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두막'
오래된 가요에서나 나올법한 그림이 그려진다.
푸른 초장에 파란 하늘에 산들거리는 바람을 맞으며
외로이, 하지만 서글프거나 초라하지 않은, 오히려 세상의 마천루를 조롱하는 듯한 낮음으로 자리를 지켜나가는,
그러한 포근함의 고향이 바로 오두막일 것이다.
'Shack'?
사전을 찾아야했다. '판잣집!'
판잣집은 과연 어떤 그림을 그려야만 할까?
도저히 그려볼 수 없다. 이곳은 직접 보지 않는다면 떠올리지 못하는 장소일 것만 같다.
사전에는 수리되지 않은 상태의 매우 작은 집이라고 되어있다.
'오두막/혹은 판잣집'이란 책을 읽었다.
책은 (나중에서야 알았는데, 픽션이었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에게 심한 상처를 받고 성장한 한 남자의 자기 치유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그 과정은 상당히 충격적이며 또한 파격적이다.
충격적이란 말은, 자신의 막내딸이 연쇄살인범에게 납치를 당해서 시신을 찾지 못한 상태로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며,
파격적이란 말은, 자신의 딸이 살해된 '판잣집'에 다시 찾아가서 생각 밖에 있었던 하나님과 동고동락을 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지를 겸허하게 수용하게 되고,
그 결과로, 그는 아버지를 용서하고 딸에게 용서를 받으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매우 단순한 이야기임에 분명하다.
더군다나, 매우 그럴듯한 이야기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적인 틀이 매우 탄탄한 사람들의 눈에는, 저자가 마지막에 20번 넘게 수정을 거쳤다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신학적인 논쟁점을 피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점을 알 수 있지만, 저자가 그려내는 (세 분) 하나님이 상당히 편협하며 혹은 영지주의적으로 보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요한복음의 패러프레이즈를 보는 듯한 면이 많이 있었던 것 같다. (잠언에서 나오는 지혜를 또 하나의 성령의 대신물로 보는 것은 확실히 작위적이다.) 성서를 잘 모르거나, 기독교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아마도 많은 영화나 소설들이 차용되고 있는 것 같이 느낄지도 모르겠다. 메트릭스에 나오는 '오라클'의 서글서글한 할머니의 모습이 바로 '파파'일 것이다. 신비주의적으로 보이는 많은 내용들이, 설령 엉뚱한 신학으로 변질될 우려도 없지 않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은 신학적인 사변이나, 신비적인 주장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저자가 많이 표현하고 있듯이, "거대한 슬픔"의 존재가 모든 사람들에게 내재하는 실존이라는 것이며, 그러한 슬픔은 반드시 치료되어야만 하며, 또한 치료될 수 있으며, 바로 하나님이 치료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 책은 상당히 설득적이다.
일종의 신정론에 대한 현대의 심리치료적인 해석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소설은, 한편으로는 구약의 욥기와 상대적으로 공명한다. 욥기에서 욥이 부단히 신을 찾기 위해서 애를 쓰지만 그럴수록 멀리 떨어진 신에게 점점 치를 떠는 상황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결과적으로 초월적인 존재로서 인간의 '인간다움'에 대한 비참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자괴감으로 혹은 전적인 복종으로 "스스로 거두어 들이고/melt into nothingness" 자복하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반면(욥 42:6), [오두막]에서 하나님은 직접 초청의 편지까지 쓰시며, 매끼니마다 몸에 좋은 유기농의 음식을 만드시며, 시공간의 자연법칙을 깨뜨리는 능력으로 주인공을 위로하고 있다. 고대인의 욥에게 주권적인 하나님의 '행위'는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면, 현대인의 맥에게는 물론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기는 하겠지만, 하나님은 최대한 이해되려는 존재로 등장해야 했다. 그 결과 욥은 그 유명한 '갑절의 축복'을 받았고(42:10), 맥은 연쇄살인범을 용서했다. 현대인에게는 고유한 채널이 있다.
생각이 비워지는 책이다.
마음이 정리되는 책이다.
눈물이 만들어지는 책이다.
시선이 고정되는 책이다.
"당신 인생의 근본적 결함은 나를 선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에요.
수단과 결과, 개읹거인 삶의 모든 과정이 나의 선함에 덮여 있다는 것과 내가 선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당신은 내가 하는 일 전부를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신뢰할 수 있겠죠."
- 사라유 (198)
"그래요. 내가 당신의 생명일 때, 순종은 나의 인성과 본성을 가장 자연스럽게 표현해주죠.
순종은 관계 속에서 새로워질 당신의 본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기도 해요."
- 예수 (232)
"맥.. 나도 안다. 나도 알아."
- 파파 (384)
성서에는 이런 말이 없다. 그러나 성서를 오랫동안 묵상하다보면 이 말을 누구나 들을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의 모든 말들이 가슴에 오래동안 남아 있을 것 같다. 책을 덮으며,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골방에 들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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