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반은 따고 먹는다. "국가의 사생활"?? 국가와 사생활이라는 것이 조화되기 어려운데, 거기에 '의'를 붙여 놓으니, 독자들이 '뭐야??'하고 달려들게 마련이다. 저자는 이렇게 일종의 모순법을 상당히 선호하는 작가인 것 같다. 거기에 대구적인 방식으로 세계와 인물을 묘사하니, 그 읽기가 한쪽으로 확 쏠리지만은 않는 균형감각이 있다.
형식상 조명도와 리강은 서열이 같았지만 정말 그렇게 믿고 있는 자는 조명도를 포함해서 단 한 명도 없었으며,
정말 그렇게 믿고 싶어 하는 자도 조명도를 포함해서 단 한 명뿐이었다. (p.49)
이 책은 미래를 그려내는 전형적인 입장에 서 있다. 미래는 전체적으로는 암울하지만, 개인에게는 새벽이라는 입장이다. 누구나 '씁쓸한' 통일한국을 상상해내기 어렵지 않겠지만, 저자는 객관적인 자료를 근간으로, 또한 이것을 절대로 외부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미래의 통일한국이 얼마나 비참할 수 있는지를 예견한다.
통일 대한민국은 이북 사람들에게 뼈아픈 상실 그 자체였다.
따뜻한 남쪽 나라의 동포가 미리 건설해 놓은 자본주의에 편입만 하면
언젠가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부를 누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이남 사람들은 이북 사람들을 게으르고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라고 모욕했다.
이북 사람들은 이남 사람들이 거만하고 인색하다며 비난했다.
이북 사람들은 자신들이 통일 대한민국의 국민이 아니라
지금은 유령이 되어 버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민일 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미루어 대강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북 사람들과 이남 사람들은 서로가 달라도 이토록 처절하고 이 갈리게 다를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p.100)
이러한 통일한국을 설정한 작가는 또 하나의 세계를 그리고 있는데, 바로 서울에 위치한 이북사람들에 의해서 세워진 '조직세계'이다. 한 조직원의 의문의 죽음으로 시작된 미로가, 결국 통일이전 북에서 제작된 세균무기를 악용해서 세상에 새로운 출발점을 알리겠다는 그 조직세계의 보스의 계략을, '리강'이라는 주인공이 한 여자의 도움을 받고 또한 장애물인 조명도를 물리치며, 결국엔 무너뜨리면서 해결된다는 내용이다. 상당히 영화적 상상력이 아닐 수 없으며, 그렇기에 간결하고 우연하며 비약적이다.
바로 우리의 일이 될 수 있는, 유력한 미래 예견 중에 하나이므로, 매우 심각한 읽기가 의도된 것은 아닌 것 같다. 내 생각에, 소설은 대화체와 서술체가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고 본다. 쉽게 질려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가 바로 서술체이다. 느닷없이 등장하는 작가의 정신세계가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이 서술체이다. 등장인물의 생각이나 혹은 주변의 묘사를 통해서, 저자의 냉철하고도 비판적이며, 혹은 몽환적이면서도 미래적인 세계관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러면서 독자는 대화체의 급격한 사건 전개에서부터 잠깐 휴식을 취하고, 보다 깊은 읽기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내 생각에, 저자는 서술체를 너무나 정보제공적이며, 혹은 무미건조한 교훈조로 일관한 것 같다. 아마도 통일한국을 어떻게라도 보여주기 위해서 정보를 제공해줄 수 밖에 없었으며, 이러한 세상에 대한 일종의 예언자적 심정으로 독자에게 침통한 처세관을 알려주려 작심한 것 같다.
너 말이야,
뭐하는 놈인 줄은 모르겠는데, 한국에서 출세하고 싶거든 절대 비판하지 마라.
비판은 곧 죽음이다. 죽음.
정 하고 싶은 예기가 있거는 열라 큰 그림을 그려서 얘기해. 못 알아듣게. . . .
어떠한 변화도 기대해선 안 돼. 까불다간 죽는 거야.
네가 비판하고 싶은 게 뭐든, 비판하지 마라.
한국에선. 근신이 너를 지키며 명철이 너를 보호하여 악한 자의 길과 패역을 말하는 자에게서 건져 내리라.
잠언 2장 11절로 12절 말씀, 아멘. (p.156)
작가는 (굳이 말하자면) 아마 기독교인인것 같다. 한국교회의 그림자를 나름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왠만한 것은 알겠지만 말이다.) 작가가 볼 때에 사회의 최소한의 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신앙의 호소는, 책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열심있게 전도하는' 할머니와, 비록 술과 몸을 파는 여인이지만 알콜이 들어가면 어린 순수함으로 돌아가는 '양미'라는 여자에게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사회는 전반적으로 가망이 없다. 그럼에도 작가는 책임감이 있다. 내가 볼 때, 그게 바로 작가가 말하는 '변화'인 것 같다. 앞서서 변화를 기대하지마라는 선포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가장 무서운 독사의 이빨이라는 것을 알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면 대결이 작가의 선택인 것 같다. 사실 작가는 정면 대결로 시작한 셈이다(p.9-10).
그 이야기는 작은 알에 대한 이야기도, 거대한 물고기에 대한 이야기도, 거대한 새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변화 그 자체였다.
그것은 지극히 사소한 존재가 강하고 아름다워진다는 이야기였다.
작은 알이 거대한 물고기가 됐다가 또 거대한 새가 되는 변화.
거대한 새란 자기를 초월해 위대한 변화의 가능성을 실현한 자다. . . .
그는 하나의 알에서 출발한 이 분단된 민족이, 거대한 물고기가 거대한 새가 되어
해일과 폭풍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변화의 장관을 펼쳐 내야만 희망이 있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함과 동시에
그 찾기 힘든 이야기의 본색을 어린 손자에게 마지막 선물로 주었던 것은 아닐까? (p.212-3)
우리의 미래는 과연 어떠할 것인가? 사실 그것은 현재에 달려있다. 여전히 우리에게는 '피의 흔적'과 '상징이 되어버린 상처' 투성이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p.257). 작가의 말대로 통일은 준비되어있지 않은 사람들에겐 지옥일 수 있다. 그래서, 달리 생각하자면, 국가와 사생활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짧은 장편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다. 요즘 느껴지는 것이지만, 절정(클라이맥스)이라는 부분이, 소설에서건 영화에서건 상당히 압축적이며, 반전스러우며, 의외적이고, 그래서 한편 허무한 경향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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