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구약 성서

Waiting for Josiah: The Judges (by. Philippe Guillanme)-7장 번역

진실과열정 2007. 11. 28. 11:00
 

Waiting for Josiah: The Judges by. Philippe Guillanme (pp. 227-53 번역: 양지웅)



제 7 장

유대의 역사편찬에서의 사사기서:

사사기 1:1-3, 19-21, 36; 2:6-10, 20-3:6; 4:5, 11, 17, 21; 11:12-28; 21:25




사사기서의 마지막은 앞 장에서 다루었지만, 몇 개의 흩어져 있는 구절들이 여전히 고려되어야할 것으로 남아있다. 이런 구절들은 사사기서가 정경화되기 전에 가장 늦게 편집된 상태로 마지막까지 자리를 잡고 있었으니, 바로 소위 신명기적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하기 위해서, 또는 더 잘 표현하자면 예언 문학의 한 두루마리가 되기 위해서 여호수아서와 사무엘상서 사이에 삽입되었을 기간을 말한다.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서 사이의 변화는 모순되는 가설을 불러 일으켜왔었는데, 이는 2장에서 이미 다룬바 있다. 슈미트(Schmid)는 이 주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았는데, 그의 주된 관심은 족장 내러티브가 출애굽기의 모세 이야기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에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노트의 가설 안에서 여전히 작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슈미트는 창세기-열왕기하 안에서, 창세기서와 출애굽기서 그리고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서 사이에는 각각 중요한 중단(caesuras)이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다.

   첫 번째 중단은, 즉 창세기서와 출애굽기서 사이에서 발견되는 것은, 족장 이야기의 수집과 모세-출애굽 이야기에서부터 찾을 수 있는데, 그때까지는, 이 이야기들이 서로 무관한 문학적인 덩어리라는 것이다.

   두 번째 중단은, 즉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서 사이에서 발견되는 것은, 역사서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서 사이의 복잡한 변화는 아마도 사사기서가 여호수아와 사무엘-열왕기 둘 다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지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1

   족장 이야기가 출애굽-정복 내러티브와 또한 사사기-열왕기 내러티브와 융합된 것에 대해서, 슈미트는 여전히 매우 조심스러우며 그 연대를 페르시아 초반 동안이라고 본다.2 그러나 슈미트가 제시한 두 번째 중단은, 이 세 개의 책들이 포로 기간이라는 이른 연대에 연결되었다고 간주하는 노트의 신명기적 역사의 약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사사기서가 여호수아서 그리고 사무엘서와의 연결이라는 복잡한 문제는 (편집연대를) 바벨론 시기가 아닌 페르시아 초반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해결될 수 있다. 실로, 이것은 한걸음 내딛는 것이겠지만, 슈미트는 더 이상 날아가기 쉬운 전통이 아니라 책이라는 개념으로 작업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혀 다른 차원의 새로운 제안이라고 하겠다.3 슈미트는 사사기서의 독특성이 창세기-열왕기 모음집 사이의 그 어떠한 문학적 뭉텅이들에는 전혀 속해있지 않다고 증명한 바 있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은 여기에서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것들을 인정해 준다고 하겠으니, 즉 사사기서를 다른 예언서들과는 무관하게 읽어가는 것 말이다. 더 나아가, 슈미트가 바벨론에서 페르시아 시대로 약간의 시간 조정을 했었기 때문에, 이러한 조정이 프톨레미 시대까지도 나아가는 것은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연대설정이라는 문제를 다루기 전에, 여호수아서와 사무엘상서 사이에서 지금까지 독립적이었던 사사기서를 끼워 맞추기 위해서 사사기서에 삽입했던 과도기적인 자료들을 먼저 살펴보아야만 할 것이다.



여호수아와 사사기 사이의 추이


사사기 1장 1-3절: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사사기서의 서론으로 넣기

사사기 1장 1절: 사사기서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라는 간단한 말로 여호수아서 다음에 놓여 졌는데, 이것은 여호수아서를 모세-출애굽 이야기에 이어 붙이기 위해서 수 1:1에서 사용되었던 방법을 반복하는 것이다.4 모세의 경우와는 달리(민 27:18-23), 이러한 추이가 부자연스럽다는 것은 자명한데, 여호수아 다음으로 약속된 후계자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계자를 소개하기 보다는, 다음 구절은 이스라엘 자손이 야웨에게 질문하는 것과 관련된 정복 주제를 소개할 뿐이다: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 ????? ????????? ???????? ??, 삿 1:1b)’. 이 질문은 베냐민을 상대로 누가 먼저 올라가야만 하는지를 결정하기 위해서 벧엘에서 제기되었던 것을 재연한 것이다(????? ?????? ?????? ????? ???????? ??, 삿 20:18). 그러므로 삿 1장과 20장 사이의 모든 자료들은, 즉 사사기서의 전체 이야기는 연속적인 대재앙의 특징이라는 인식을 강하게 남겨주는데, 바로 삿 1:1의 가나안이 삿 20:18에는 베냐민 자손으로 교체되면서, 정복으로 시작했던 것이 내전으로 끝을 맺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연속적인 대재앙으로서 사사기 내러티브의 성격은 벧엘의 구원자책과 심지어는 요시야의 사사기서의 본래 메시지와는 눈에 띄게 대조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사기서 이후에 열왕기서(4권)의 서론을 위해서는 아주 딱 맞아떨어졌다.

   유다가 가나안을 치기 위해서 먼저 올라가야만 했다는 것은 매우 당혹스러운데,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서가 같으면서 연속적인 내러티브의 부분이라고 한다면 그렇다: 사사기는 여호수아서에서 그 어떠한 일도 발생하지 않은 것처럼 시작하고 있다. 심지어 아직도 정복이 시작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사실은 신명기적 역사가 이스라엘 역사의 완전한 표현으로서 처음 제시된 것이라고 주장했던 노트 계열의 학자들에게는 가시가 된다. 그렇게 훌륭하고 설득력 있는 작품이, 수많은 엉성한 전승들을 결국엔 서로 구별된 책으로 만들어 버리고야 말 그런 것으로 묶어 놓았던, 사려 깊지 못한 서기관들로 인해 난도질당한다는 것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블룸(Blum)의 시도와 면밀히 비교해보면, 그것이 얼마나 명석하고 대가처럼 보이기는 하지만,5 슈미트의 완전히 간단한 구조가 노트의 이론을 능가하는 독립적 책 모델의 우위성을 선호하는 논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사기서는 본래 정복 시기 이후에 이스라엘과 유다에서 발생했던 사건들과 관련하여 기록하려던 것이 아니다. 삿 1:1이 가나안 정복의 시작을 알리는 행동을 뒤로 옮겨 놓고 있는 것은 사사기 두루마리를 여호수아와 사무엘상 사이에 묶어두려고 했던 사서들에 관한 문제가 아니었다. 사사기가 처음부터 여호수아의 죽음을 언급하는 것으로 다시 시작하는 것은, 단순히 사사기를 정해진 연대기적 연속선 안에서 자리 잡고 있는 순서대로 읽으라는 것뿐이다. 실패한 전승들을 이유로 편집자들을 비난하기보다,6 우리는 그들의 선택이 얼마나 적절했었는지를 인식해야만 한다. 그 자체로 충분한 사사기서를 본래부터 들어갈 자리가 없는 순서 안으로 집어넣었을 때 유발될 수 있었던 어려움들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사사기 1장 2절: 삿 20:18의 ‘유다가 먼저 올라갈지니라’라는 신적 대답은 몇 개의 단어들이 추가된 상태에서 다시 등장한다: ‘보라 내가 (개역에는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주었노라(???? ??????? ???? ???)’. 과연 어떤 땅을 말하는 것이며 또한 그 땅 중에서 얼마큼을 유다가 정복해야만 하는지는 언급되지 않았다. 언급된 것이라고는 아도니베섹 사건의 시작과(4-7절) 시작부터 이스라엘 땅(Eretz Israel) 전체를 정복하는 사명이 바로 유다에게 있음을 확언하는 것이다. 요셉 가문과 다른 이스라엘 지파들이 이스라엘을 정복하는데 거의 아무런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22-34절에서 완벽하게 제시되고 있다. 이스라엘이 유다로 하여금 이스라엘 땅을 정복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유사 이래로 이스라엘은 평화롭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논의는, 팔레스타인 전체를 유다의 지배 아래 두도록 했던 마키비의 새로운 정복 상황의 시기였던, 기원전 2세기와 잘 들어맞는다.


사사기 1장 3절: 일단 유다가 먼저 올라가라는 야훼의 명령을 받자마자, 유다는 시므온에게 제비뽑아 얻은 땅을 정복하는 일에 함께 하자고 권하며, 이로써 수 13-21장의 분배(????) 개념이 시작되고 있다.7 시므온과 유다의 협력은 유다의 네게브 정복을 정당화하는 삿 1:18에서도 나오는데(제 2장을 보라), 그러나 1-3절이 이 책의 새로운 서론이 되기 전까지는 18절에서도 그렇고 삿 1장의 나머지에서도 제비는 언급되고 있지 않는다.

   이러한 세절은 여호수아와 사사기 사이에 교차하는 지점에서 정복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개의 개념들을 뒤섞어 놓아버렸다. 그것들은 요시야의 사사기서의 서론적인 이전의 구절들을 바꾸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왜냐하면 내러티브 조각의 시작과 끝이 편집적인 활동에 가장 많이 노출되었기 때문이다.8 그러나 침묵의 논증으로는 그 어느 것도 증명할 순 없을 것이다. 사사기 1장 4절의 ‘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그들의9 손에 넘겨주시니’라는 구절은 독립적인 사사기서의 서론으로 보기에 충분하다.

   비록 똑같은 이데올로기적 의도로 므낫세의 구원자책을 사사기서로 탈바꿈했던 같은 시기에 요시야의 이념주의자들에 의해서 여호수아서의 처음 형태의 초안이 작성되었을 것이겠지만, 이것이 두 개의 작품이 그 당시에 연속물로 나왔다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각각의 책은 자신의 논리가 있으며, 이 둘은 왕정 이전의 시대를 가정하는 것보다 7세기의 현실과 여전히 연결되어있다.

   사사기의 최근의 서론은 삿 1:1-2:5도 아니고 삿 2:6-3:6도 아니라,10 바로 삿 1:1-3에 있는 것이다. 이 세 개의 구절이 연대기적인 문제들을 해소하지도 않고서 사사기와 여호수아를 연결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연대기가 주요한 관심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집이 완성되어서 자신만의 정경적인 형태에 거의 도달했을 양쪽의 것으로, 이 책들을 함께 두었던 것은 일종의 업적이라고 하겠다.11 그러므로 몇 개의 조정이 필요하며, 이것을 이제 고려할 것이다.


사사기 1장 19-21절: 사사기와 여호수아를 조화하기

삿 1:19-21은 여호수아와 사사기가 서로 연결되었을 때 발생했던 가장 눈에 띄는 모순을 부드럽게 해주고 있다.12


사사기 1장 19절: 서기관은 그의 독자들에게 자신이 첨가한 부분에서는 삿 1:4에서와 같이  야웨가 유다에게 땅을 선물로 주는 것을 그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문제로 삼지 않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사사기 1장 18절은 유다가 가자, 아스글론 그리고 에그론을 취한 일을 선포하면서, 자신의 아버지 히스기야의 통치 기간 동안에 유다를 정복했던 므낫세 왕의 일들을 마무리한다(제 2장을 보라). 그러므로 삿 1:19에서, 서기관들은 야웨가 유다와 함께 있었고(???????? ???? ????) 유다가 평지의 거민들을, 그들은 철병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삿 1:19), 쫓아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산지만을 취했다고(???? ??????? ?????? ?? ??) 첨가한다. 점차 판본들은 유다가 취할 수 없었다라고 첨가하면서 논의를 ‘발전’시킨다. 단지 대부분의 히브리어 사본들은 난외주에 ????(be able to)를 확인하는 수준이지만 말이다. 사실, 히브리어 본문은 유다가 평야를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렇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조심스럽게 피하려는 것이었다! 철병거는 수 17:16,18에서 빌려온 것으로, 그 본문에서 철병거는 요셉에게 두 배나 되는 몫을 할당하는 것을 정당화해주는데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수정의 필요는 본래 기원전 7세기라는 맥락에서 사울 왕 이전의 시대를 표현하기 위해서 사사기가 사용되어 졌을 때 발생했다. 므낫세는 히스기야가 블레셋 일부를 취했다고는 선언할 수 있었지만, 다윗 내러티브는 그러한 선언대로 나와 있지 않는다.


사사기 1장 20절: 다음으로, 20장은 삿 1:10절을 수정하면서, 헤브론의 정복을 유다의 공으로 돌렸던 구절로 만들어서 수 14:14-15; 15:13-14에서 모세의 말을 확증하고 있으며, 헤브론 정복의 영예를 갈렙에게 되돌리고 있다.

   수 11:21에서, 헤브론에서 아낙 자손을 내쫓은 사람은 여호수아였다; 삿 1:20은 수 15:14를 따라서 헤브론의 해방자로 갈렙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수 15:13-19와 삿 1:11-15는 거의 동일하다(옷니엘에 의한 드빌 정복과 악사 이야기). 그러므로 어느 본문이 다른 것을 베꼈는지 결정하는 일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확실한 것이 있다면 이러한 평행구문들이 그들의 근본적인 부조화를 극복하기 위해서 두 책들 사이에 여분의 연결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보다 자세히 조사해보면, 그 구절은 수 15장보다는 삿 1장에 더욱 견고하게 고정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드빌 정복과 악사 사건은 유다의 공정함과 유다 자손의 야만성을 대조하는데 목적을 둔 주의 깊은 진술의 부분이다. 반면에 수 15장에서 이들 사건은 경계영역의 기술과 촌락 목록 사이에 껴서 방해하고 있다. 사사기 1장 4-18절은 유다의 성취를 보여주는데 전적으로 할애하고 있다: 유다는 아도니-베섹을 잡고(8절), 헤브론에서 세새, 아히만, 달매를 물리쳤으며(10절), 드빌을 향해서 진격한다(11절). 갈렙은 유다의 일원으로 사이에 끼어들며, 자신의 딸인 악사를 드빌 정복의 포상으로 옷니엘에게 준다(12-15절). 마지막으로, 유다는 시므온의 도움으로 호르마를 취하고(17-18절) 거기에다가 가자, 아스글론 그리고 에그론도 취한다(18절). 므낫세 왕의 유다는 여호수아를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여호수아 내러티브는 다른 논리를 따른다: 수 11장에서, 에브라임 사람 여호수아는 정복 전쟁의 지도자로 나오며, 당연히, 헤브론, 드빌, 아납에서 그리고 온 산지에서 아낙 자손을 몰아낸 사람으로 나온다. 다음에 수 14:6-14에서 갈렙은 민 13-14장을 회상하며 자신의 몫을 요구하는데, 거기에서 그는 여호수아에게 넘겨받는다. 그러나 수 14:12은 수 11-14장의 나머지 부분과 충돌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갈렙은 그가 헤브론을 요구했을 때 아낙 자손이 헤브론에 여전히 존재할 것이라고 암시하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 쫓아낼 것입니다(???????? ???? ???? ????)’. 이러한 충돌은 수 15:13-14에서 수정할 것을 예견한다: 여호수아는 헤브론을 갈렙에게 주고(//수 14), 갈렙은 세새, 아히만 그리고 달매로 불리는(//삿 1:10에서는 아낙 자손이라고 불리지 않는다) 아낙 자손을 내쫓는다(≠수 11:21 그러나 //수 14). 다음에 수 15:15-19은 삿 1:11-15를 반복하는데, 처음 절에서 내포된 주어를 유다에서 갈렙으로 바꾸고 있다.

   수 15:13-19에서 조화를 이루는 기능은 삿 1:20에서 수행되고 있는데, 즉 최종 판본의 적당한 요약을 제공한다: 그들(유다와 여호수아)이 헤브론을 갈렙에게 주었고, 갈렙은 아낙의 세 아들을 내 쫓는다(그들의 수는 삿 1:10에서 온 것이며, 그들의 아버지는 수 11:21에서 온 것이다).

   이러한 매혹적인 과정은 두 개의 떨어진 본문들과 함께 시작한다: 므낫세의 통치 아래에서 본래의 삿 1장은 모든 왕국의 영역을 통치한 것은 유다라고 한다. 갈렙은 드빌을 앞두고 유다의 장군으로 등장하지만, 헤브론에서는 그렇지 않다. 요시야의 통치 아래에서, 본래의 수 11-14장은 여호수아가 모든 곳을 정복했고 그런 다음에 모세의 말씀대로 헤브론을 갈렙에게 주었다고 선언한다.

   여호수아와 사사기를 함께 놓으면서,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계시면 내가 필경 혀오화의 말씀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라는 말은 수 14:12의 끝에 첨가되었다. 그런 다음 여호수아가 헤브론을 갈렙의 것으로 인정한 일은 수 15:13에서 반복된다. 아낙 자손을 헤브론 밖으로 몰아내기 위한 갈렙의 필요는, 수 14:12b에서 처음 제시되었던 것으로, 수 15:14에서 다시 확언된다. 다음에 사사기 1장 11-15절은 수 15:15-19에서 반복된다. 동시에, 이러한 상호 연관은 삿 1:20의 헤브론 정복을 요약함으로 완성된다: ‘그들이 모세가 명령한 대로 헤브론을 갈렙에게 주었더니 그가 거기서 아낙의 세 아들을 쫓아내었고’ 헤브론 전체 문제에 대한 완벽한 종합인 셈이다.


사사기 1장 21절: 마지막으로, 조화롭게 만드는 언급으로서 마지막 절은 예루살렘과 관련을 맺는다. 같은 언급은 수 15:63에서도 발견된다: 수 15장은 유다 자손이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여부스 족속을 몰아 수(could) 없었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삿 1장에서는 베냐민 자손이 그곳을 몰아내지(did)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둘은 여부스 족속이 오늘까지 예루살렘에서 유다와 혹은 베냐민과 함께 살고 있다는 점에서 동의한다. 사용된 어휘는 이어지는 정복이야기에서부터(????????, ???, 삿 1:27-34) 선택된 것이며, 오직 삿 1장의 맥락에서만 이해가 된다: 21절은 19절을 수정하고, 사실 유다가 평지를 취하지 못하도록 금지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산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은 그 영역에서 벗어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수 15장의 끝에 그대로 전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삿 1장에서는 수정되고 말았는데, 즉 유다가 베냐민으로 교체되면서 유다의 성공의 한계가 삿 1:4-18에서 유다의 무용을 소개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느껴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사사기 1장 36절: 사사기를 여호수아 19장과 조화시킴

제 4장에서, 삿 1:35에서 나오는 지리적인 이동을 조사한 바 있다. 34절에 단 성읍 주위에서 살고 있던 단 자손은 예루살렘 서부에 정착했는데, 이는 아모리 족속이 자신들의 이주 장소였던 셰펠라로 이동한 결과였다. 즉, 멀리 단까지 이스라엘을 정복했던 요시야의 모델로서 기능하도록 예견되었던 그런 이주였다. 그런 다음 36절은 아모리 지역을 수 15:1-4에서 유다 지역의 남부 경계에 있는 한 점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고 기술하는 것 같다: ‘아모리 족속의 경계는 아그랍빔 비탈의 바위부터 위쪽이었더라(????? ????? ?????? ????? ????? ?????)’. 그러나 이 설명은 세 개의 출발 지점에 대해서 그 어떠한 도착 지점을 지시하는 것도 없이 갑작스럽게 끝이 나고 있다. ‘~부터’로 시작하는 그러한 설명은 논리적으로 ‘~까지(??)’로 시작하는 마지막 지명으로 끝이 나야만 한다.13 이 구절의 끝은 그러므로 손실되었고, 그러나 그것은 아마도 아모리 지역을 유다 남부로 자리를 지시했을 것인데, 왜냐하면 헤레스 산과 아얄론 그리고 사알빔이 아모리 족속에 속한다고 말하는 삿 1:35과 이들 마을을 단에게 주었다고 말하는 수 19:41를 일치시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같은 노력의 일환으로, 단 자손이 삿 18:27-31에서 그들의 몫을 상실하게 된 것은 수 19:47에서 단의 마을 목록 이후에 복사된 것이다.


사사기 2장 6-10절: 여호수아 24장 29-31절과 출애굽기 1장 6, 8절을 삽입함

노트의 신명기적 역사라는 속박에서 사사기서를 자유롭게 해준 슈미트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 있기는 하지만, 본 연구는 수 24장과 그가 ‘das sogenannte deuteronomisticsche Richterschema’라고 말하는 것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완전히 그를 따르지는 않고 있다. 슈미트에 따르면, ‘(신명기적은 아닌) 사사기의 뼈대(schema)’는 수 24장을 전제로 한다.14 슈미트는 이 뼈대 안에 삿 1:1-3:6 사이의 대부분의 자료들을 포함시키는 것 같은데,15 여기에서 삿 1:1-3:6은 구원자 이야기를 수 24장의 구원 역사가 끝나고 난 이후의 과도기적인 기간으로 만들어 버렸다.16 지금까지 살펴봤던 것을 기초로 볼 때, 즉 특별히 구원자 내러티브의 뼈대와 틀(frames) 사이에 만들어진 구별(제 1장), 므낫세의 구원자 책을 위한 삿 1:4-18, 27-34의 서론적인 기능(제 2장) 그리고 요시야 아래에서 삿 2:1-5, 11-19에 의해 이루어진 구원자책에 대한 비판(제 3장)을 배경으로 볼 때, 슈미트의 가설은 적합하지 않다. 그가 ‘사사기의 뼈대(Richterschema)’라고 의미했던 것이 삿 1:1-3:6 모두를 덮고 있다면 그러하다. 그러나 그는 삿 2:10을 특별히 언급하는데, 만약 그가 말한 뼈대가 삿 2:6-10로 제한된다면 그의 논의는 수용할만하다.

   사실, 수 2:6-10은 일종의 혼합물이다: 6-9절은 수 24:29-31에서 여호수아의 죽음 기사를 거의 축어적(verbatim)으로 반복하고 있다.17 반면에 10절은 출 1:6, 8에서 영감을 받았다:18


????????? ????? ???? ??????? ??? (삿 2:10a)

???? ???? ??? ???????? ???? ???? (출 1:6)

??????? ??????? ??? ?????? ??? ??? ???? (삿 2:10b)

??????? ?????? ??? ???????? ??????? ???? (출 1:8)


   여호수아 24장과 삿 2:6-10은 같은 편집 단계에 속하는 것으로, 이 단계는 사사기서를 (삿 2:6-9와 함께) 여호수아서와 그리고 (삿 2:10과 함께) 모세-출애굽-여호수아 내러티브와 연결했다.

   사사기 2:6-10은 반드시 뼈대의 부분으로서 고려되어야만 하는데, 이 때 뼈대는, 10절에 언급된 세대(???)와 17, 19절에 언급된 조상들 사이에 유사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삿 2:11-19로 제한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에 대한 연구에서, 뢰머(Th. R?mer)는 10절을 뼈대와 같은 시대로 분석했는데,19 그러나 그는 10절이 뼈대를 쓴 같은 사람의 솜씨로 보는 것에 대해서 강한 의구심을 표명했던 바이얼린(Beyerlin)20을 논박해왔다. 바이얼린의 제안은 10절과 11절 사이에 변화가 실제로 (st?rend)인지 아닌지에 대한 뢰머의 논의보다도 더욱 확실한 증거에 기반을 두고 있다(제 1장의 논의를 보라).

   혹자는 왜 여호수아의 죽음이 사사기에서 반복되며 또 왜 책의 제일 첫 장면이 아니라 삿 2:5에 삽입되었는가 라고 여전히 궁금해 할지도 모르겠다. 그에 대한 대답은 단지 시험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편지자의 동기를 물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편집자들이 어떻게 작업했는지를 조사하는 것은 도움이 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점진적인 정복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는 빛을 던져준 보김 사건이 삽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삿 1장은 이스라엘과 유다가 그 땅에서 세력을 키웠던 것에 대해서 매우 다른 설명을 한다. 편집자는, 여호수아의 죽음에 대한 두 번의 언급을 사이로, 삿 1장을 둘러싸기 위해 일종의 포위작전을 선택했다. 이런 방법으로, (여호수아의 경우와 비교해 볼 때,) 삿 1장의 이상한 정복 기사는 최소한의 본문 충돌로 여호수아의 시대 안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사사가 사는 날’(삿 2:18)이 삿 2:11에서 시작하고 요시야의 ‘두 번째 장사(葬事)’21는 삿 1장을 여호수아 정복의 기간으로 되돌려 놓는다.

   삿 2:6-9에서 수 24:29-31을 액면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은 그러므로 여호수아 이후에 사사기가 삽입된 것이 매우 후대에 이루어졌음을 지지하는 또 하나의 강력한 논증이 된다. 그 시기에, 이 둘 책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독립적으로 존재했었기 때문에, 편집자의 간섭 혹은 변화는 최소한의 것으로만 지켜져야 했다. 이러한 반복은 수 24:29과 삿 2:9 사이에 포함된 내용이 이차적이라거나22 혹은 삿 1:1-2:5이 본래 여호수아서의 부록이었음을 가리키는 것은23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수 24:28-31과 출 1:6, 8이 삿 2:6-10 안으로 삽입되었으며, 이러한 낯 설은 성격의 요소들이 숨겨지도록 의도된 것은 아니다: 이야기의 빈틈은 이러한 과정을 인식하게 된 독자들에게 눈에 띄게 남아있다. 그 어떠한 망상도 필요치 않으며, 두루마리는 엄격한 연대기적 이야기라기보다는 편리하게 읽을 수 있는 순서를 제공하는 대강의 분류법에 따라서 배열되었을 뿐이다.


사사기 2장 20절-3장 6절: 군사훈련

이러한 이상한 구절은 뼈대(삿 2:11-19)의 부산물처럼 보인다. 사사기 2장 20절은 14절에서와 같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 ?? ????; 야웨의 진노가 이스라엘을 상대로 불타오르다)’로 시작하며, 신적 진노의 결과에 대한 언급을 더하고 있다(21절). 그러나 여호수아가 두 번 언급되면서(삿 2:21, 23), 구절 전체가 여호수아라는 인물을 사사기서에 소개하고 있는 편집단계에 속해있음을 지시하게 된다(삿 1:1-3; 2:6-10).

   이제 유다는 하나의 민족(Ethnos, ???)으로 다른 이들 가운데 있게 되는데(삿 2:20), 위험은 노략자들에게서나(????) 사방(?????, 삿 2:14)에서 온 대적으로부터 야기되지 않고, 여호수아가 죽을 때 남겨놓았던 이방 민족들로부터 야기된다(삿 2:21). 전체 이스라엘을 지배하려했던 일에 요시야가 실패했던 이후로, 팔레스타인은 점차적으로 모자이크식의 인종 집단들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사사기 2장 22절은 이러한 상황에서 처음으로 신정론을 제기한다: 야웨 자신이 이스라엘이 계명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를 시험하고(????) 검사하기 위해서 열국을 그대로 남겨놓았다고 결정했다는 것이다(????? ... ??????). 대적들의 위치는 올무(삿 2:3)에서부터 야웨의 손안에 있는 군사교관으로 변했다. 뼈대가 말하는 엄청난 저주는 미해결의 문제로 변하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새로운 새벽이 떠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야웨가 이방 민족들에게 준 평안(???)은 최종 종결된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야웨는 단지 그들을 속히 쫓아내지 않았을 뿐이다(???, 삿 2:23): 새로운 정복의 기회가 이제 주어졌다.

   사사기 3장 1-6절은 이방 민족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에 대한 두 번째 설명을 보여준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불충을 벌주려는 것뿐만 아니라,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하고 있는 세대들에게 전쟁을 가르치기(????? ?????) 위함이다(삿 3:1-2). 도덕적인 설명으로는 더 이상 만족시키지 못하며, 과거의 실패는 군사적으로 준비가 미흡했던 것으로 돌려지는 셈이다. 요시야의 후손들은 전쟁에서, 그것이 얼마나 거룩한지에 상관없이, 믿음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사사기 3장 3, 5절은 두 개의 전통적인 대적 목록을 보여준다: 블레셋 사람, 가나안 사람, 시돈 사람 그리고 히위 사람(3절), 가나안 사람, 헷 사람, 아모리 사람, 브리스 사람 그리고 여부스 사람(5절)이 나오며, 이들을 친척으로 하는 이스라엘의 통혼권(conubium)과 그들의 신들을 섬기는 것에 대한 장황한 이야기로 결론을 맺고 있다(//수 23장).

   사사기 2장 22절은 가장 의미가 통하는 식으로 삿 3:4에서 반복된다:


????? ????? ???? ???? ?? ???? ???? ?????? ?? ?????? 22b절

그들이 야웨의 길을 따를 것을 준수할 것인지, 그들이 그들의 아버지들이 준수했던 것처럼, 혹은 그렇지 않은지


??????? ????? ?? ??????? ???? ??????? ?????? ???? 4b절

만약 그들이 야웨의 계명을 들을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즉 그가 모세의 손으로 그들의 아버지들에게 명령했던 것


   시험은 더 이상 이스라엘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야웨의 길을 준수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로 결정되지 않는다. 불확실한 아버지 모델은 입법자 모세에 의해 아버지들에게 전달된 계명들로 교체되었다. 토라는 이제 잘 확립된 법전이 되었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이 자신들을 그것의 ‘파수꾼’임을 자부하고 있는 것처럼, 준수하는 것(???)은 이러한 불온한 친척들을 합법화시키는 그 어떤 것들도 인정하지 않기 위해서 듣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사사기 2장 20절-3장 6절은 꼼꼼한 교차대구 구조를 보여주는데,24 즉 더 나아가 사사기가 여호수아뿐만 아니라 토라에도 연결되고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 정경은 네비임(Nebiim)이라는 두 번째 부분을 받아들였는데, 이것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나타나는 모든 차이들의 하나가 된다. 이것은 아마도 신명기적 역사와 예언 수집물 전체를 구성하는데 뒤에서 밀어주는 가장 좋은 동기였을 것이다. 그것은 하스모니안 원정을 위한 종교적 배경을 제공해 주었는데, 특별히 사마리아 성전의 파괴를 야기했던 요셉 가문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삿 2:20-3:6은 점진적인 예루살렘의 재건을 증거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마리아인 네아폴리스(Neapolis)와의 커져가는 긴장도 증거하고 있다. 요시야의 뼈대가 새로운 신흥세력을 대비하기 위해서 어떻게 재작업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으로 넘어가야 했다.25 조상들이 실패했다는 사실은 새로운 접근을 이끌지는 않았다. 과거는 단지 군사적인 대비가 더 필요했었음을 보여줄 뿐이다. 로마는 이제 셀류시드 통치의 남은 부분까지도 완전히 뒤엎어 버리는 것을 돕기 위해서 병참 지원도 제공해주고 있다. 주의 깊은 유대인들은, 종종 충돌로 인해서 열광했는데, 그들의 피를 자신의 땅을 자유롭게 하는데 기꺼이 바칠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로마는,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곧 그들의 사형집행자기 되고 오랜 17세기 동안이나 팔레스타인에 신명기 이데올로기를 제거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영구히 지우지는 못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본문 안에서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명기적 신학은 자비로운 하나님의 이름 안에서 레반트 부족들 서로가 서로에게 반대되도록 여전히 맞춰지고 있다.


사사기 4장 11, 17, 21절; 5장 24절: 겐 족속 헤벨과 야엘의 방망이

벤덴버거(A. Bendenberger)의 견해처럼, 삿 4-5장에서 마카비가(家)의 편집 활동의 존재를 수용하는 것은 가능하다.26


겐 족속 헤벨: 야엘의 남편인, 헤벨(‘동료’)이란 이름의 겐 족속(삿 4:11, 17; 5:24)은 삿 4-5장에서 에녹서에 연결되어 있는 유대인 그룹과의 동맹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마카비가에 의해서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서 마카비가는 자신들이 봉기하기 위해서는, 겐 족속과 레갑 족속과 같은(대상 2:55),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했었음에 분명하다.


방망이(The maqevet): 자신의 이름을 자신들의 지도자인 유다 마카비우스(‘방망이’)의 별명에서 가지고 왔을 마카비가의 사람들은 또한 삿 4장에서 야엘이 썼던 도구의 이름을 바꾸었을 것이다. 삿 4:21에서, 야엘은 시스라를 박살내기 위해서 마카비가의 방망이(????)를 잡는다. 반대로 평행본문인 삿 5:26은 치명적인 무기로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일꾼들의 방망이(?????? ?????)’. 칠십인경은 삿 4장과 5장이 ‘방망이’로 두 개의 다른 용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확증하고 있다.27 그러므로 마카비가의 반역을 야엘의 대담한 업적에 비교함으로써 마카비가에 명예를 돌리려는 목적으로, 방망이(maqevet)가 소개되고 있음은 가능하다고 하겠다.

   이러한 두 개의 요점은 사사기서라는 집단에서는 사소한 것이겠지만, 그것들은 어떻게 여기저기에서 본문이, 기원전 2세기 중반이라는 늦은 시기에서까지도, 여전히 작은 첨가와 수정을 받을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사사기 11장 12-28절: 베레아(Perea) 병합을 정당화하기

만약 사사기서에서 마카비가의 편집 활동이 매우 제한적이기만 했다면, 그들의 하스모니안 후계자들은 삿 11장에 보다 풍부한 언급을 남겼던 것 같다.

   긴 독백에서, 입다는 아모리 왕에게 트랜스요르단 상당 지역에 대한 이스라엘의 정당한 요구를 증명하고 있다. 논의는 민수기 21장의 출애굽 여정에 기초하고 있다(민 21:11-13//삿 11:18; 민 21:24//삿 11:13; 민 21:26//삿 11:15). 이러한 동쪽 중심의 여정은 아라바를 통과하는 남부 도로를 말하는 민 33장의 것과는 다르다. 민수가 32장은 같은 길을 따르고 있으며,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 목자들이 모압 평지와 길르앗을 기대하고 있음을 말한다(민 32;1). 민수기 21장은, 역시 남부 도로에 기초하고 있는데(민 21:10-13), 이스라엘 자손을 시혼과 에돔 북부와 아르논 강의 아모리 족속에 맞서기 위해서 모압 평지 동편으로 길을 돌리고 있다. 헤스본 지역의 정복은 이스라엘로 자신의 왕국을 건너가지 못하게 한 시혼의 거부에 의해서 정당화되어진다. 정복당한 아모리 사람의 지역은 남쪽의 아르논에서부터 북쪽의 얍복강 하류에 이르기까지 퍼져있는데, 반면에 암몬 족속의 지역은 아직 훼파되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민 21:24). 사사기 11장 12-28절은 민 33장의 정보를 받아서,28 새로운 내용을 소개한다. (암몬의 남부인) 시혼 당은 이제 암몬 족속의 것이라고 선언되고 있다(삿 11:13). 암몬 족속의 이름 없는 왕은 자신이 지금 (암몬의 북부인) 길르앗을 공격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르논과 얍복강 사이를 이루고 있는 지역(민수기에 의하면 시혼의 영역)에 대하여 이스라엘이 병합시킨 것에 대한 앙갚음이었다. 입다는 민수기의 정보들로부터 이 땅이 시혼의 것이고 그것을 병합하는 것은 모압에게나 암몬에게 어떠한 해도 끼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삿 11:18-22). 암몬은 문제가 되는 지역의 북동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지역은 암몬의 남부이자 서부로, 나중에 베레아 속주에 해당하는 곳이다. 사사기 11장 12-28절은 베레아에 대한 유다 자손의 요구를 정당화하고 있는데, 반면에 입다 이야기의 남은 부분은 길르앗 북부(돕29 삿 11:3)를 향한 암몬 족속의 공격을 보여준다. 사사기 11장 12-28절은 그러므로 기원전 598년 보다 상당히 나중에 기록되었으며,30 그것이 민 33장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늦은 헬라시대로 보는 것이 낫다. 트렌스요르단이 관련되고 있다는 것은 베레아가 예루살렘에 의해서 지배받고 있던 하스모니안 정복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기원전 128-88년).31 이것은 삿 11:12-28의 연대를 너무 늦게 잡는 것이 되는데, 왜냐하면 모든 LXX 전통은, 사사기에 대한 첫 번째 헬라어 번역이 마카비 시대에 이미 종결되어버린 가운데,32 이 구절을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토를 주장하는 것은 그들의 봉기가 실현될 기회가 있기 전에 표현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삿 11:12-28은 기원전 200년 이전으로 연대설정을 할 수 있으며, 첫 번째 사사기서의 헬라어 판본이 나오기 바로 전이거나, 아니면 하스모니안가(家) 기간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호수아와 사사기 사이의 사소한 연결들

삿 1장의 부정적인 정복에 대한 몇 가지 요소들은, 수 16-19장에서 지파들에게 주는 할당 본문으로 들어가게 된다:33 삿 1:27-28이 수 17:11-13으로, 삿 1:29이 수 16:10으로 들어간다.



사사기서와 사무엘서 사이의 변화


사사기 4장 5절: 드보라의 종려나무와 사무엘상 7장

드보라와 사무엘은 사사기서와 사무엘서에서 다스리는 과정에 있어서 재판관이라는 설명이 붙어 다니는 유일한 인물들이라고 하겠다. 삿 4:5에서, 드보라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의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서 앉아 있으며, 이스라엘 자손들은 재판을 위해서(?????) 그녀 앞으로 온다.

   삼상 7:16-17에서, 사무엘은 해마다 벧엘, 길갈 그리고 미스바를 지나 다시 고향인 라마로 돌아오는 순회 재판을 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사무엘은 자신의 아들들을 브엘-세바에 사사로 삼았지만, 그들이 정의에서 벗어나게 되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에게 대신 왕을 달라고 요청한다(삼상 8:1-5). 왕 옹립자로서, 사무엘은 최후의 사사였다. 이 구절들은 사사 시대의 종언을 알리고 왕국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사무엘 전승에 대하여 이차적인 것으로, 본래 사무엘 전승에서는 그를 사사로 보여주지 않는다. 사실, 정의를 집행하는 사사로서의 역할이라는 성격묘사는 삿 10장과 12장의 사사들을 불러일으켰던 페니키아의 (suffets) 모델에서부터 확실히 변화된 것임을 보여준다(제 3장을 보라). 요시야가 구원자들 가운데 통합시켰던 ‘사사’라는 말은 아시리아 시대 동안에 이스라엘의 왕을 대신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자신의 종려나무 아래의 드보라와 자신의 순회재판에서의 사무엘은 다른 역할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사사기와 사무엘상 사이에 연결을 세우게 된다. 그들은 사울과 다윗 이전 시대의 경계선을 그린다. 이 두 구절 모두에서 벧엘과 라마를 언급하는 것은, 특정한 재판 제도를 사실적으로 기술하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사 시대에 대한 지리적이고 연대기적인 틀을 강화하기 위한 일종의 문학적 장치인 것이다.

   사사기서와 사무엘상서 사이의 변화는 또한 삼상 7장 전체에 의해서도 발견될 수 있는데, 삼상 7장은 사사기서의 요약으로 읽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무엘은 회개와 바알과 아스다롯을 그만 섬기라고 설교를 하는데, 이는 뼈대와 매우 유사한 방식이기도 하다(삿 2:11-19//삼상 7:2-4). 다음으로 이스라엘은 금식(삿 20!)과 죄 고백(삿 10:10,15//삼상 7:5-6)을 위해서 미스바에 모인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을 재판하고, 블레셋은 쳐들어오고 이스라엘은 두려워한다(6절).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무엘에게, 야웨가 블레셋의 손에서부터 자신들을 구원하도록(???), 야웨께 부르짖기(???)를 그치지 말라고 요청한다(8절). 삼상 7장의 저자들은 야웨가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대답하기를 거절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삿 10:14의 기록을 분명히 취했다. 그래서 그들은 사무엘을 중보자의 역할로 만들어 놓았다. 사무엘은 야웨에게 부르짖어서(???, 9절) 구원자를 보내주는 것 대신에 우레를 발하게 한다(10절). 블레셋 사람들은 패배했고(???, 삿 3:30; 4:23; 8:28//삼상 7:13), 구원자 내러티브의 평화형식이 부분적으로 채택되고 있다. 사사기와 관련된 이러한 수집물들은 사무엘을 구원자와 동시에 사사로 기술하게 했으며, 그러므로 사사기에서는 단지 나란히 놓였을 뿐인 두 개의 기능들이 하나로 일치되어지게 했다. 이것은 황홀경적인 전쟁 지도자의 업적을 묘사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이것은 삼상 11장이 가깝다), 사사기와 사무엘 사이의 변화를 해결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사사기 20장 27-28절: 법궤

언약궤는 사사기와 사무엘상을 연결하고, 일단 법궤가 예루살렘을 향해 떠나게 되자(삼하 6) 벧엘의 신탁처로서의 잠재력을 박탈하기 위해서 괄호 안에서 소개되고 있다.


사사기 21장 25절: 마지막 기록

친왕적 후렴구가 본래 삿 17-18장에 있다는 노트의 주장은 여전히 유효하다(제 4장을 보라).34 이 후렴구는, 요시야의 사사기서 맨 끝에 베냐민을 향한 페르시아 시대의 논쟁과 연결시키기 위해서(삿 19-21장), 19:1에서도 베껴졌다(제 6장을 보라). 네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후렴어구가 삿 21:25에서 책의 가장 마지막 구절로 등장하는 것과 관련해서 상황은 보다 덜 분명하다. 두 가지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사사기 21장 25절은 삿 19-21장이라는 틀을 만들기 위해서, 반(反)-베냐민 장들이 요시야의 신명기서에 첨가되었을 때인 페르시아 기간 동안, 삿 21장 마지막에 첨가될 수 있었다. 그러나 삿 21:24은 독립적인 사사기서를 위한 결론으로도 잘 드러맞는다: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그 곳에서 각기 자기의 지파,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갔으니 곧 각기 그 곳에서 나와서 자기의 기업으로 돌아갔더라’. 그러므로 후렴구가 ‘사사 시대’가, 여호수아의 정복에서부터 사울왕의 등극까지 경과하는 시간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졌을 때, 두 번째 결론으로서 첨가되었을 것이 더 그럴듯하다. 사무엘상이 막 시작하기 전에 사사기의 마지막 절에다가 그날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라는 구절을 반복함으로서, 일단 과거의 모든 날들이 사울 이전의 날들로 정해지고 말았다.

   삿 4:5; 21:25 그리고 삼상 7장과 함께, 사사기에서 사무엘로의 변화는 그러므로 여호수아와 사사기 사이에서 했었던 것처럼 정교하게 손질된 것이다. 성서의 역사편찬자들은(창세기에서 열왕기하까지) 삿 21:25의 친왕적 후렴구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삿 21장과 삼상 1장 사이의 어설픈 변화를 사사 시대로 견고케 하기 위해서 삿 4:5과 삼상 7장 사이에 보다 큰 포함관계(inclusion)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구원자, 사사들, 패배자, 단 자손, 베냐민 자손, 사무엘 그리고 이동하는 법궤라는 복잡한 문학적 미로를 통해서 인도함 받게 된다. 바로 자신의 종려나무 아래의 드보라와 순회 길의 사무엘과 같은 중재자(arbitrators)로 새롭게 정의된, ‘사사’라는 실을 통해서 말이다.



사사들의 기간


여호수아서, 사사기서 그리고 사무엘서 사이의 변천사항은 이 장에서 나타낸 바 있다. 이제 너무나도 유명한 사사들의 기간에 대해서 다룰 시간이다.


열왕기하 23장 22절

‘사사들의 시대’라는 표현이 왕하 23:22에 나오는데,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사사들의 시대와 이스라엘 열왕과 유다 열왕의 날들 이래로, 그 어떠한 유월절도 요시야가 기념했던 것같이 못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 ???? ??? ?????? ????

????? ????? ????? ???? ??? ???


   그러므로 사사들의 기간이 기원전 3세기 이전에 잘 개념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35 그러나 21-23절의 고대성은 21절이 신 16:1에 의존하고 있다는 이유로 종종 의심을 받아왔다. BHK에서의 주(註)는 이 구절들의 부분에서 이차적인 성격이 있다는 것에 무게를 실어주는데, 바로 ‘이스라엘 여러 왕의 시대와 유다 여러 왕의 시대에(????? ????? ????? ???? ??? ???)’라는 구절 전체가, 별표와 특정표시에 대해서 가장 믿음직스러운 증거분문 중에 하나인, 오리겐의 시리아헥사플라 본문에서 별표 아래 위치한다. ‘이스라엘 여러 왕의 시대와 유다 여러 왕의 시대’라는 단어들은 원래 LXX과 비교해서 추가된 MT라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오리겐은 아퀼라 판본에서 끌어다 썼다.36 이것은 이 단어들이 최초의 사사기 헬라어 판본이 완성된 후에, MT에 첨가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해석한 것은 기원전 2세기가 끝나기 전에 이루어졌을 것인데, 그 이유는 벤 시라의 손자가 자신의 시대에 예언서와 다른 책들이 헬라어로 번역되어졌다고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시락서 서문 24).37

   대하 35:18에서의 평행은 ‘예언자 사무엘의 시대와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도’이라고 언급한다. 어디에도 왕들의 ‘시대’나 ‘유다 왕들’이라는 것은 나오지 않는다. 기록자에게 있어서 사사 시대는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예언자 사무엘의 시대’(여기에서 사무엘은 아직 사사가 아닌데, 그 이유는 삼상 7장이 아직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는 사울 왕 이전의 시대를 기술하는 것으로, 이것은 사무엘상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라도 명백한 결론이 된다. (역대기의) 기록자는 유다 왕들의 시대를 이스라엘의 그것과 동일시할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이스라엘의 기원을 유월절에 두고 있는 자신들의 자료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속되는 변화는 다음과 같이 재구성될 수 있다:


???????? ???? ??? ?????? ???? (왕하 23:22*)

????? ???? ??? ??? ????? ????? ???? (대하 35:18)

????? ????? ????? ???? ??? ??? ???????? ???? ??? ?????? ????

(왕하 23:22)

????? ???? ????[?] ????? ???? ??? ??? ????? ?? ???? ?????? ????

(탈굼, 왕하 23:22)


   열왕기하를 썼던 유다의 저자들은 이스라엘 왕조에 대한 전반적인 부정적 심판을 내렸기 때문에, 그들은 이스라엘 왕들을 언급하지 않기 위해서 사사 시대에 주의를 돌렸다. 이러한 사사 시대는 아마도 요시야의 사사들보다는 더 그럴듯하게 묘사되었다: 그 때는 이스라엘에 왕이 (더 이상) 없었던 시기이다. 만약 대하 35:18이 왕하 23:22에서 전수된 본문보다 더 오래된 본문이라고 입증되지 않았더라면, 대하 35:18의 기록자들은 ‘예언자 사무엘의 시대와 이스라엘 모든 왕들’로 받아들이기를 선호했던 것 같은데, 그 이유는, 자신들이 볼 때, 사사 시대가 아직 개념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사울 이전의 시대를 기술하는 것이 더 나았기 때문일 것이다. 왕하 23:22과 대하 35:18 사이의 모순은 결코 조화를 이룰 수 없는데, 이들 책들이 같은 수집물로 구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람어 판본은, 헬라의 역사편찬 전통에 덜 영향을 받았는데, 사사 시대와 왕들의 시대 사이에 연결을 확증하지 않는다. MT가 ????? ???? ??? ???인데 반해서, 탈굼은 ????? ???? ??? ??로 읽으면서, 왕들의 시대를 사사 시대와 동격의 자리에 놓고 있다. 페쉬타(Peshitta) 역시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사들을, ??에 남성복수접미사를 첨가함으로써 왕들의 시대로부터 분리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사사들의 날(단수), 즉 이스라엘 왕들과 유다 왕들의 날들(복수) 전부(????)에서부터’라고 읽는다. 사사 시대에 관해서 아무 것도 듣지 못했던 독자들에게, 왕하 23:22에서 사사들의 시대라는 것은 두 개의 분리되면서 연속적인 시대로 나타내기 보다는 이스라엘 왕들과 유다 왕들의 통치의 시대와 같게 여겨졌을 것이다. 아람어 전승은 연속적인 시대에서 이스라엘의 과거를 조직하는 것은 셈어 독자들에게 여전히 낮 설은 개념으로 남아있으며, 심지어 시대에 따라서 전기 예언서라는 두루마리를 조직한 이후에라도 그러했다.

   어찌 되었건, 왕하 23:22에서 사사들의 시대는 사사들의 기간이 포로시대에 발병되어진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사용될 수는 없다. 이러한 방식의 사사들은 본래 이스라엘 왕조 이후에 등장하게 된 재판관들이었다. 그러다가 두 번째 단계에서, 이들 재판관들은 사무엘의 시대 동안에 직무를 집행했던 자들로 이해되었던 것이다(바로 역대하에서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마지막으로, 그들은 사울 이전의 시대를 나타내는 것이 되고 만다(다음을 보라).


룻기 1장 1절

룻기는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 ????)’라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러한 방식은, 왕하 23:22과는 반대로, 이스라엘의 과거에서 특정한 시대로 이해되는 사사들의 기간에 대한 틀림없는 언급임을 보여준다. 사사들의 기간이라는 문맥은 룻이 다윗의 족보에 삽입되고 있는 책의 마지막 절과 부합된다(룻 4:17b-22).

   책의 처음과 마지막 절에서 제공하고 있는, 이러한 시간설정과는 별도로, 내러티브는 다른 정황에서도 잘 들어맞을 수 있다. 그 책을 사사 시대로 설정하는 것은 헬라어 정경이 룻을 사사기에 첨부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히브리어 전승은 룻기를 성문서 안에서 놓고 있기 때문에, 사사들의 기간이라는 것이 늦게 만들어졌다는 것을 옹호하는 무게 있는 논거가 된다.


요시야부터 알렉산드리아까지 사사들의 시대

정복과 ‘통일 왕조’ 사이의 기간으로 이해했던 노트 학파의 신조와는 반대로, 사사들의 시기는 사사기가 기록되던 초기에서부터 개념화되지 않았었다. 사사들의 시대는 각각의 시대에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스라엘에 왕이 (더 이상) 없었을 시대: 사사들의 시대란, 벧엘의 구원자들을 대신했지만 그들 주위로 뛰노는 아이들 무리들과 함께 행복하고 또한 번영의 시기를 보냈던 영웅들이 나오는, 삿 10장과 12장에서의 사사들의 통치라고 처음으로 명명했다. 이들 사사들은 일종의 대리인으로 이해되어졌는데, 즉 요시야가 와서 솔로몬의 왕국을 회복하게 될 때까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것이었다. 요시야가 이스라엘의 과거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사사들의 시대는 기원전 720년과 요시야 사이의 중간기로, 이는 페니키아의 suffets 모델에서 기초하고 있다(제 3장을 보라). 그러나 이스라엘 외각의 지주 귀족들로부터 이렇게 많은 사사들이 나오는 멋진 우편엽서를 선물로 받는다는 것은 요시야의 요점을 무효화시키고 말았을 것이다. 만약 오랫동안 왕이 없게 됨으로 인해 야기되는 위험들을 묘사하는 것으로 그것들을 완성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을 때에’라는 개념은, 왕이 없는 정부의 종교적인 위험성뿐만 아니라 그러한 권력의 공백으로 인해 유다가 얻게 된 엄청난 기회까지도 보여주기 위해서, 삿 17-18장에 중심사상으로 분명하게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사사들은 기원전 720년 이후에 이스라엘을 다스리면서 엄청난 일을 해냈고, 이제 단 자손의 사례를 따라야만 했으니, 이스라엘은 멀리 단까지 정복되어져야만 했다.


이스라엘에 (그리고 유다에서도) 왕이 (더 이상) 없었을 때: 그러나 요시야의 계획은 용두사미로 끝이 나버렸고, 유다의 통치는 가까스로 벧엘까지 미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유다 영토의 이러한 북쪽으로의 확장은 반세기 후에 예기치 않았던 결과를 가져오고야 말았다. 기원전 586년에, 혹은 그보다 약간 이전에, 베냐민이 유다에서 남겨진 부분의 중심이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일세기 후에 치열한 경쟁을 야기하고 말았으니, 즉 새로운 정부인 페르시아의 후원을 받은 예루살렘이 기원전 7세기에나 있었던 자신들의 지위를 회복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을 때에’라는 구절은 베냐민의 통치를 묘사하기 위해서 삿 17-18장에서부터 삿 19-21장으로 가지고 온 것이다. 여기에서 베냐민의 통치를, 예루살렘이 자신을 재차 긍정하고 이러한 형편없는 상황을 끝내게 될 때까지, 미스바가 감히 예루살렘을 대신하고 있었던 시대라고 묘사했던 것이다. 사사기 19-21장은, 삿 17-18장은 묘사하고 있는 것과 같이, 제의가 분산되는 것의 위험성을 묘사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예루살렘의 간섭으로부터 구속되지 않게 되었을 때의 베냐민 자손들이 보여준 정도를 벗어난 삶의 방식을 묘사하고 있다. 왕이 없었을 시대는 예루살렘이 경험했던 것 중에서 최고의 암흑시대로 특징지어 졌으며, 그 때란 바로 이스라엘에도 왕이 없으며 역시 유다에도 왕이 없었던 시대였다(삿 19-21장).

   이렇게 사사기에 대한 후기-왕정 시대라는 개념은 오바댜 21절에서 그려지고 있다:


?????? ????? ????? ??? ????? ???? ???? ??? ?????? ????

구원 받은 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여기에서 이 구절과 관련된 문제들을 다룬다는 것은 적절치 못한 일이다.38 그러나 LXX 번역자들은 ??????를 간단하게 (사사기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같이) σωτηρε?로 번역하지 않고, 복잡하게 ανδρε? σεσωσμενοι라고 번역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구원자 풍의 사사기서가 기원전 586년 이후 시온의 원수를 갚을 것이라는 사실에 그 어떤 부분에서 서기관들의 당혹스러움이 나타나있지 않고 있는 MT와는 날카롭게 대치하면서, 알렉산드리아의 번역자들은 너무 직접적으로 사사기서와 연관 맺는 것을 명백하게 피하고 있다. 그들의 당혹스러움은 사사들의 왕조이전 시기라는 개념화 작업의 장소와 연대에 대한 또 하나의 표시가 된다. 번역자들은 예언서들을 그리스 역사의 형식에 따라서 ‘역사적인’ 책들 안으로 조직화하는데 기여했던 문학적 환경에 거의 확실히 연관되어 있었다. 모든 것은, 왕들의 시대 이전의 사사들로 특징 지워진 어떤 특정한 연대기적 기간으로서 형성되기 위해서, 알렉산드리아로 향하게 되었다. 새롭게 만들어진 사사들의 왕조 이전 시기라는 것에 약간의 일관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룻기와 사사기를 연결하고 있는 것 역시 헬라어 정경이라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오바댜 21절의 구원자를 번역했던 사람들의 양심의 가책은, 그러므로, 이 구절이 후기 왕조 시대에 구원자들과 사사들이 등장할 것이라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해할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바댜 21절은 (바벨론 시대에 벧엘 혹은 미스바에서?) 누군가가, 기원전 586년 이후에 유다에게 행했던 강탈에 대해서 에돔 족속이 형벌을 받게 될 후기 왕조의 통치 형태로서, 구원자들과 사사들을 이해했을 것이라고 시사한다.


이스라엘에 (아직) 왕이 없었을 때: 마지막으로, 사사들의 기간은 소위 말하는 왕조 이전, 즉 사울 이전의 시대로 돌아가게 된다. 핵심적인 관건은 언제 이러한 마지막 단계가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것이다. 한 가지 가능성은 초기 연대로, 즉 기원전 5세기 말경으로 설정하기 위해서 왕이 없는 사회는 무질서 상태를 야기하고야 만다는 사사기서의 마지막 주장에 기대는 것이다.39 그 목적은 스룹바벨이 다윗 왕조를 재건하려던 것에 실패하는 동안 새로운 유다 왕조의 재건을 합법화하려는 것이었다. 더욱 그럴듯한 사건이라면, 하스모니안가(家)에 의해서 유다 왕조가 성공적으로 재건된 일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 시기는 분명히 너무 늦는데, 왜냐하면 시락서 46장 11절에서 사사기는 여호수아와 갈렙 다음에, 사무엘 이전에 언급하면서 사사들의 기간을 왕조 이전으로 입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락서가 기원전 200년 어간에 기록되었기 때문에,40 사사들의 왕조 이전 기간이라는 개념이 2세기 전에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필요하다. 사사들의 왕조 이전 기간이라는 것을 발명해내기 위해서 적합한 역사적인 자리로 기원전 5세기까지 멀리 되돌아간다고 해서 우리를 비난할 것인가? 대다수의 학자들은 이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하는데, 왜냐하면 의식하건 그렇지 않건, 그들은 포로기적인 신명기적 역사라는 노트 학파의 교리에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유다 사람들이 헤로도투스 이전에 역사편찬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노트의 가설을 수용하는데 있어서 극복할 수 없는 장벽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렇게 상당히 유명한 포로기 시대라는 것이 여호수아와 열왕기하 사이에 포함된 문학 자료들을 수집하고 한 줄로 세운다는 엄청나게 거대한 작업을 하기에는 최악의 가능한 시기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41 이 가설은 최후의 선택으로서만 수용되어져야 할 것이다. 더구나 기원전 3세기는 여호수아서와 사무엘서 사이에 사사기서를 삽입하는데 보다 더 확실한 배경을 제공한다. 단지 헬라어 정경만이 룻기를 사사기 다음에 집어넣었기 때문에, 그리고 왕조 후기의 구원자에 대해서 당혹스러워했던 사람들이 단지 오바댜 21절의 번역자들이었기 때문에, 알렉산드리아는 번역의 장소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역사서’ 수집이라는 작업을 하기에도 가장 적합한 장소였다.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 예루살렘은 알렉산드리아가 가졌던 것처럼 풍부한 전문가들이 있었지만, 유대적 역사편찬 저술을 후원하기 위해서 필요한 자원과 정치적인 의지를 제공할 수 있는 더 좋은 장소는 알렉산드리아였다.42 그러므로 우리는 (토라의 번역을 위한 가능한 가장 이른 연대인 기원전 282-246년의) 프톨레마이오스 2세(Ptolemy II) 제위를 시작으로, (사사기서가 사무엘상 이전에 삽입되었다는 것을 제일 처음 증거하고 있는 기원전 200년의) 시락서의 편집 단계까지의 짧은 시기를 고려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가설에 따르면, 사사들의 왕조 이전 시대는 이집트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 의해서 처음으로 만들어졌는데, 이들은 이스라엘 역사를 풍부하게 기술하려는 목적으로 토라에 포함되지 못했던 몇 몇 책들을 번역하고 작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으로 여겨지며, 수 24:33을 다양하게 읽고 있는 LXX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최소한 두 개의 서로 다른 시도들이 있었다.43 그러므로 이러한 첫 번째 역사편찬은 역사적인 공백을 메워놓았으니, 이 공백이 너무나 당혹스러울 정도여서 아브데라의 헤카테우스(Hecateaus of Abdera)는 ‘유대인들에게는 어떠한 왕도 없었다’라고 강하게 주장하기까지 했을 정도였다.44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제위 기간 동안(기원전 3306-283년) 기록했었던, 헤카테우스가 사사들에 관해서 알았던 것이, ‘모든 중대한 일의 경우에 재판을 위해서’ 모세에 의해서 임명된 자들로서만 알고 있었지(출 18장), 사사기서에서 왕조 이전의 사사들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음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에게 정보를 주었던 사람들도 왕조 이전 시대의 사사들에 관해서 알지 못했거나, 혹은 그들은 헤카테우스에게 그것이 드러나지 않도록 조정한 것이다!

   최초의 유대인 역사편찬의 작성을 위해 알렉산드리아라는 장소와 연대를 설정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노트 학파들을 확신시키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신명기적 역사서가 기원전 5세기에 나왔다는 것을 내세우기 위해 제시된 몇 안 되는 증거본문들을 조사해볼 필요가 있다.

   신명기적 역사의 첫 번째 증거는 삼하 7:8-12에서 발견된다. 이 단락은 기원전 3세기 이전에 왕조 이전 기간의 사사들의 존재를 보여주는 단서로서 확실하게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구절은 야웨가 다윗의 통치 이전에 사사를 명해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day of days, LXX)를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야웨는 나단으로 하여금 다윗의 경력을 회상하게 함으로써 백향목 성전을 짓겠다는 다윗의 기도에 대답하고 있다: 다윗은 목장에서 선택되었고(8절) 야웨는 그와 함께 있어서 그의 모든 적들을 정복할 수 있었다(9절). 다음으로 야웨는 이스라엘이 전과 같이 악한 종류에게서 해를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한 장소를 정하고, 이스라엘로 거주하게 할 것을 약속한다(10절).45 전과 같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치 않지만, 다음 구절에서 명시하고 있는 것 같다: 야웨가 자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서 사사들에게 명령했던 때로부터 이다(11a절). 사사들의 기간이 여기에서 의미하고 있는 바는 가능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확실한 것은 아니다.46 여기에서 사사가 언급되는 것은 전혀 다른 두 개의 구절들(1-7절, 11b-16절) 사이에서 연결을 위한 일종의 접합점으로 그것의 이차적인 성격을 이미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 될 뿐만 아니라,47 동사 ‘명령하다(???)’가 처음엔, 대상 22:13; 28:7에서의 경우와 같이, ‘재판관들(?????)’을 가리키기 보다는 ‘재판(??????)’에게 적용되었던 것 같다. 이러한 방법은, 다시 말해서 그 본문은 ‘이스라엘에게 해를 끼쳤던 악한 종류’(10b절)로부터, 즉 이집트에게서 해방된 이후에 곧 바로 시내 산에서 계명을 받게 된 일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훨씬 더 잘 뜻이 통한다.48 분사 ?는, 일단 왕조 이전 시대의 사사들이라는 것이 만들어지게 되자, 간단히 없앨 수 있었던 것이다.

   느헤미야서 9장은 명쾌한 연대기적인 짧은 언급으로 이스라엘과 유다의 과거를 역사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창조(6절), 족장(7-8절), 출애굽(9-21절), 정복(22-25절) 그리고, 슈미트에 따르자면, 사사들과 왕들의 시대(26-31절).49 실로 이 본문은 모세 오경과 여호수아가 보여주는 순서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러나 정복 이후에, 내러티브는 노트 학파가 기대하는 것처럼 사사들과 다음의 왕들이라는 균형 잡힌 순서로 나타나고 있지 않는다. 사실, 사사들은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다. 구원자책이 분명히 암시되고 있기는 하지만(27절의 ???와 ???????, 28절의 ???), 포로기 동안에 고안된 왕조 이전의 사사 시대에나 등장하는 사사들은 과연 어디에 있단 말인가? 느헤미야서는 사사라는 말도 나오지 않으며, 심지어 28절에서는 구원자 대신 사사를 언급하고 있는 사사기서의 바로 그 부분인 뼈대(삿 2:11-19)에서조차도(제 3장을 보라) 나오지 않는다. 그러한 생략에 대한 확실한 이유는, 느 9장의 저자들은 요시야 판본의 구원자책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들은 이 책이 ‘사사기서’로 불렸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또한 그것이 이스라엘 역사의 특정 기간을 상정하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구원자책은 기껏해야 이스라엘 영웅을 미화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그려내고 있는 것뿐이며, 그러므로 구원자책을 사용했던 요시야의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느 9장의 저자들은 구원자책과 사무엘서-열왕기서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았다. 사무엘은 완전히 무시되었고, 유다와 또는 이스라엘의 왕이 등장했으니, 이들은 특별한 시대를 가리키기 위함이 아니라, 방백들과 제사장들 예언자들과 조상들과 백성들과 함께 나올 뿐이었다(32, 34절). 더 나아가, 이 단락의 첫 번째 구절은(26절) 예언자들이 죽임을 당했다고 확언하고 있지만, 사사기서는 어디에도 그러한 사건을 말하고 있지 않다. 예언자들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은 단지 열왕기서에서만 발견된다(왕상 13, 18-19; 왕하 21). 그러므로 느 9장이 토라(26, 29, 30, 34절)와 그 귀추(여호수아서)를 정복으로 이어지는 굳건한 연대기적인 순서를 나타내고 있으며, 그러나 정복 이후에 더 이상의 연대기적인 실마리가 없었다는 것이, 바로 신명기적 역사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왕들, 예언자들 그리고 구원자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취급되었는데, 왜냐하면 그 당시에 토라만이 유일하게 수집된 책 혹은 두루마리였기 때문이었다. 다른 작품들은, 그것을 열왕기서, 예언 신탁 모음 혹은 구원자책이라고 하든지, 여전히 서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었다.

   시편 106편은 왕조 이전의 사사 시대에 대한 증거를 제공해 줄 수도 있겠다. 시편은 출애굽 이후의 시대를 말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우상들에게 제사했을 때(38절) 이교도의 손에 넘겨지게 되었고(41절), 원수들의 압박을 받았다고 말한다(42절). 구원자책이 아마도 연관되어있는 것 같은데, 비록 그것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나타내는 인물들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43-44절은 구원의 행위를 가리키기 위해 ???를 쓰기보다 어근 ???를 사용하고,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말하기 위해 ??? 대신 ???을 사용한다. 사사들도 구원자들도 왕들도 나오지 않고, 46절은 곧바로 포로기로 넘어가는데, 왕조를 회피하고 있는 것으로, 이것은 겔 20장과 시 78편이 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혹자는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체계적인 진술에 관해서 말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시편 105편과 106편은 육경에서 이야기되는 사건들의 순서들이 나름대로 고정되어 있지만, 단지 정복 이후에, 정확한 연대기적인 실마리를 따라서 다양한 책들을 조직할 수 있는 모델이 여전히 없었음을 보여준다.

   왕조 이전의 사사 시대를 위한 가장 이른 성서 외적인 증거로는, 이미 다룬바 있는 시락서 46장 11절을 들 수 있겠다. 다른 증거들이 바룩서 2장 1절에서, 에녹1서 89장 42절에서, 바룩 2서 60장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이 구절들은 모두가 시락서 46장보다 늦은 것이어서,50 여기에서 다루고 있는 기원전 3세기와 관련된 것들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왕조 이전의 사사 시대라는 것을 발명한 연대가 기원전 3세기 말의 알렉산드리아였다는 점에 그 어떠한 문제도 있을 수 없다. 크로노그래프(Chronographical)를 사용해보면 그러한 계획에 잘 들어맞는다.51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을 때’는, 바로 그 때에, 왕들 이전의 시대가 된 것이다(룻 1:1). 사사기서와 룻기서는 세상과 이스라엘의 기원에서부터 페르시아 시대(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까지로 나아가는 연속적인 시대 안에서 특정한 기간을 묘사하는 책임을 맡게 된 셈이다. 하스모니안가(家)는 곧 이러한 연대기적 일들을 마카비와 사사들 사이의 우월적인 연결을 세우기 위해서 사용하게 된다: ‘요나단은 미그맛에 자리를 잡고 백성을 다스리며 이스라엘 민족 반역자들을 모두 없애 버렸다’(마카비상 9장 73절). 하스모니안가(家)는 헬라어 ‘역사서’를 자신들의 왕조를 합법화하기 위해서 사용했던 것이다! 역설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아마도 바리새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전기 예언서’에 대해서 헬라어의 순서를 계속 사용하게 이끌었던 이유들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룻기는 제외하고).

   다양한 책들을 정복, 사사 그리고 왕정 기간 안으로 편성한 것은, 헬라어와 후에 기독교 성서에서 역사서라는 범주를 만들어냈던 같은 과정에 속한다고 하겠다. 이렇게 크로노그래프를 사용하면, 이러한 과정들은 알렉산드리아라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그림을 만들어내며,52 논리적으로 기원전 3세기에 해당될 수밖에 없다. 연대기적인 실마리는 각각의 책들이 가지는 한계와는 정확하게 들어맞지는 않는다. 사사 시대는 실제로 여호수아의 죽음에 대한 두 번째 언급 이후에서 시작하고(삿 2:11)53 (사무엘의 아들이 사사로서 거부되고 있는) 삼상 8장과 (사울이 구원자 이야기를 흉내 내면서 야베스를 구원한 사건을 말하는) 삼상 11장 사이의 어딘가에서 끝을 맺는다.

   그러므로 사사 시대는 국가 이전의 사실적인 이스라엘 역사 재구성을 위한 증거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는 문학적 작품인 것이다.54 ‘사사 시대’라는 용어는 진지한 이스라엘 역사들(Histories of Israel)로부터 결정적으로 금지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사사 시대라는 가상적인 성격을 인식함으로써 독자들은, 얼마나 주의 깊게 그 시대가 만들어졌는지를 알아챌 수 있어야만 하며, 또한 그러한 작업의 결과로 나타난 직접적인 효과에 대해서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사 시대를 여전히 역사적인 것으로 믿고 있다. 심지어 출애굽의 역사성과 여호수아의 지도력 아래에서 이루어졌다는 정복의 역사성이라는 생각을 오래전에 포기한 학자들조차도 그러하다.55

   지금까지, 사사기서를 완전히 살펴보았다. 그것의 생성은 대략적으로 기원전 720년부터 기원전 200년까지 잡아볼 수 있는데, 마지막에 와서는 칠십인경의 역사서 안으로 통합되게 된다. 그런 다음 그것은 세계문학 안으로 들어갈 준비가 되었으니, 비록 기원전 150년 어간에 몇 개의 마카비시대의 첨가가 있었긴 했지만 말이다.







1. Schmid, Erzv?ter, p. 374, 또한 R.G. Kratz, Die Komposition der erz?hlenden B?cher des AT (Uni-Taschenb?cher, 2157; G?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2000), p. 198.


2. Schmid, Erzv?ter, p. 373.


3. Schmid, Erzv?ter, p. 32.


4. Schmid, Erzv?ter, p. 30-31.


5. Blum, ‘Knoten’, 제 3장을 보라.


6. Lindars, Judges 1-5, p. 92; 제 3장을 보라.


7. 수 14:2; 18:11; 19:51; 21:4-20.


8. Noth, ‘Background’ , p. 79.


9. MT는 ‘그들의 손들에... 그들이 물리치다...(????? ????)’으로 읽지만, LXXA는 ...εν χειρι αυτου, και επαταξεν...으로 읽으면서 1-3절이 첨가되기 전에 사사기의 본래 처음 구절을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므온이 17절에서만 등장하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유다가 단독으로 행동했던 것이다. LXXB와 MT는 3절에 따라서 유다와 함께 전쟁을 나선 시므온을 고려하기 위해서 복수형으로 후에 조화시킨 것이다.


10. 제 3장에서의 논의와 Schmid, Erzv?ter, p. 219를 보라.


11. Schmid, Erzv?ter, pp. 214-24.


12. Lindars, Judges 1-5, p. 42.


13. 수 15:5; 19:33; Lindars, Judges 1-5, pp. 72-73.


14. Schmid, Erzv?ter, pp. 220, 235.


15. Schmid, Erzv?ter, p. 219.


16. Schmid, Erzv?ter, p. 220.


17. R?sel, ‘?berleitung’, pp. 342-50.


18. Schmid, Erzv?ter, p. 38.


19. Th. R?mer, Israels V?ter (OBO, 99; Freiburg/G?ttingen: Universit?tsverlag/Vandenhoeck & Ruprecht, 1990), pp. 296-97.


20. Beyerlin, Gattung, p. 8.


21. Smyth-Florentin, F., ‘When Josiah Has Done his Work or the King Is Properly Buried: A Synchronic Reading of 2 Kings 22.1-23.28’, in A. de Pury and Th. R?mer (eds.), Israel Constructs its History (JSOTSup, 306,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2000), pp. 343-58.


22. Rof?, ‘End of Joshua’, pp. 217-27.


23. M.Z. Brettler, ‘Jud 1,1-2,10: from Appendix to Prologue’, ZAW 101 (1989), pp. 433-35 (435) 그리고 이제는 Brettler, Book of Judges.


24. 베커(Becker, Richterzeit, p. 103)는 DtrN에게 돌린다.


25. 다음을 보라: J. Kampen, The Hasideans and the Origin of Pharisaism: A Study in 1 and 2 Maccabees (SCS, 24; Atlanta: Scholars Press, 1989)


26. A. Bendenberger, ‘Biene, Fackel, Blitz: Zur Metaphorik der Namen in der Deborageschichte’, TuK 76 (1997), pp. 43-55.


27. A. Bendenberger, ‘Theologie im Widerstand: Die Antiochoskrise und ihre Bew?ltigung im Spiegel der B?cher Exodus und Richter’, TeKon 23 (2000), pp. 3-39 (21).


28. J.M. Miller, ‘The Israelite Journey through (around) Moab and Moabite Territory’, JBL 108 (1989), pp. 577-95 (585-87). 민수기 21장 10-13절은 민 33장과 삿 11장의 관점을 섞고 있다: G.I. Davies, ‘The Wilderness Itineraries and Recent Archaeological Research’, in J.A. Adney (ed.), Studies in the Pentateuch (VTSup, 41; Leiden: E.J. Brill, 1990), pp. 161-75. 민수기 21장은 민수기에서 가장 늦은 장중에 하나이다: W?st, ‘Einschaltung’, pp. 464-79; E.A. Knauf, ‘Supplementa Ismaelitica 14: Mount Hor and Kadesh Barna’, BN 61 (1992), pp. 22-26.


29. 데라(Der'a[Edre?]) 남동쪽인 에트-타이베(e?-?ayibeh)에 위치하고 있다: P.L. Redditt, ‘Tob’, ABD 6, p. 583.


30. 기원전 600-597년에, 암몬은 유다를 대항해서 바벨론에게 군대를 파견했다(왕하 24:1-2 그리고 E.A. Knauf, ‘Psalm lx nd Psalm cviii’, VT 50 [2000], pp. 55-61). 암몬은 아마도, 유다 남부를 침략했던 에돔과 같이, 요단을 향해서 자신의 지역을 확장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헬라 시대 말기에, 하스모니안가(家)와 헤롯가(家)는 빼앗긴 지역을 다시 되찾게 된다. 암몬 족속의 신으로 그모스(Kemosh)가 언급되고 있는 것은(삿 11:24) 암몬 족속이 모압의 북쪽 부분에 권리가 부여받고 있음을 지시하는 것일 수 있다(신 32:8-9 LXX). 이 경우에, 본문은 페르시아 시대의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 당시에 헤스본은 암몬에 속해있었기 때문이다: 렘 49:1; E.A. Knauf, ‘Hesbon, Sihon Stadt’, ZDPV 106 (1990), pp. 135-44 (137); H.-C. Schmitt, ‘Das Hesbonlied Num 21,27ab-30 und die Geschichte der Stadt Hesbon’, ZDPV 104 (1988), pp. 26-45 (35). 그러나 암몬 족속이 남쪽까지 확장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렘 49:1-5에서 라밧 암몬 보다는 라밧 모압이 먼저 관련되어있는 것 때문에, 확실치는 않다. 두 번째 모압 신탁(첫 번째는 렘 48장에 있다)은 렘 25:21(그리고 암 1:13-15; 겔 40:13; 41:10-15)을 따라서, 비록 예레미야 전승이 암몬에 대해서는 불평이 없었다 하더라도, 암몬에 적대적으로 바뀐다: E.A. Knauf, ‘Jeremia xlix 1-5: Ein zweites Moab-Orakel in Jeremia-Buch’, VT 52 (1992), pp. 124-27. 휘브넬(U. H?bner, Die Ammoniter [ADPV, 16; Wiesbaden: Otto Harrassowitz, 1992), p. 167 n. 55])에 따르면, 삿 10-11장은 암몬 보다는 모압, 즉 그모스에 더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페르시아 연대는 확실히 불확실하다.


31. D.I. Treacey-Cole, ‘Perea’, ABD 5, pp. 224-25 (224); 마카비상 5장.


32. Harl?, Bible d'Alexandrie, p. 47.


33. 다음을 보라: Becker, Richterzeit, p. 23.


34. Noth, ‘Background’, p. 80.


35. 다음의 참고문헌을 보라: M. Delcor, ‘R?flexions sur la P?que du temps de Josiah d'apr?s 2 Rois 23, 21-23’, in idem (ed.), Environnement de l'Ancien Testament (AOAT, 228; Kevelaer: Butzon & Bercker, 1990), pp. 90-104 그리고 M. Delcor, ‘Le r?cit de la c?l?bration de la P?que au temps d'Ez?kias d'apr?s 1 Chr 30 et ses probl?ms’ in A. Schenker (ed.), Studien zu Opfer und Kult im Alten Testament (FAT, 3; T?bingen: J.C.B. Mohr, 1992), pp. 93-106.


36. G.J. Brooke and N. McLean, The Old Testament in Greek. II.2. The later historical books, 1 and 2 King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30), p. 381. 나는 이러한 내용에 대해서 프리보그(Fribourg[CH]) 대학의 아드리안 솅커(Adrian Schenker) 교수에게 빚을 졌다.


37. Harl, Dorival and Munnich, La Bible grecque, pp. 96-98; E. Tov, ‘The Septuagint’, in M.J. Mulder (ed.), Mikra: Text, Translation, Reading and Interpretation of the Hebrew Bible in Ancient Judaism and Early Christianity (CRINT, 2; Assen/Philadelphia: Van Gorcum/Fortress Press, 1988), pp. 158-88 (162).


38. 다음을 보라: E. Ben Zvi, A Historical-Critical Study of the Book of Obadiah (BZAW, 242; Berlin: W. de Gruyter, 1996), pp. 223-26.


39. Schmid, Erz?ter, p. 273.


40. G. Sauer, Jesus ben Sirach (JSHRZ, 3.5; G?tersloh: G. Mohn, 1981), p. 483.


41. 유배자들에게는 광대한 신정론을 만드는 것보다도 더욱 급한 문제들이 확실히 있었을 것이다; 만약 바벨론 당국에서 이러한 작업을 달성하기 위해서 유다의 서기관 그룹을 후원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미스바를 이어받은 엘리트들에 관해서라면, 바벨론 시기 전반에 걸쳐서 팔레스타인에 나타났던 몇 번의 경제적인 위기가 에돔 족속과 관련된 정치적인 문제들에 첨가해서, 집중적인 편집 활동에 도움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미스바와 그 행정부에게는, 예루살렘의 파괴와 반역의 지도자들을 죽이거나 강제 이주한 것이 적들의 제거를 의미했다. 예레미야도 사반 가문도 예루살렘을 위해 한탄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예루살렘의 파괴를 설명하기 위한 의도로 신정론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42. 헬라어와 히브리어 정경 순서 사이에 나타난 복잡한 질문에 대해서 그 어떠한 적당한 대답도 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이 두 개의 개념은 모두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이며,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LXX와 MT의 순서가 이러한 상호작용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락서의 서문은 예언 수집물의 우선성을 선호하는데 무게를 두는 논증이 되는데, 그 이유는 정경의 두 번째 부분이 예언문학이라는 잘 알려진 사실을 바로 시락서가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의 분명하지만 비역사적인 순서에도 불구하고, MT는 LXX의 역사적인 뼈대를 여호수아-열왕기하, 즉 전기 예언서로 통합했던 것 같다. 이것은 MT의 순서보다도 헬라어로 된 유대의 역사편찬의 존재를 지지하는데 무게를 두는 논증이 된다. 이 점에 대해서 아드리안 솅커 교수에게 감사한다.


43. 다음을 보라: Rof?, ‘End of Joshua’, pp. 217-27. 수 24장에서 에훗 이야기로 곧장 건너뛰는 이러한 읽기는 유대인 역사의 ‘포켓판(pocket edition)’이거나 선택된 구절들만을 포함하고 있는 첫 번째 시도였을 수 있다.


44. Diodorus of Sicily XL.3 (번역 F.R. Walton; LCL; London: Heinemann; 1967), p. 283.


45. D. Vanderhooft, ‘Dwelling beneath the Sacred Place: A Proposal for Reading 2 Samuel 7.10’, JBL 118 (1999), pp. 625-33.


46. D.F. Murray, Divine Prerogative and Royal Pretention (JSOTSup, 264;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98), p. 184.


47. 다음을 보라: S.L. McKenzie, ‘Why Didn't David Build the Temple? The History of a Biblical Tradition’, in M.P. Graham, R.R. Marrs and S.L. McKenzie (eds.), Worship and the Hebrew Bible (JSOTSup, 284;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99), pp. 204-224.


48. 해법은 이미 제시된 바 있다: S.R. Driver, Notes on the Hebrew Text and the Topography of the Books of Samuel (Oxford: Clarendon Press, 1960), p. 275: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10b절이 말하는 것은 애굽에서의 고난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리 잡은 다윗의 정부 덕분에 보장된 축복이 이스라엘이 사사 시대 동안에 맞닥뜨리게 되는 공격으로 충돌하고 있다라는 맥락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다’.


49. Schmid, Erzv?ter, pp. 302-304.


50. 이들 서로 다른 작업들의 연대와 참고문헌을 위해서 다음을 보라: Schmid, Erzv?ter, pp. 316-49


51. 크로노그래프는 아마도 다니엘, 에스라-느헤미야, 에스더를 포함하는 후기 왕조 시대까지도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Josephus, Apion, 1.38-41; R. Beckwith, The Old Testament Canon of the New Testament Church and its Background in Early Judaism (Grand Rapids, MI: Eerdmans, 1985), pp. 78-80, 118-27.


52. Schmid, Erzv?ter, p. 51.


53. 이는 사사 시대가 수 24장에서 시작한다는 슈미트(Schmid, Erzv?ter, p. 218)에 반대하는 것이다.


54. Kratz, Komposition, p. 195.


55. W.G. Dever, ‘What did the Biblical Writers Know, and What Did They Know about It?’, in J. Magness and S. Gitin (eds.), Hesed ve-Emet: Studies in Honor of Ernest S. Frerichs (Atlanta: Scholars Press, 1998), pp. 241-57 (244-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