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독서] 좋은 책 이야기

슈테판 츠바이크,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진실과열정 2009. 9. 30. 12:20

 

그 무엇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을 얻는다는 일은 어찌보면 불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먹는 음식이 과연 어디에서 난 것이며, 어떤 과정을 통해서 제조되었고, 누구의 손을 거쳐서 조리되었는지.. 이 모든 것을 알아버린다면, 숟가락을 놔야할 경우가 훨씬 많아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본성은 '알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러한 앎은 우리를 반성하게 하기에, 슬프고 노엽지만 눈을 열어야 하고 귀를 기울어야만 한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라는 책은 바로 이러한 성격의 책이다.

 

 

사실 이 책은 구약세미나 과정을 준비하는 중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들었던 책이었다. 구약성서에 대한 고대와 중세 그리고 종교개혁 시대의 해석들이 어떠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너무나 '공식적인' 혹은 '판에 박힌' 견해들이 가득했기에, 조금 다른 면은 없을까 해서 펼쳐보았던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참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이 책은 '카스텔리오'라는 종교개혁시기에 살았던 인문주의자의 고상한 '자유의지'를 다룬다. 그러한 과정에서 등장하는 두 인물이 있으니, 종교적 이단자로 판결을 받아 화형을 당한 '세르베투스'와, 또 그를 무참히 죽임으로써 최초의 개신교 종교재판을 실현한(?) '칼빈'이다. 카스텔리오는 세르베투스의 죽음이 부당하며, 또한 칼빈의 정치가 매우 잘못된 것임을 전면으로 나서서 논쟁한 대학교수였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에서 요약한 문장들이 전혀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뭐가 뭔지 모르는 사람은 교회사에 전무한 사람일 것이며, 혹시 이름을 바꿔 쓴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었다면 얼핏 교회사를 배웠던 사람일 것이다.

 

 

(칼빈,                                      세르베투스,                              카스텔리오)

 

 

종교개혁시기에 유럽은 도시국가였다. 그리고 오늘날처럼 비교적 선진정치 혹은 인권정치를 요구할 수 없는 시대이기도 하였다(물론, 오늘날도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지만...). 가톨릭의, 지금 보면 너무나 허무맹랑하지만, 당시엔 황제까지도 벌벌 떨게 만들었던 절대무적-유아독존의 통치에 대항한 자들이 일어났다. 그들이 바로 종교개혁자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 존 칼빈(칼뱅)이다. 떠돌이였던 이 성서학자는 제네바라는 도시국가에 재-스카웃이 되어, 자신이 꿈꾸왔던 신정통치가 실현된 세계를 만들게 된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성서해석을 기반으로 도시국가 법을 만들고, 그럼으로써 고유의 문화적 유산들을 결별하게 만들고 결국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중(喪中)'의 도시로 만들었다(p.91). 이러한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서, 내가 관심을 가지고 본 부분이 바로 성서해석에 관한 칼빈의 착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특별히 명석한 정신의 소유자는 일생 동안 단 한순간도 자기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할 권리, 자기만이 진리를 알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의심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p.54). 물론, 이 표현은 지극히 근거없는 주장이라고 일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후에 발생한 사건은, 이러한 주장에 오히려 무게를 더해줄 뿐이다. 칼빈의 집권(?)으로 인한 제네바 도시국가의 감성적 퇴보를 참다 못하여, 의사이자 신학자라고 할 수 있는 세르베투스가 [기독교 재건]이라는 책을 집필하게 된다(p.136). 이것은 칼빈에 대한 도전이었고, 칼빈은 세르베투스와 그 책을 불태워버리고 만다. "불기둥에 묶어놓고 서서히 불에 그을려 죽이는" 처형방식, 기독교 최초의 이단자 처형의 순간이다(p.167).

 

사실 당시에 개신교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들의 견해에 맞지 않는 부류들이 상당했었다. 당연하지 않았겠는가! 천 년이 넘게 억지로 교황만을 바라보았던 유럽인들에게, 이제 자유가 선언되는 시기에, 그들을 위한 그들에 의한 그들의 입장이 왜 없었겠는가! 그들도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성령님을 믿었다. 그러나 이 순간 '이단'이라는 개념이 발생하게 된다. '우리'가 아닌 사람이 '이단'이다. 문제는, 루터와 같은 신학자는 '이단자'와 '사회에 실제로 피해를 주는 집단'을 분리함으로써, 전자에 대해서 사법권을 실행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했던 반면, 칼빈은 이들 모두를 뭉뚱그려서 '칼빈을 반대하는 자'='이단자'='사단'이라고 정의내렸던 것이다(p.246). 이러한 무리한 주장에, 놀랍게도, 혹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이성적인 인문주의자들은 모두 하나같이 잠잠하였다. 아니, 침묵하였다. 그러나 카스텔리오가 일어났다: "한 인간을 죽이는 것은 절대로 교리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한 인간을 죽인 것일 뿐이다"(p.227). 저자는 카스텔리오가 얼마나 치밀하게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인용하면서 논리적이며 웅변적으로 칼빈의 행동이 잘못된 것임을 낱낱이 고발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놀라운 사실은, 바로 그러한 이유로 인해서, 칼빈의 [기독교강요] 초반에 있었던 (즉, 카스텔리오가 공격했던) 부분이, 2판에서는 자취를 감추었다는 점이다(p.224).

 

역사란 어떤 것일까? 카스텔리오는 48세의 나이로 급사했다고 한다. 그리고 칼빈은 자신의 제국을 더욱 굳건히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칼빈에 의한 세르베투스 화형 사건을 놓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하나의 희생이 종교재판의 화형대에서 사라져간 수천 명보다도 더 나의 가슴을 뒤흔들었다"(p.178). 과거를 올바르게 되돌리려는 노력은, 1903년 칼빈의 추종자들이 세르베투스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며 세운 화해의 기념비에서 발견되기도 한다(p.281). 그리고 바로 저자의 말과 같이, 아주 우연히 실낱같은 자료들을 이끌어서 재탄생시킨 카스텔리오라는 위대한 인문주의자의 용기에서, 역사는 진짜 역사가 된다(p.294).

 

 


 

 

이 책은 문체가 상당히 웅변적이다. 살아있는 강연을 듣는 것 같다. 가슴을 파고드며, 주먹을 쥐게하며,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한다. 성서를 해석하는 사람으로써, 내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를 성찰하게 한다. 편협함이 가장 무서운 유혹이라는 것, 잠잠함이 최악의 잘못이라는 것을 배운다. 인간 지성이 얼마나 무서울 수 있는지, 저자인 츠바이크의 고민이 나의 고민이다(p.296). 마지막으로, 카스텔리오가 말한 "신념은 자유다"라는 선언이 내가 다시 깨달아야 할 명제이고, 또한 뛰어넘어야 할 주장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