하시는”(34:14) 분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부분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지만 인격적으로 자신을 계시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이 인격이라는 부분은 잠시 후에 생각해봅시다). 저는 이 부분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신이기에 그분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했지만, 그 일이라는 것이 신의 것이 아닌 지극히 인간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는 그것을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창세기가 하나님을 ‘창조자’로 보여주었다면, 출애굽기는 하나님을 ‘구원자’로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창조라는 것이 세계의 창조(창 1-11장)와 함께 이스라엘의 창조(창 12-50장)까지 연결되어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것 역시 ‘애굽으로부터 구원’(출 1-18장)과 함께 ‘하나님으로의 구원’(출 19-40장)으로 나타납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은 단순히 ‘해방’이 아닌 ‘새로운 구속’입니다. 그 결과는 신을 누리게 되는 특권입니다. 출애굽기 6장 6-7절은 이런 내용을 잘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빼어내고, 건지며, 구속한” 애굽으로부터의 구원이며, “삼고, 되는” 하나님으로의 구원이며, “아는” 특권인 것입니다.



 1) 왜 구원하신 것인가?


    이러한 생각은 출애굽 사건의 또 다른 의미를 던져줍니다. 우리의 구원이라는 것이, 달리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은, 그 이유가 “고역으로 이스라엘의 생활이 괴로웠기”(1:14)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출애굽기의 (세 가지) 주요 본문에서 근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이름이 처음으로 계시되고 있는 3:9-15의 말씀입니다. 소위 ‘신명’이라고 부르는 이 말씀은 짧은 지면으로 해석할 수 없는 신앙의 깊은 뿌리에 속하기 때문에,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점이라면, 14절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번역된 구절은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아래의 보충설명을 참고하세요). 우리가 한글로 (해석되어) 번역된 구절을 읽을 때, 자연적으로 들어가게 되는 부분들(이것은 번역자의 신앙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을 걸러낼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원어에는 ‘스스로’라는 단어가 들어있지 않습니다(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라고 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하나님의 ‘선재성’이나 ‘무엇을 있게 하는 원인자’라는 ‘어려운’ 철학적인 사고는, 원어에는 들어있지 않은 것입니다. 오히려 단락(3:9-15)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이름의 뜻을 보여줍니다. 단락의 내용은, 출애굽의 사명이 ‘모세’에게 주어졌음을 보여줍니다(10절, 이는 8절의 ‘내가(하나님)’와 조화를 이룹니다). 이에 모세는 당황합니다. 모세가 상대할 자는 애굽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무능함을 호소하는 모세의 거부에 대해서(11절), 하나님은 14절에 “나는 있는자니라”라고 나와 있는 단어를, 12절에서 이미 사용하면서(“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모세의 거부를 새로운 차원에서 응답하십니다. 그 응답이 바로 14절의 “나는 있는자니라”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세에게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함께’ 있는 하나님, 즉 (보다 전문적인 발음으로) ‘야훼’를 계시하신 것입니다. (이는 4:1을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이름의 뜻이 지금 여기에 함께 있는 것이라는) 야훼께서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네게 나타나지 않지 않느냐?”라는 질문에서 말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어떻게 부르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며, 하시는 분’이라는 신적인 인격관계를 깨닫는 것입니다. 출애굽의 이유는 야웨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함이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계약을 맺는 20:1-17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2절의 말씀은 하나님의 자기 선언입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야훼)로라.” 정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종 된 이스라엘을 인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후의 말씀, 즉 십계명에서 새로운 규칙을 만듭니다. 사실 십계명은 간결한 금지목록들로 ‘하지마라’라는 선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순종할 때와 불순종할 때의 결과들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 일종의 상대방과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동기부여인 셈입니다. 그렇다고 십계명 자체를 무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십계명은 10개의 계명 자체에 의미가 있기보다는, 그 계명을 통해서 2절에서 보았던, 야웨 하나님의 ‘새로운 주인되심’을 압축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19:5-6에서 하나님이 계명(혹은 언약)을 주신 이유는, 준법시민으로 만들기 위함이 아닌, 하나님과 구원받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명시하기 위함입니다. 그 관계란, “거룩한 백성”(19:6)이며, 하나님의 “소유”(19:5, 이는 원어로 ‘보배로운 소유(쎄굴라)’라는 의미입니다)가 되는 새로운 관계입니다.


    세 번째로 야훼 하나님이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거하시는 성막을 언급하는 본문이 있습니다(25-31장). 출 29:45-46은 하나님의 출애굽 하신 이유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성막을 뜻하는 단어)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야웨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야웨니라”


성막은 우리에게 매우 낮 설은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성막을 영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경계합니다. 다시 말해서 물두멍에서 언약궤까지, 각각의 것들이 또 다른 무엇을 상징한다는 것은 매우 이차적인 해석입니다. 일차적인 해석은 그 성막을 통해서 야훼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살고 계신다는 것, 즉 ‘임마누엘’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언제나 함께 살았던 야훼를 “보았듯이”(40:38), 우리 각자의 집에서 야웨 하나님이, 즉 내 안에 성령으로 계신 야훼의 임재를 느끼는 것입니다.



 2) 어떻게 구원하신 것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이유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이제는 그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봅시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듯이, 야훼 하나님은 10가지의 “표징과 이적”(7:3)으로 구원을 시작하십니다. 이 열 가지 사건은 (자연적 특수성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나(하나님)의 표징과 나(하나님)의 이적”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7:3). 그렇습니다. 중요한 점은 하나님은 자연적인 현상을 비틀어버림으로써, 구원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애꿎은 자연만 뒤통수 맞은 것일까요? 우리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우리의 눈에, 나일강이 피로 변했다는 부분은, 마치 서해안의 기름유출사건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러나 고대의 애굽인들의 눈에는 그것이 자연의 이상 현상이 아니라 신들의 전쟁으로 보였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일강에서부터 시작해서 흑암의 이적은 각각 애굽인들이 숭상하는 신들인 것이며, 마지막으로 생명의 신 자체인 바로에게서 그 장자의 생명을 거두어간 사건은 다름 아닌 야웨의 KO 펀치였던 것입니다. 누가 참 신인가? 그렇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참 신입니다. 출애굽은 단지 이스라엘이 자유롭게 된 사건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며, 이 세상에 참 신이 누구인지를 만방에 알리는 방식으로 진행된 것입니다(12:12).


“내가 그 밤에 에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참 신 야훼 하나님은 자신의 놀라운 신성을 애굽 사람들에게만 보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친 백성들에게도 보이게 됩니다. 우리는 그 사건을 34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올라간 산에서 “모세가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32:1), 백성들은 야훼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으려고 합니다. 바로 우상을 만듦으로, 그들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자신들의 신”(32:4)을 선포합니다. 야훼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인정하지 못하며, 정말이지 다된 밥에 재 빠뜨리는 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구원의 이유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었는데, 바로 그 근본적인 요소가 깨어져버렸기 때문에, 상황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다다르고 맙니다. 즉, 관계가 깨어짐의 상징으로 모세는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고”(32:19) 맙니다. 이제 그 어떠한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출애굽기는 더욱 놀라운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야훼 하나님의 구원하심은 자신의 백성들을 끝까지 책임지시겠다는 위대한 선언으로 클라이맥스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34: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엎질러진 물도 다시 채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다시 불러 "언약의 말씀 곧 십계"(34:28)를 다시 주십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은 아무런 자격도 없는 “목이 곧은 백성”(32:9)들까지도 변함없이 사랑하시겠다는, 야훼의 결정으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야훼 하나님은 참 신이기 때문입니다.



3. 말씀이 내 안에서


    지금까지 우리는 출애굽기를 통해서 ‘신의 정체성’을 탐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서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통해서 ‘신의 정체성’을 보았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야훼’ 즉 우리와 교제하시는 분입니다(이것이 바로 출애굽 즉 구원의 이유였습니다). 우리는 야훼 하나님과만 교제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다른 것들이 야훼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이것이 바로 야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중요한 한 가지를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하나님은, 다른 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존재이며, 그 하나님은 ‘야훼’라는 이름으로 언제나 함께 해야만 하는 ‘당신’으로 경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는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을 너무 ‘하나님스럽게’ 여겼던 것 같습니다. 나와 너무 거리가 먼 존재로 말입니다. 무서운 아버지의 모습으로 무게를 더하는 분으로 생각하지는 않을까요? 그러나 사실 (우리가 본 바대로) 야훼 하나님은 철저하게 우리와 가까운 분이십니다. 야훼 하나님은 ‘아바 아버지’이십니다. 이러한 야훼의 친밀한 임재는 ‘임마누엘’이라는 놀라운 신학의 뿌리가 됩니다. 이후로 출애굽과 야훼의 함께하심은 이스라엘 역사의 주제가 되며, 그들에게 일어나는 수많은 일을 해석하는 기본 관념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주제 말씀을 다시 묵상하기 원합니다(19:4):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역사 속에서 이루어나가시면서, 그 가운데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사실 광야의 여정은 만족스럽지 못한 것입니다(17:7). 그러나 신앙은 우리에게 출애굽이 “독수리 날개를 업고 하나님께로 인도함을 받은 것이었다”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광야 속에서도 독수리 날개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의 회복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여러 번 나옵니다. 바벨론 포로 시절을 끝마치고 시온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그들은 ‘새로운 출애굽’ 즉 야웨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의 회복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새로워진 관계 속에서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사 40:31) 믿음으로 새로운 출애굽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저는 특별히 우리의 삶에 언제나 ‘구원’ 즉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이 계속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Exodus!). 다시 말해서 출애굽의 사건은 출애굽기에서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계속적으로 반복되었던 것처럼,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계속적으로 반복되어져야만 하는 ‘새로움의 사건’으로 경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의 영향력에서부터 자유로워지고 대신 야웨 하나님에게로(바울이 말하듯이, ‘그리스도안에서[엔 크리스토스]’) 구속되어지는 것입니다(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2008.1.25.  진실과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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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은 기독교 신앙의 토대이자, 모든 기독교 교리와 말씀 해석의 최종 결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를 히브리어로 말하면, 임마누엘(lae(WnM'î[i, 7:14)입니다: (M[i)함께’, 아누(Wn ')우리’, (lae()하나님입니다. 다시 말하면, ‘임마누엘이야말로 모든 것의 요약이자, 신앙의 엑기스라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구원이라는 이해하기 어렵고도 설명하기 쉽지 않는 개념도, 바로 임마누엘로 간단히 설명됩니다: 즉 구원이란 하나님과 내가 함께 연합된 존재가 되어, 죄로 인해 깨어졌던 관계성이 회복된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그렇습니다! 그러한 임마누엘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이 구원의 유일한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임마누엘이 특별히 유대인들에게는 중요한 사안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영원한 연합이라는 임마누엘의 주제가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기에, 마태가 유대인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다른 복음에는 없는 임마누엘이란 이름으로 메시야를 가리켰다는 점은(1:23), 이 임마누엘이 얼마나 중요한 개념이라는 것을 새삼 되 짚어보게 합니다.

 

어찌되었건 임마누엘은 우리들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경험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모세에게 가르쳐주는 출애굽기 3장의 위대한 사건이 바로 다름 아닌, ‘임마누엘의 선언이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성서의 본래 뜻을 알지 못하고, 3:14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는 모호한 표현을,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지만, 사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원어에는 스스로라는 단어 자체가 들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여호와라고 부르는 발음도 정확한 것이 아닙니다. (쉽게 말해서, 여러분들은 할렐루야라고 하지 할렐루여라고 하지 않습니까? 많은 분들이 소소한 부분들은 정확성을 따지면서도, 사실 이렇게 중요하고 신앙의 핵심이 되는 부분들은 전혀 무지하고 있다는 점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보다 정확한 발음은, ‘야훼(hw"ùhy>)’입니다(3:15).

 

사실 본래 성서에 기록된 히브리어는 거룩한 글이기 때문에, 아무나 읽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자음만 있고, 모음은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마음에서 ㅁ,,ㅁ만 있는 겁니다. 아무나 읽을 수 없겠지요.) 특수한 제사장이나 서기관들만 전통을 따라서 듣고 읽는 법을 암기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정확한 발음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면 왜 야훼인가? 사실, 이 말은 어떠한 특별한 뜻을 가진 단어가 아닙니다. 단지 있다라는 동사 형태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be’가 되지요. 그런데 내가 있다라는 1인칭 동사라는 말의 발음은 에흐예(hy<ßh.a,()’입니다. 그래서 출 3:14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는 구절의 본래 히브리어 표현은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hy<+h.a,( rv<åa] hy<ßh.a,()’입니다. 굳이 번역하자면, ‘나는 있는 자로써 [여기에] 있다입니다(아쉐르는 스스로가 아닌 관계대명사로, 에흐예의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기능을 합니다).

 

만약 출 3:14, 한 구절만 본다면, 그럼 나는 스스로 있는 자가 맞네! 라고 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의미의 이름을 가르쳐 주셨는지, 그 전후맥락을 알게 된다면, 더 합당한 이름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애굽의 왕자였던 모세가 하루아침에 살인자가 되어서, 미디안 땅에 목자로 지낸지 40년이 지나서, 이제 모세의 나이 80세에,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셔서 드디어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시려고 합니다. 모세에게 소명을 주신 겁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3:10). 모세는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에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합니다: 첫 번째, “내가 누구관대(ykinOëa' ymiä) 바로에게 가며, (내가 누구관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낼 수 있단 말입니까?”(3:11) 나요? 살인자요! 나요? 40년 전에 이미 쓴잔을 마신 사람이란 말이오! 나도 알고 하나님이 아시지 않습니까? 내 나이 이제 80이란 말이오! 하나님은 모세의 이러한 어리석은 질문을 현명한 대답으로 해결하십니다. 우문현답(愚問賢答)이지요. 바로 내가 누구관대?’라고 물으면, 아무런 해결이 안 된다! ‘당신이 누구신대요?’라고 물어야 해결점이 보인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해결점의 실마리를 제시하십니다. 현답입니다(3:12a):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M'ê[i hy<åh.a,()” 여기에 바로 에흐예가 나오며, 임마누엘이 나옵니다: 에흐예 임마크(%M'ê[i hy<åh.a,(), 너와 함께 있는 분! ‘그러는 당신은 누구라고? , 너와 함께 있는 분이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정체입니다. 임마누엘 말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아직 확실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름이라고 하기엔 뭔가 알딸딸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두 번째 묻습니다: 당신이 정말 누구라구요?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당시에 애굽에는 수많은 신들이 있었습니다. 상형문자라는 그림으로 나타난 신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이렇게 묻는 거지요. 하나님, 당신을 어떻게 그려야 되는 거지요? 또한 애굽의 수많은 신들은 어떠한 사물/동물로 나타났습니다(태양, , 황소, ). 모세는 이렇게 묻는 겁니다. 하나님, 당신은 이 세상에서 과연 어떤 것과 닮았습니까? 그 질문이 이겁니다: 당신이 정말 누구라구요?

 

이제 하나님은 전혀 다른 차원의 신존재를 설명하십니다. “나는 어떠한 그림으로 나타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나는 어떠한 사물/동물과 닮은 존재가 아니다. 나는 오직 내가 너와 함께 있음으로써만 존재하는 분이다.” 14절이 바로 그러한 맥락입니다. “에흐예 아세르 에흐예” ‘나는 지금 여기에 너와 함께 있는 분이다. 너를 도우려고 네 옆에 지금 있는 분이 바로 나다! 네 손을 잡아주려고 네 옆에 지금 있는 분이 바로 나다! 너를 구원하여 나와 연합된 관계로 영원히 함께 하려고, 네 옆에 지금 있는 분이 바로 나다!’ (14b)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고 하라

 

그렇습니다. 야훼란 이 에흐예(나는 있다)3인칭 동사표현입니다. , “그분이 여기에 계시다가 바로 야훼인 것입니다. 아직도 긴가민가하시는 분이 있을 것 같아서, 출애굽기 41절을 읽도록 합시다: “모세가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나 그들(애굽사람)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야훼(그분이 지금 여기에 계신다)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지금 어디에 계신다는 말이냐? 보여달라!) 하리이다.”

 

그럼 왜 여호와라는 발음이 생겼는지를 잠깐 말씀 드리겠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모음이 없는 상태에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 이름을 나의 주님으로 읽었습니다(마치 자신의 아버지 이름을 부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주님이라는 말이 아도나이입니다. 그런데 후에, AD 800-1000년경에, 하나님 이름 자음에, 아도나이의 모음(, , )를 붙여서 어법에 맞게 수정하고 나니, ‘여호와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사실 여호와라는 발음은 성서시대에는 한 번도 발음된 적이 없는 이름인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호와/야훼라는 발음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발음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셨다면, 성서에 분명 기록하셨을 겁니다.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신 것은, 그 분의 이름을 어떻게 부르는가에 있지 않고(사실, 이러한 발음이 전세계적으로 통용될 수도 없습니다. 성룡이 사실 청룽[Chéng Lóng]이랍니다!), 그 이름의 뜻에 있다는 겁니다.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 그 분이 바로 여호와이고, 그 분이 바로 야훼인 것입니다. 10년 전에 나와 함께 있었고, 나를 도와주었던 분이라고 한다면, 그 분은 여호와/야훼가 아닌 겁니다. 저 멀리에 계시는 분이라고 한다면, 그 분은 여호와/야훼가 아닌 겁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가 믿는! 우리가 반드시 깨닫고 믿어야만 하는 신앙의 대상은, 지금 여기에 나와 함께 계시는하나님입니다!

 

우주의 창조주이자 인류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나와 함께 하시니, 모세는 40년 전에 뒤도 안돌아보고 도망쳤던 그곳으로 다시 돌아갔던 겁니다. 뼈저린 실패와 어두운 과거의 자리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던 겁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달아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연단시키고, 준비시키며, 전술과 전략을 연구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나와 함께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러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모세는 다시 그곳으로 들어갔던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서 보여주신 것이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사실 이 부분은 요한복음에서 아주 깊은 통찰력을 두고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임마누엘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신 겁니다(14: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또한 이어서 예수님은 성령님을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소개하십니다(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하나님의 임마누엘은,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임마누엘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임마누엘의 완성으로 성령님이 오신 겁니다(‘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라’). 그런데 예수님은 이 임마누엘을 완벽하게 가르쳐 주시고자, ‘보혜사라는 말을 쓰십니다. 이 말은 파라클레토스(para,klhtoj),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옆에서(파라) 말해주다(칼레오)’라는 뜻의 특정한 일을 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당시엔 귀족이 길을 걸을 때, 누군가가 와서 인사를 청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누군지 모릅니다. 그럴 때, 언제나 옆에 있는 사람이 말해주는 겁니다. “저 사람은 누구다.” 또한 법정이나 어떠한 결정을 내릴 때에도, 내 옆에 항상 함께 있어서 합당한 말을 해주고, 내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 바로 파라클레토스입니다. (보혜사가 조금 어렵다면, 임마누엘로 읽으십시오!)

 

임마누엘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입니다. 임마누엘 자체가, 곧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나와 함께 깊은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구원이며 천국이고 찬송이며 영광인 것입니다. 임마누엘은 창조주이자 구원자이신 야훼 하나님이,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면서, 그들의 길을 인도하며 그들이 하나님의 성민으로 살아가는 원리가 되어주셨던 신적인 가르침의 방법이었습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했던 임마누엘이, 모세를 통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그 모양이 만들어졌고, 예수님을 통해 절정에 이르렀으며, 파라클레토스(성령님)를 통해 완성되었던 것입니다. 임마누엘이 있는 곳에는 사망이 힘을 쓰지 못하고 생명의 꽃이 피어납니다. 임마누엘이 있는 곳에는 불의의 어둠이 사라지고 공의의 빛이 높이 솟습니다. 승리와 기쁨, 찬송과 영광이 임마누엘 가운데 언제나 활동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경험하십시오. 혹시 모세와 같이 어리석은 질문을 하나님 앞에 던지지 마십시오. “내가 누구관대, 이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왕이 아니라서, 이 일을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돈이 없어서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능력이 부족해서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에, 나 자신의 자격은 끼어들 자리가 전혀 없습니다. 앞으로 사무엘서를 보겠지만, 사무엘서에 등장하는 사울과 다윗에게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왕이 되어 커졌기 때문에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건 엄청난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이 작았을 때(히브리어로 카톤)’ 그를 사용하셨다고 일깨워주셨기 때문입니다(삼상 15:17). 이에 반하여 다윗은 그 자신이 막내였습니다(삼상 16:11; 역시 히브리어로 카톤입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평생 잊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쓰신 것은 내가 어떠한 누구이기 때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관대? 가 아니라, 하나님 당신이 과연 어떤 분이시길래? 그 질문에 명확한 대답을 갖고 있는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던 겁니다. 다윗이 사울왕을 죽일 수 있는 자리에, 그가 칼을 내렸던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햐웨는 지금 여기에 나와 함께 계시다! 내가 그 야훼의 도움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냈는데, 지금 기회가 있다고 악을 저지를 수 없다!(삼상 24:5,12)

 

반대로 임마누엘의 신앙을 깊이 체험하십시오. 임마누엘은 절망을 소망으로 만들어 줍니다. 임마누엘은 좌절을 용기로 바꾸어줍니다. 임마누엘은 후회를 기회로 만들어 줍니다. 임마누엘은 눈물을 기쁨으로 바꾸어줍니다. 임마누엘은 질병을 치유하며, 임마누엘은 기적이 상식이 되게 합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 당신과 함께 계시는 분이, 창조주 하나님, 구세주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 앞에 닥친 그 어려움을 임마누엘로 이겨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