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구약 성서

Waiting for Josiah: The Judges (by. Philippe Guillanme) - 6장 번역

진실과열정 2007. 11. 20. 02:27
 

Waiting for Josiah: The Judges by. Philippe Guillanme (pp. 198-226 번역: 양지웅)


제 6 장


페르시아 시대에 예루살렘 대(對) 미스바: 사사기 1장 22-26절; 19-21장




니느웨가 무너졌어도 예루살렘은 살아남았다. 그러나 유다의 지도자들은 제국 다음에 또 다른 제국이 종종 일어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일어난 일로, 니느웨를 파괴했던 자들은 예루살렘, 남부 유다 그리고 블레셋을 완전히 파괴했고, 에돔은 남쪽 유다의 남은 부분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백 년 전까지만 해도 예루살렘에서는 그 어떤 중요한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삶은 계속되었고, 비록 상당히 낮은 수준이기는 했지만, 북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전승이 보존되고 있었다. 다른 것들 중에서, 사사기서는 화염에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고, 이제 그 구원자가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바로 벧엘에서부터 말이다.



사사기 1장 22-26절: 벧엘 정복


사사기 1장22-26절은, 요셉 가문이 벧엘을 정복한 것과 관련된 사건으로, 아직 우리가 다루지 않았었다. 바로 ‘요셉 가문’이라는 것이 35b절에 다시 나타나는데, 35a절이 말하는 것과 같이 벧엘의 정복이 요시야적 판본에 속하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3장을 보라). 그렇게 시대를 잡는 것은 벧엘 정복 이야기를 요시야가 자신의 활발했던 제의정결화 작업 동안에 벧엘 지역으로 침입했던 맥락을 고려한 것이다(왕하 23:15). 그러나 그 야웨신앙의 열심에도 불구하고, 왕하 23장은 요시야가 실제로 벧엘 성소를 실제로 폐쇄했다고 확언할 뿐 그 이상은 아니다. 본문은 그가, 게바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제사장들이 번제를 드려왔었던 산당을 더럽혔다고 단순히 선언한다(8절). 그러나 벧엘에서는, 왕궁의 열심은 여로보아의 산당, 그 번제단과 아세라에 대해서만 집중되었다. 만약 벧엘에 다른 제의 시설이 있었다면, 즉 상당히 오래된 중심지라고 여길 정도의 그러한 시설이 존재했다면, 그들은 그곳을 아무 상처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새로 정복된 베냐민 지파에 대한 외교적인 이해관계로 인해서 아마도 요시야는 벧엘의 다른 곳을 파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요시야가, 요셉 가문이 벧엘을 정복했다는 이야기를 위한, 모델이 될 많은 기회는 없었다.

   사실, 삿 1:22-26은 벧엘 정복을 군사적인 업적의 모습으로 보여주지 않고 있다. 성읍은 불시에 습격을 당했으니, 정보를 알려주는 대가로 안전을 보장받은 벧엘의 거주자가 배반하면서 가르쳐준 뒷문을 통해서 일어난 일이었다(24절). 이 남자는 다음으로 자신의 모든 식구들과 함께 그 도시를 떠날 수 있었고, 루스(Luz)라고 부르는 다른 성읍을 건설했으니(26절//창 28:19), 바로 루스가 벧엘의 이전 이름으로 나타나고 있다(23절). 이 이야기는 그 길이가 짧아서 분명치는 않지만, 많은 정보들이 이미 가정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의 분명한 목적은 다른 루스, 즉 헷 족속의 땅에 있는 루스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그러한 성읍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으며,1 그러나 오늘날 비르 제트(Bīr Zēt) 주변에 무성한 아몬드 나무들이 있기 때문에, 루스 즉 ‘아몬드’는 벧엘 주변의 베냐민 아몬드 재배 구역을 기술하는 것일 수 있다(창 23; 26:34;민 13:29). 이 내러티브는 수 10-12장의 성공적인 정복 내러티브보다는 여리고의 라합이 보여주었던 잔꾀에 좀 더 가깝다. 그러므로 삿 1:22-26의 역사적인 정황을 찾기 위해서 요시야 이후의 기간으로 옮길 필요가 있다.

   예루살렘 재건의 연대와 주변 상황은 결정하기가 불가능하다.2 그러나 에스라와 느헤미야서는 그것이 길고도 어려운 과정이었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고 있다. 미스바는 아마도 사마리아가 ‘패역한 성읍(אידרמ אתירק)’을 발견했다고 증언했던 것보다 더 행복하지는 못했다(스 4). 예루살렘 성소의 헌당식으로 인해서 벧엘과 그 성전 학교가 즉각적으로 문을 닫지는 않았다. 벧엘은 늦어도 기원전 450년까지는 계속해서 그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3 고고학은 벧엘의 종말과 관련된 그 이상의 내용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 시대의 상반기에 벧엘과 예루살렘 사이의 경쟁은 포로기 이후의 문학에서 흔적을 남기고 있다.4

   삿 1:22-26에서 요셉 가문이 벧엘을 정복했다는 이야기가 가장 납득이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경쟁이라는 맥락에서이다. 예루살렘은 벧엘에 엄청난 수치를 가져다주었고(왕상 12; 출 32),5 이에 벧엘은 예루살렘과 같은 시기에 정복되었으며 그러므로 성소로서 존재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는 점을 설명하는 내러티브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방어했을 것이다. 삿 1장안에서 이 구절의 위치는, 예루살렘과 유다의 남은 지역을 정복한 것에 대한 내러티브 바로 다음으로(삿 1:4-19), 삿 1:22-26의 그러한 기능을 아주 잘 설명해준다. 밀고자를 향한 요셉 가문의 공정한 대우가 그 이전 절들에서 나오는 유다 족속의 야만성과의 대조에서 강조되고 있다. 아도니베섹의 손가락을 모두 잘라 내버린 유다와는 반대로(삿 1:7), 요셉 가문은 루스인과 그 가족의 목숨을 구해준다. 이는 마치 에브라임 족속의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라합에게 해주었던 것과 같이 말이다(수 6:22-25//삿 1:25). 이러한 관대한 태도(דסח, 삿 1:24)와는 별개로, 본문은 벧엘이 예루살렘이 그러했던 것처럼 정복을 통해서 정결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들이 칼날로 그 성읍을 쳤다’(삿 1:25). 이는 이스라엘의 좋은 성소의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한 언급이다.


요셉 가문의 정체

삿 1장에서 요셉 가문의 정체와 관련된 그 어떠한 내용도 나와 있지 않다. 본문은 이 그룹이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함께 놓고 있음을 분명하게 암시하고 있다(민 13:12; 26:28; 34:23; 36:5; 신 33:17; 수 14:4; 16:1; 17:14; 18:11; 왕상 11:28). 요셉은 부족 연합의 오랜 이름으로 여겨져 왔었지만,6 그러나 외부적인 증거는 없는 상태이다.7 에브라임이 (삿 5:14에서와 같이 마길이 아닌) 므낫세와 짝을 이룬다는 사실은 기원전 10세기 이전으로 연대를 잡는 것이 그럴듯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서로가 독립적인 정치 체제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라는 짝은 아시리아의 속주 체제를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특별히 요시야가 최 남부 지역인 사마리아의 베냐민 속주를 잘라 먹었던 일이 있고 난 후일 것이다. 그러한 분리가 바벨론과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서도 유지되어져 왔기 때문에, 암묵적인 현실은 기원전 7세기 후반에서부터 최소한 기원전 4세기에 이르기까지 진행되어왔고, 그 시간 간격이 너무나 커서 삿 1:22-26의 연대설정을 위해 많은 도움을 줄 수 없을 정도이다. 비록 요셉이 열 두 부족 체제 안에서 분명히 이차적인 역할을 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요셉 가문’이라는 명칭에 대한 기원과 연대는 여전히 미지의 것으로 남아있다.8

   어떤 그리스어 본문은 22절을 ‘요셉 가문(ףסוי־תיב)’ 대신에 ‘요셉 자손들(ףסוי־ינב)’이라고 읽고 있는데, 이는 번역자가 그 이전 구절에서 유다와 유다 자손들이 나왔던 것에 짝을 이루려는 것임을 보여주는 부분이다(삿 1:3-18에 대해서 2장을 보라). 그러나 23절에서, 모든 번역본들은 MT의 요셉 가문(ףסוי־תיב)과 같이 기록하기 때문에, 요셉 ‘가문’이 본래적이라는 점은 의심할 나위 없다. 이 구절의 기본적인 의미는 아마도 요셉 가문(므낫세와 에브라임)이 루스를 정복했고 다음에 그것은 ‘엘의 가문(לא־תיב)’으로 개명했음을 뜻할 수 있다. 이름을 바꾼 것은 제의 장소의 성격을 바꾸는 것으로, 이스라엘에게로 벧엘 창설을 돌리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예루살렘을 정복한 사람들이 8절에서와 같이 유다의 자손들이라는 점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부분이다. 페르시아 시대의 정황에서, 그러한 대조는, 예루살렘의 지배와 간섭이 점점 증가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명백한 목적에서, 벧엘 자신에게서부터 일어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벧엘은 자신의 고대성과 자신의 근본이 이스라엘적 성격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바로 예루살렘이 재건된 이래 페르시아의 속주인 예후드(Yehud) 안에서, 유다와 베냐민적인 요소들 사이에서 점점 다가오는 충돌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베냐민을 상대하는 예루살렘

페르시아의 행정부는 북부 유다 경계에 대하여 바벨론의 배치를 그대로 따랐기 때문에, 요시야가 베냐민을 유다로 병합시켰던 일을 인준한 셈이 되었다. 벧엘과 베냐민은 예루살렘이 점진적이면서도 거부할 수 없게 수도로 다시 회복되는 것에 대해서 필연적으로 분개할 수밖에 없었으니, 이는 또한 미스바가 자신의 지도적인 정치적 역할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은 직접적으로 벧엘과의 경쟁 구도를 만들어 놓았으니, 이 벧엘은 예루살렘 북부에 20킬로미터도 채 되지 않은 거리에 위치했으며, 이는 결국 벧엘의 제의적 역할이 예루살렘에게로 옮겨진다는 징조로 점점 크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한 도전에 직면하여, 벧엘의 제사장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모든 논쟁거리들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벧엘 제의의 고대성이라는 성격은, 벧엘이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바벨론과 페르시아 초반부 동안에 예루살렘을 대체했었다는 사실에 더해서, 벧엘을 위한 구실로 확실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등장한, 페르시아의 공식적인 후원을 받고 있는, 예루살렘을 압도할 순 없었다. 그러한 상황 아래에서, 삿 1:22-26은 베냐민 자손의 독특성을 주장하고 있는데, 즉 예루살렘을 향해 계속적으로 증가하는 구심력에 저항하기 위해서 ‘베냐민 자손의 예외’를 만든 것이다. 예루살렘이 자기 자신을 유다의 주요 제의 중심지라고 다시 주장하는 것을 막지 못한 상태에서, 벧엘은 예루살렘이 벧엘을 대신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베냐민과 그 지역의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 때문이었다. 이러한 전략은 필시 실패하고 말았다. 종국에 와서, 미지의 상황 아래에서, 벧엘은 파괴되었고 그 제의는 ‘상당기간’ 중단되고 말았으니, 바로 페르시아 기간 동안이었다.9


벧엘과 예루살렘 사이에 밀고 당기기

페르시아 시대에 예루살렘이 재건된 것은 벧엘과 예루살렘 사이에서 책이 여행했던 마지막을 장식한다.

   실제로 손에 잡히는 두루마리 책이 움직였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두루마리들은 언제나 벧엘의 성전 학교에 꾸밈없이 남아있었을 것이다. 므낫세 시절의 첨가는 유다 근방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 받아들여졌을 것인데, 왜냐하면 예레미야와 같은 유다의 학생들이 벧엘에서 교육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요시야 재위 기간 동안 벧엘이 직접적으로 유다의 통치를 받게 되자, 벧엘은 정부의 선전문구를 자기 자신의 전통들과 통합하는 일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사기서의 두루마리가 몇 번이고 벧엘과 예루살렘 사이에서 실제로 돌아다니지 않았다면, 그것이 사실인 것 인양 계속해서 말하는 것은 유용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계속되는 이데올로기와 이익의 움직임이 시각적으로 더 잘 그려지기 때문이다.

   1장에서 봤던 것처럼, 구원자책의 원본은(삿 3-9) 기원전 720년 어간에 벧엘에서 만들어졌으며, 그것을 예루살렘으로 가져온 사람은 바로 므낫세였다. 예루살렘에서 요시야는 그것을 상당히 크게 확장시켰고, 그것을 사사기서로 탈바꿈해놓았으니, 다음에 수도가 미스바로 바뀔 때 화염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다. 벧엘은 유다의 전승을 자신의 것과 함께 보전했고, 벧엘의 구원자책에 유다에서의 첨가물을 통합하고 보호했으며, 가르치고 전수했다. 비록 요시야의 판본이 구원자책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반박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요시야가 잘못되었고 구원자책이 맞았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났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었고, 본문만 그대로 유지된 채 모든 상황은 완전하게 바뀌고 말았다. 그것들은(본문-역주) 자신들의 본래적인 관련성을 상실하고 말았으며, 그것들은 갑자기 전승이 되어버리고 말았으니, 이제 보전되어졌던 것을 보전해야할 책무를 맡은 것은 바로 벧엘이었다. 기원전 586년에, 요시야가 구원자책에 덧붙인 내용은 전통의 일부분이 되었고, 요시야는 그가 베냐민을 접수했을 때 이미 벧엘에 자신의 확장된 구원자책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어떻든지 간에, 구원자책은 그것이 기원전 7세기 동안에 첫 번 여정을 거친 이후, 벧엘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벧엘은 결국 예루살렘의 압력에 굴복하고 말았고, 사사기서는 벧엘에서 보존된 전부는 아니더라도 거의 대부분의 전승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이제 벧엘은 종교와 문학적 중심지로서 다시는 일어설 수 없게 되었다. 더 나아가, 사사기라는 것이 예언 문학 안으로 포함되기 전까지 수세기가 결렸고, 다음으로 그리스어 번역본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문학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제 7장에서 살펴볼 것인데, 그러나 그 전에, 예루살렘과 벧엘 사이의 경쟁과, 베냐민과 유다 사이의 경쟁이 사납게 휘몰아쳤고, 그 결과로 정경화된 사사기서의 끝에 참혹한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사사기 19-21장: 예루살렘의 복수


왜 사사기서는 베냐민 지파를 거의 완전히 멸망하고 있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을까(삿 20)? 왜 그러한 사건이 있은 다음에, 베냐민 지파의 생존자들이 후손을 키우고 이스라엘 부족에서부터 소멸될 것을 막는다는 공공연한 목적으로, 두 번의 가장 의심스러운 여자사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것일까(삿 21)? 베냐민을 상대로 한 잔인한 원정은 기브아에서 레위인의 유대인 첩을 집단 강간한 것에 계기가 되었다(삿 19). 유다가 분명히 베냐민에 대한 보복 원정의 지도자로서 야웨에 의해 지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삿 20:18), 유다 자손의 책임은 삿 20장의 나머지 부분 전체를 통해 ‘이스라엘의 자손들’이라는 일반적인 호칭으로 불리는 것으로 희석되고 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매복공격을 통해서 기브아의 폭풍을 가까스로 잠잠케 하기 전에, 두 번의 치욕스러운 패배로 고통을 받는다(삿 20:20-25). 그들은 성읍을 초토화했고(삿 20:40), 다음으로 재앙이 베냐민의 모든 성읍과 마을을 뒤덮었다. 그들의 거주민들과 소떼들은 모두 살해당했고(삿 20:48), 림몬 바위에서 피난처를 발견했던 육백 명의 군사들은 예외였다(삿 20:45; 21:13). 림몬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다의성 때문에, 즉 ‘천둥’ 혹은 ‘석류(pomegranate)’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아마도 벧엘에서 동쪽으로 5킬로미터 떨어진)10 림몬 바위는 비신화화적인 언급일 수 있다. 바알 림몬(왕하 5:18 ‘천둥의 주인’)과 연결된 지역명이 풍요의 상징인 석류의 바위로 재해석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러므로 이는 재혼과 후손을 생산할 수 있는 피난처를 찾기 위한 명백한 장소가 된 것이다.


지역 문제

삿 19-21장의 범-이스라엘적인 틀이 있다고 해도, 여기에서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유다와 베냐민 사이에 내부적인 정착의 이유에 있다는 사실은 숨길 수 없다: 다른 지파들은 그 이름도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범-이스라엘이라고 한 의도는 기껏해야 베냐민 지파를 몰살하는 것에 대한 임시적 합법화를 첨가하려는 계획일 뿐이다. 삿 19:1에서 삿 17:6; 18:1에도 나오는 친왕적 반복어구가 또 반복되고 있는 것은 내러티브를 요시야의 사사기서와 연결시키며, 그러나 명백하게도,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에 대한 이해는 바뀌었다: 그것이 되짚어보고 있는 요시야 시대라는 본래적인 자리에서부터 아시리아 시대까지(제 3장을 보라), 그리고 그것은 이제 바벨론과 페르시아 시대를 내러티브의 내포된 것으로 지칭하기 위해서 발전되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지금 이해되고 있는 것처럼, 왕조 이전을 ‘사사 시대’라고는 아직 받아들여지지 못했다(제 7장을 보라).


사사기 19-20장의 연대설정

베냐민 자손의 대학살의 범위는 당황스러울 정도이다. 베냐민 자손의 용사를 50,000명이나 살육한 것(삿 20:35, 44, 47), 다시 말해 베냐민 전체 인구를 학살한 것으로, 유다사람인 첩의 살해를 복수한다고 이러한 완전한 무차별 복수라니 말이다! 한 사람의 군인에 한 명의 아내와 두 명의 아이들이 있다고 고려해볼 때, 베냐민 자손의 전체 사상자의 수는 최소한 200,000명에 이르며, 이것은 산헤립의 3차 원정 기간 동안에 강제 이주된 사람의 총합과 맞먹을 정도이다! 그러한 인구밀도는 20세기 이전에 베냐민 지역에서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수치이다. 이러한 수치는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은 이웃 베냐민 사람들을 향한 편집자의 분노와 증오가 분명히 반영된 것이라고 하겠다.

   삿 19-21장의 연대를 설정하기 위해서 넓은 범위가 제안되기도 했다. 융글링와 군터만(H. Jüungling and J. Unterman)은 이 장들을 왕정 제도의 설립을 위한 구실로 이해했고,11 반대로 톨링톤(J.E. Tollington)은 소위 말하는 시리아-에브라임 전쟁과 연관시킬 것으로 이해했다: 북왕국이, 에브라임에 의해서 베냐민 지파에게로 인도된 이후 유다 여자가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유다를 위험한 존재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12 명백한 이유들로, 베커(Becker)는 모든 포로기 이전의 연대설정을 거부하고13 포로기 혹은 포로 후기 연대를 선호한다. 블렌킨솝(Blenkinsopp)의 페르시아 초기라는 제안은 가장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는 것 같다: 벧엘과 미스바의 확실히 구별된 기능을 서로 다른 두 개의 자료들이 섞인 결과물로 고려하기보다, 블렌킨솝은 그것을 연대를 지시해주는 주요한 열쇠로 보았다.14 레위인은 미스바에서 법적 고소를 제기했고(삿 20:1,3), 기브아를 벌주자는 결정은 미스바에서 이루어졌다(삿 20:8). 미스바는 또한 이스라엘 처녀를 베냐민 자손들과 혼인시키지 말자는 약속이 이루어진 장소이기도 했다(삿 21:1). 벧엘은 야웨의 조언을 듣는, 금식을 위한, 그리고 희생제사를 위한 합당한 장소로 구별되었다(삿 20:18, 26; 21:2).15 벧엘과 미스바가 5킬로미터 거리로 떨어져있는 것은, 이야기가 보여주는 넓은 범-이스라엘의 경계와 상충하며, 오히려 기원전 586년과 페르시아의 상반기 시대 사이의 기간에, 즉 예루살렘이 파멸된 기간에, 해당하는 정치적인 기구를 보여준다. 다음에 미스바는 속주의 수도가 되었고, 벧엘은 주된 제의 중심지로서 기능했다. 블렌킨솝은 삿 19-21장에서 사용된 제의적 단어들이 뚜렷하게 페르시아적인 경향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한다.16

   블렌킨솝의 페르시아 연대설정은 텔 아비브(Tel Aviv) 대학의 나아만(Na’aman) 교수의 지원 아래 이루어진 연구에 의해서 확증되었다. 신시아 에딘버그(Cynthia Edenburg)는 최근에 삿 19-21장이 첫 천 년 기 후반의 히브리어 언어가 가지는 전문용어와 관용구 그리고 문법적인 사용 특징이 온통 뒤덮여 있다고 보여준다. 이러한 표시들의 분산은 그러한 설명 을 후대의 주석으로 볼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그러므로 두 개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고대 본문이 포로 시대 이후(그러나 그런 경우에, 편집 과정은 너무 방대해져서 차라리 재작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합당할 정도이다)에 편집되었거나, 아니면 에딘버그가 주장한 것처럼, 삿 19-21장이 고전 히브리어로 기록하려 했던 포로 후기 저자의 의식적인 시도를 반영했다는 것이다. 분문 안에서 본문 상호간(intertextual)의 암시에 대한 문학적 분석에 따르면, 저자는 거의 최종 본문 상태의 오경과 신명기적 문헌에 익숙했던 것으로 보인다.17 이러한 언어학적인 언급에 첨가해서, 에딘버그는 바벨론 기간 동안의 베냐민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분석을 다루었던 텔 아비브 대학의 또 다른 연구의 결과를 사용한다.18 그러므로 그녀는 사사기서의 마지막 세 장은 페르시아 초기 상황에서 생겨난 것으로, 예루살렘이 재건되기 시작했을 때 베냐민을 대항한 유다의 반응을 표현하고 있다고 결론을 맺는다.

   그러한 연대설정에 반대하여, ‘기브아의 시대’(호 9:9; 10:9)는 삿 19-21장의 이른 연대를 선호하도록 만드는데, 왜냐하면 호 9-10장은 삿 19장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19 그러나 베커는 호세아에서 이 구절들은 레위의 첩에 대한 강간과는 무관하다고 확신하며 논증했다.20 기브아라는 이름이 모호하기 때문에 문제를 분명히 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으며,21 호세아가 그 마을을 고려하고 있는지도 증명할 수 없다: ‘기브아’라는 단어는 항상 관사와 함께 사용되었다(העבזה, 호 9:9; 10:9a 그리고 העבזב, 호 10:9b). 더구나, 삿 19장이 단 하루 밤에 발생했던 사건과 관련이 있는 반면, 호세아는 기브아의 ‘날들’을 언급하고 있다. 모든 불확실에도 불구하고, 삿 19장은 한 밤중에 일어났던 것을, ‘기브아의 시대’라는 널리 알려진 투로 그려내고 있을 수도 있다. 더 나아가, 호세아와 구원자책 둘 다 벧엘에서 기원하고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벧엘의 제의적 기능을 파괴하고 단절시켰던 일을 합법화하기 위해서 베냐민 지파의 경구를 사용했을지도 모른다.

   베냐민 지파는 아마도 예루살렘의 재건을 방해하기 위해서 사울 전승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들은 사울이 다윗 이전에 왕이었고, 다윗은 사울의 종이었다는 점을 강조했었을 것이다. 그러한 주장에 대해서, 삿 19장은 유다와 베냐민의 지배라는 두 개의 상징 사이에 모순이 있음을 부각시킨다: 베들레헴, 즉 다윗과 레위인의 첩 모두의 고향(삼상 17:12; 삿 19:1-2)은 유다를 뜻하며, 반대로 기브아/기브온, 즉 사울의 수도이자 강간이 이루어진 장소(삼상 11:4; 삿 19:15)는 베냐민을 뜻한다. 베들레헴에서, 첩의 아버지는 너무나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친절해서, 레위인이 그곳에서 벗어나 떠나기까지 이틀이나 걸렸을 정도였다(삿 19:5-9). 기브아에서, 베냐민의 지역민들은 여행자들을 광장에 그냥 내버려두었고, 최소한의 친절도 베풀지 않았다(삿 19:15). 이들 두 성읍의 선택은 중요하다: 베들레헴은 기원전 586년 이후의 유다 지파의 경계의 남쪽 한계를 가리키며, 다음으로 헤브론과 남유다의 나머지 부분은 에돔의 지배 아래로 넘어가게 되었다.22


사울 전승과 평행관계

삿 19장에서, 모든 결정들은 미스바에서 이루어지는데, 그 이유는, 기록 당시에, 미스바가 유다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또한 삼상 10:17에서도 반영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사무엘은 이스라엘을 미스바로 불러 모아서 왕을 제비 뽑는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 되기 위해서 베냐민 지파가 선택된 것은, 베냐민이 세겜, 디르사 그리고 다음으로는 사마리아를 둘러서는 전통적으로 중심지로, 기원전 10세기에 블레셋의 중심지와 베냐민이 근접했던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23 이 왕이 사울의 수도인 기브온에서가 아닌 미스바에서 ‘선출’되어야만 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데, 만약 삿 20장과 같은 이 구절이 기원전 6세기 말경의 유다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면 말이다.24 사울을 깔보는 몇 개의 구절들은 예루살렘을 대신하는 미스바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사울 전승을 이용하고 있는 베냐민 지파에 반격하기 위해서 고도로 의도된 것이었다: 첩을 토막내는 것(삿 19:29)은 가장 명백하게 이러한 연관성을 보여준다. 같은 의도로, 사울의 황소는 이스라엘을 소집하기 위한 유다의 여자로 교체되며(삼상 11:7), 이 경우엔, 야베스-길르앗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라 전체 베냐민을 말살하기 위함이다. 삿 19:16에서, 밭에서 돌아온 사람은 위세 좋은 젊은 사울이 아니라(삼상 11:5), 레위인과 그의 첩을 가두어 놓고 마는 에브라임 노인이었다. 이 모든 것은 문학적인 전쟁이나 매한가지이니, 속주의 수도를 유지해나갈 미스바의 체면과 능력을 뒤엎으려는 그런 전쟁이 되고 말았다.


이차적인 첨가들

법궤: 언약궤는 삿 20:27b-28a에 나타난다. 이 언급은 수 18:1의 제사장 내러티브의 끝을 예견하고 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거기 회막을 세웠으니 그 땅이 이미 그들의 앞에 돌아와 복종하였음이라’. 만약 제사장 기자가 그의 작품을 기원전 515년 어간에 완성할 수 있었다면,25 삿 20장에서 법궤에 관한 언급은 본래부터 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 안에서 법궤는 아무런 기능도 하지 않기 때문에, 사사기서를 다른 책들과 조화시키기 위해서 후대에, 즉 ‘역사서’ 모음이 토라에 추가되었을 때에, 첨가했을 것이다(제 7장을 보라). 이러한 언급이 있다고 해서 본래적인 본문의 성격을 뒤바꿔놓지는 못한다. 그것은 단지 벧엘의 신적 업무를 맡은 자들을 법궤의 등장에 도움이 되는 인물로 만들었을 뿐이다. 법궤의 등장은 예외적인 것으로 단명한 것처럼 보이는데, 만약 누구라도 법궤가 다윗에 의해서 예루살렘 안으로 가져오기도 전에 어떻게 없어질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사무엘서가 충분히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벧엘의 법궤 앞에서 기브아를 상대로 최후의 살육을 하라는 야웨의 명령을 받는 장면을 위치시킴으로써, 편집자는 베냐민의 소멸과 예루살렘이 벧엘을 대신할 것을 미리 예고하게 되었다.


레위인: 같은 절에서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언급되고 있는 것은(삿 20:28) 평가하기가 좀 더 어렵다. 블렌킨솝에 의하면, 그 부분은 제사장 집단들 간의 갈등이 반영된 것으로, 예루살렘이 상당 기간 동안 벧엘을 밀어내기 전까지 예루살렘과 벧엘 사이의 갈등이라는 것이다.26 사실, 비느하스는 삿 19-20장에서 전적으로 고립되어있지는 않다: 삿 19장의 주연인물은 레위인으로, 레위인은 (아론 자손이건 아니건) 벧엘 성소와 확실히 연결되어 있다.27 여자의 행동을 남자의 재산과 명성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에 따라서 평가되는 사회에서, 첩이 자신의 아버지의 집으로 도망갔다는 것은 레위인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일이었다.28 첩의 정확한 지위와 그녀가 도망간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29 레위인이 그녀의 도망을 막을 수 없었다는 점이 사실로 남아있다. 더구나, 여부스 사람의 성읍보다 이스라엘 지역에서 밤을 셀 정도로 외국인 혐오를 고집하는 것이(삿 19:11-13) 그의 유다 사람 첩의 죽음의 주요한 원인이 된다. 더욱 나쁜 점은, 삿 19:29은 그가 여자를 토막낸 일은 인간 제사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30 만약 레위인이 베냐민 지파의 희생자였다면, 그는 그 자신의 완고함의 희생자이기도 하다. 레위인은 삿 17-18장에서 나왔던 것보다 더 나쁜 모습으로 삿 19장에서 등장하고 있다. 달리 말해서, 유다의 여자는 베냐민 지파뿐만 아니라 레위인들로부터도 거리를 두라도 경고를 받는다.

   여기에서 비느하스가 원래 있었거나 그렇지 않았거나 라는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문제가 되는 것은 삿 19-20장이 문학적으로 볼 때 벧엘 정복 이야기와 정확히 반대되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인데(삿 1:22-26), 이는 이 장을 시작하면서 고려한 점이기도 하다. 삿 1:22-26에서, 벧엘은 예루살렘을 대항해서 자신의 신임을 단언한다. 사사기 19-20장은 비방 내러티브 형식으로 예루살렘의 대답이라고 볼 수 있는데, 즉 베냐민 전승(사울)과 베냐민 성직자(레위인)을 향해서 비난의 수위를 올리고 있다. 사사기 20장은 예루살렘을 경멸하고 그것을 이방의 성읍으로 고려했던 일의 결과를 보여준다.31 이러한 예루살렘의 완강한 거부는 베냐민의 완전한 파괴를 이끌었고 단지 몇 백 명의 남자들의 목숨만 구할 뿐이었다. 이 파괴가 실제로 발생했던 내전에 대한 기록인지에 대해서는 대답하기가 어렵지만, 그 결국은 분명하다: 베냐민의 미래는 이제 유다의 손에 있고, 권력은 미스바와 벧엘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사사기 21장은 베냐민의 부흥을 위한 조건들을 기술하고 있다.



사사기 21장: 베냐민을 위한 여자들


사사기 21장은 사사기 19-20장보다 나중인가?

사사기의 마지막 장은, 삿 20장의 대학살에서부터 살아남은 베냐민 전사들을 위해서 어떻게 600명의 여자들을 발견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유다는 어디에도 언급되고 있지 않는다. ‘이스라엘 사람들’(לארשׁי שׁיא)이라고 불린 애매한 그룹이 미스바에서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결혼시키지 않는 맹세를 했지만(삿 21:1), 그러한 서약은, 이 장 전체의 전개를 위해서 핵심이 되는 것으로, 그 이전 장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던 부분이다. 사사기 21장은 그러므로 삿 20장에 이차적으로 첨부된 것처럼 보인다. ‘백성들’ 혹은 ‘용사들’은(삿 21:2-12) 벧엘로 올라가서, 방금 전에 완전하게 달성해버린 베냐민 자손의 전멸을 이유로 대성통곡하고 만다. 이러한 태도의 변화는 너무나 급격하고 갑작스러운 것이어서, 삿 21장의 이차적인 성격에 관해서 의혹을 더할 뿐이다. 베냐민 자손의 전멸은 예루살렘의 측면에서 삿 19-20장의 만족스러운 결론으로 보이는데, 이는 페르시아 시대에서 베냐민 지역의 지속적인 쇠락에 대한 원인론적인 이야기를 제공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쇠락은 내전의 결과로 설명되어질 수 있으며,32 그리고 삿 19-20장은 그러한 사건을 잘 반영해주고 있다. 보다 베냐민에게 우호적인 이후의 판본은 대학살을 비판했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지파의 재활에 관한 이야기를 첨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벧엘에서의 대성통곡(לודז יכב)은(삿 21:2) 아마도 거짓 눈물일 것이다. 야베스-길르앗의 남은 주민들을 몰살시켜서 얻은 첫 번째 처녀무리들에 대한 기원은(삿 21:8-12) 이러한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야베스를 파문한 일은 야베스 사람이 미스바 총회에 참석하지 않았다라는 사실로 정당화되어졌고, 이는 미스바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예상되는 또 다른 서원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러한 일에 대해서 삿 19-20장은 침묵하고 있다. 야베스의 선택이 삼상 11장에서 사울이 동일한 야베스를 구출한 것과 관련되었다는 결론은 피하기 어렵다. 야베스-길르앗의 대량 학살 이야기는 그러므로 거의 소멸된 베냐민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해답을 주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사울의 영웅적 행동을 흠집 내기 위한 것으로 이해되어지도록 보인다. 그러한 인상은 야베스에서 온 400명의 처녀가 베냐민의 생존자 각각을 위한 배우자로는 충분하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삿 21:14). 그러므로 다음의 질문이 제기된다: 야베스 사건은 베냐민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심각한 시도로 이해되어져야 하는가 아니면 이스라엘을 조롱거리로 만들 다른 방식일 뿐인가? 역사적인 평가가 그러므로 필요하다.

   여부스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서 초청했다는 것이 기원전 6세기 종반 혹은 5세기 초반의 베냐민 사람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길르앗은 사실 예후의 시대 이래로 다메섹의 지배를 받아왔었고(기원전 841-814), 그런 다음에는 아시리아 제국으로 통합되었다.33 이것은 요단강을 건너온 혈족들의 생존을 명백하게 보호해주지 못했다. 베냐민과는 정반대의 입장에 있는 빌라델비아와 이라크의 엘-아미르(el-Amir) 출신인, 도비야스(Tobiads) 가문이 페르시아와 헬라 시대 동안에 유다의 정치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을 때에, 혈연관계는 여전히 강력했다. 그러므로 요단 계곡을 관통하는 유대관계는 만들어졌고 정치적인 흥망성쇠를 견뎌내며 살아남았다.34 길르앗에서 아내를 찾는 일은 그러므로 페르시아 시대 동안에 베냐민 사람들에게는 실제적인 선택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삿 21장에서 사용된 방법은, 즉 마을의 나머지를 몰살하는 방법은, 상당히 의심스럽다. 내레이터의 실제적인 의도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의심에 무게를 실어줄 수밖에 없다.


기원전 4, 5세기의 베냐민

베냐민 지역의 점진적인 쇠락은 베냐민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인 조사에 의해서도 잘 드러난다.35 비록 베냐민이 기원전 586년 어간에 바벨론 군대에 의한 파괴에서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그리고 미스바에 속주의 행정기구가 설치되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동부와 서부 외각지대(셰펠라와 요단 계곡)는 곧 버려졌지만, 그렇다고 모든 주민들이 이집트로 내려가지는 않았다(이는 렘 43; 왕하 25:11, 26에 반대이다). 인구는 미스바 주변의 베냐민 고원에 집중해 있었다. 기원전 7세기에 최고조에 이르렀던 인구는 하락하게 되었으니, 이 시기는 어려운 때였다. 경제적인 상황은, 일단 이집트가 정복할 수 없는 상대임을 깨닫게 된, 바벨론이 예루살렘, 남부 유다 그리고 블레셋을 파괴한 이래로 약화되었다. 이러한 지면 초토화 정책은 시리아와 이집트 사이의 버려진 완충지대를 만들어 냈다. 베냐민과 에브라임 산은 고립되었고, 북부 페니키아 항구의 경제적 중심지에서부터 격리되고 말았다.

   예루살렘의 더딘 회복은, 일단 페르시아가 이집트를 정복하게 되자, 베냐민의 상황을 과감하게 발전시키지 못했다. 새로운 외국의 투자를 힘입어, 예루살렘은 곧 베냐민의 경쟁자가 되었고, 바벨론 시기를 걸쳐서 미스바와 벧엘을 북적거리게 유지시켜주었던 공식적인 기능들을 점차적으로 하나 둘 씩 가져가게 되었다. 베냐민의 파괴와 필사적으로 여자를 구하는 이야기는 페르시아 시대에 베냐민에서 오랫동안 계속된 경제적인 위기를 왜곡해서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에스라-느헤미야서는 예루살렘을 재건한 자들이 직면했던 거대한 불화를 자신의 방식으로 반영하고 있다. 도시에 다시 거주시키기 위해서, 그들은 심지어 위압적인 수단으로 되돌아가야만 했다(느 11:1). 모든 방면에서 반대가 생겨났고, 베냐민 사람들에게 결혼시키기 위해서 여자를 보내는 것을 거부하는 서원은(삿 21:1) 느 10:30의 한 부분과 유사한 점이 있는데, 비록 후자의 경우가 베냐민에 대한 것이 아니라 ‘땅의 백성(ץראה־ימע)’을 거부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새로운 주인의 눈에는, 베냐민이 남부의 에돔 사람과 북부의 다른 이스라엘 사람과 함께 땅의 혐오스러운 백성들 중에 하나로 확실히 포함되었을 것이다. 느 11장이 예후드 안에서 유다와 베냐민을 서로 구별된 존재로 여겨지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것이며(느 11:4, 7, 25, 31), 베냐민 자손의 지도자들은 아마도 가능하면 유다로부터 상당한 자치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매우 열심히 구별을 지켜나갔을 것이다. 예루살렘은 심지어, 일종의 자유 지대로, 특별법을 필요로 하는 전혀 다른 독립된 지역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거룩한 성(שׁדקה־ריע, 느 11:1, 18)에는 유다의 자손들, 베냐민의 자손들, 제사장들, 레위인들 그리고 성 문지기들이 공평하게 거주하게 되었다. 베냐민 사람들이 베냐민에서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느 11:31)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유다의 모든 성읍에서 살고 있었다(느 11:20). 그러나 이러한 교묘한 배열은 베냐민에 속해있기는 하지만 유다에서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어떤 레위인의 등장으로 엉망이 되버린다: ‘그리고 유다에 있던 레위 사람의 어떤 반열은 베냐민과 합하였더라(ןימינבל הדוהי תוקלחמ םיולה־ןמו, 36절)’. 페르시아에서 예후드는 세 가지의 서로 다른 지역들로 구성되었는데, 바로 베냐민과 유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중립적 예루살렘이었다; 그것은 용광로라고 할 수 없었고, 심한 증오만이 서로 다른 파벌들 사이에서 나타날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삿 21장을 이해할 수 있는 반향을 품고 있다.


베냐민 살육을 정당화하기 위한 야베스 살육

베냐민에게 아내를 준다는 이유로, 야베스 거민들을 대학살한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만 할까? 페르시아 기간이라는 정황에서, 페르시아의 공식적인 후원으로 바벨론에서부터 돌아온 포로민들이 미스바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며, 그러한 긴장이 이미 곯아 터질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은 명명백백했다. 귀환자의 편에서 볼 때, 미스바와 베엘은 반역자였고, 예루살렘을 파멸시키고 그 사람들을 강제 이주시켰던 느부갓네살의 종복이었으며, 지금은 패배하고 만 군대의 하인이었다. 베냐민 사람들은, 바벨론 시기의 모든 자취들을 소멸시키기 원하고 또한 예루살렘을 그 본래의 지위로 되돌리기를 원했던 갓 도착한 이들 벼락 출세자들의 권위에 저항했었을 법하다. 귀환자들은, 최소한 처음부터, 지역의 적대적인 주민들을 상대로 땅의 사람들과 구별됨으로써 자신들만의 지위를 확실히 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통혼권(conubium)을 금지하는 서약과 바벨론에 동조했던 사람들과 연류되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서약이 생겼다. 그러한 맥락에서, 삿 21장에서 제시된 베냐민의 생존자들을 위한 이상한 대답은 전혀 해답이 되지 못한다. 예루살렘의 새로운 주인으로부터 왔다는 것은, 삿 21장이 속주의 이전 베냐민 엘리트들과의 동맹을 노골적으로 거부하고 있다는 것과 다름없다. 힘은 유다인의 손으로 되돌아갔고, 유다 사람들은 그 어떠한 베냐민 사람과도 동맹을 원하지 않았다. 베냐민 사람들은 그들의 선조들의 예를 따라야만 했으니, 곧 길르앗에서 여자를 찾는 것이었다(창 28). 유다는 베냐민 사람들에게 길르앗에서의 자신들의 사촌을 살육했다고 함으로써 최고의 풍자를 만들어낼 수 있었으니, 이 길르앗은 다름 아닌 사울에 의해서 생명을 얻게 된 사람들의 후손들이다. 이제 요점은 분명해졌다. 베냐민 사람들 중에서 그 누구도 문자 그대로 충고를 받아들일 사람은 없다.


실로의 무희들을 납치하다.

두 번째 대답에 대해서, 즉 회중의 장로들이 실로 축제의 무희들 중에서 처녀를 납치하라는 조언에 대해서, 앞에서와 같이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역시 놀림조의 대답일까 혹은 베냐민에 우호적인 판본의 등장을 지시할 수도 있는 심각한 제안일까? 이 사건이 후대에 첨가되었을 가능성도 있는데, 그 이유는 삿 21:14b의 ‘그리고 그들 역시 발견 (못)했다(ןכ םהל ואצמ־אלו, 개정: 아직도 부족하므로)’에서와 같이 야베스의 처녀들이 충분치 못하다는 것을 지시하고 있는 부정 불변화사(אל)가 대부분의 헬라어 번역본에서는 입증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보다 이른 초안은 14절에서 곧장 24절로 이어졌을 것으로, 야베스 처녀들이 베냐민의 생존자들에게 주어졌고,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즉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기업으로 돌아가기 전에, 베냐민 지파가 자신의 여인들을 발견했던 그 방식이었다는 결론을 맺고 있다. 14절에서 부정문을 더하고 12절에서 사백 명을 더한 것은, 어떻게 이백 명의 부족한 여인들을 찾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두 번째 사건의 서론을 위한 길을 열어 놓았다. 21장의 첫 부분과 비교해볼 때, 어조가 변한 것 같은데, 즉 문제의 해결은 이전 사건과는 정 반대로 더욱 잔혹한 대학살이 없이도 이루어진다. 본문은 공정한 분배까지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왜냐하면 베냐민 자손이 자기들의 숫자대로(םרפסמל םישׁנ) 여인을 취했기 때문이다(삿 21:23). 물론, 본문은 무희 가족들의 분노를 달래줘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 22절에서와 같이, 장로들은 즉시 쓸 수 있는 해답을 가지고 있었다: ‘만일 그의 아버지나 형제가 와서 우리에게 시비하면, 우리가 그에게 말하기를, “청하건대 너희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들을 우리에게 줄지니라. 이는 우리가 전쟁할 때에 각 사람을 위하여 그의 아내를 얻어 주지 못하였고, 너희가 자의로 그들에게 준 것이 아니니, 너희에게 죄가 없을 것임이니라 하겠노라(개정판은 NRSV를 따르지만, 저자는 NASV[“그렇지 않다면 너희에게 죄가 있을 것이다”]를 따르는 것 같다-역주)” 하매’. 참으로 다소 복잡한 논증이 아닐 수 없는데, 그러나 실로 사건을 이해하는 것은 바로 이 구절을 이해하는 것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보다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직역하자면, 삿 21:22은 다음과 같다:


ונילא בורל םהיחא וא םתובא ואבי־יכ היהו

그들의 아버지들이나 그들의 형제들이 우리에게 시비걸기 위해서 올 것이다


םתוא ונונח םהילא ונרמאו

우리는 그들에게 말할 것이니,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라.


המחלמב ותשׁא שׁיא ונהקל אל יכ

왜냐하면 우리는 전쟁에서 남자의 아내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םהל םתתנ םתא אל יכ

왜냐하면 그들에게 준 (사람은) 너희가 아니기 때문이다.


ומשׁאת תעכ

이제 너희는 유죄이다.’


   첫 번째 문제는 장로들에게 불평하려고 올 아버지들과 형제들의 정체에 있는 것 같다. 문맥에 의하면, 그들은 분명히 실로 무희들의 친척으로, 그들이 괴로워했던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과 시정을 요구할 책임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경우라면, 본문은 ‘그(남자)들의 아버지들이나 그(남자)들의 형제들, םהיחא וא םתובא[남성 복수 접미사]’이라고 읽는 것이 아니라, ‘그(여자)들의 아버지들이나 그(여자)들의 형제들, ןהיחא וא ןתובא[여성 복수 접미사]’로 읽어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여성들만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남성 접미사는 가당치 않은데, 왜냐하면 베냐민을 파문한 이후, 포악한 베냐민 사람들에게는 불평하려고 올 수 있는 아버지들이나 형제들이 더 이상 생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어떤 사람들이 목숨을 부지했었더라면, 그들은 불평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아들들과 형제들이 값없이 아내를 얻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대응되는 남성 접미사에 점차적으로 여성 복수 접미사로 보충하고 있는 것은 후기 성서 히브리어의 특징이었으니,36 남성 접미사는 납치당한 여자의 친척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두 번째 문제는 납치된 처녀의 친척들을 달래려는 장로들이 내세웠던 이유와 관련되어있다: 그들은 베냐민의 생존자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야만 했으니, 그 이유는 ‘우리’가 전쟁에서 각 사람의 아내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우리’는 그 사건의 처음부터 화자로 등장하고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16절): 즉 장로로, 회중 전체의 이름으로 그리고 삿 20장에서 베냐민을 상대로 전쟁에 참여한 모든 사람의 이름으로 말하고 있다. 불평하는 아버지들과 형제들이 ‘우리’라는 것에 포함될 수 있는지의 여부는 문제의 여지가 있다. 바로 이것이다: 여자들은 전쟁 동안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비록 일반적인 전쟁의 과정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논의를 이해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과는 달리, 이들 아버지들과 형제들이, 삿 20장에서 암시되고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포로로서 베냐민 여인들을 취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신의 딸들을 값없이 여겨야만 했던 이유는, 그들 자신이 베냐민 여자 포로 몇을 아내로 취했기 때문이며, 여기에서 그들은 지금 말하고 있는 ‘우리’와는 반대되는 사람인 것이다. 사실, 삿 20장을 꼼꼼히 읽어보면, 베냐민 여자들을 살육했음이 명백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나타나고 있음을 알게 된다.37 그러므로 베냐민 여자 몇이 죽임을 당하는 대신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서 취해졌으며, 그들의 새로운 주인이 자신의 딸들을 실로에서 잃어버리는 일을 당했을 것이라는 게 가능하게 된다.

   더구나, 장로들은 아버지들과 형제들을 확신시키는 두 번째 이유를 말해준다: 그들은 실제로 여자들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베냐민에게 딸을 주는 것을 금지했던 서약을 회피하려는 책략으로 보통 이해할 수 있다: 참으로 소녀들은 넘겨졌다라기 보다는 빼앗긴 셈이다.38 그러한 경우에, 마지막 단어인 ‘이제 너희는 유죄이다(ומשׁאת תעכ)’는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지금 죄를 범한 것이다’라고 다소 뒤틀린 번역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다른 문제도 두 번째 יכ에 의해서 도입된 구절의 이해에서 발생한다: 그것은 두 번째 이유를 소개하는 것인가 아니면 같은 논의의 일부분인가? 장로들은 아버지들과 형제들을 비난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아버지들과 형제들이 장로들에게 여자들을 주지 않았으면서도, 장로들이 여자 포로들을 취하는 것조차도 바로 아버지들과 형제들이 막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러한 읽기는 두 개의 난점을 남긴다: 동격인, םתא은 반드시 부정어 앞에 위치해야만 한다. 즉, ‘왜냐하면 그들에게 준 (사람은) 너희가 아니기 때문이다(םהל םתתנ םתא אל יכ)’ 대신에 ‘왜냐하면 너희가, 너희가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םתתנ אל םתא יכ)’이 되어야 한다. 동사의 목적어는 분명히 간접적이다. 즉, ‘그들에게 준 (사람)(םהל םתתנ)’은 베냐민 사람들을 뜻하는 것이지 BHK에서 제안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게 된다. 두 개의 생각이 섞여있는 것 같다: 첫째로는, 베냐민 생존자들에 의해서 납치된 소녀의 가족들 그 자신들이 베냐민 여자 포로 몇을 취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었고, 그러므로 그들은 죄가 있는 것이며 배상을 요구해서는 안 되었다. 두 번째로는, 서약은 깨어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실로의 소녀들은 넘겨진 것이 아니라 약탈된 것이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베냐민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이 구절은 다소 불확실하게 남아있다. 그 구절은 전수과정 속에서 훼손되었거나 아니면, 베냐민 생존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확실한 논의라기보다는 불량배들 사이에서 하찮은 흥정을 나타내려고 아예 처음부터 일종의 뒤틀려져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 경우에, 편집자의 관점은, 화가 나있는 형제들이 자신의 여동생들을 겁탈했던 베냐민 사람들에게 최후까지 복수를 갚는 방도를 왜 찾지 않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기보다는, 베냐민에 대한 경멸적인 태도는 보다 확실하게 드러내는데 있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준다: 편집자들은 정말로 해답을 찾고 있었던 것인가? 그들은 순전히 베냐민의 종말을 바라던 것은 아닌가? 더 나가기 전에, 대답을 하자면 ‘그것은 아니다’이다.

   이런 인상을 뒤엎을 다른 요소들이 성서 외적인 확인들에서 나온다. 즉, 장로들이 조언했던 것과 같은 실행 가능한 결혼문제의 해답이 있었던 것이다.


동방의 결혼 풍습

결혼식과 관련된 동방의 풍습은 다소 엄격하다. 장로들이 내세웠던 불명확한 이유들은 상당히 설득력이 떨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심지어 소녀들의 아버지들이 포로들 몇을 취했다는 이유로 죄가 있으며, 또한 심지어 강간이 엄숙한 서약을 교묘하게 회피하는 편리한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요소들은 강간이 아내를 얻기 위한 선택 가능한 것이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아내 납치라는 입증된 행습들: 인종학적인 연구를 통해서 볼 때, 어떤 그룹들은 결혼식 기간 중에 신부를 납치하는 일종의 의식을 수행하기도 한다.39 이러한 의식들은 오랜 행습40의 잔재로 이해되어져 왔지만, 이제 그들은 족외혼을 통해서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는 아픔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다. 즉, 정든 집을 떠나게 된 신부의 슬픔과 그녀를 보내야만 하는 것에 대한 어머니와 형제들의 거부감의 표현일 것이다.41 이러한 모방 납치는, 때때로 심각한 상해를 야기할 정도로 상당한 열정으로 수행되기도 했는데, 고대 행습이 전수된 것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통과의례였던 셈이다.

   그러나 아내를 손에 넣기 위해서 실제로 강탈과 납치는 오늘날에도 자행되고 있다. 특별히 식구 중에 여성의 결혼에 대해서 도전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지고 있는 아버지들과 형제들의 경우에서 그러하다. 연구는 현재 터키에서 일어난 예로 시작해보겠다.

   동방의 결혼은 신부 값, 예식 날짜, 지참금의 합의에 도달하기 위한 오랜 현상 과정의 결과라고 하겠다. 현상이 시작하기도 전에 어떤 예비적인 조취들이 필요하게 된다. 신랑의 가족들은 신부의 가족들에게 가능한 한 최고의 것을 보내야만 하고, 그러므로 양 가(家)는 동등한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실제로, 많은 장벽들로 인해 결혼은 제약을 받을 수 있다: 다른 구혼자가 후보로 등장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납치가 잘 사는 편은 아니지만 결혼에 욕심을 내는 사람에게는 가능한 선택이 될 수 있다.

   다른 후보자와 결혼하기 전에, 누군가는 재빠르게 행동해야만 한다. 때로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소녀의 친척들 중에서 도움을 받기도 하는데, 일반적으로 여자 자신은 납치를 통해서 결혼하게 되며, 이 때 젊은 남자가 소녀를 유괴해서 그녀를 겁탈한다. 일단 그녀가, 그녀의 가족이 볼 때 가장 값진 그녀의 자산인, 자신의 처녀성을 잃어버리게 되면, 그녀는 자신을 겁탈한 자를 상대로 고소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의 가장 중요한 관심은 이제 그녀의 새로운 남편(겁탈자?)의 이익에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부부는 겁탈한 사람의 가족으로 들어오게 되고, 그 가족은 그들의 뒤를 봐주어야만 한다. 심지어 (남자의) 가족이 결혼을 반대하더라도 그리고 그 가족이 여자의 식구들에게 상당히 심한 모욕을 줬다 해도 말이다.42 보상금은 지불되지만, 신랑은 그의 매형을 만나서는 안 된다. 최소한 일 년은 지나야 하며, 더 좋은 경우라면 첫 아이를 출산한 다음에야, 이 부부는 화해를 위해서 여자의 식구들을 찾아뵐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 조롱이 은근히 나오기 마련이며, 신랑은 그의 장모가 보복자(매형?)에게 술을 따라주어서 그를 풀어주기 전까지 거꾸로 매달려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가문 사이에는 오랜 동안 여전히 긴장관계는 유지된다.43

   이러한 터키 사람들의 예를 통해서, 가족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동등한 수준의 결혼이라는 선호되는 방식과 같은 비율로, 결혼의 상당 부분(거의 20%)이 강간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비정상적이며 불쾌한 행습들은, 사회의 이데올로기적인 기반은 그대로 유지되고는 있지만, 동시에 경제적인 현실에 적응하도록 해준다.44 그러나 소녀의 평판과 함께 그녀의 가족과 가문의 평판에 흠을 내보여서는 안 되기 때문에, 가출이라고 함으로써 강간을 당했다는 사실이 뒤덮여지고 있다는 점은 주목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납치와 강간은 오늘날 터키에서 아내를 얻기 위해서 가능한 선택임에 분명하고, 유사한 경우가 페르시아 시대 동안에 이스라엘에서도 존재했었다고 충분히 추론해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위험한 방법이었으며, 심각하고 영속적인 사회적 상처를 야기했다.

   두 번째 예로, 이번엔 요르단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처녀의 납치로 야기된 사회적 상처가 더욱 심각한 상처를 고치는 방식으로 활용되고 있다. 여기에서 더욱 심각한 상처란, 베냐민 족속 사이에서 씨족 간에 끝나지 않는 피의 복수의 상처이다. 이런 경우에, 압둘라(Abdullah) 왕은 자신의 백성들이 찢겨지는 복수의 종말을 고하기 위해서 강간을 조장한다. 학대받은 부족의 한 젊은 남자로 하여금, 잘못한 부족의 처녀를 납치하게 하고 또 결혼을 시켜줌으로써, 왕은 분명하게 폭력의 사슬을 끊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강간당한 여자의 피가 양 쪽 그룹들이 쏟아 부었던 피를 더 이상 흘리지 않도록 만든 셈이다.45

   현대의 이러한 행습들을, 페르시아 시대 즈음에 납치 행습의 증거를 조사하기 위해서라도, 고대의 법전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여자를 강간하고 납치하는 것에 벌을 내렸던 고대의 법률들: 성서의 법률은 여자 납치에 관해서는, 전쟁 포로의 지위를 규정하는 것을 제외한다면(신 21:10-14), 아무 말하지 않는다. 기원전 260년 어간에 프톨레미 2세(Ptolemy II)에 의해서 포고된 법령에는 포로가 된 아내와 관련해서 특별한 언급이 있다: ‘시리아와 페니키아에서 군복무를 하고 있는 군사들과 군사적 목적으로 정착한 사람들로, 포로가 된 원주민 여자와 함께 살고 있는 자라면, 그 누구라도 그(여자)들을 신고할 필요는 없다.’46 그들이 그녀들과 함께 살고 있는 조건에서라면, 주인들이 이러한 종류의 노예에 대해서 내는 세금을 면제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군사적인 맥락은 야베스 사건에서는 잘 들어맞지만, 실로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히타이트 법률은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내를 납치했던 남자에 대해서 가장 관대하다.47 다른 편에서, 아시리아 법전은 일단 신부 값이 지불되었다 하더라도, 납치로 인한 결혼은 그 어떠한 것도 용납하지 않고 있다(A §26).48 그러한 지불을 하기 전에, 강간(A §55)은 가출과 동의(A §56)와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 둘의 행습들(가출과 동의)은 실망스러운 것이며, 그 값도 일반적인 결혼보다도 높고, 상처받은 아버지는 그녀의 딸이 강간자와 한 패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채 보상금을 받을 권리만을 내세우게 된다. A §55는 도시 축제 기간 동안에 일어난 강간을 언급하는데, 이는 실로 사건과 유사한 경우라고 하겠다. 그러나 축제는 강간을 위한 변명이 되지 못한다. 아시리아 법률은 축제 동안에 그 어떠한 긴장이 해소된 상황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반대 증거들이 발견되기 전까지, 실로 축제를, 결혼을 장려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제도 완화라는 특별 기간으로서, 성적인 방종을 조장하는 시기로 여기는 것은 무리이다.

   서로 다른 견해들에도 불구하고, 히타이트와 메소포타미아 법전에는, 어떤 결혼식이 납치의 결과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비록 이러한 법률들이 페르시아의 이스라엘과 유다에서 실시되었던 것과 얼마나 비슷한가를 확정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어느 누구라도, 베냐민의 생존자들이 닥쳤던 절망적인 상황과 관련해서, 장로들이 제안한 해결방안이 실제적이며 혹은 최소한 야베스를 전멸한 것보다는 더 실제적이라는 것에 한해서는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실로의 무희를 납치한 것이, 명백하게 위험을 불러일으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남자들에게 가장 적합한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첨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사례가 오늘날 터키에서도 나온 것처럼, 결혼을 위해 여자를 납치하는 것은 아마도 터키어로 iḉ güveyilik라고 칭하는 것보다는 더 낫을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결혼에 따르면, 가난하고 땅이 없는 남자가 남자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아내의 집에 들어간다. 이 경우에, 자신의 아내를 감히 납치할 만큼의 용기와 열정을 가진 것으로 증명된 남자와 비교되면서, 신랑은 자신의 사회적 열등함과 소심함을 인정하게 된다.49 그러므로 사사기 21장은 두 종류의 행습들에 배경이 있다고 하겠다. 즉, 전쟁 포로와의 결혼, 그리고 평화의 시기 동안에 처녀를 납치하는 것.

   그러나 실로 사건이 나중에 첨가된 것일 수 있다는 점을 우리가 이미 보았기 때문에, 삿 21:14-24이 실제적인 행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중해 세계에서 잘 들어맞는 신화적인 강간을 말하는 것이라고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다.50


신화적인 납치와 강간

실로 무희를 강간한 것과 고전적인 신화에는 많은 유사점이 있음을 보여주는데,51 그 신화는 이제 우리가 검토해 볼 것들로, 페니키아 해안 서부에서 시작한다.


에우로페(Europe): 두로의 전설적인 왕의 딸로, 에우로페는 그리스 사람에게 납치를 당한다. 그녀의 형제 카드모스(Kadmos)는 그녀를 찾아 그리스로 떠나고, 그러한 중에, 테라(Thera), 로도스(Rhodes) 그리고 린도스(Lindos)에서 제의를 세우게 된다. 그는 알파벳과 청동 기술을 그리스에 전수해주게 된다. 신화의 그리스적 기원은 인정받고 있는데, 왜냐하면 신화가 페니키아의 지중해 식민지에 대해서 그리스에 이익이 되는 관점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며, 에우로페가 로마 시대 이전까지 두로의 화폐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52


히폴리테(Hippolyte): 아티카(Attica: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고대 그리스의 지방-역주) 에서 최초의 아마존 사람들(여장부-역주)이 등장했다는 것이 여왕 히폴리테의 허리띠를 잡았던 헤라클레스와 관련해서 발견되었다. 헤라클레스 전승에 아마존 사람의 등장이 있는 것은 그 자신을 헤라클레스라고 규정함으로써 아테네에서의 자신의 통치를 견고하게 만들었던 폭군 피시스트라투스(Pisistratus)에게서 기인한다. 피시스트라투스 이후에(기원전 510년), 아마존 사람들은 테세이스(Theseis) 서사시 안으로 통합되었으니, 곧 그의 백성을 위해서 퇴임한 왕에 대한 서사시에 등장하게 된다. 전통적으로 헬렌(Helen)과 아리아드네(Ariadne)의 유괴범으로 알려진,53 테세우스(Theseus)는 또한 히폴리테와 결혼해서 아테네로 건너가게 된다. 아마존 사람들은 아티카를 침략하고 아테네를 공격함으로써 보복했다. 히폴리테의 개입 덕분에 평화 조약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히폴리테는 아마도 아테네에서 얻은 테세우스의 후계자의 어머니였을 것인데, 그러나 테세이스 서사시가 지금은 완전히 조각나버린 상태이기 때문에 확실치는 않다.54 그러나 히폴리테를 강간한 것이 기원전 510년 어간에 아테네의 부조에 나와 있으며,55 기원전 475년 어간에 신화작가 페레시데스(Pherecydes)의 글에서도 나온다.56 강간이라는 소재는 테세이스 서사시에는 제거되었는데, 바로 페르시아에 대한 아테네인들의 승리로 인해 결국 아테네가 반(反)-페르시아 저항운동의 우두머리이자 대안(counter)-제국의 중심의 자리를 얻게 되었을 때였다.57 그런 다음에 아마존 사람들은 침략자 페르시아의 상징이 되어버렸고, 강간은 아테네인들을, 테세우스에 의해서 히폴리테가 강간을 당한 일에 대한 결과로 생겨난 아티카 침략에서, 바로 그러한 침략자라는 역할로 보이기 때문에 부적합한 것이 되고 말았다. 더구나, 히폴리테의 타협적인 역할은 아테네 사람들이 가졌던 다른 그리스 도시들을 능가하는 제국적인 사업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빼앗아버린 것이 되고 말았다.58

   히폴리테의 강간은 그러므로 기원전 5세기경에 헬라 세계에서는 잘 알려져 있었다.59 바로 이 시기는, 이 장에서 다루고 있는 가설에 따르자면, 삿 21장이 작성되고 있던 때다. 비록 그것은 단지 한 명의 여자만을 다루고 있지만, 그것은 아테네의 젊은 도시가 그 지배권을 확장할 수 있었던 도시통합(synoecism)을 정당화해주었다.60

   그리스 신화는 다른 강간들도 기록하고 있는데, 바로 하데스(Hades)에 의해서 욕보이게 된 페르세포네(Persephone) 혹은 코레(Kore),61 포세이돈(Poseidon)에 의해서 욕보이게 된 아네모네(Anymone), 아킬레스(Achilles)에 의해서 욕보이게 된 폴리세나(Polyxena), 보레우스(Boreus)에 의한 오레이티아(Oreithyia), 헤라클레스에 의한 아우게(Auge), 오레스테스(Orestes)에 의한 헤르미온느(Hermione), 디오스쿠리 신(the Dioscuri)에 의한 류시피데스 신(the Leucippides) 그리고 더 많은 예들이 있다. 이들은 지중해 세계 전반에서 아테네식의(Attic) 도자기에 그림으로 표현된 방법으로 널리 퍼졌는데, 바로 기원전 6세기 이후에는 팔레스타인에서도 나타나게 되었다.62


메세니아인들(Messenians): 소긴(Soggin)은 이 사건이 삿 21장과 가장 흥미로운 평행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종교적인 축제 기간 동안에 발생했기 때문이다:63


메세니아 국경에는 성소가 있는데, 호수의 여주인이라고 불려졌다; 그리고 성소에 대한 소유권을 함께 가지고 있었던 유일한 도리아인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메세니아인과 라케데몬인(Lacedaemonians)였다. 라케데몬인들은 축제에 참석한 그들의 처녀 중에 몇이 메세니아의 남자들에게 욕보이게 되었다고 말한다 ... 더 나아가 그들은 욕보이게 된 처녀들이 수치심으로 인해서 자살했다고 말한다.64


   메세네인 사건의 결과는 실로의 것과 매우 다르다. 이 소녀들은 자살했고 통탄할 만한 전쟁이 잇따라 일어나게 되었다.

   파우사니아스는 아르테미스(Artemis)를 기념하며 카리애(Caryae)에서 춤을 추었던 처녀들의 납치의 경우를 보고한다. 이 경우엔, 부유하면서 귀족 집안의 여자들이 잡혔는데, 결혼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몸값을 위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이전 사건에서와 같이, 제의적인 춤을 추는 기간 동안이나 축제 기간 동안에 젊은 여자가 납치를 당하는 것은 용인된 행습이 아니었고, 극단적으로 폭력을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이 경우에도, 밤중에 소녀들을 지키고 있었던 남자들 중에 몇이 그들을 겁탈하려고 했으며, 그러나 비행을 저질렀던 수비대원들은 그들 자신이 납치범이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65

   그리스에서의 증거들로 판단해 보건데, 축제 기간 동안에 납치와 강간과 관련해서 어떤 특별한 법률 완화가 내려졌던 것 같지는 않다. 사사기 21장은 베냐민 자손들에게 가장 위험한 방식을 따르라고 충고하는 것 같다. 23절은 충고대로 아무런 문제없이 완수했음을 보여주는데, 이 부분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고, 또한 이것이 베냐민 사람들을 향한 유다의 또 다른 조롱의 예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궁금해 하지도 않은 채, 행복한 결말이라는 이러한 결론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렵다고 하겠다.


헤로도토스가 말하는 페르시아의 여인들: 자신의 「역사」 서론에서, 헤로도토스는 이오(Io), 에우로페(Europa) 그리고 헬렌(Helen)이 강간당한 것과 관련해서 페르시아인, 페니키아인, 그리고 그리스인의 죄를 다루고 있다:


우리는 생각하고, 그들(페르시아인)이 여자들을 데리고 가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강간에 복수하려는 열심을 내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지혜로운 남자라면 그러한 것을 생각지도 않을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건대, 이전까지 사로잡혔던 적이 전혀 없었던 여자들은, 그들 스스로도 그러한 일을 원하지 않았다(헤로도토스 1.4).


이 단락은, 헤로도토스가 그 문제에 대해서 자기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지도 않고 단순히 소문들에 대해서 논의를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 사이에 강간을 바라보는 태도를 비교할 수 있는 본문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상상의 토론은, 고대 동방이라는 배경아래 실로에서 온 200명의 무희들이 강간을 당했던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였을 수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삿 21:23-24에서와 같이 줄거리가 행복한 결말로 끝나버리는 것은, 삿 21:22의 다소 뒤죽박죽된 줄거리에서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고 하겠다.


사빈 사람들(The Sabines): 사빈 사람들의 강간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까지의 것들 중에 실로 사건과 가장 가깝게 평행하고 있는데, 로마를 건립했던 사람들에 의해서 수 백 명의 젊은 여자들이 납치되었던 일을 자세하게 말한다. 가장 오래된 판본은 로마 주변에 살고 있는 가장 강력한 민족 중에 하나였던 사빈 사람들의 딸들이 납치된 것만으로 제한하지 않았다.66 그 사건이 사빈 사람들의 약탈(Sabinae raptae)로 알려진 것은 단지 공화정-이전 전승의 ‘사빈화(sabinization)’ 과정 이후였다.67

   로물루스가 건립한 이후 몇 년이 지나서, 로마는 도시의 미래를 더럽혔던 여자들을 위한 무덤이 부족한 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했다. 왕은 중대한 청혼 사절을 주변의 민족들에게 보냈지만, 그의 사절들은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러자 로물루스는 도시 주변에서부터 많은 손님들을 초대해서 그들이 참여할 수 있는 게임을 조직한다. 왕이 신호를 내리면, 젊은 로마인은 자기 자신을 젊은 여자들에게 내던지고, 그들을 채어 간다. 여자들의 위신을 보호해주기 위해서 엄격한 순서대로 진행되었고, 다음날 그들은 왕 앞에 나타나서, 자기 고향의 풍습에 따라서 자신을 납치한 사람과 정식으로 결혼한다. 이러한 예방책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결혼으로) 실족한 사람들은 로마를 공격해 들어왔다. 그러나 그 사이에 이미 어머니가 되어버린 여자들은 화해를 부여하기 위해서 그들의 남편들과 그들의 오빠들 사이에서 중재하게 된다.68 그러므로 로마는 자신의 생존을 확실히 할 수 있었고 새로운 세대의 탄생에 감사했지만, 또한 가장 강력한 이웃 민족들과의 동맹을 통해서 지역을 넘어선 자신의 패권을 확증할 수도 있게 되었다. 여기에서 동맹은 강간을 당한 여자의 친척들에게 시민권과 명예를 제공함으로 이루어졌다. 여자들의 회유하는 역할은, 심지어 그것이 이야기의 최초 형태의 일부분이 될 필요는 없을지라도,69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러티브의 강력한 동기임에 분명하다. 혼기가 찬 여자들이야말로 도시에 3세대(부모, 동반자 그리고 자녀들)를 그것도 일 년 안에 제공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또한 이들은 (나이가 적당히 많기 때문에) 보복의 위험성을 최소화할 수도 있었다.

   사빈 사람들의 강간은 기원전 3세기 종반에 이르기 전까지는 로물루스 이야기 안으로 통합되지 않았다.70 로마의 전기작가들은 기원전 5세기에 중요한 사빈 사람들이 도시와 통합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하고자 그리스 모델(아마존 여인 히폴리테)을 사용했다.71 히폴리테와 사빈 사람의 내러티브 모두의 목적은 이야기를 말하고 있는 그룹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적으로 여겨지던 다른 그룹 사이에 널리 유행하고 있는 도시통합(synoecism)의 기원을 설명하는데 있었다.

   이상하게도, 이러한 요소가 삿 21장에는 부족하다. 예루살렘과 같은 그 어떠한 중심지도 어떻게 자신의 강력한 이웃들을 통합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다. 도시를 세우기 위해서 유다 자손과 베냐민 자손을 뒤섞은 대신에, 실로 소녀들의 강간 사건은 통혼권(conubium) 금지를 강화했고, 베냐민 자손을 반대 방향으로 밀어 보내버렸으니, 바로 실로를 향한 것으로, 명백히 가나안 땅에 자리를 잡은 그런 곳으로 보내고 말았다(삿 21:12).72 축제는 유다 국경의 바깥에서, 이스라엘 지역에서 일어났으니, 이는 많은 유다의 무희들의 참석이 제외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삿 21장이 그 어떠한 신화적인 작품으로 여길 수 없음은 분명하다 하겠다. 반대로, 앞에서 언급했던 요르단 사람들의 행습은 처녀 납치가 갈등을 끝낼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일 수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며, 그러나 베냐민 사람들이 가나안의 실로라는 곳으로 파견되었다는 사실은, 유다 관점에서 볼 때, 반대의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처럼 보인다. 즉, 유다는, 베냐민을 상대로 한 응보적인 성격의 원정전쟁의 리더로서, 유다의 처녀들의 수를 확실하게 최소화한다. (소수일지언정) 유다의 처녀들이 베냐민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는 위험을 무릅쓰고 말이다.


베냐민 문제에 대한 거짓 해답: 유다의 인종차별

삿 21장의 두 부분인, 야베스 거민의 학살과 실로의 무희를 겁탈한 것은 모두가 반-베냐민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다. 실로 사건이 야베스 학살 사건보다는 다소 이후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심지어 삿 21:14-23이 이차적이고, 헬라의 신화적인 관련성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작용을 내놓기 위해서 단순히 구성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반-베냐민 정서는 삿 21장을 통틀어서 강하게 남아있다.

   삿 21:1-14a와 14b-23절 사이의 차이는 그러므로 매우 다른 기원과 연대 설정을 가정하기에는 충분치 않다.73 야베스의 언급은 벧엘과 베냐민에서 길러진 사울 전승에 대한 악의인 셈이다. 실로에서의 강간은 좀 더 중립적인 것 같지만, 그러나 사실 납치당한 소녀들의 단순한 숫자는 단지 베냐민의 씨앗이 거의 소멸될 뻔 했던 위기를 해결하기 보다는 오히려 또 다른 내전을 야기했을 뿐이다. 어떤 경우든지, 삿 21장은 베냐민을 유다와 예루살렘과 거리를 두고 있다.

   역사적으로, 베냐민 위기에 대한 두 개의 해법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 유다의 지도 아래 야베스를 학살한 것은 역사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데, 하스모니아 시대와 알렉산더 얀네우스(기원전 103-76년)가 트렌스요르단으로 원정을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야베스 사건은 사울 이야기에 대한 문학적인 언급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늦은 연대설정을 할 필요는 없다. 요단강의 양쪽 편 모두를 이어주는 결혼은 페르시아 시대로 증명된다: 예루살렘 제사장인, ‘바르실래’의 아들은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의 딸들에게서 아내를 얻었고, 그리고 그들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느 7:63-64). 더구나 그리스의 강간 이야기가 기원전 5세기경 팔레스타인에 입증되었기 때문에, 삿 21장은 이 시기에 만들어졌을 수 있다. 이 시기와 관련해서 많은 것들이 불확실하기는 하지만,74 느 11장은 예루살렘의 재건 동안에 유다와 베냐민 사이에서 나타났던 긴장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강제 이주된 베냐민 사람들의 숫자는 유다에서 그렇게 된 사람들과는 하찮을 정도로 대조적이며(느 7:6-38), 베냐민이 바벨론에 의한 파괴를 면했기 때문에,75 베냐민 사람들은 도시를 재건하기 위해서 최대한 벽돌공와 목수들을 제공해야 했다(느 3; 11). 삿 19-21장의 연대로 에딘버그가 제안했던 페르시아 시대는 그러므로 확실하다고 하겠다. 이 장들은 새로운 수도의 지배권이 확실하게 세워질 때까지, 베냐민을 상대로 한 예루살렘의 새로운 주인들이 가졌던 갈등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그 갈등은 벧엘이 삿 1:22-26에서처럼 자기를 보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스바와 벧엘이 다시 바깥으로 밀려날 때까지였다. 삿 17:6; 18:1에 나와 있는 친-왕적 후렴구는 이들 세 장을 요시야의 사사기서에 덧붙이기 위해서 첨가되었다. 그것은 나뉘어져서 그 첫 번째 부분(‘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은 삿 19:1에 서론으로서 자리를 잡았다. 두 번째 부분(‘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은 이야기의 가장 어두운 면에 삽입되었으니, 바로 한 밤 중에 에브라임 자손의 어떤 집주인이 그의 딸을 내주고 레위인의 첩은 베냐민 자손의 폭도들에게 준 것이다: ‘너희 눈에 좋은 대로 그들에게 행하라(םכיניעב בוטה םהל ושׁע, 삿 19:24)’. 그러므로 이런 단어들은 요시야 시대에는 없었던 불길한 의미를 받아들이게 된다(제 4장을 보라).76 사사기 19-21장은, 삿 17-18장이 그랬던 것처럼, 이스라엘 속주 합병을 정당화하기 위한 의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베냐민 사람들의 행동을 묘사하기 위한 것으로, 그들이 자치권을 얻게 되었을 때, 그리고 물론이지만 베냐민에 대한 예루살렘의 지도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후렴어구를 재사용한 것이 다윗의 보좌를 재건하려 했던 스룹바벨의 중단된 시도를 반영할 수도 있다는 것은 단지 짐작일 뿐이다.77

   삿 17-18장이 요시야적 판본의 일부였기 때문에, 삿 19-21장은 사사기에 어울리는 단순한 부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미트(Amit)가 맞았다: 사사기 말미에 벧엘에 반하는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의 최고의 악의는 삿 19-21장에 와서야 극에 다다랐으며, 그것은 숨겨질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78


사사기 19장과 창세기 19장

이 장을 끝맺기 전에, 삿 19장과 창 19장에 평행적인 강간 이야기 사이의 관계를 한번 집어보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창 19장은 소돔에서 롯의 집에 있는 손님들을 강간하려던 시도가 나온다.) 이 들 두 장의 문학적 의존 순서에 대하여 언급했던 대부분의 석의학자들은 삿 19장보다 창 19장이 앞섰다는 견해를 선호했다.79 니디취(S. Niditch)는 삿 19장이 더 오래된 것이라고 믿는 면에서 노선을 달리한다. 왜냐하면 삿 19장에서의 강간은 다음 장으로 내러티브가 발전하는데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지만, 반대로 창 19장에서 그것은 주변 상황과는 전혀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80 또한 두 개의 본문 모두가 정경화 논리에 부합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겠다: 족장이라는 축복의 시대에서, 야웨는 가증스러운 범죄를 막기 위해서 개입했지만, 사사 시대 동안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더 이상 개입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함이 극에 이르렀던 것이다. 만약 삿 19-21장이 페르시아 초기 시대에 속한다면, 즉 토라가 저술되기 전이나 혹은 저술되는 동안이라면, 창 19장은 삿 19장에 대한 미드라쉬로 여겨져야만 할 것이다. 즉, 그것(삿 19장)을 미리 고려하면서, 점차적으로 개념화되고 있는 ‘사사 시대’를 어둡게 하는 대비(contrast)를 깊게 하는 것이다. 가능한 저술 기간을 기반으로 볼 때, 니디취가 제안한 것처럼, 삿 19장은 아마도 창 19장보다 약간 오래되었을 것이다.




6장 끝






1. W.I. Toew, ‘Luz’, ABD 4, p. 420


2. Grabbe, Judaism, pp. 126-29.


3. 블렌킨솝(Blenkinsopp, ‘Judean Priesthood’, p. 34 n. 26)은 기원전 540년과 450년 사이에 파괴가 있었다고 말한다! 다음을 보라: Lipschits, ‘Benjamin Region’, pp. 171-72 n. 31.


4. Blenkinsopp, ‘Judean Priesthood’, pp. 32-43.


5. Blenkinsopp, ‘Judean Priesthood’, pp. 37-38.


6. E. Cortese, Josua 13-21: Ein priesterschriftlicher Abschnitt im deuteronomisticshen Geschichtswerk (OBO, 94; Freiburg/Göttingen: Universitäts-verlag/Vandenhoeck & Ruprecht, 1990), pp. 51-52.


7. H. Donner, Geschichte des Volkes Israel und seiner Nachbarn in Grundzügen. I. Von den Anfängen bis zur Staatenvildungszeit (GAT. Ergänzungsreihe, 4, 4;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2000), p. 136.


8. J. Wehrle, ‘Josef’, NBL 2, pp. 385-87.


9. Lipschits, ‘Benjamin Region’, pp. 171-72.


10. Rammûn: J. Simons, Geographical and Topographical Texts of the Old Testament (SFS, 2; Leiden: E.J. Brill, 1959), §638.


11. H.-W. Jüngling, Richter 19-Ein Plaidoyer für das Königtum: Stilistische Analyse der Tendenzerzählyng Ri 19,1-30a; 21,5 (AnBib, 84; Rome: Biblical Institute Press, 1981), p. 291. J. Unterman, ‘The Literary Influence of “the Binding of Isaac”(Genesis 22) on “the Outrage at Gibeah”(Judges 19)’, HAR 4 (1980), pp. 161-66.


12. J.E. Tollington, ‘The Book of Judges: The Result of Post-Exilic Exegesis?’, in J.C. de Moor (ed.), Intertextuality in Ugarit and Israel (OTS, 40; Leiden: E.J. Brill, 1998), pp. 186-96 (193).


13. Becker, Richterzeit, pp. 262, 297.


14. Blenkinsopp, ‘Judean Priesthood’, pp. 30-31.


15. 삿 20:1은 회중이 미스바에 모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모든 종교적인 기능은, 그 어떠한 지리적인 정보도 주지 않는 삿 20:23과는 별개로, 벧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16. Blenkinsopp, ‘Judean Priesthood’, p. 31: הדע (삿 20:1; 21:10, 13, 16) 그리고 להק (tkt 20:2; 21:5, 8)은 제사장 기자의 특성이다.


17. C. Edenburg, email 2000년 6월 11일.


18. Lipschits, ‘Benjamin Region’, pp. 155-90.


19. J. Joosten, ‘Les Benjaminites au milieu de Jérusalem: Jérémie vi lss et Juges xix-xx’, VT 49 (1999), pp. 65-72 (71).


20. Becker, Richterzeit, pp. 263-64.


21. A. Demsky, ‘Geba, Gibeah and Gibeon, an Historical-Geographical Riddle’, BASOR 212 (1973), pp. 26-31.


22. Bartlett, ‘Edom’, pp. 13-24.


23. E.A. Knauf, ‘David, Saul, and the Philistines: From Geography to History’, BN 109 (2001), pp. 15-18.


24. Mathys, ‘Saul’.


25. E.A. Knauf, ‘Die Priesterschrift und Geschichten der Deuteronomisten’ in Th. Römer (ed.), The Future of the Deuteronomistic History (BETL, 147; Leuven: Peteers, 2000), pp. 101-118 (114-15). 혹은 기원전 530년 어간이라는 주장은 다음을 보라: A. de Pury, ‘Der priesterschriftliche Umgang mit der Jakobsgeschichte’, in R.G. Kratz, T. Krüger and K. Schmid (eds.), Schriftauslegung in der Schrift (BZAW, 300; Berlin: W. de Gruyter, 2001), pp. 33-60 (39-40).


26. Blenkinsopp, ‘Judean Priesthood’, p. 42.


27. Blenkinsopp, ‘Judean Priesthood’, pp. 34-43.


28. K. Stone, Sex, Honor and Power in the Deuteronomist History (JSOTSup, 234;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96), pp. 72-73.


29. 삿 19:2에서, 히브리어 표현인 ‘그냐가 행음했다’라는 것은 잘 들어맞지 않는다.


30. 삿 19:29에서 תלכאמ 즉, ‘칼’은 희생제사를 위한 전문용어(terminus technicus)이다(창 22:6, 10을 보라): Jüngling, Richter 19, p. 254; Unterman, ‘Binding’, pp. 161-66.


31. 레위인이 예루살렘을 이방이라고 여겼다는 점은 다윗이 아직 예루살렘을 정복하지 못했음을 보여주기보다는 페르시아 시대 초반에 베냐민 지파가 느꼈던 감정이 표현된 부분이다.


32. Grabbe, Judaism 1, pp. 93-94, 99-100.


33. M. Ottoson, Gilead: Tradition and History (ConBOT, 3; Lund: C.W.K. Gleerup, 1969), pp. 232-35; N. Na’aman, ‘Rezin of Damascus and the Land of Gilead’, ZDPV 111 (1995), pp. 105-17.


34. E.A. Knauf, ‘Berg und Tal, Stadt und Stamm: Grundzüge der Geschichte Palästinas in den letzen fünftausend Jahren’ in G. Völger, K. von Welck and K. Hackstein (eds.), Pracht und Geheimnis: Kleidung und Schmuck aus Palästina und Jordanien. Katalog der Sammlung Widad Kawar anlässlich einer Ausstellung des Rautenstrauch-Joest-Museums in Zusammenarbeit mit dem Institute of Archaeology and Anthropology der Yarmuk Universität Irbid vom 3. Oktober 1987 bis 27. März 1988 (Ethnologica, 13; Köln: Rautenstrauch-Joest-Museum, 1987), pp. 26-35, 417-18.


35. Lipschits, ‘Benjamin Region’.


36. Joüon and Muraoka, Grammar, §149b.


37. 삿 20:35은 군인들을 언급하고, 37절은 기브아의 모든 주민이 나온다. 44-46절은 단지 용사들만 나오고, 48절은 베냐민 성읍의 가축들 이전에 이상한 단어인 םתמ이 나온다.


38. 베커(Becker, Richterzeit, p. 290)는 이러한 해답을 ‘raffinierte Lösung’으로 이해한다.


39. Neufeld, Marriage Laws, pp. 84-85; R.H. Barnes, ‘Marriage by Capture’, JRAI 46 (1999), pp. 57-73 (57-68).


40. Neufeld, Marriage Laws, p. 77.


41. M. Burrows, The Basis of Israelite Marriage (AOS, New Haven: 1938), pp. 51-52; E. Grosse, Die Formen der Familie und die Formen der Wirtschaft (Freiburg: 1896), pp. 105-106; Barnes, ‘Marriage by capture’, p. 69; Neufeld, Marriage Laws, p. 85.


42. A. Kudat, ‘Institutional Rigidity and Individual Initiative in Marriages of Turkish Peasants’, AQ 47 (1974), pp. 288-303 (291-99).


43. D.G. Bates, ‘Normative and Alternative Systems of Marriages among the Yörük of Southeastern Turkey’, AQ 47 (1974), pp. 270-87 (278).


44. Bates, ‘Yörük’, p. 284.


45. M. Assad, Le chemin de la Mecque (Paris: Fayard, 1976), pp. 106-107.


46. R.S. Bagnall and P. Derow, Greek Historical Documents: The Hellenistic Period (SBLSBS, 16; Atlanta: Scholars Press, 1981), p. 96.


47. H.A. Hoffner, ‘Hittite Laws’, CoS 2, pp. 106-119: §28a는 ‘만약 한 딸이 한 남자와 약혼했지만, 다른 남자가 그녀를 데리고 달아나게 된다면, 그녀를 데리고 달아난 그 남자는 처음 약혼한 남자에게 그가 할 수 있는 보상을 주어야만 한다’. §35는 ‘만약 목자가 자유자인 여자와 가출해서 그녀를 위한 신부 값을 지불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단지) 3년 동안 종이 되어야할 것이다’. §37은 ‘만약 누군가가 여자와 가출하고 시종들 역시 그들을 따라 갔다면, (여자와 가출하는 과정에서?-역주) 만약 두 세 명의 남자가 죽임을 당했다면, 여기에는 그 어떠한 보상도 필요치 않다: 너(남성단수)는 늑대임에 분명하다’.


48. M. Roth, ‘The Laws of Eshnunna’, CoS 2, pp. 332-35: §26에는 ‘만약 한 남자가 한 남자의 딸을 위해서 신부값을 주었다면, 그러나 다른 사람이,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동의도 없이, 그녀를 납치한 다음 그녀를 범했다면, 그것은 실로 중대한 범죄로, 그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Roth, ‘Assyrian Laws’, pp. 353-60: A §55에는 ‘만약 한 남자가, 한 처녀를 억지로 붙잡고 강간했다면, 그녀의 아버지의 집에 살고 있는 그 처녀를 ... 성읍 안에서나 혹은 들에서나, 혹은 한 밤 중이거나, 길가에서나 혹은 창고 안에서나 혹은 도시의 축제 기간 동안에서나 (강간했다면), 처녀의 아버지는 처녀를 간음한 사람의 아내를 취해서 그 아내가 강간되도록 (누구에게?-역주) 넘겨주어야 한다; 그(아버지)는 그녀를 그녀의 남편에게 돌려보내서는 안 되고, 그가 그녀를 (부인으로?) 취해야만 한다; 아버지는 간음에 희생이 된 자신의 딸을 그녀를 간음했던 사람의 가문으로 보내서 보호를 받도록 해야 한다. 만약 그(간음자)에게 아내가 없을 경우엔, 간음자는 처녀의 값으로 쳐주는 은에 세 배를 그녀의 아버지에게 주어야만 한다; 그녀를 간음한 사람은 그녀와 결혼해야 한다; 그는 그녀를 거절하면(?) 안된다. 만약 아버지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그(아버지)는 처녀를 위해서 세 배의 은을 (누구에게?-역주) 주어야만 하고, 그는 그의 딸을 그가 선택한 사람에게 결혼시켜야만 한다’. A §56에는 ‘만약 한 처녀가 한 남자에게 기꺼이 자기 자신을 주려고 한다면, 그 남자는 그렇게 맹세해야만 한다; 그들은 그의 아내로서 그 어떠한 것도 요구할 수 없으며; 간음자는 처녀의 가치에 해당하는 은의 세 배를 지불해야만 하며; 아버지는 그의 딸을 그가 원하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처리할 수 있다’.


49. 이것은 정확히 호 12:12이 야곱을 책망하는 것과 같다!


50. B. Lincoln, ‘The Rape of Persephone: A Greek Scenario of Women's Initiation’, HTR 72 (1979), pp. 223-35.


51. Gaster, Myth, p. 445.


52. C. Bonnet, ‘Kadmos’, DCPP, p. 241.


53. 기원전 7세기에 나오는 것으로: M. Robertson, History of Greek Ar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5), 그림. 125. 441. 535. 579. 596.


54. Huxley, Epic Poetry, pp. 116-18.


55. D. von Bothmer, Amazons in Greek Art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57), pp. 117-119; W.B. Dinsmoor, ‘The Athenian Treasury as Dated by its Ornaments’, AJA 50 (1946), pp. 111-13.


56. F. Jacoby, Die Fragmente der Griechischen Historiker (Leiden: E.J. Brill, 1968), 1 A 64 fr. 15; 1 A 98 fr. 152.


57. J.H. Blok, The Early Amazons (Leiden: E.J. Brill, 1995), p. 441.


58. W.B. Tyrrell, Amazons: A Study in Athenian Mythmaking (Baltimore: John Hopkins, 1984), p. 15.


59. J.G. Préaux, ‘La sacralité du pouvoir royal à Rome’, ACERB 1 (1962), pp. 108-135 (117).


60. R. Parker, Athenian Religion: A History (Oxford: Clarendon Press, 1996), pp. 10-17.


61. N.J. Richardson, The Homeric Hymn to Demeter (Oxford: Clarendon Press, 1974), pp. 10-11.


62. J.Y. Perreault, ‘Céramique et échanges: les importations attiques au Proche Orient du VIème au milieu du Vème s. av. J.C.’, BCH 110 (1986), pp. 145-75; A. Cohen, ‘Portrayals of Abduction in Greek Art’, in N. Boymel Kampen (ed.), Sexuality in Ancient Art (Cambridge: 1996), pp. 117-35.


63. J.A. Soggin, Judges (London: SCM Press, 1981), p. 304는 가스터(Gaster, Myth, p. 445)를 인용하고 있다.


64. Pausanias, Description of Greece (trans. W.H.S. Jones; LCL; London: Heinemann, 1940), 4.4.2.


65. Pausanias, 4.16.9.


66. Livy, Roman History (trans. B.O. Foster; LCL; London: Heinemann, 1961), 1.9; Dionysius of Halicarnassus, Roman Antiquities (trans. E. Cary; LCL; London: Heinemann, 1960), 2.30.


67. J. Poucet, Recherches sur la légende sabine des origines de Rome (Bruxelles/Kinshasa: Publications universitaires/Université Lovanium, 1967), p. 164.


68. 두메질(G. Dumézil, Mariages indo-européens [Bibliothèque historique; Paris: Payot, 1979], p. 75)에 의하면, 이 사건은 세 가지 형태의 로마식 결혼을 보여주고 있다: 납치는 가장 고귀한 결혼 형식으로 여겨지고 있다; 다음날 결혼식을 하는 것은 콘파레아티오(confarreatio[신들 앞에서의 결혼])를 세운다. 일 년 동안 함께 사는 것은 아내에 대한 남편의 부권(夫權, manus)를 세워주는데, 왜냐하면 그녀는 사용(usus)을 무효로 만들어 버리는 (usurpatio trinoctii)의 권리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69. Poucet, Recherches, p. 239.


70. Poucet, Recherches, p. 433.


71. Poucet, Recherches, p. 427.


72. 여기에 가나안이 언급된 것은 얕보기 위함이 아니다. 그 이유는 제사장 기자들은 그것을 약속의 땅을 지칭하는데 사용하기 때문이다(창 33:18; 35:6). 다음을 보라: de Pury, ‘Umgang’, p. 42 n. 43(창 33:28 대신에 창 33:18을 읽어보라). 그러나 그것은 실로가 예후드(Yehud)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73. 반대 의견으로는, Becker, Richterzeit, pp. 290-91.


74. Grabbe, Judaism 1, pp. 119-22.


75. Lipschits, ‘Benjamin Region’, pp. 155-90.


76. F.E. Greenspahn, ‘An Egyptian parallel to Judges 17,6 and 21,25’, JBL 101 (1982), pp. 129-30은 람세스 4세가 세트나크트(Setnakhte, 기원전 1184-1182년)의 취임식 이전에 있었던 혼란을 묘사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던 후렴어구와 평행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집트 땅은 각기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전복되고 말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타인의 시대에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음을 보라: W. Erichsen, Papyrus Harris 1 (BAe, 5; Bruxelles: Foundation égyptologique Reine Elisabeth, 1933), p. 91.


77. Grabbe, Judaism 1, pp. 77-79; 다윗 왕조의 재건에 대해서 다음을 보라: W.H. Rose, Zemah and Zerubbabel (JSOTSup, 304;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2000).


78. Amit, ‘Hidden Polemics’.


79. Becker, Richterzeit, p. 262 n. 139.


80. S. Niditch, ‘The “Sodomite” Theme in Judges 19-20: Family, Community and Social Desintegration’, CBQ 44 (1982), pp. 365-78 (376-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