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다 슈이치, 「악인」
아이들에게 아버지 혹은 어머니는 신적인 존재이다. 아이들이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표정을 짓고 콧노래를 부를 때는, 열에 열 부모의 손을 잡고 있을 때이다. 그렇기에 만약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그 부모의 손을 놓친 아이가 있다면, 그에게 세계는 멸망이다. 더군다나 만약 그가 부모에게 버려진 존재라고 한다면, 그에게 세계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신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고로 그가 세계를 창조하지 않는다면, 그 역시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자신이 창조한 세계에서 호흡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신의 보호와 은총을 받으며 자라나는 사람들과 차이를 보이게 된다. 차이는 크지 않는다. 그러나 민감한 사람들은 금세 엿볼 수 있다. 무엇인가 다르다. 눈빛, 손길, 그들의 숨결... 기존의 세계에서는 그들을 ‘악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세계를 창조한 사람들이 만나게 된다면, 그러니까 피조물이 아닌 사람들이 만나기라도 한다면, 그들은 친구가 된다. 왜냐하면 아주 오랜만에 그들은 천사를 보았기 때문이다.
책의 제목에서 연상이 되는 것은, 희대의 살인마에 대한 감성적인 혹은 사회 참여적인 호소였다. 왜냐하면 한 번 죽 훑어보면서 차례를 확인했는데, ‘누가 누구를 만났는가’라는, 혹은 그와 비슷한 ‘만남’을 소제목으로 책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연상된 것이 악인의 정체에 대하여, 그러니까 ‘악인’이라는 것이 만들어지는 개념이겠거니 하고 쉬운 마음으로 책을 집어 들었다.
속도감이 붙은 것은, 일본 소설 특유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미리 답을 던져 주는 작가의 속 시원한 내용 전개 덕분이었다. 거기에 담담하게, 그러면서도 간명하게 장면을 그려 넣는 작가의 인물 배치와 상황 설명이 한 몫 단단히 하고 있다.
책은 우연치 않게 살인을 저지른,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버림받은 경험을 가진 한 청년이, 다른 차원에서 버림을 받은 외로운 한 처녀와 만나게 되는데, 그 만남의 여정이라는 것이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지만, 그리고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살인자를 사랑하는 가슴 저린 순애보를 뒤로하고 운명적 이별을 선언하는 것으로 마치려고 하지만, 그렇지만 독자들은, 등장인물만큼이나 외로움에 지쳐버린 그런 독자들은 그들의 사랑이 천년의 그것이었음을 알게 하는, 그래서 사실 ‘악인’은 아니었다고 도덕적 판결을 내리게 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 같다.
일본사회가 한국사회보다 확실히 도시화의 폐해를 고민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남의 이야기라고 전혀 생각되지 않는 것은, 이야기의 등장인물을 한국사람으로 바꿔 놓아도, 전혀 어색한 부분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사람들도 외롭다. 우리의 문제는 바로 이 외로움이다(208, 252, 417). 고인이 된 마이클 잭슨의 ‘You are not alone’이 다시금 바람이 불고 있다. 외로움은 집착을 낳게 마련이다. 그러한 집착은 만족함보다는 인생의 씁쓸함으로 매몰차게 배반하기 일쑤다(271f, 448). 그래서 다시금 인간의 본질, 즉 “사람냄새”에 본능은 충실하게 된다(438). 책을 읽으면서 사람냄새를 맡아볼 수 있었다. 출구가 없는 사람들이, 이제 출구를 찾지 않고 서로를 바라볼 때, 냄새가 났다.
“누가 악인인가?” 악인의 정의란 과연 무엇일까? 악인은 역시 만들어지는 것 같다. 사회학적으로 말하자면 그렇다. 그래서 책은 한편으론, “살인이란 이렇게 이루어지는구나”라는 자조적인 생각까지 일어나게 만든다. 우리는 악인을 만나는가? 내가 세상에서 악인인가?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하는, 그래서 철학적인 반성까지도 가능하게 하는 읽기였다.
마지막으로, 작가의 날렵한 글쓰기가 매력적이다. 절대로 길게 쓰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자신의 목소리를 주장하려고 들지 않으면서도 독자들은 그의 세계에 푹 빠져들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는 ‘필요악’이라고 말이다. 그가 버림받은, 전적인 피해자이면서도, 동시에 ‘가해자’를 ‘피해자’로 만들어주면서까지, 그들의 짐을 지워내려고 했던 주인공의, 그러니까 ‘악인’의 마음 씀씀이는 이 책의 압권이다(466). 독자만이 진실을 누리기를 바라는 편집에서(468-71), 시간을 초월하면서 우연한 만남을 조장하는 신적인 지휘에서(424/459), 버림받은 장소를 만남의 장소로 변화시킨 극적 반전의 미학에서(346/407) 친절한 작가와 만날 수 있었다.
나를 만나는 사람은, 나를 악인으로 기억할까?
“요즘 세상엔 소중한 사람이 없는 인간이 너무 많아. 소중한 사람이 없는 인간은 뭐든 할 수 있다고 믿어버리지. 자기에겐 잃을 게 없으니까 자기가 강해진 걸로 착각하거든. 잃을 게 없으면 갖고 싶은 것도 없어. 그래서 자기 자신이 여유 있는 인간이라고 착각하고 뭔가를 잃거나 욕심내거나 일희일우하는 인간을 바고 취급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지. 안 그런가? 실은 그래선 안 되는데 말이야.” (448)
인생은 춥다. 눈물만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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