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독서] 좋은 책 이야기

이언 매큐언(2001) - [속죄]

진실과열정 2009. 11. 3. 10:30

전문가의 세계는 그들이 사용하는 어휘에서 벌써 그 독특한 차이를 보여준다. 성서를 연구하면서 '고고학' 분야의 생소하고도 쉽게 우리말로 그려내기 어려운 특성 때문에 곤혹을 치뤘던 적이 적지 않았다. 이렇게 볼 때, 특정 집단이나 사회에서만 통용되는 언어를 방언이라고 하는데, 기독교와 같은 종교 분야 역시 나름의 언어 세계를 가지고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속죄'라는 것이다. 종교에서는 유한한 인간과 무한한 신의, 본질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존재론적인 '사이성'의 문제를 더욱 벌어지게 하는 근원적 원인-소위 '죄'-을 제거하는, 그럼으로써 인간과 신의 존재론적인 간격을 줄일 수 있게 해주는 개념으로, 이 '속죄'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특별히 기독교에서 속죄(Atonement)를 사용하는 것은, 그러한 근원적 원인을 제거하는 일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해결되었다고 믿는다. 어찌되었건, 속죄라는 말은 쉽게 이해하기도 어렵고, 그렇기에 이러한 제목으로 어떠한 글을 써내려가는 것 역시 매우 대담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매서운 첫 겨울을 알리는 11월을 맞이하면서 들은 책이 바로 이언 매큐언의 [속죄]이다. 무엇보다도 작가의 구성방식이, 그리 독특한 것은 아니었지만, 신선했다. 작가는 대리작가를 작품속에 넣어서 그의 손을 통해서, 그의 세계를 통해서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선사했다. (이런 방식을 액자방식이라고 하나?) 저자는 브리오니라는 사춘기 소녀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그래서 그녀가 겪었던 자신의 일을 스스로 써내려가는 방식으로 작품을 구성했다. 으례 그러한 것에 더하여, 브리오니는 독특한 재능으로 인해서 사춘기 시절의 그 위험한 시기에 '큰 일'을 내고 만다. 다시 말하면, 브리오니는 그 어린 나이에서부터 벌써 작가였기 때문에, 밖에서 일어난 일을 '훌륭하게!' 자기 안에서 일어난 일로 만들어내는 천부적인 능력(혹은 파멸적인 착각)을 발휘하곤 했던 것이며, 바로 그러한 자기 세계 안에서 타인의 세계를 해석하려는 과욕으로 인하여 자신이 제일 가깝게 생각했던 사람이 타인으로 변화되는 엄청난 인생의 역경을 거치게 된다. 인류학적인 개념으로 에틱(etic)과 에믹(emic)의 충돌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 아무튼 보다 자세히 말하면, 유난히 더웠던 여름날의 초청파티를 전후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 진짜 작가가 내세운 브리오니의 자서전적 소설 방식이라는 독특한 구성으로 인해서 보게 될 때, 언니 세실리아와 의대생을 준비하는 로비라는 남자 사이에서 일어난 지극히 자연스러운 남녀관계(러브스토리!)에 대하여, 브리오니의 에틱적인 그러나 파멸적인 착각으로 자신이 관찰한 그 두 사람 사이를 전혀 엉뚱하게(정신병자[로비]의 추근거림) 해석하고 만 것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초청파티가 막 시작하기 전에 발생한 '성폭행 기도' 사건에 대해서(235-42), 또한 바로 거기에 천재적인 상상력을 소유한 브리오니가 있었기에(329), 전혀 관계하지 않았던 로비가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었다. 사건의 시작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한 사람의 착각이, 더구나 그의 소신있는 확신이 다른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조정할 수 있는가? 그것도 사회적으로 아무런 힘이 없는 사춘기의 한 소녀가 말하는 것이 세계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가? 놀라운 시도이다. 저자는 이후로 벌어지는 2차세계 대전에, 어찌보면 첫단추로 인해서 운명적으로 전쟁에 휘몰리게 된 두 남녀(세실리아와 로비)의 죽음의 세계를 실감나게 그려낸다.

 

중요한 전환점은 이것이다. 만약 그 소녀가 철이 들어서 자신이 한 일이 무엇인지를, 늦게 너무나 늦게 알았다고 한다면, 과연 어떻게 우리는 그 무너진 삶을 주워 모을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우리 세계에서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소위 '어리석은 자기 확신형 인간'이, 특별히 고위직일 수록, 많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엉망이된 삶의 실타래를 풀어낼 수 없다는 인간의 무능력이 처절하게 느껴질 때이다. 철이든 소녀는 문학가의 펜을 놓고 고생의 길인 전쟁 간호사가 되면서 자기 만의 고행의 길, 혹은 속죄의 길로 들어선다. 우리의 오늘은 과거의 속죄인 셈이다(391f). 그러나 궁극적인 속죄란 있을 수 없는 것, 자신이 무너뜨린 언니와 로비를 만나지 못한다면 말이다. 소설은 결말에서 이들의 만남을 주선한다. 우리는 그 만남에서 가족의 화해를 기대할 수 있을까? 과연 그 가족은 화해할 수 있을까? 반드시 화해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들의 관계에서 속죄라는 것이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저자는 속죄란 즉흥적으로 해결되는, 갖다 붙이면 상처 없이 떨어지는 놀라운 매직 밴드가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물질적 존재라는 것, 쉽게 파괴되지만 쉽게 회복되지는 않는 존재......"(425) 오히려 속죄는 자신이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달을 때, 비로소 시작되는 삶의 새로운 장인 것이다(491).

 

마지막에 진짜 저자가 담담하게 풀어내는 사건의 전말은 또 하나의 반전이었고, 속죄라는 무거운 혹은 불가해적인 주제에 대한 '대리인'의 입을 통해 말한 것 역시 탁월한 통찰이었다:

 

"지난 오십구 년간 나를 괴롭혀왔던 물음은 이것이다. 소설가가 결과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과 같은 존재라면 그는 과연 어떻게 속죄를 할 수 있을까? 소설가가 의지하거나 화해할 수 있는, 혹은 그 소설가를 용서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소설가 바깥에는 아무도 없다. 소설가 자신이 상상 속에서 한계와 조건을 정한다. 신이나 소설가에게 속죄란 있을 수 없다. 비록 그가 무신론자라고 해도. 소설가에게 속죄란 불가능하고 필요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속죄를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다."(521)

 

 


언제나 그렇지만,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는것 같다. 제목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도 아니고, 단지 독자의 무심한 감정에 파문을 하나 일으키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 같다. 한 사람의 해석자로서, 내가 세상을 어떻게 파괴하고 있었는가를 반성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석은 영원하며, 우리는 그 상처를 입고 살아갈 뿐이다. 감사한 것은, 착각이 자유라고 한다면, 사랑은 위대하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