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만 루시디, 「악마의 시, The Satanic Verses」
"우리 인생의 허영을 고발하고, 상처를 치유한다."
올 여름 가장 인상 깊었던 읽기는 바로 「악마의 시」였다. 사실 이 책을 가장 먼저 읽었지만, 감상을 남기는 일이 가장 마지막으로 밀렸던 이유가, 그토록 깊었던 읽기의 여운이 몇 번의 가벼운 타이핑으로 날아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일종의 두려움 때문이었기도 했다. 그렇다. 이 책은 그냥 가슴에 품고만 싶은 걸작이다. 명품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책을 읽으면서 두 개의 다른 소설이 떠올랐다. 첫 번째는 움베르토 에코의 「바우돌리노」였다. 이 책은 읽는 내내 ‘내가 마약을 한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4차원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그럼에도 에코 특유의 잡다하고 하찮은 것을 포장하는, 다시 말해서 새로운 무엇인가가 늘 등장하는 그의 이야기에 푹 빠져버리고 마는 그러한 능력이 느껴졌었는데, 바로 「악마의 시」가 그러한 부류에 적합한 것 같기 때문이다. 루시디는 타고난 말 재주꾼인 것 같다. 천일야화의 능력이 그에게 있는 것 같다. 말도 안 되는 작품의 설정에도 불구하고, 즉 두 사람의 주인공이 한 명은 천사와 같은 후광이 생기고 또 한 명은 염소와 같이 외형이 변하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야기는 언제나 다음 페이지를 향해서 독자의 손길을 끊임없이 끌어당기고 있기 때문이다. 루시디가 전해주는 이야기는 어떤 것은 유쾌하고 또 어떤 것은 마치 잠언과 같은 지혜도 느껴진다. 특별히 끊임없이 쉼표로 일관하면서 길게 말을 늘려가는 기술은, 정말이지 번역가를 두 번 죽이는 작가의 익살이었다. 두 번째로 연상이 되는 책은 헤르만 헤세의 「지와 사랑」 혹은 「나르시스와 골드문트」였다. 이 책에서 헤세는 두 사람을 등장시킨다. 지적인 사람(나르시스)과 정적인 사람(골드문트)의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마치 인간의 우뇌와 좌뇌가 아나로그적인 밸런스를 어떻게 맞춰 가는가에 대한 성찰을 느끼는 것과 같이, 「악마의 시」 역시 두 사람의 운명적인 엇갈림 혹은 그들의 선택을 통해서 인생과 세계의 의미를 묻고 있는 것 같다. 헤세의 글 속에서는 누가 과연 인생의 승자일까? 골드문트가 아닐까 라는 나름의 답을 가지고 있었는데, 「악마의 시」에서는 어쩌면 헤세와는 반대로, 지적이라고 할 수 있는 참차 혹은 살라딘으로 느껴진다. 아무튼 원서의 표지에 그려진 두 인물이 서로 붙잡고 뒹구는 모습에서, 이러한 연상은 억측은 아닌 것 같다.
일단 배경적 지식이 없는 사람으로서, 「악마의 시」라는 제목이 함의하고 있는 종교적 혹은 정치적 무게감을 쉽게 인지할 수 없었다. 인터넷을 보니,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무함마드가 유일신교에 위배될 수 있는 선언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선언이 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악마에 의한 것이었다는, 후대의 이슬람 법학자의 종교해석이 ‘악마의 시’란 제목의 배경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인류 최대의 지적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의 근간을 흔들릴 수 있을 위협적인 사고에 대해서, 그 종교의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은 간단하게 ‘그건 악마의 짓거리이다’라고 했던 것에 대해, 작가적 상상력을 가지고, 바로 그러한 현상이 삶의 모순이자 혹은 반대로 삶의 미학이라고 묘사한 것 같다. 그래서 한 때 유행했던, ‘개그는 개그일 뿐 토를 달지 말자’라는 캠페인이 무색할 정도로, 소설을 소설 이상의 차원으로 생각한 종교적 열심당의 분노를 샀던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배경적 지식이 없다 하더라도, 책은 종교 특별히 이슬람에 대한 더 나아가 인생 자체에 대한 풍자를 교묘하게, 탁월한 입담으로 무장하여, 화려하게 치장하고 있다. 그래서 멋진 「악마의 시」가 되었다.
이야기는, 나중에 역자의 소개를 통해서 알게 된 바와 같이, 전체 9장에서 홀수 장은 실제를 보여주며 짝수 장은 일종의 환상적인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 그러고 보면, 어떨 때는 「바우돌리노」의 세계였고 또 어떨 때는 「지와 사랑」의 세계였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던 것이다. 이러한 작가적 구상으로 이야기의 중심을 잡기가 쉽지는 않지만, 비교적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다. 두 남자, 즉 배우와 성우로 한 가닥 했던 두 남자의 좌충우돌 자기 찾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 조금 살을 붙이자면, 이 두 사람이 우연히 비행기 사고를 당하게 되고, 기적적인 생존 이후 한 사람(배우였던 지브릴)은 이상 현상으로 머리에 후광이 생기는 일종의 ‘천사증후군’이 발생하고, 또 한 사람(성우였던 살라딘)은 역시 이상 현상으로 인간의 외형이 사라지고 염소로 탈바꿈하게 되는 끔직한 유전자 변이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의 인생길은 예상하는 것처럼 나뉘게 된다. 결국 신이 된 지브릴과 반대로 악마가 된 살라딘이 된 것이다. 웃긴 것은 이 지브릴에 의해서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조종되었다는 설정이고, 또한 염소 인간이 참 사랑을 갈구하게 되는 설정이라고 하겠다. 이렇게 극을 달리는 인물의 설정이지만, 놀랍게도 그들의 최종적 운명은 천사 지브릴의 타락 혹은 자살과 반대로 악마 살라딘의 회심 혹은 회복으로 나타나고 있다.
굳이 ‘악마의 시’라는 주제의 성격을 찾는다면, 종교와 인간의 투쟁의 비겁한 결과물을 일컫는 것이라고 생각하고자 한다. 즉, 저자는 우선적으로 앞서 ‘악마의 시’의 배경적 이해와 같이, 무함마드(책에서는 ‘마훈드’로 등장)의 정책적 혼선을, 지브릴의 혼동의 결과였다고 제시한다. 종교라는 것이 생각보다 그렇게 완벽하지 않다는 작가의 조소가 진동한다(상권 184f):
지브릴은 한 가지 사소한 사실을 알고 있는데, 지극히 사소하지만 여기서는 약간의 문제가 될 수 있는 일, 그것은 바로, 둘 다 나였어, 바바, 처음에도 나였고 두 번째도 역시 나였다고. 내 입에서 나온 말, 앞서 선언한 것도 그렇고 이번에 부인한 것도 그렇고, 시와 반시, 올바른 시와 뒤집힌 시, 그 모든 것, 우리가 다 알다시피 내 입은 저절로 움직였으니까. 마훈드는 자힐리아로 달려가며 투덜거린다. “지난번엔 악마였어. 하지만 이번엔 천사가 틀림없어. 나를 땅바닥에 눕혔으니까.”
두 번째로 등장하는 ‘악마의 시’라는 초점은 정치가 혹은 종교가의 손길에 의해서 조율되는 종교의 무능력을 꼬집는데 사용된다. 우선 이맘(내가 볼 땐, 호메이니를 상정하는 것 같다)이라는 사람에 의해서 종교가 움직이고 있다고 작가는 이해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서, 호메이니가 모하메드를 이용하고 있다고 작가가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처럼 호메이니가 불호령을 내렸던 것을 아닐까? (상권 311-3):
도시의 어두운 문간마다 머리를 가린 어머니들이 사랑하는 아들을 행렬 속으로 밀어넣는다. 가거라, 순교자가 되거라, 필요한 일을 하거라, 목숨을 바치거라. 그때 육체 없는 음성이 말한다. “저들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시겠지요. 느리게 걷는 저 사랑의 힘을 견뎌낼 수 있는 폭정은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브릴은 눈물을 흘리며 대답한다. “이건 사랑이 아니오. 증오요. 저들은 그 여자에게 쫓겨 그대의 품에 뛰어들었을 뿐이오.” 그러나 그의 설명은 빈약하고 피상적인 것처럼 들린다. 이맘의 음성이 말한다. “저들은 나를 사랑합니다. 나는 물이니까요. 나는 다산이고 그 여자는 죽음이니까.” .... 이맘의 힘이 지브릴을 움직이며 그의 손에 번개를 쥐어주고 마침내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제 거대한 괴물로 변한 이맘과, 결국은, 물이 포도주를 이겨낸 승리의 시각이 왔다.
그리고 종교가의 손길에 의한 ‘악마의 시’ 역시 찾아볼 수 있다. 작가는 종교의 맹목성을 지적한다. 즉 종교가 나름의 경전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그래서 그 경전에 무한한 가치와 권위를 실어주고 있다지만, 실상 그 경전의 허술함 다시 말해서 경전을 경전으로써 대우하지 못하고 또한 경전으로써 전수되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종교 자체의 최대의 약점을 작가는 꼬집고 있다(하권 116):
마훈드의 서기관(살만)의 장난: 곧 악마의 시, "예언자의 발치에 앉아 규정 규정 규정을 받아적을 때마다 그 내용을 몰래 바꿔놓기 시작했다" ... "내 속된 말들로 신의 말씀을 더럽혔으니까. 그렇지만 이거야 원, 신의 사자라는 사람이 계시의 말씀을 보면서 내가 바꿔놓은 어설픈 말들을 가려내지 못한다면 그건 무슨 뜻일까?"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악마의 시’라는 요소는 인간의 본성에 들어있는 사랑에의 열정 혹은 그 왜곡된 복수에서 나타난다. 천사(지브릴)과 악마(살라딘)를 연결해주는 요소들은 몇 가지 있었는데, 그 중에 핵심적인 것이 두 남자 사이의 한 여자였다. 여기에선 지브릴이 살라딘의 여자를 빼앗는 그림이 나오게 된다. 이에 살라딘은, 그가 본래 성우였기에, 장난전화라는 치사한 방법을 통해서 지브릴을 복수하게 된다. 사실 그 과정은 상당히 섬세하며, 창조적이며, 한편으론 단순하다. 두 인물의 극한 대조적인 운명에서 이들을 처절하게 갈라놓은 것은, 인간의 본성 즉 ‘전부를 들키게’ 되는 상태였다(하권 201f). 내가 신뢰할 수 없는 사람에게 벌거벗기는 상태가 용서할 수 없는, 인생의 치욕이라는 것이다. 바로 살라딘이 지브릴에게 이러한 치욕을 당했고, 최후의 복수가 바로 ‘장난전화’였던 것이다: (다양한 목소리로) “난 네가 지난여름에 한 짓을 알고 있다!” 살라딘의 목소리에서 악마의 시는 부활한 것이다(하권 231).
사실, 일관된 사건의 진행사항을 치밀하게 좇아가기 보다는, 오히려 작가의 무한하고 다양한 세계를 풍성히, 자유롭게,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이 이 책이 준 배려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종교라는 것이 그 자체로 악마의 시가 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하권 271), 화려한 수사 속에 감취어진 날카로운 칼날을 느껴볼 수 있었다. 아무튼 재밌다 진짜 재밌다. 지브릴과 살라딘(혹은 참차), 그들과 함께 사막과 마천루, 과거와 현재, 상처와 치유를 함께 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한 여름이었다. 인터넷에서 루시디의 사진을 찾아 보았는데, 액션영화에서 악당으로 등장할 법한 마스크로 놀랐고, 더욱 놀라운 것은 완전 미녀를 얻은 승리자의 모습으로 그의 사진이 도배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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