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구약 성서

시편 45편: 고대이스라엘의 '왕과나'

진실과열정 2008. 1. 9. 12:20

시편 45편: 고대이스라엘의 '왕과나'

 

 

신명기에서부터 시작해서, 여호수아와 사사기, 사무엘서와 열왕기서까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자기 평가를 '신명기적 역사'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신명기에 두드러진 언약의 중심적인 사상이 반복되고, 이를 중심으로 다양한 형식들이 공통적으로 나타나있기 때문이다. 요시야 시대에 첫번째 신명기적 역사가들(Dtr1)은 다양한 전승들을 수집했고, 이스라엘 역사의 뼈대를 세웠다. 다윗 왕조의 기원이라고 볼 수 있는 사무엘하 7장 역시 신명기적 역사가들에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이었다. 많은 학자들이 사무엘하 7장의 해석을 놓고 훌륭한 견해들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신명기적 역사가들이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하버드 대학의 Frank Cross는 자신의 책에서(CMHE, 254이후), 1-7절까지가 나단 예언자의 옛 신탁으로, 8-11a까지를 신명기적 연결로, 11b-17절을 솔로몬 시대의 영원한 약속의 신탁으로 보기도 한다.

 

문제는, 사무엘하 7장의 신탁이 신명기적 역사의 모티프인 '조건적'인 것이 본래부터 있었는가(14절) 아니면 '무조건적'인가라는 점이다(16절, '영원히'). 상당히 많은 연구들이 신명기적 신학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편, John Collins(2004:236ff)는 고대근동의 왕조 이데올로기와 평행할 수 있다고 제시한다. 다시 말해서, '조건적'인 내용이라는 것이 단순히 신명기적인 특징으로 제한할 수만은 없다는 주장이다. 콜린스는 더 나아가, 시편 연구와 함께 충분히 고대이스라엘의 왕권 이데올로기(신학?)를 재구성할 수 있다고 제안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주변의 소국들도 그러한 이데올로기를 선언했기 때문이다(기원전 13세기 Hittite's Ulmi-Teshshup).

 

시편 45편은 그런 의미에서 다른 시편들과 함께(2, 72, 89, 110, 132), 고대 가나안 사회의 맥락속에 위치한 고대이스라엘의 왕권 이데올로기의 일부를 충분히 엿볼 수 있는 본문이 된다. 소위 결혼식의 노래라고 되어있는 이 시는, 다름 아닌 왕과 결혼식을 올리는 신부(장차 왕후가 될)의 기대감이 들어있다.

 

다음은 시편 45편의 새번역 본문이다. 우리가 고대이스라엘의 상황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읽는다면, 전혀 새로운 그림을 그리게 된다. 요즘 TV에서 볼 수 있는 사극, '왕과나'는 어떨까?

 

제 45 편: 왕실 혼인 잔치를 위하여(지휘자를 따라 소산님에 맞추어 부르는 고라 자손의 노래)
      1   마음이 흥겨워서 읊으니, 노래 한 가락이라네.

          내가 왕께 드리는 노래를 지어 바치려네.

          나의 혀는 글솜씨가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과 같다네. 

      2  사람이 낳은 아들 가운데서 임금님은 가장 아름다운 분,

          하나님께서 임금님에게 영원한 복을 주셨으니,

          임금님의 입술에서는 은혜가 쏟아집니다.
      3  용사이신 임금님, 칼을 허리에 차고, 임금님의 위엄과 영광을 보여주십시오.
      4  진리를 위하여, 정의를 위하여 전차에 오르시고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어 주십시오.

          임금님의 오른손이 무섭게 위세를 떨칠 것입니다.
      5  임금님의 화살이 날카로워서, 원수들의 심장을 꿰뚫으니,

          만민이 임금님의 발 아래에 쓰러집니다.
      6  오 하나님, 하나님의 보좌는 영원무궁토록 견고할 것입니다.

          주님의 통치는 정의의 통치입니다.
      7  임금님은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임금님의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주셨습니다.

          임금님의 벗들을 제치시고 임금님께 기쁨의 기름을 부어 주셨습니다.
      8  임금님이 입은 모든 옷에서는 몰약과 침향과 육계 향기가 풍겨 나고,

          상아궁에서 들리는 현악기 소리가 임금님을 흥겹게 합니다.
      9  임금님이 존귀히 여기는 여인들 가운데는 여러 왕의 딸들이 있고,

          임금님의 오른쪽에 서 있는 왕후는 오빌의 금으로 단장하였습니다.
      10 왕후님!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이십시오.

          왕후님의 겨레와 아버지의 집을 잊으십시오.
      11 그리하면 임금님께서 그대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임금님이 그대의 주인이시니, 그대는 임금님을 높이십시오.
      12 두로의 사신들이 선물을 가져오고,

          가장 부유한 백성들이 그대의 총애를 구합니다.
      13 황후님은 금실로 수놓은 옷을 입고,

          구중 궁궐에서 온갖 영화를 누리니,
      14 오색찬란한 옷을 차려입고 임금님을 뵈러 갈 때에,

          그 뒤엔 들러리로 따르는 처녀들이 줄을 지을 것이다.
      15 그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안내를 받아,

          왕궁으로 들어갈 것이다.
      16 임금님, 임금님의 아드님들은 조상의 뒤를 이을 것입니다.

          임금님께서는, 그들을 온 세상의 통치자들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17 내가 사람들로 하여금 임금님의 이름을 대대로 기억하게 하겠사오니,

          그들이 임금님을 길이길이 찬양할 것입니다.

 

 

그림이 똑같지는 않겠지만, 충분히 비슷한 그림이 나오지 않겠는가! 9-10절은 뭉클하기까지할 정도이다. 고대이스라엘에서 왕권은 고대가나안의 것이나, '왕과나'의 그것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6절을 보면, 심지어 왕은 '하나님(엘로힘)'으로 불리고 있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왕이 신격화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왕은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최근에 '대왕세종'이 새로운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우리는 사극을 통해서 현재를 본다. 아니 미래를 기대하는 것이다. 시편도 그렇고, 우리가 원하는 지도자(사무엘하 7장 8절의 '주권자'는 히브리어 '나기드'로 왕('멜레크')과는 다른 개념이다)도 그렇고, 진리와 온유와 공의가 조금이라도 더 나타날 수 있도록, 신적(혹은 국민의!) 허락을 받은 사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