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구약 성서

Auctoritas vs. Authority

진실과열정 2008. 1. 13. 12:32

Auctoritas vs. Authority

 

어느 사회이건 맞이하는 새해에는(집단의 출발점에는) 빼놓지 않고 권위가 문제가 되는 것 같다. 우리나라 정계는 집권한 쪽에서는 박근혜의 헛기침에 전전긍긍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집권에 실패한 신당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편에 '손'을 잡기는 했지만 역시 권위의 문제를 인정받는 것이 당면 과제일 것이다. 회사나 학교 할 것없이 새로운 발령과 새로운 질서로 인해서 제 3의 권위를 얻어내는 것이 성공의 첫걸음임에 분명할 것이다. 권위하면 교회도 빠질 수 없을 것이다. 국회에서는 '아니오'라고 할 수 있어도, 교회에서는 '예'만 해야한다. 사실 국회는 서로 다른 정당의 모임이기에 가능하고, 교회는 서로 같은 신앙인의 모임이기에 가능하다. 그러나 과연 서로 같은 신앙인들이 모였기 때문에 '예'라고 하는 것일까? 정말로 교회만큼이나 제 3의 권위에 매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귄위라고 한다면, 힘(Power)과는 다른 차원이라고 생각한다. 힘과는 달리 '권위'는 법적인 면이 추가되는 차원에서, 거부할 수 없다는 또한 거부해서는 안된다는 암묵적인 지배력이 존재한다. 그런데 권위(Authority)는 라틴어 Auctoritas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이 Auctoritas는 로마 사회에서 로마 시민 한 사람이 개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법적인 능력을 말한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전적으로 개인적인 단어였던 것이다. 개인이 없으면 사회도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이 단어는 로마 사회를 지탱하는 개인의 능력을 존중하는 태도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는 발전하면서 점점 퇴보한다. 개인은 사라지고 단체가 등장한다. Auctoritas는 사라지고, Authority가 등장한다. 어느 누구도 개인에게 '권위'라는 신적명사를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을 당연시화된 사회가 된 것이다.

 

포로기 이후 예루살렘에 돌아온 이스라엘은 새로운 권위의 인증으로 갈등을 겪었다. 기존의 세력과 신흥 세력이 이처럼 충돌하게된 경우가 없었기 때문이다. 역사는 언제나 신흥 세력의 개혁을 자랑한다. 에스라 7장은 좋은 그림을 보여준다. 페르시아 황제의 권위와 함께 '야웨의 계명의 말씀'(11절)의 권위까지 등에 업은 에스라는 천하제일의 권위를 자랑했다: '무릇 네 하나님의 명령과 왕의 명령을 준행치 아니하는 자는 속히 그 죄를 정하여 혹 죽이거나 정배하거나 가산을 적몰하거나 옥에 가둘지니라 하였더라'(26절) 그렇다면, 에스라는 자신의 권위로 무엇을 했는가? 물론 개혁이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잘라내기'와 '재정확보' 즉 '숙청과 집중'이었다. 십일조가 유래없이 강조되며(느 12:44), 그 동안 함께 생활했던 이방인은 버려졌다(스 10:3).

 

오경의 주요한 최종편집이 에스라 시대에 이루어졌다는 것이 신학학계 대부분의 공통된 의견이라고 볼 때, 우리는 말씀의 권위를 내세워서 이루어진 접붙임(재정확보)과 가지치기(이방인 제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말씀의 권위는 또 다른 사람들이 주장하고 나섰다. 그들은 이사야의 전통 아래에서 야웨의 권위(세속의 왕이 아닌 야웨의 진정한 왕되심)를 인정받았다고 확신했던 집단이었다. 어쩌면 그들은 외부인이었다. 주요한 역사적 내러티브(신명기적 역사, 역대기적 역사)에서 그들은 철저하게 제외되기 때문이다. 이사야 56장은 제 3이사야의 출발점을 잘 보여준다: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여호와께서 나를 그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말하지 말며 ...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3,7절)

 

  

에스라의 권위는 권위자들에게서 소유된 제한된 것(authority)이었다면, 이사야의 권위는 외부인에게 퍼져야하는 만민의 그것(auctoritas)이어야 했다. 언제까지 교회는 무지하게 보이지만 '다아는' 사람들에게, 권위를 들이댈 것인가.

 

2008.1.13.

진실과열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