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레인 페이걸스, 「아담, 이브, 뱀」
이 책은 하버드 대학에서 출간하는 신학리뷰 학술지(HTR)와 권위 있는 학자들의 글을 실어 놓은 신약학분야 헌정논문집에 기고한 바 있는, 신약과 초기 기독교의 이면적 역사, 혹은 살아남아서 주류가 된 승리자의 역사를 되짚어 본 글을 다시 풀어서 쓴 책이다. 이 책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창세기 1-3장 해석을 기반으로 해서, 초기 기독교의 신학적 성향의 흐름을 평가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부제가 규정하는 것처럼, (한국어 번역본은 “기독교 탄생의 비밀”이라는 출판사측의 과욕이 드러나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이 책은 “초기 기독교의 성과 정치”를 분석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 무게와 신학적 가치가 평가절하 되는 것은 아니다.
일단 저자는 신약의 문서를 역사비평적으로 해석함으로써, 해석의 전개과정의 합리적 토대를 마련한다. 그러므로 (학계의 공통된 의견과 크게 다르지 않은 차원에서) 마가복음의 예수는 ‘혁신적’이다. 다시 말해서, 성적인 면에 있어서만큼 예수는 철저한 금욕주의자였다. 또한 바울 역시 예수의 금욕주의적인 성향에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어떠한 체제가 세워지고 나서 시간이 흐르게 되면, 자연스럽게 성향은 보수적으로 굳어지게 마련이듯이, 초기 기독교 역시 보다 온건한 예수와 바울의 모습으로 이해되어 졌으며, 그것이 신약의 후기 문헌(마태/누가; 제2바울서신)에 드러나고 있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저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유산 분쟁에 휩싸인 유족들처럼, 금욕주의를 추구하던 기독교인들과 이를 비판하던 기독교인들은 자신만이 진정한 상속자라고 경쟁적으로 주장하며, 예수와 바울의 유산에 대한 소유권을 독점하고자 했다. (68)
기독교인들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투쟁의 역사가, (그래도 번역된 부제의 측면을 변호하면서 말하자면) ‘초기 기독교 탄생의 비밀’인 셈이다.
1. 평등의 요구 - 황제 숭배 거부의 이유
우선 저자는 초기 기독교가 창세기 1-3장의 해석을, ‘평등권 보장’의 ‘인권백서’로 이해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황제숭배 거부의 사상적 근간이 창세기 1-3장에 있다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회는 성서를 통해서, 상대방을 새롭게 규정해낼 수 있었다. 즉, 세상이 신이라고 숭배했던 로마의 황제를, 교회는 ‘악마’로 의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유스티누스는 기독교인들이 엄청난 비밀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로마의 행정관들과 황제를 떠받치는 막강한 힘은 로마의 신들이거나 플라톤주의자가 말하는 현상이 아니라 바로 악마라는 것이었다. 기세등등한 악마의 힘은 인간을 타락과 파괴로 이끌었고 인간을 눈멀게 하여 만물의 창조주이자 모든 인간을 동등하게 만드신 하나님이 오직 한 분뿐이라는 진리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92)
만물의 창조주가 하나님이라면, 그를 제외한 세력은 악마일 뿐이다. 바로 이러한 단순한 사고가 기독교인의 정체감을 만들어주게 되었다. 유일신은 반대로 상대를 규정하면서 더욱 강화된 셈이다: "기독교인들은...모든 인간을 동등하게 창조한 유일신 하나님만을 모셔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93)
그들은 담대한 주장을 선포했다. 복음은 평등이며(113), 천부적 자질이다(118f). 기독교인들 볼 때, 특별히 원시적 예수와 바울의 금욕주의적 사고에 사로잡힌 관점에서 볼 때, 제국의 상태는 한 마디로 타락이었다. 저스틴과 클레멘츠는 “두려움을 모르는 육욕”으로 가득차 있는 제국을 공격했다(101). 이러한 주장은 제국을 위협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로마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었다. “로마 관리들은 , 로마의 신들과 황제들을 비난하는 기독교인들이 국가의 절대적 권한을 훼손하는 자들이라 여겼을 것이고, 또 종교적 편향위에 선 그들의 열정적인 선동이 불평분자들과 부랑자들, 특히 피지배 민족과 노예들 사이에서 반란의 불을 지필 수도 있으리라 여겼을 것이다. 그리하여 로마 당국은 위험한 기독교인들에 대해 어떠한 관용도 베풀지 않았다”(107).
2. 영적 성숙의 열망: 영지주의
교회는 질적으로 성장해야만 했다. 성장의 출발은 성서의 해석에 있었다. 그러나 기존의 해석은 문자적이며, 자구적인 읽기였다. 뭔가 심오한 주장이 요구되었다. 플라톤의 세계에서 헤브라이즘은 조금 가볍게 보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러한 시점에서 영지주의의 해석은 탁월한 돌파구였다. 비록 ‘분열을 조장하는 오만한 어정뱅이들’(127)로 평가받기도 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영적 깨달음에 대단한 자부심을 보였다(133). 이들이 이해한 창세기 1-3장은 전통적인 견해와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이브(영성) 아담(심령)의 분리와 결합 혹은 신성한 지혜의 스승으로서의 뱀(141)!
정통파들은, 아담과 이브가 완벽한 세상을 물려받았으나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해 해악을 세상에 퍼뜨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영지주의자인) 발렌티누스파는, 인간이 도덕적 선택을 할 정도의 자유를 받은 건 분명하지만, 우주의 창조 동인이기도 한 고통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은 자유롭지 않으며 그랬던 적도 없다고 믿었다. (148-51)
결국, 이러한 해석의 문제는 정통파 세력을 규합하게 만든다: “이레나이우스를 더욱 분노케 한 것은, 영지주의자들이 도덕적 절대주의를 거부하며 교회의 규율을 위반했다는 사실보다, 그들의 창세기 독해법이 자유의 메시지를 위협한다는 사실이었다. 창세기를 둘러싼 2세기의 논쟁은 기독교의 중대한 불일치를 노출하였고, 나중에 기독교 교리를 확립하는 계기가 된다.”(147)
이러한 불일치는 (결과론적으로) 정통파의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끝이 난다. 로마세계의 많은 사람들, 특히 일상생활에서 자유를 경험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기독교 설교자들은 영지주의자들의 것보다 더 호소력 있고, 평이하고 강력한 자유의 메시지를 전파했다. 정통파가 살아남은 이유는, 어쩌면 듣는 귀를 잘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할 정도이다.
3. 절제, 절제, 또 절제!: 되찾은 동정의 낙원
우리는 기독교를 절제의 종교로 이해하는데 익숙해 있다. 자기희생과 청렴한 삶이 기독교의 모토가 된 셈이다. 그러나 이것은 청교도적 신앙유산의 한 자락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최근엔 느림과 누림의 신학이 떠오르고 있지 않는가!
아무튼 초기 기독교는 창세기 1-3장을 해석하면서 낙원이야기에서 절제를 배웠다. 그러나 이것은 시대적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으며, 시대적 반발에서 나온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정체성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자유와 금욕을 동일시화한 독특한 세계이해”를 만들었다(157): “절제는 자유, 특히 로마사회와 얽히지 않고 그것에서 벗어날 자유를 제공했다.”(160) 이것은 기독교의 뿌리, 즉 유대교에 있어서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히브리의 역사 자체가 오랜 국외자의 역사이기에, 유대교 특유의 개인주의로 발전이 가능했던 것이다(161). 기독교인의 별명으로 ‘세상과 단절한 이들’을 제시한 저자는, idiot의 어원이 예수의 단절에 있다고 제시한다(161).
제국은 물질의 번영을 자랑했고, 날마다 벌어지는 낭비의 축제를 뽐냈다. 기독교는 이것을 세상의 구속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창세기를 통한 절제의 해석은 일종의 해방이었다(165). 금식은 창조 원칙으로 이해되었고(166), 천국의 열쇠였다(173). 특별히 제롬의 등장은 몇 세기 후에 등장하는 청교도들을 예견한다(184f).
4. 하늘이 바뀌었다! 낙원의 정치학
세상이 바뀌었다. 서슬 퍼런 칼로 위협했던 제국의 황제는 갑자기 하나님의 종으로 변신한다. 자유의 근거로써 이해된 창세기 1-3장이 새롭게 해석될 시기가 온 것이다. 바로 오늘날 정통 견해로 굳어진 원죄의 그늘로 이해된 것이다. 이제 자유로 와졌기 때문에, 자유의 해석은 폐기되고 원죄의 구속이 빈자리를 차지했던 셈이다(192f).
이러한 정통파의 대부는 누가 뭐라 해도 어거스틴이었다. 그는 인간을 욕망에 속박된 존재로 규정한다(202, 206). 그 자신의 ‘주관적인’ 경험을 토대로 주장된 것이었음에도, 아무도 반론을 전개하지 못했다. 아니 반론을 전개했지만, 그들은 승리하지 못했다. 어찌 보면 결과가 원인을 규정한 인류의 최대의 아이러니이다.
사실 어거스틴은 성서를 오독했다. 롬 5:12을 오독했다(208). 그는 인류의 자유를 제한하게 되는, 그래서 결국 지배의 정당성을 인정하게 하는 해석을 하고 만다. ‘손상된 본성의 유전,’ 달리 말해서, 그 유명한 ‘정자수태론’이 나온 것이다(212). 이제 인류의 자유는 갈 곳이 없다. 자유는 구속되어야 한다. 어거스틴은 권세를 옹호한다. 제국의 지배는 당연한 것이며, 교황권 역시 필수적이다(220). 당시 입맛에 맞는 정치적 선택이었던 것이, 절대적인 근간이 되었다. 그러므로 저자의 이러한 평가는 일리 있다: “타락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은, 가톨릭교회와 제국의 권력 간의 어색한 동맹을 대다수 가톨릭 기독교인들의 구미에 맞게 정당화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필수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234)
한편, 스키너의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가 생각난다. 왜냐하면 어거스틴이야말로, (스키너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정통적인 자유주의의 사상적 뿌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206,224): “자유란 '훌륭한 통치자'의 지배, 다시 말해 원로원이 승인한 훌륭한 통치자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것을 의미했다.”(224) 물론, 이 말은 어거스틴에 대한 칭찬이 아니다.
5. 죽음의 변화
어거스틴의 공헌(?)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5세기에 들어 기독교는 더 이상 감시의 대상이 되거나 박해받는 종교운동이 아니었고, 오히려 황제가 믿는 종교가 되었다. 인간의 타락, 그리고 그것을 극복할 정치적 수단에 대한 어거스틴의 이론은 새로운 정치상황에서, 인간의 자유를 내세운 이전의 이데올로기는 대체되었다(269). (이는 신명기적 역사의 연장선으로도 말할 수 있다.)
특별히 죽음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다시 말해, 자연적인 현상으로 여겨졌던 죽음이, 타락의 결과라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타락의 결과! 그 당연한 것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이러한 어거스틴에 의한 새로운 인식은 ‘정통파’의 확실한 무기였다.) 당시에, 어거스틴에 반대한, 즉 인류의 본성 지지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본성의 창조적 순결성을 주장했다(260, 265): Naturalia ergo necessaria sunt; possibilita autem voluntaria(따라서 자연스러운 것은 필연적이며, 가능한 것은 자발적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철저한 타락을 주장했다. 인간-유아기, 성, 죽음으로 볼 때-은 철저하게 타락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인류의 인식을 바꿔놓은 어거스틴의 영향력을 다음과 같이 효과적으로 기술한다:
아담의 의지가 자연의 사건들에 영향을 끼쳤고 인간의 과오로 고통이 생겨났다는 어거스틴의 일원론적이고 반자연주의적인 자연관은, 죄의식이라는 비용을 치러서라도 우리 자신을 통제 상태에 있는 존재로 상상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요구에 호소력을 발휘했다. 과학적 자연관과 일치하는 요소가 많은 듯한 율리아누스의 대안적 사고는, 사실 과학적이기라보다는 종교적이어서, 세상은 창조 때처럼 선하며 사람은 도덕적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고대의 믿음에 근거한 것이었다. (275)
저자에 의한다면, 죄의식이란, 역설에 기반 한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273).
저자는 책을 정리하면서, 진정한 기독교를 묻는다. 우리는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는, 그 허무맹랑하면서도 동시에 현실무감각적인 주장을 너무나 쉽게 선포하곤 한다. 이것은 아마도 사도행전의 교회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초대 교회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러한 측면에서, 초기 기독교 역시 이상적인 교회상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오히려 저자는 하나의 교회가 우리의 이상이 아니라, 다양했던 종교적 양상들이야말로 진정한 기독교였다고 주장한다:
진정한 기독교란 하나의 공동체나 특정한 어느 한 교구의 종교적 양상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진정한 기독교는 발렌티누스에서 율리아누스로 이어지는 이단자 계열은 물론, 아우구스티누스와 크리소스톰과 같은 성인 반열에 오른 사람들, 심지어 신약성서의 기록 그 자체이며, 아주 광범위한 영역에 걸친 다양한 목소리와 관점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엄격한 역사적 관점에서 판단할 때 하나뿐인 '진정한 기독교'란 없다. (281)
저자가 특정 종교에 헌신하지 않은 상태에서, 소위 말하는 세속적 종교전문가의 입장에서, 오늘날의 완벽해 보이는 기독교의 핵심교리는 사실 정치적인 선택이었다는 주장은, 중요한 외부자의 목소리임에 틀림없다. 어떤 면에서, 신약학자 바트 어만의 목소리와 공명되는 부분도 발견된다. 저자가 핵심적으로 주장했던 ‘진정한 기독교’의 무의미성에 대해서, 오늘날 다원화되어가고, 이것이 단순한 시대적 조류가 아니라, 삶의 본질이라는 점을 본질적으로 감지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저자의 주장은 되새김질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것은 한계설정이라는 ‘편가르기’의 다른 용어와 개념을 기독교가 어떻게 극복하는 가에 달려있는 불안한 미래이기도 하다. 한편, 창세기 1-3장을 중심으로, 그 짧은 본문이 만들어놓은 세계가 어마어마하다는 점에서, 한 사람의 해석자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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