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구약 성서

Waiting for Josiah: The Judges (by. Philippe Guillanme) 제 5 장 번역

진실과열정 2007. 11. 15. 19:15

Waiting for Josiah: The Judges by. Philippe Guillanme (pp. 144-97 번역: 양지웅)



제 5 장

벧엘을 비신화하기, 패배자들: 사사기 10-16장




입다 이야기와 삼손 이야기는 이들 모두를 영웅으로 간주하고 있지만, 사실 그들은 구원자도 아니고 사사도 아니다. 비록 이 둘의 내러티브가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라는 어구로(삿 10:6; 13:1) 모든 구원자 내러티브처럼 시작하기는 하지만, 두 개의 전설집은 평화의 시대로 끝을 맺지 않고 있다. 입다와 삼손은 구원자들이 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을 구해내지 못한다. 입다는 암몬 자손을 복종시켰지만(삿 11:33), 그의 승리는 매년마다 자신의 딸에 대한 슬픈 기념제의(삿 11:40)와 사만 이천 명의 에브라임 자손을 학살하는 것(삿 12:6)을 유발시킬 뿐이었다. 삼손은, 시작에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할 것으로 기대되었지만(삿 13:5), 결국에는 그의 적과 함께 죽고 만다(삿 16). 더 나아가, 입다와 삼손이 삿 10-16장에 자리를 잡은 것은 구원자 책의 일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가리키고 있다.1

   사사에 관해서라면, 삿 12:7; 15:20 그리고 16:31은 입다와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사사들의 특징인 많은 자손들을 낳지는 않았다. 입다는 자신의 외동딸을 번제물로 바쳤고 삼손은 어디에서도 아버지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근본적인 차이들을 볼 때, 입다가 구원자이면서 동시에 사사라고 했던 노트(Noth)의 가설은 다소 그럴듯하지 않은 것 같다.2 실로, 입다의 이야기는 사사 목록의 한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그 맥을 끊고 있다(삿 10:6-12:8). 이러한 삽입은 입다와 삼손이 이차적 등장인물임을 보여주는 실마리로서 이해할 수 있다. 입다와 삼손의 내러티브가 보여주는 서로 다른 특성 때문에, 구원자 이야기나 사사 이야기와 비교해 볼 때, 입다 이야기는 사사 목록 사이에 삽입된 것이지, 목록 다음에 놓인 것이 아님에 분명한데, 이는 입다와 삼손이 이후의 편집자에 의해서 사사기 서에서 제거되는 위험을 감수할 각오는 아니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물론, 입다가 원래 사사였다는 것이 이론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입다 내러티브에서 사사로서의 그 어떠한 특징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입다를 사사로 만든 것(아이들, 나귀, 마을)은 편집의 결과였음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게 나을 것이다. 그러므로 불필요한 가설들을 피하고, 대신 입다와 삼손 이야기에서 그들이 지금 위치한 상태를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구원자와 같이 일어서기는 했지만 비극적으로 끝을 맺다. 그들은 반(反)-영웅, 즉 패배자라고 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3



사사기 10장 6-16절: 패배자들에 대한 서론


입다와 삼손을 한 덩어리로 묶어서 특정한 부류로 볼 문학적인 이유도 물론 있다. 사사기 10장 6aα절은 구원자 내러티브의 틀(frames)의 첫째 요소(הוהי יניעב ערה תושׁעל לארשׁל לארשׁי ינב ופסיו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악이 즉각적으로 바알과 아스다롯, 즉 아람과 시돈, 모압, 암몬 자손과 블레셋의 신들을 섬기는 것으로 규정되고 있는데, 이는 뼈대(schema)와 익명의 예언자가 했던 방식과 같은 식이다. 배교는 야웨의 분노를 격발시키는데(삿 10:7 // 2:14; 3:8), 이 야웨는 블레셋과 암몬 자손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분이시다. 블레셋과 암몬 자손은 6절에서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대적이며, 그들은 각각 삼손과 입다의 적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이 이 둘 내러티브 모두의 서론임에 분명하며, 그렇기에 이 둘은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암몬 자손의 압제(삿 10:8-9)는 직접적으로는 길르앗과 심지어(םג, 개정의 ‘또’) 유다, 베냐민 그리고 에브라임 족속에 해당되는데, 이는 유다에서 이 이야기가 기원했음을 보여주는 열쇠가 된다. 이스라엘 자손(유다가 아니라!)이 야웨에게 부르짖자(10절), 야웨는 구원하기를 거절하고 대신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에게 가서 부르짖어야(וקעו וכל) 할 것이라고 비꼬면서 제안한다(11-14절). 비록 이스라엘은 부르짖은 다음에 곧장 자신의 배교라는 죄를 고백했지만 말이다(10절). 이스라엘은 이의 없이 자신의 죄를 다시 한 번 인정하며(15절) 야웨를 섬기려고 이방신들을 제하여 버린다(16절). 그러나 이러한 선한 결심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야웨는 더 이상 어떠한 구원자도 보내지 않으며, 그는 단지 자신의 백성들의 고난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화를 누그러뜨릴 뿐이다(16절).

   그러므로 이 구절은 익명의 예언자의 설교와 유사하다(삿 6:7-10): 즉, 이것은 입다와 삼손 이야기를 구원자 책의 끝과 사사 목록에 결합시키기 위한 편집자의 솜씨이다.



사사기 10장 17절-12장 7절: 입다, 첫 번째 패배자


사사기 10장 17절-11장 11절: 구원자 대신에 하급법관

암몬 자손은 자신의 군대를 소집하고(וקעציו) 길르앗을 침략한다. 야웨가 어떠한 구원자도 보내주지 않자, 장로들은 우두머리(שׁאר)를 찾는다. 전기적인 자료는 입다가 자신의 아버지 집에서 제적됐던 과거를 말해준다.4 기생(zonah)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는 아버지의 상속에 대한 몫을 가질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가 자신의 본 부인의 자녀들을 양육했기 때문이다.5 입다는 잡류(םיקיר םישׁנא)의 우두머리로 살아남게 되었다(삿 11:1-3).

   길르앗의 장로들이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하려고 그에게 대장(ןיצק)의 자리를 주었고, 만약 승리할 경우엔 길르앗의 머리가 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에게 잃어버렸던 지위를 복권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셈이다(삿 11:5-10).6

   이야기는 이스라엘 자손이 트랜스요르단을 합법적으로 소유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입다의 긴 연설에 의해서 중단된다(삿 11:12-28). 이 부분은 제 7장에서 살펴볼 것인데, 마카비의 트랜스요르단 원정과 관련된 기록인 듯싶다.


사사기 11장 29-40절: 입다의 서원

11절에서 중단되었지만, 이제 입다 내러티브는 야웨의 영이 입다에게 임했고(29절) 암몬 자손의 지역으로 즉각 출발하는 것으로 계속된다. 여기에서 지리적인 표시는, 그들이 암몬 자손을 공격한다는 면에 있어서(17절), 분명치 않은 점이 있다. 길르앗이라는 용어의 모호함에도 불구하고,7 이야기는 분명히 길르앗 북부에 자리를 잡고 있다. 입다는 돕을 떠나서 얍복강의 미스바를 향해서 출발했고(11절), 33절에 세 곳으로 나와 있는 라밧-암몬 근처의 암몬 자손을 쫓아내기 위해서 넘어갔다(29절): 아벨 그라밈은 라밧-암몬의 남동쪽이고,8 아로엘은 모압 지역이며(디본에서 남쪽으로 4 킬로미터 떨어진 히르� 아라이르[Ḥirbet ‘Arā’ir]) 민닛은 아마도 암몬 성읍 근처로 아로엘과 아벨 그라밈 사이의 텔 엘-우메리(Tel el-’Umēri)일 것이다.9 입다의 승리로 암몬 자손은 그들의 영토로 물러났지만, 그들의 도시는 아직도 난공불락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므로 33a절은 본래의 이야기에서 없앨 필요가 없다.10

   공격이 있기 전에, 입다는 자신의 승리를 가족의 비극으로 바꿔버린 유명한 서원을 말하게 된다(31절). 구원자 틀의 요소들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악, 신적 분노, 억압, 울부짖음, 영과 적을 진압함, 자세한 내용은 그림 1을 보라), 입다는 구원자가 아니다. 이것은 서원의 결과가 상당히 광범위한 어휘들과 연관된 전투 자체보다도(32-33절) 더 많은 것을 밝혀내고 있다(34-40절)는 사실에 의해서 주목받게 된다.


탐무즈 제의의 민간전승화

입다는 단지 빛바랜 수준에서 구원자를 모방한 것으로, 서원은 영웅이 자신의 승리를 탈취 당했음을 확실하게 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다 이야기는 여전히 승리 설화로, 단지 정복당한 적이, 37-40절에서와 같이, 결국에 등장한다. 내러티브는 인간 제사에 관해서 어떤 것도 가르쳐주지 않으며, 서원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비록 이러한 문제들이 즉각적으로 마음에 걸리겠지만, 그것들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주제화되지 않는다. 소녀의 희생제사는 신중하게 스쳐지나가고 있다: שׁעיו רדנ רשׁא ורדנ־תא הל 즉, ‘입다가 그가 서원한 대로 그녀에게 그의 서원을 행했다’(39절). 그 이전에, 아버지는 진작 자신이 경솔하게 입을 열었음(יפ־יתיצפ, 35절)을 인정하고, 그에게 그가 말한 대로 행할 것(ךיפמ אצי רשׁאכ יל השׁע, 36절)을 부탁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딸 자신이었다. 등장인물 모두는 완전하게 동의하고, 내러티브는 그 어떠한 갈등도 쌓지 않는다. 딸은 단지 하나의 호의를 요구했으니, 산으로 ‘내려가서’(םירהה־לע יתדרי)11 자신의 자식 없음을(הלותב)12 그 동무들과 함께 애곡할 수 있도록(הכב) 부탁했다(37절). 이것이 전체적인 입다 내러티브가 말하고자하는 바다: 제의적인 애가는 그녀로 자녀를 출산하는 것을 방해했던 때 이른 죽음을 기념해서 만들어진 것 같다(38절). 종종 기원론적인 내러티브에서의 경우와 같이, 묘사된 현실은 내러티브 보다 먼저 일어난 일이지만, 내러티브는 그것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제공한다. 본문은 이스라엘에 잘 확립된 풍습(קח)을 언급하는데, 이는 성서의 다른 부분에서도 나오며(겔 8:14; 사 17:10-11), 이름 하여 젊은 두무지/탐무즈(Dumuzi/Tammuz)를 위한 여인들의 애가라고 할 수 있다.

   두무지/탐무즈는 메소포타미아의 젊은 신랑으로, 상속자도 없이 죽어서 왕국을 세울 시간도 갖지 못했던 사람이다. 이러한 신화는 본래의 성스러운 결혼 의식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되지만, 고대 바벨론 기간에서부터(기원전 약 1500년) 신화는 이러한 맥락으로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고, 두무지는 여신 인안나(Inanna)의 희생자가 된 비극적 영웅으로 기억될 뿐이었다.

   인안나는 지하세계로 내려가기를 결심하는데, 아마도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함이었다.13 여러 신화적 작품들은 어떻게 그녀가 아무도 돌아올 수 없는 그런 왕국에서 가까스로 돌아올 수 있었는지를 말해준다.14 인안나는 자신을 대신할 것을 내놓기로 약속을 하고서 자신이 돌아갈 수 있기를 협상해야 했다. 대신할 사람을 지하세계로 데려갈 임무를 맡은 사신에 의해 지상으로 돌아간 이후, 인안나는 드러내놓고 그녀의 친척이 잡혀가지 않도록 회피한다. 결국, 잡힌 것은 목자 두무지였다.15 그러나 두무지와 그의 여동생 게쉬틴나(Geshtinna)는 강력하게 저항했고 인안나는 그들의 울부짖음에 굴복하고 만다: ‘너 (두무지는) 일 년의 절반을 (보낼 것이고), 너의 여동생은 (저승에서 일 년의 남은 절반을 보낼 것이다)’.16

   두무지는 지하세계에서 인안나의 자리를 대신했어야만 했지만, 일 년의 절반 동안 그는 돌아갈 수 있었고 그녀의 여동생이 그를 대신하게 되었다.

   영웅의 몰락은 매년 여자들에 의해서 슬피 노래 불려 졌는데,17 그 때는 식물이 죽고 두무지가 애도되는 초여름이었다.18 아시리아 사람들은 탁림투(Taklimtu) 축제를 해마다 지켰는데, 이는 두무지가 목욕재개하고 저승으로 떠나기 전에 엄숙하게 누워있는 상태로 기름부음을 받게 된다.19

   사사기 11장은 두무지를 위한 이스라엘 여인들의 애가를 이스라엘의 영웅들을 위한 것으로, 그리고 야웨라는 자신들의 신을 위한 것으로 돌리려는 데 의도가 있는 것 같다. 여신 인안나는 야웨에 의해서 대체되고, 남매 두무지와 게쉬틴나는 아버지와 딸로 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다는 불쌍한 인간 영웅이라는 두부지의 비극적 성격을 그대로 닮고 있는데, 즉 신들 사이에서 벌어진 역겨운 난투극에 휘말린 결백한 희생자가 되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책임을 떠맡을 수밖에 없었다. 삼손 이야기에서 보다 더 분명하게 드러나겠지만, 신들의 싸움은 삼손의 경우에서만큼 입다 이야기에서는 명백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일반적인 서론은 이 둘이 함께 이해되어져야만 할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입다 이야기는 어떠한 신(혹은 신격화된 영웅)에게 드려졌던 제의의 의식을 다른 신(야웨)에게로 전환시키려는 것이다.

   입다의 딸은 자신의 아버지가 가졌던 피할 수 없는 운명에서부터 부분이나마 덜어줄려는 게쉬틴나의 모습을 어느 정도는 닮고 있다. 그녀의 아버지의 서원이 자신의 때 아닌 죽음을 가져왔다는 부분은, 왕조를 세우려는 입다의 소망을 잘라 내버리는 면에 있어서 두무지와 평행을 이룬다. 그러나 입다의 딸이 죽은 것은 ‘구원자’가 암몬 자손을 누르고 승리한 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그 어떠한 영광도 무효로 만들어 버린다. 이 점은 패배자를 만든 사람들의 주된 관심을 보여준다. 구원자 책에서 나왔던 아시리아와 친숙한 영웅들은 지나가 버렸고, 그들이 품었던 소망은 덧없는 것으로 드러났으며, 새로운 정황에 맞추기 위해서라도 보다 냉정한 사고방식이 필요했다. 이런 새로운 맥락에 대한 세밀한 사항은 아직까지는 분명치는 않지만, 여기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신화적인 영웅에 야웨신앙의 옷을 간단히 입힌 것을 뛰어 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하겠다. 신화적인 영웅의 혹은 야웨의 집 문에서 농작물 신의 죽음을 애도하곤 했던 울부짖는 여인들이, 그들의 애정을 단순하게 입다에게로 돌렸을 리 만무하다. 오히려 그들은 입다의 딸의 때 이른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반복했어야만(삿 11:40, הנת20) 했다. 해가 바뀔 때마다, 이스라엘의 딸들은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행했던 위업을 기념하는 대신에 길르앗 사람의 딸의 슬픈 설화를 문자적으로 반복하게 될 것이다. 페이지가 넘겨졌다. 이스라엘아, 너의 영웅은 어디에 있단 말이냐?


비신화화 과정

신화는 변하고,21 신화는 죽지만22 제의는 살아남는다. 이러한 슬픈 이야기가 여름의 비탄으로 끝이 나고 새로운 제의를 이루었다는 것은 그럴듯하지 않다: 그 어떤 유대인 전승도 입다의 딸과 과련된 축제나 제의를 보존하고 있지 않다. 반대로, 입다는 혐오의 대상으로, 사람들이 인간 제사가 이스라엘에서는 실시되었다고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는 대상이 되었다.23 그러나 입다 이야기는 그 어떠한 기념이나 제의를 실제로 설립하는 것이라고는 거의 확실히 의도되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은 건설적이기보다는 파괴적이다. 이스라엘의 영웅과 아시리아의 신화는, 벌어진 사건들이 허망된 것이라고 드러났기 때문에, 폐기되어야 했다. 신화에 대한 이러한 정면 공격, 즉 아시리아 파워의 문화적 정점 중에 하나인 신화에 대한 공격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종교를 확실하게 변화시켰고 그것을 신명기적 야웨신앙으로 바꾸어놓았음에 분명하다.

   이러한 과정은 비신화화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고24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되어야만 함을 종종 반영한다. 폰라트(G. von Rad)25와 슈미트(W.H. Schmidt)26는 가나안 전통이 야웨 제의로 흡수되었다고 보았다.27 ‘순수’ 이스라엘 종교는 그러므로 유목민적 부족들이 땅에 정착하게 되면서 ‘가나안화’되어졌다고 이해되었다.28 헬러(J. Heller)는 이러한 개념을 우가릿의 만신전에 적용했다: 이스라엘은 바알의 몇몇 특성(자연과 식물)을 야웨에게 돌렸으니, 본래는 창조신 엘 모습으로, 너무 위대해서 제의에서 실현되지 못했다. 비신화화는 신들 사이의 연결들을 신과 인간 사이의 연결로의 전환을 포함한다; 야웨는 다른 신들을 만들었다기보다는 사람을 만든 창조주이자 왕이 된 셈이다. 비신화화는 인간화 과정이다.29

   헤르만(W. Herrmann)도 역시 비신화화가 요시야 통치 상황에서 한창이었다고 본다;30 그는 신화의 민간전승화(folklorization of myths)31라고 말하는데, 이는 신화가 지도층이 볼 때 위험하거나 수용할 수 없다고 여겨질 때 일어나는 일로, 특별히 개혁이 최정점에 달했을 동안에 발생한다. 의식들은, 그것(신화-역주)이 변화에 대한 거부를 분명하게 나타낼 때, 다루어질 필요가 생긴다. 의식적인 행위들은 새로운 태도와 새로운 신앙을 배태하기 위해서, 권위자들의 후원아래, 새로 교육되어진다. 레리에브레(Lelièvre)는 이러한 과정이 기원전 586년의 멸망 이후에 역전되었고, 그런 다음 신화는 사건들을 부정하기 위해서 다시 채택되었다고 믿는다:32 ‘야웨가 마르둑(Marduk)에 졌다’라는 것에 대한 대답으로 ‘야웨가 얌(Yam)을 이겼다’! 예상 밖의 정치적인 행운이 있은 이후에 벌어진 신화들에 대한 대안적 태도라는 레리에브레의 기술은 상당히 흥미롭다. 비록 그 전후 관련은 좀 더 발전시켜야 겠지만 말이다.


아시리아 이후의 비신화화 과정

열왕기서에 의해서 요시야가 추앙을 받고 있는 것은, 다른 시대를 제외한 상태에서 요시야의 통치 동안에 열정적인 개혁만을 집중하려는 경향을 드러낸다. 요시야의 통치가 여전히 아시리아 시대에 속해있음을 언급하는 것이 중요한데, 심지어 그가 자신의 군주인 아시리아에 반역했다 하더라도 말이다. 아시리아 제국의 종말은 결과적으로 므깃도에서의 요시야 죽음보다도 더 한 충격을 유다의 신학에 부여했을 것이다. 명백하게도, 성서는 악하다고 여겨진 제국의 몰락에 의해서 유다가 경험했을 충격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비록 하박국에는 ‘갈데아 사람’(합 1:6)이 아시리아의 봉신들에게 바람을 불어넣고 있는 것에 대하여 두려워하고 있는 좋은 예가 남아있기도 하다: 그들은 니느웨의 몰락으로 크게 기뻐하지 않았다. (바벨론과 엘람과는 상당히 다른 상황에 있는) 제국의 서부는 비정상적으로 길고 번영했던 시대로부터 이득을 얻어왔다.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상당히 많이 손해 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벨론 지배 아래에서 팔레스타인의 운명은 그들의 두려움으로 확증된다: 블레셋과 유다는 황폐화되어지고, 예루살렘은 포위되며, 팔레스타인 전체는 주변화된다. 시간은 무르익어서 바벨론화 된 미스바와 벧엘은 세계와 그들의 신들을 상대로 이스라엘의 위치 전반에 대한 개념을 재고할 때가 되었다.


벧엘의 중요성:

현재의 논의 속에서 검증되고 있는 크나우프(Knauf)의 가설에 따라서 구원자 책의 발상지인 벧엘은,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에서부터 왕정 시대(왕상 12-13장)와 아시리아 통치(왕하 17장)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거점이었던 것 같다. 요시야가 베냐민 지역을 정복했을 무렵에 그 장소가 파괴되었다는 언급은 없었다.

   기원전 590년에 이르자, 친-바벨론 파벌(사반 계열[Shafan family])은 예루살렘의 몰락을 예견하고 바벨론과 동조하기 위해서 미스바에 임시정부를 세웠다(렘 6:1; 7; 21:9; 22; 26-29; 32; 34; 38). 미스바는 기원전 586년 이전에는 예루살렘을 대신해서 유다의 수도가 되었는데(렘 38:19), 이는 왜 베냐민 지역이 느부갓네살의 군대로부터 그 어떠한 피해도 입지 않았음을 설명해준다.33 미스바에서 북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벧엘은 바벨론의 속주로 공식 제의 중심지로서 기능했으며, 벧엘 전승은 계속해서 전수되어졌다(야곱,34 사울, 호세아, 아모스, 예레미야 그리고, 물로, 구원자 책). 이제 성서에 있는 유다 전승의, 모두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은, 기원전 586년과 페르시아 시대에 예루살렘의 회복 사이에 보존되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벧엘에서였을 것이다. 예루살렘의 재건 연대와 주변 상황은 결정하기 불가능하다.35 그러나 에스라와 느헤미야서는 그것이 길고도 어려운 과정이었다는 사실을 감추지는 않고 있다. 미스바는 아마도 사마리아가 (예루살렘의) 회복을 ‘패역한 성읍(אידרמ אתירק, 스 4)’이라고 보았던 것 이상으로 잘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루살렘 성소의 헌당식은 즉각적인 벧엘 성전의 폐쇄를 야기하지는 않았다. 그 성전 학교는 늦게는 기원전 450년까지 계속해서 기능했다.36 고고학은 벧엘의 종말과 관련된 더 이상의 정보를 제공해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입다의 서원 이야기에 적합한 역사적인 맥락을 찾기 위해서 페르시아나 심지어 헬라 시대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불필요하다. 벧엘의 제사장들은 기원전 7세기 이래 모든 필요한 정보들을 손안에 쥐고 있었다. 그들은 분명히 입다의 서원을 상상해내기 위해서 에우리피데스(Euripides)의 이피게니아(Iphygenia)를 읽어야만 하지 않았다.37 그러나 요시야의 신명기사가들은 메소포타미아 문화를 완전히 무너뜨렸던 저자들 같지는 않다. 그들은 ‘우상-타파’를 뛰어넘을 수 있는 혜안이 부족했다. 바벨론의 벧엘은 구원자책과 사사기서 모두에 대한 슬프고도 반성적인 재검토를 위한 더 확실한 배경이 될 수 있다. 적들로부터 즉각적인 구원을 기대하게 만드는 구원자책의 울부짖음에 대한 요시야의 비판을 받아들이면서, 입다 이야기의 결론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울부짖기보다는 슬퍼하도록(삿 11:38처럼 קעז 대신에 הכב) 초대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비판은 심화되어지는데, 사사들이 상당히 많은 자손들로 인해서 영광을 얻었다는 것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비판한다: 입다의 외동딸은 영원히 해마다 슬퍼해야만 한다. 실제적인 제의가 아니라 일종의 문학적인 애도의 과정이 여기에서 의도되고 있다. 뒤를 이을 사람이 없는 딸과 동시에, 박탈된 후계자로의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은 바로 입다이며, 그와 함께 모든 구원자이고 모든 사사들이었다. 입다는, 이미 사사목록의 중앙에서, 구원자들의 시대와 사사들의 시대의 끝을 예견한다. 기원전 720년(벧엘의 구원자책), 700년(므낫세의 구원자책), 그리고 640년(요시야의 사사기서)에 배태된 위대한 희망은 버려져야만 했다. 울어라 이스라엘이여, 슬퍼해라 유다여, 입다의 딸은 죽었고, 너의 희망은 사라져버렸다! 복된 아시리아 제국의 시대는 가버렸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까지는 패배자 내러티브의 끝에는 도달하지 않았다. 아직 입다 이야기에서 조차도 그 끝은 아니다. 입다 내러티브의 끝에 길르앗과 에브라임 사이에 이상하면서도 잔혹한 대면을 고려할 시기이다.


사사기 12장 1-6절: 부르짖고 또 부르짖지만, 구원자는 없다!

이 구절은 구원자책의 좌우명으로 시작한다: ‘그들은 부르짖었다(קעציו קעציו)’ 그러나 삿 10:17에서처럼 군대를 움직이는 방식으로 사용된다. 입다에 향해서 오고 있는 것은 에브라임 군대이다. 암몬 자손에 대한 그의 승리는, 이미 그의 서원에 의해서 빛바래져 버렸고, 이제는 내전을 위한 구실이 된다. 입다는 (기드온을 반대했던) 삿 8:1-3을 생각나게 하는 사건에서 에브라임을 부르기를(ארק) 거부했다는 이유로 고발되고, 그는 그를 압박하면서 그의 집을 태워버리겠다고 위협을 받는데(1절), 이는 삿 15:6의 삼손의 아내가 받았던 형벌이기도 하다. 입다는 기소를 뒤집어엎으며, 그는 에브라임이 자신을 구원하지(עשׁי) 않을 것이라고 깨닫게 되자 홀로 암몬 자손을 공격하게 되었노라고 주장한다(2-3절).

   입다의 대답은 당혹스러웠다. 왜냐하면 삿 10-12장에서는 그 어떠한 길르앗 사람도 에브라임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자는, 야베스-길르앗 마을이 암몬 자손으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해 구조원들을 불러 모으기를 바라면서 사자를 보낸 일을 말해주는, 삼상 11장에서 대답을 찾으려는 유혹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그 이야기에서 에브라임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으며, 구원을 가져다준 사람은 바로 베냐민 지파의 사울이었다. 그러므로 사사기서 안에서 설명을 찾아보는 것이 더 안전할 것 같다: 구원자책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에브라임에서는 그 어떤 구원자도 나오지 않는다! 삿 12:1-6의 구절은 그러므로 삿 8:1-3과 함께 평행되게 첨가된 것으로, 에브라임에서는 다만 분쟁만 나올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다음으로 입다는 길르앗의 모든 남자들을 모아서 에브라임 사람 사만 이천 명을 공격한다. 에브라임의 도망자들은 요단강 나루에서 대량 학살을 당하고 마는데, 그들은 길르앗 사람들이 ‘십볼렛’이라고 발음해야할 것을, 대신 ‘씹볼렛’이라고 말함으로써 자신들의 고향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내고 말았다. 길르앗과 에브라임 사이에 발음의 차이는 삿 12:6의 마소라 본문이 제안하는 것처럼 ס과 שׁ의 차이가 아니라, 렘 40:14에서 바알리스라는 왕의 이름에서와 같이 [s]와 [th]의 차이이다.38

   가설적인 제안이 이러한 당혹스러운 구절에 대해서 나올 수 있겠다. 바벨론화된 유다의 중심지로서 미스바의 새로운 지위는 에브라임과의 불화를 야기했을 것인데, 여기에서는 느부갓네살의 파괴 이후 아시리아의 속주인 사마리아에 남겨진 것들을 지칭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확실히 새로운 것은 아닌데, 이후 시기 동안에 더욱 심각해질 것이며, 사마리아인들과의 최후결렬을 일으키고 말 것이다. 여전히 오늘날에도, 예루살렘을 요구하는 나블루스(Nablus)의 목소리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사사기 12장 7절: 결론

구원자를 모방했던 서론(삿 10:6)과는 달리, 입다 내러티브의 결론은 사사를 모방하는 언급으로 끝을 맺고 있는데, 바로 통치 기간과 매장지를 말하는 것이다.

   입다 내러티브 안에 두 개의 분명한 편집적 단계가 있었다고 알려있다. 패배자 입다의 이야기는, 잠정적으로 바벨론 시기로 연대를 잡을 수 있는데, 삿 11:12-28에서 베레아(Perea)에 대한 이스라엘의 영토 권리를 주장하는, 일찍 잡아도 3세기경으로 보이는, 긴 항변에 의해서 중단된다. 이 구절은 제 7장에서 살펴보게 될 것이다.



사사기 13-16장: 삼손, 구원하기 시작했던 패배자


삼손 내러티브는 사사기서에서 가장 길고도 복잡한 이야기로, 영웅의 생애 전반을 다루고 있으니, 임신에서부터 장사까지 보여준다. 삼손은 매력적인 인물로, 그의 업적, 호색함 그리고 다른 것들은 성서에서 가장 애착이 있는 표시(Biblical Obelix)를 갖다 붙여 놓았으니, 비록 그는 눈에 띌 정도로 이교도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편집자들의 동정표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결코 비난받지 않았는데, 이는 아마도 삼손은 블레셋 도시들이 농부들을 착취했던 것에 대한 저항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39 드보라의 노래에 나오는 용사처럼(삿 5:11), 그는 그 도시로 내려가 성문을 뜯어내 버린다(삿 16:3).

   사사기 14-15장은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며, 다양한 고대의 인물 집합을 연상시키는데, 바로 거칠고 털투성이의 남자(엔키두, 라흐무[Laḫmu]), 동물의 왕(사자와 여우)로 맨손으로 싸우고 세련된 문명(알코올, 면도)을 무시하는 그런 인물을 보여준다.40 여자는 그를 시작시키고, 도시 생활을 가르쳐준다.41 삼손은 또한 헤라클레스42와 수수께끼를 말하는 스핑크스와 비슷한 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어지는 네 장에서, 삼손 이야기는 그 자체로 충분히 저작된 모습을 보여주고, 그러므로 종종 책의 나머지와는 독립적으로 고려되어졌었다. 리히터(Richter)는 노트(Noth)를 따라서, 삼손 내러티브가 DtrG에 의해서 입다와 엘리 내러티브에 첨가되었다고 생각한다. 즉 사사기의 연대를 삿 10장에서부터 삼상 12장까지로 걸쳐 만들어놓기 위함이라는 것이다.43 베커(Becker)는 삼손 이야기 전체를 건너뛰면서, 입다 이야기의 끝에서 곧바로 삿 17장으로 넘어간다.

   공시적인 주석가들은 삼손에 대하여 이렇게 관심이 줄어든 것에 대하여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이야기의 통일성에 강조해왔다. 더 나아가, 삿 13장이 통시론자들에 의해서 종종 이야기 나머지 부분에 대한 이차적인 자료로 여겨져 왔기 때문에, 그것은 다른 장들과 함께 단일한 문학 작품으로 연구되어졌다. 그러므로 상당히 많은 문제가 여기에 걸려있다: 만약 삿 13장이 이차적인 것이라면, 본래 이야기는 삼손 이야기가 방탕한 불량배 이야기로 격하될 지도 모르고, 후에 그 다음 장에 종교적인 겉치장을 덧붙였던 것으로 이해될 것이다.44

   삼손 이야기 그 자체를 떨이로 취급하지 않기 위해서, 본 연구는 게세(H. Gese)가 열어놓은 길을 따를 것인데, 그는 삿 13-16장에서 급진적 야웨신앙을 위해서 광대한 종교 해체 작업이 있었다고 보았다.45 이 작업은 사실 입다의 딸의 희생제사와 함께 삿 11장에서 발견되었던 것과 유사한 것이다; 비신화화는 그러므로 사사기 13-16장의 미궁(labyrinth)을 통과해서 이후의 연구를 이끌어줄 아리아드네(Ariadne, 그리스 신화 중 테세우스에게 실패를 주어 미로를 빠져나오게 한 미노스 왕의 딸-역주)의 실이 될 것이다.

   김지찬은 최근 단행본에서 삼손 이야기와 관련된 최고의 연구를 제시한 바 있는데,46  그러므로 연구사를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다음의 분석은 가능한 한 역사성이 높은 자료들로부터 끌어들일 것이며, 삼손의 모험에 대한 지리적인 틀을 작게나마 제시하는 것으로 처음 그림을 그려보게 될 것이다.


지리적인 틀

삼손의 모험은 블레셋(소라, 딤나, 아스켈론, 가자)과 유다(에담, 라맛-레히, 헤브론)에서 일어난다. 삼손의 가족은 소라(삿 13:2, 25; 16:31), 즉 벧-세메스(히르벳 엘-루멜레[Ḥirbet er-Rumēle, 중기청동기-후기청동기-철기 I-II])에서부터 북쪽으로 3 킬로미터 떨어진 텔 짜라(Tel Ṣar'a, 철기 II)에 자리를 잡는다. 삼손은 소라와 에스다올(이스봐[Išwa', 철기 II]) 사이의 가족묘에 매장된다. 삼손은, 유다와 블레셋 사이의 완충지대에 있던 나할 소렉(naḥal śorēq)에 의해 깊이 파여진 협곡인, ‘소렉 계곡’의 들릴라를 사랑하게 되었다(삿 16:4). 성서는 예루살렘으로의 접근을 방어할 수 있는 이 중요한 지역에서의 반복되는 전투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고 있다.47 부족 명단은 이 지역이 정치적으로 복잡했음을 보여준다: 벧-세메스와 에스다홀은 때로는 단에 속했고(Is-Shemesh, 수 19:41), 때로는 유다에 속했다(수 15:33; 21:16).

   그러므로 삼손은, 복잡하고도 논쟁이 되는 영역 안으로, 국경을 건너가고 있다.


아시리아와 바벨론 치하에서 세펠라

삼손의 인생은 블레셋을 향한 처절한 싸움으로, 이 블레셋은 일반적으로 철기 I 시대에 해안 지대에 정착하고 바로 그 지역의 이스라엘을 위협했던, 심지어 사울 왕을 죽일 정도로 위협적인, 해양민족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 연구의 역사적 틀에 따르자면, 삼손의 적들은 기원전 7세기와 6세기의 맥락에서 놓는 것이 필요하다.

   기원전 705년에 일어났던 히스기야 왕의 반란에 대한 보복으로, 산헤립은 유다 세펠라의 46개 성읍과 촌락을 무너뜨렸고, 이십만 명의 거주민들을 포로고 잡아들였으며, 그 지역을 블레셋의 것으로 바꾸어버렸다. 이러한 강제추방은 유다가 그동안 경험했던 일들 중에서 처음이자 가장 가혹한 것이었으나,48 그러한 경험은 점차 잊혀졌다.49 이런 부정적인 대규모적 이주의 흐름은 전반적인 아시리아 그림에 잘 드러맞는다: 다른 위대한 왕들의 강제 이주와 비교해볼 때(디글랏-빌레셀 3세, 사르곤 2세), 산헤립은 모두 합해서 469,000명의 이주민이라는 가장 많은 기록을 세우게 된다.50 기원전 701년에 200,000명 포로민의 수는51 기원전 705년에 바벨론으로부터의 208,000명과 비교되는 수치이다.52 기원전 720년에 사마리아 성읍에서, 사르곤 2세는 27,000명의 강제이주자를 기록했다.53 그러므로 이 수치가 완전히 비현실적이라고 거부할 이유는 없으며,54 비록 기원전 701년의 200,000명이 모두 세펠라에서 나온 것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산헤립의 3차 원정에 대한 기록물은 유다에서 종결된 원정 기록물 말미에 강제이주자들의 총합을 간단하게 보여준다. 200,000명 중에는 다른 왕국의 반역자들, 즉 시돈과 비블로스 등등의 사람들 역시 포함되어있다.

   그러나 아시리아는 이 지역을 재조직했다. 아시리아의 상당한 투자로 인해서 블레셋은 광대한 ‘산업’ 시역으로 바뀐다; 에그론과 딤나는 기름생산의 중심지가 되었고, 아스켈론은 포도주에 집중했다. 기원전 7세기는 블레셋 왕국(시 60:10)과 유다에게 있어서 최고로 번영했던 시기였다.

   반대로, 바벨론 시기는 급격한 쇠락으로 특징되며, 그들이 이집트를 정복할 수 없음을 인식하게 되자, 바벨론은 그 지역을 폐허로 만들어 버리면서 전 영역을 걸쳐서 파괴해버렸다.


사사기 13장 1절, 15장 20절, 16장 31절: 삼손 이야기의 틀

입다의 경우와 같이, 삼손 내러티브는 구원자 내러티브의 도입 양식으로 시작한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블레셋의 손에 40년간 넘겨주시니라’(삿 13:1). 그러나 그것은 사사들의 양식을 닮고 있는 두 개의 결론도 보여준다:


הנשׁ םירשׁע םיתשׁלפ ימיב לארשׁי־תא טפשׁיו

그가 블레셋 사람의 때에 이스라엘을 20년간 다스렸다(삿 15:20).

הנשׁ םירשׁע לארשׁי־תא טפשׁ אוהו

그리고 그가 20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렸다(삿 16:31b).


   삿 15:20에서 내러티브와 연대기적 기록은 삿 16:31절에서 가져온 것은 아니다. 문법적으로 볼 때, 삿 16:31은 내러티브에 20년을 더하지 않고 있으며, 단지 처음 결론(삿 15:20-역주)을 반복할 뿐이다. 김지찬은 םיתשׁלפ־ימיב이라는 양식이 일반적이지 않기 때문에, 삿 15:20이 본래는 םיתשׁלפב לארשׁי לשׁמיו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지배를 받았다’)로 읽혀야 함을 주장하는데, 이는 삿 15:11b의 םיתשׁלפ ונב םילשׁמ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과 일치하기 때문이기도 하다.55 틀을 만들어 낸 저자는, 삼손 내러티브가 사사기서 안으로 통합되었을 때, 그것을 삿 16:31과 들어맞게 하기 위해서 삿 15:20을 수정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차적 결론을, 16장을 이전의 장들로부터 완전히 다른 현실 상황에 놓고 있는, 목록 변경의 표시로 이해하는 것 역시 가능할 것이다. 비신화화 과정 덕분에, 삿 16장은 삿 13-15장의 연속성에 있지 않고, 그 모양은 보다 고차원적인 국면에서 나타나니, 즉 앞으로 진행될 일은 동시에 일어나거나 아니면 시간적인 간격을 두고 일어난다는 표시인 셈이다. 이 요점은 삿 16장에서 그 빛이 발할 것이다.

   그 전에, 사사기서를 구성하고 있는 연대기적인 틀을 조사해야만 할 것이다.


사사기서의 연대기

구원자책은 외국인 압제의 기간과 각 구원간의 사이에 있는 평화로운 휴지기간을 언급한다. 사사들은 또한 그들의 직책의 기간이 얼마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기간은 여호수아, 사무엘서, 열왕기서 안에 들어있는 다른 언급들과 함께 계산될 수 있는데, 이와 같은 방식으로 왕상 6:1에 따르면 솔로몬 성전 건축의 시작에서부터 출애굽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이 480년에 이름을 알게 된다.

   480년을 하나로 묶어보려는 대다수의 학자들은 사사들의 직책기간이었던(삿 10:1-5; 12:8-15) 70년을 포함시켜왔다. 벨하우젠(Wellhausen)은 이들 70년을 자신의 연대계산에 포함시키지 않았던 유일한 사람이었음에 분명한데, 왜냐하면 그는 삿 10:1-5와 12:8-15이 포로후기의 편집자들에 의해서 첨가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이들 편집자들은 연대설정에 신뢰감을 줄 수 있는 역사서를 기록한 신명기적 편집 이후의 사람들인 셈이다.56 벨하우젠은 또한 돌라, 야일, 입산, 엘론 그리고 압돈의 70년이 구스(8년), 모압(18년), 가나안(20년), 미디안(7년) 그리고 암몬(18년)의 억압 연수의 총합과 상응한다고 언급한다. 결정적인 480년에 도달하기 위해서, 벨하우젠은 삼손은 제외시키고, 사울(삼상 13:1에는 두 개만 남아있고 나머지 숫자는 본문에서 사라져버렸기 때문에)과 사무엘(그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에게는 50년을 적용시킨다.

   또 다른 절반의 학자들의 시도들은 주석적인 문헌들에서 발견되는데, 그들이 서로 다른 인물들을 고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모두 480년에 도달하고 있다.57 더 긴 연대의 가능성을 산출해주는 충분히 많은 연대 표시들이 전기 예언서 안에 흩어져있다. 그러나 사울의 통치 기간을 말하는 삼상 13:1 자체의 불완전한 시간언급으로 인해서 완벽하게 계산을 할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이 준비되지 못함을 알아야만 한다. 각각의 저자들은 그러므로 480년에 맞추기 위해서 사울과 사무엘에게 적당한 연수를 더했던 것이다. 사실, 이러한 480년은 40년의 12세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비록 성전이 시작했던 솔로몬 제위 4년의 언급으로 인해서 보다 더 정교한 계산이 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말이다.58

   이러한 가망이 없는 작업을 위해서 또 다른 계산을 여기에서 시도하려고 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 동안 이들 연수들을 가지고 이리저리 생각해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인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림 6을 언뜻 보면, 출애굽과 솔로몬의 제위 제 4년 사이에 가능한 연대기적 연수의 총합이 554년에 이르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러므로 480년에 도달하기 위해서 어떤 부분을 제외시킬 필요가 있음도 알게 된다.


그림 6. 사사들의 연대기와 왕상 6:1의 480년

 

억압

평화

사사들

통치

  출애굽 + 정복(수 14:10)

  옷니엘(삿 3:7-11)

  에훗(삿 3:14,30)

  삼갈(삿 3:31)

  바락(삿 4:1-5:31)

  기드온(삿 6:1-8:28)

  아비멜렉(삿 9:22)

  돌라(삿 10:2)

  야일(삿 10:3)

  입다(삿 10:8; 12:7)

  입산(삿 12:9)

  엘론(삿 12:11)

  압돈(삿 12:14)

  삼손(삿 13:1; 16:31)

  엘리(삼상 4:18)

  블레셋에서의 법궤(삼상 6:1)

  기르앗-여아림(삼상 7:1)

  사울(삼상 13:1)

  다윗(삼하 4:4)

  솔로몬(왕상 6:1)

 

08

18

00

20

07

 

 

 

011

 

 

 

40

 

012

20

 

 

 

 

40

80

00

40

40

0

 

 

0

 

 

 

0

 

 

 

 

 

 

 

 

 

 

 

 

 

23

22

06

07

10

08

203

40MT

 

 

 

 

 

45

 

 

 

 

 

03

 

 

 

 

 

 

 

 

 

 

02+?

40

04

  총합

115

200

136

94


   만약 이 계산식에 사사들의 기간을 제외한다면, 그 총합은 466년에 이른다:


출애굽

정복

억압

평화

엘리

블레셋에서의 법궤

기르앗-여아림에서 법궤

통치

040 년

005 년

111 년

200 년

040 년

001 년

020 년

049 년 (사울을 제외하면)

총합

466 년, 14년이 부족하다


   사사들을 제외하면, 14년이 부족하고, 이는 또한 사울의 통치 기간도 포함되지 않는 수치이다. 엘리의 40년 사사 기간도 LXX에 따라서 20년으로 줄일 수는 있는데, 그렇다면 사울에 대해서는 34년을 남겨두어야 한다. 삼상 13:1에서 일어난 탈락현상(x+2년)은 12년이거나 32년으로 채워 넣을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집트와 페니키아-아람의 체계에서는 10단위 후에 1단위를 기록하기 때문이다(숫자로서 알파벳 문자의 사용은 헬라시대 이전에는 확인된 바 없다): 예를 들면, ∨//¬ 혹은 ∨//-(14) 그리고 ∨//¬TM 이거나 ∨//+(34)이다.59 출애굽부터 솔로몬 제위 4년까지 기간을 480년으로 잡는 것은 사사들 없이도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러한 결론은 앞서 3장에서 내린 주장과 일치한다. 간단히 말해서, 사사들의 기간은 구원자책의 평화기간과 일치하지 않고 압제기간만 일치한다는 것이다. 페니키아의 경우에 따르자면, 사사들은 외국의 압력으로 인해서 어려운 시기를 보내는 동안 왕을 대신해서 잠깐 다스렸을 뿐이다. 이스라엘의 쇼�(shofet)도 아시리아의 감독 하에 일하거나, 어떤 합법적 중앙 정부의 부재 시에 책임을 맡게 된 이스라엘 지방 행정관일 것이다. 징계의 기준이 되는 기간이기도 한(렘 29:10), 사사들의 70년이라는 기간은, 그러므로 철기 I 시대의 왕조 이전의 정부형태를 연상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기원전 720년 이후의 기간을 상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사들에 의한 이 기간은 또한 ‘왕조-이전’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데, 바로 이스라엘 왕정의 종말과 앞으로 회복될 이스라엘 왕국 사이의 잠정적 시기를 의미하는 차원에서 그러하다. 결국 사사들의 기간을 왕조 이전으로 이해함으로써 본래 그 왕조 후기적 관점을 이겨낼 수 있었는데, 그 때는 바로 사사기서가 여호수아와 사무엘상 사이에 삽입되면서 부터였다(제 7장에서 볼 것이다).


사사기 13장 2-14절: 나실인

사사기 13장은 종종 삼손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 부차적인 것으로 고려되었다.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나실인 주제가 13장에서는 중심적인 것이지만, 다른 장에서는 그 어떠한 특별한 기능도 없기 때문이며,60 삼손이 들릴라에게 비밀을 털어놓는 삿 16:17aα의  ימא ןטבמ ינא םיהלא ריזנ־יכ ‘이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이 되었음이라’라는 짧은 단락을 제외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이 언급은 13장과 같은 시대에 첨가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13장의 본문상의 문제는 나실인에 관련된 애매모호한 조건들에 대하여 필사자들과 번역자들이 상당히 당혹해 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삼손은 그의 어머니처럼 그렇게 엄격한 음식규정을 따랐을까?61

   김지찬은 삿 13-16장의 통일성과 일관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자신의 연구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그는 작품 전체에 걸쳐 규칙적으로 나타나는 많은 후렴구와 삿 13장과 14-16장 사이의 평행구절의 목록을 발견하기도 했다.62 리히터가 13장의 부차적 속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알다/알지 못하다’라는 대조를 사용한 반면, 김지찬은 이야기의 각 부분에서 두 번씩, 총 여섯 번에 걸쳐 עדי ‘알다’가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삿 13:16과 21절; 14:4과 15:11; 19:9과 20절). 나실인 법규의 반복이 나실인이 삿 13장의 단일한 관심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리히터의 주장에 반대하면서,63 김지찬은 삿 13장의 나실인과 다음에 나오는 장들에서의 난봉꾼 사이의 대조는 네 개의 장을 붙잡고 있는 긴장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삼손이 나실인이라는 신분에 따라 행동하기를 기대하는 중에, 독자는 길을 잃어버리도록 의도적으로 인도된다. 반복되는 범죄들은 내레이터의 비평적 거리감을 만들어 내고, 진짜 영웅은 이스라엘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백성을 포기하지 않는 야웨가 된다.

   김지찬은 삿 13장이 14-16장과 동일한 시대에 구성되었다는 것을 정말로 증명한 것일까? 평행이라는 것이, 첫 번째 내레이터가 원숙한 천재성으로 표현했던 것이라고 보기보다, 편집자의 예술적인 솜씨로 13장을 보다 초기의 작품인 14장의 시작부분에 같다 붙였던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할까? 아니면 우리가 성서 본문들이 탁월한 시인에 의해 기록되었다가 무능한 편집자에 의해 혼합되었다는 믿음을 가졌다고 정죄될 수 있단 말인가? 이질적인 요소들을 함께 묶기 위해서 평행이라는 문학적 장치를 사용함으로써 오래된 본문 안으로 상대적으로 새로운 이슈를 집어넣을 수 있으며, 그래서 계속되는 해석자들에게 놀라운 활동의 장을 제공하기도 한다. 단순히 평행절이 많다는 것만으로는 그 어느 것도 증명해주지 않는다. 보다 확신이 있는 주장은, 삿 13장이 다른 장들에 의해 가정되고 있는 하나의 결정적인 요소를 제공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것이 이번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나실인 주제는 삿 14-16장에 걸쳐서 낮 설은 상태로 남아있다.

   다른 한편으로, 삿 13장이 나실인 신분을 묘사하기 위해서 첨가 되었다는 것은 그럴듯하지 않은가? 삼손은 나실인들이 실제적으로 가정되었던 특별한 종교적인 성별된 것과 같은 이상적인 모습으로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삿 13장에 놓여 진 모든 규칙들을 작정하고 위반함에도 불구하고, 삼손은 나실인의 서원을 보여주기 위해서 선택된 것일까? 이러한 난점에 대해서 �핼드(Römheld)의 해결방안은 고전이 되는 것으로, 그는 삿 13장의 첨가를 통해서 나실인의 의무를 위반하는 삼손으로 인해서 영웅을 모욕하기 원했던 신명기적 역사가가 편집한 통합된 영웅 전승이라고 가정한다.64 공시적 해석자들과 통시적 해석자들은 결국 삿 13장이 패역한 영웅 내러티브를 급격하게 격하시키는 신명기적 서론으로 보기에 동의하는데, 삼손을 야웨의 은혜를 탕진한 불충실한 이스라엘의 체현으로 만든 것을 인정하는 셈이다.

   그러나 나실인 주제는, 만약 삿 13장을 요시야 시대로 가정한다면 중요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민 6:1-21을 언급하지 않은 채65 이해될 수는 없다. 더욱 곤혹스럽게도, 스팁(Stipp)은 많은 석의학자들이 눈감아왔던 부분을 지적해낸다: 5절의 삭도를 제외하고는, 준수사항은 단지 어머니에게만 관련된 것이라는 점이다!66 이것의 결정적인 요점은, 5절에서 마노아가 그의 아내에게 이미 말했던 것을 야웨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다시 말하고 있는 13-14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5절은 그 여자(השׁאה)가 포도와 불결한 음식으로부터 완전히 결별해야함을 말한다. 스팁은 어머니에게 음식제한을 부과하는 것은 어머니를 주연 배우로 전환시킨 후기 편집자들의 작업이라고 확신한다.67 그와 같은 갑작스런 페미니즘 현상은 설명하기 어렵지만, 여기에서의 문제는 삼손의 소위 불법이라는 것들이 단지 삭도를 대는 것에 대해서만 제한된 것이었고,68 사실 그것도 부차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69 사실 5절은 ושׁאר־לע הלעי־אל הרומו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는 구절에 의해 훨씬 과장되었으며, 그러한 구절은 7, 13-14절에는 나오지도 않는다.

   두 개의 가능성이 남아있다: 5절의 삭도 금지가 부차적이거나 또는 그것이 원래적이고 14절의 היתיוצ־רשׁא לכ (‘내가 그녀에게 명령한 모든 것’)에 암시되어 있다는 해석이다. 만약 삭도 규정이 기대되었던 위치가 있다면, 특별히 소년의 삶의 방식에 대하여 질문한 마노아에 대한 12절의 천사의 응답이 될 것이다. 삭도는 이후에 단지 5절에 첨가된 것으로, 삼손은 나실인과 관련된 규정을 위반한 것으로 고소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스팁의 가설이 더 그럴듯한 것 같다.70 만약 삭도의 금지가 원래의 것이 아니라 삼손의 경우를 과장하기 위하여 삿 16장에서 추가된 것이라면, (삭도를 제외한) 삿 13장 전체를 원래 삼손 내러티브의 나머지로부터 제외할 이유는 없게 된다. 그러한 관점에서, 삿 13장은 단 지파 민간전승 영웅의 신명기적 과장이 아니라, 그 시작에서부터 이야기의 일부였던 것이다.71 그렇다면 왜요시야의 신명기사가들은 자신들의 목적에 잘 맞아 떨어진 삼손을, 이 삼손에 대해서 우리가 곧 살펴보겠지만, 모욕했던 것일까? 사실, 그(삼손-역주)는 그들(신명기사가-역주)의 의도를 너무나 잘 따르고 있기 때문에, 혹자는 삼손이 순전히 신명기적 인물이 아닐지도 모를 것이라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또 혹자는 삼손의 원형에 대한 연구로 단 자손의 민간전승보다 메소포타미아 신화를 다루면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만약 나실인 신분이 삿 13장의 중심 주제가 아니라면, 삼손의 기원은 정말 문제가 된다. 삿 13장은 복음서의 수태고지의 문학적 장르와 너무 밀접해서, 삼손은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고려되기도 한다.72 사무엘과 삼손 그리고 다른 이들의 출생 내러티브와는 반대로, 모든 무게는 생산자(genitor)의 정체에 쏠려있다. 이런 면에서, 삼손은 침례 요한보다도 상당히 예수와 밀접한데, 씨를 준다는 것으로서의 마노아의 역할이 요셉의 경우에서와 같이 공개적으로 부인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삿 13장은 조직적으로 남편에 반대로 아내를 보여주며, 이는 일부 페미니스트 학자들을 만족시키는 부분이다.73 야웨의 사자는 그녀에게 제일 먼저 말을 걸고(3절) 사자가 마노아에게 말하기를 마칠 때에는, 그가 이미 여자에게 모든 것을 말했노라고 강조하기까지 한다(13절). 가장 놀라운 사실은, 두 번의 만남 모두 마노아 부인이 홀로 있을 때에 일어났다는 점이고(3, 9절) 자신의 남편을 데려오는 주도권을 가진 사람이 바로 그녀라는 점이다. 다음으로 마노아는 자신의 아내 뒤로(ותשׁא ךליו ירחא חונמ, 11절) 걸어오며, 신이 등장한 일로 인해서 자신들의 생명에 위험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설명을 듣는 사람 역시 그녀이다(23절). 이 게임은 단 자손에 대한 유다 자손의 조롱이 표현된 것이지만, 더욱 깊은 문제가 들어있다. 천사는 내러티브에서 ךאלמ (‘전달자’)이지만(3, 9, 13, 15, 16, 17, 18, 20, 21절), 정작 그는 여자와(6절) 마노아에(7절) 의해서 ‘하나님의 사람(םיהלאה שׁיא)’으로 불리고 있다. 이야기의 중심에서, 그는 이제는 단순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내게 임하였던 사람이 오늘 내게 나타났나이다(םויב אב־רשׁא שׁיאה ילא, 10절에 여자가 말함)’, ‘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러(שׁיאה־לא אביו, 11절에 내레이터가 말함)’ 그리고 마노아의 공개적인 질문인 ‘당신이 그 사람입니까?(שׁיאה התאה, 11절)’. 세 번이나 본문은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로 들어왔다고 넌지시 말하고 있다. 즉, 그녀가, 모든 의혹에서부터 자동적으로 깨끗케 될 수 있는, 들에 홀로 있을 때였다(9절).74 조금만 더 생각하면, 이러한 만남으로 자연스럽게 결실이 생긴다는 것은 자명하다고 하겠다.75 일반적인 형식인 ‘그가 그의 아내를 알았고/들어갔고 그녀는 임신했다’76가 없는데, 이는 삼손이 마노아의 씨에서 출생하지 않았음에 대한 끈질긴 회의론자들이 강력하게 붙잡는 부분이기도 하다. 삼손의 실제 아버지가 누구인가에 대한 것은 그 아들이 어떠한 삶, 즉 아주 특별한 삶을 살게 될 것을 예견해준다. ‘그 사람’의 입에서 아이에 관해서 무엇을 해주어야만 하는지를 직접 들으려고 고집을 부렸다는 측면에서 자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 냈던 마노아는, 법에 정통한 독자들에 의해서 여자에 대해서는 유감스러운 것으로 그리고 아이가 생긴 것에 대해서는 합법적인 것으로 해석되어졌을 것이다.77

   사사기 13장은 그러므로 완벽한 범죄를 위한 하나의 치밀한 플롯인 셈이다. 각각의 배우는 의심을 해명 받고, 모든 것이 잘 마무리 된다. 복음주의자들은 삼손 위에 예수를 놓기 위해 마리아의 동정녀성을 주장하는 것 외에 그 어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복음서의 부분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점만 본다면, 삿 13장의 연대를 늦은 시기로 잡을 수도 있겠다. 만약, 그리스도가 출현하기 천 년 전에, 고대 근동에 모호하게 출생한 영웅들의 이야기가 많이 있지 않았다면 말이다.


사사기 13장 15-25절: 마노아의 예물과 기드온의 예물

스�은 금세기가 시작할 때 나타났던 옛 생각을 받아들였는데, 즉 삿 13:15-20에서 마노아가 바쳤던 희생제사가 삿 6:11-24에서의 기드온으로부터 보다 정교하게 꾸며졌다는 생각이다.78

   그림 7은 삿 13장이 삿 6장을 요약하며, 16-18절과 21-23절에서 두 개의 발달된 내용을 첨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삿 13장은 기드온 이야기에서 발견된 회의적인 요소들을 피하고 있다. 마노아의 희생제사는 기드온의 경우에서처럼 전달자의 출처를 점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법 막대기 사건(삿 6:19-21)은, 마노아의 경우에, 희생제사와 제의에 대한 그의 전통적 이해를 넘어설 수 없음을 입증하는 것으로 대신하기 때문이다. 비록 천사가 그에게 자신은 예물을 먹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노아는 전달자가 누구인지를 아직도 알지 못하고 있다(16절). 다음절에서 마노아는 여전히 그의 이름을 묻고 있으며 천사는 18절에서 이 질문에 대해 그를 질책한다. 19절에서 보이는 것처럼, 삿 13장은 삿 6장보다 짧다. 조리용 세부 항목들은 생략되었다(6:19-21). 그리고 마노아는 직접적으로 바위에 예물을 올려놓는다. 기적은 나무 없이 점화된 불빛이 아니라(삿 6:21) 화염 속에서 전달자가 사라지는 장면이다(삿 13:20).

   이러한 본문들은 연결되었고, 각 이야기는 각자의 논리를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삿 13장은 아마도 삿 6장에 기초한 것으로 보인다. 삿 6장은 이스라엘의 구원자들의 신앙이 부족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리고 어느 곳에서든지 제단들을 세운 그들의 습성을 묘사하기 위서 장면들을 늘렸다. 삿 13장에 대해서는, 삼손의 부분적인 신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를 동양적 영웅들의 반열에 올려놓기 위해서, 전달자에 의한 신적 기원을 입증한다. 어머니의 교활함은 마노아의 씨라는 가능성을 박탈시키고 만다. 그러나 그녀의 귀결의 열매(삼손-역주)는 다곤 숭배자들에 관한 이야기의 끝에서 죽음으로 운명을 다한다. 오래된 가나안 제의(Altarätilogien) 유물로 이해되기보다,79 삿 6장은 구원자책의 비평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삿 13장은 삿 16장의 위대한 야웨신앙을 준비시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할 것이다.


사사기 14장 1-7절: 삼손과 사자

(13장에서) 삼손을 수태했을 때 자세하게 기록한 것과는 달리, 삼손의 유년기는 빠져있으며, 이야기는 곧장 청년기로 진행된다. 즉, 청년 삼손은 블레셋 사람의 딸과 결혼하기 위해 부모와 함께 딤나(Timnah)로 내려간다. 딤나의 포도원에서, 가족은 젊은 사자의 공격을 받게 되지만, 삼손은, 야웨의 영이 그를 덮치자(hit, חלצ, ‘강하게 임하니’), 그 뜻밖의 짐승을 마치 염소 새끼를 찢는 것 같이 찢어 버린다. 그것도 맨손으로 말이다(5-6절). 이러한 첫 번째 위업은 후에 삼손의 결혼 하객들에게 주어진 수수께끼의 바탕을 이루게 된다. 사자의 주검은 일종의 함정으로 기능하는데, 결과적으로 결혼과 신부, 신부의 아버지와 하객들을 파멸로 이끌며, 특히 하객들은 장차 삼손이 허물어뜨리게 될 다곤 신전 안에 참석하는 등장인물로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에타나(Etana) 서사시에서 나와 있는, 독수리를 잡기 위한 함정으로 샤마쉬(Shamash)에게 맞아 죽은 야생 수소의 주검을 설치했다는, 내용과의 평행은 아무래도 우연한 것일 순 없다.80

   삼손, 즉 ‘작은 태양’(‘태양[שׁמשׁ]’에서 유래한 것으로)은 사자를 도살하는 것에서부터 자신의 사역의 시작을 알리는데, 그러므로 이는 하늘(celestial plane)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반영한다: 새벽에 태양은 하늘의 문을 통과해서 올라가고, 그 빛은 금성의 희미한 것으로 바뀌며, 결국 (밤이 되어) 아침별의 상징인 사자가 희생되었다고 한다.81 

   또한 사자는 아득한 먼 옛날부터 우주적인 왕권을 상징하기도 한다. 수메르에서부터 신-아시리아 왕에 이르기까지, ‘사자’는 왕의 별칭이었다. 또한 이러한 상징은 주도면밀하게 실시되어 유지되었는데, 사르곤 왕은 다양한 방법으로 사자사냥을 실시해서, 사자를 죽이는 것이 왕실의 특권이자 의무가 되게 했다.82 사자는 혼돈의 야생(erṣetu)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왕은 사자를 죽이고 그 가죽을 걸침으로써 짐승의 왕의 힘을 얻게 되며, 야생의 영역을 밀어낼 수 있었고, 그 결과 문명화된 지역(mātu)을 확장할 수 있었다. 사자의 형상은 종종 왕가의 연대기에 사용되었는데, 산헤립은 바벨론의 므로닥-발라단 왕을 향해 분노하면서, ‘나는 사자와 같이 격분했고, 나는 폭풍우처럼 돌격했으니, 나의 무자비한 용사들이 함께 했고, 나는 키쉬의 므로닥-발라단을 향해 나의 얼굴을 향했다.’ 부조(reliefs)에서는 앗술바니팔이 줄지어선 군인들로 울타리 쳐진 경기장과 같은 곳에서 사자들을 사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반면, 비문(inscriptions)에 의하면 왕 역시 자연 서식지로 내려가 사자 사냥을 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사자 사냥 자체의 특권 외에, 더욱 사소한 안전에 대한 문제들도 걸려있다: 사자들은 소떼와 농부들에게 실질적인 위험요소였다. 그러므로 전쟁과 사냥을 통해서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왕의 임무였던 것이다.

   딤나의 사자는 삼손 이야기의 연대설정에 있어서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딤나는 산헤립이 정복한 도시로, 엘데케(Eltekeh)와 나란히83 아시리아 기간 동안 살아남아 번영했던 곳으로 명백하게 언급되고 있다. 딤나는 에그론과 벧-세메스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데, 기원전 701년의 파괴에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인구가 줄어들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바벨론이 원정하기 전까지 변하지 않았으니, 즉 기원전 597년과 586년 사이에 블레셋과 유다를 황폐하게 했던 원정 전까지 말이다. (원정의) 결과로, 허허벌판이 된 땅은 곧 야생동물로 넘쳐난 숲으로 덮여졌고, 그 중에는 농부들과 여행자들을 위협하는 사자들도 있었다. 고고학은 이 시기에 사자 개체수가 증가했음을 보여주는데, 기원전 12세기 얍포(Jaffo)에서 발굴된 것을 제외한다면, 발굴지에서 밝혀진 소수의 사자의 뼈들이 모두 철기 II 시대에 속한다. 열왕기하 17장 25절은 기원전 722-720년의 전쟁 이후 사마리아에서 같은 현상이 있음을 보고하고 있다. 당시에 거주자들은 야웨의 분노로 인해 사자 재앙을 당했다. 이는 벧엘의 제사장들이 야웨의 노여움을 진정시킬 때까지였는데, 아마도 이때는 사르곤이 아랍의 포로들을 데리고 와서 지역의 인구를 끌어올리려고 정착시켰을 때였다.  

   그러므로 딤나의 사자는 바벨론에 의한 파괴 이후에 일어난 불행들을 증언하는 것이다. 느부갓네살과 그 후손들이 성취했어야만 했던 것들을 맨손으로 이루어냄으로써, 삼손은 분명하게 시골뜨기가 아닌 왕적 모습을 나타내 보인다. 신화적인 면에서 볼 때, 삼손은 두드러지는데, 그것은 그의 ‘사역’의 시작에서부터 광대한 신과의 싸움까지, 앗술바니팔의 도서관(기원전 668-627년)의 이야기에 나오는 이름 없는 영웅처럼, 많은 사람들을 죽인 신화적 사자 라부(Labbu)를 물리친 영웅과도 같았다.


사사기 14장 8-9절: 꿀

두 번째로 블레셋의 ‘햇빛(םימימ?)’을 방문하는 길에, 삼손은 사자의 주검 안에서 꿀벌 떼를 발견하고는 약간의 꿀을 먹는다. 이러한 사건은 부고니아(bugonia)84와 연관되어 있는데, 즉 기원전 8세기에 고린도의 에우멜로스(Eumelos)가 처음으로 언급했던 신화이다. 그러나 이는 베르길리우스(Virgil, 기원전 70-19)가, 사람들이 발진으로 병이 들게 되자 농부들이 새로운 벌 떼들을 얻는 방법을 소개하기 전까지는 기록되지 않았었다: 열린 헛간에서 소를 질식시켜서 죽인 후에, 부패를 활성화하기 위해 사지를 두들긴다. 그 사체는 신선한 백리향(thyme)85과 월계관 가지로 깔아놓은 침대에 눕힌다. 곧 애벌레가 생겨나서, 다 자라난 벌로 성장한다. 주된 생각은 이런 것이다: 벌들은 자연적으로 부패한 고기에서부터 나온다. 그러나 신화에서는, 황소 혹은 송아지의 사체에서 벌들이 나온다. 황소는, 사자와 같이, 아시리아 왕을 지칭하는 또 다른 별칭이기도 하다. 소에 대한 은유는 삼손의 아내를 암송아지라고 부르는데 나오며, 하객들이 (암송아지인 삼손의 아내를) 밭 갈았기 때문에, 삼손을 성가시게 해서 수수께끼의 해답을 얻어냈던 일들을 지적하게끔 한다(삿 14:18).

   부고니아 신화에 내포되어있는 부활 상징의 발견은 민간전승화되고자했던 한 명의 이스라엘 영웅 덕분이었다. 신화적인 꿀은, 마음의 즐거움이요 죽음을 극복한 삶의 승리라는 표시였지만, 그것을 맛본 모든 이들의 입에는 매우 쓴 것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사자의 사체에서부터 나온 꿀이라는 이야기는 살육 이야기의 시작을 알린다. 어떤 모양의 부활도 이야기의 끝에 다다르기 전까지는 발생하지 않는데, 그때란 삼손의 머리가 다시 자라게 될 때로, 그런 다음엔 영웅이 궁극적인 희생제물로 자기 자신을 바치는 것을 허용할 작정이다. 이러한 신격화(극적인 행동)는 그가 살아있을 때보다도 더 많은 적들을 죽일 수 있는 다른 기회가 있었음을 말할 뿐이다(삿 16:30).


사사기 14장 15-20절: 비참한 신혼여행

죽은 사자 다음으로 나온 꿀은 삼손이 그의 결혼식에 온 블레셋 하객들을 속이기 위해 내 놓은 수수께끼의 열쇠이다. 수수께끼의 말들은, 특별히 둘 째 부분인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라는 말은 결혼식 흥을 한층 돋우는 성적 은유에 해당한다.  

   하객들은 곧 자신들이 함정에 빠졌음을 알게 된다. 그들은 신부를 위협해서 목숨을 구하려면 신랑을 배신하라고 협박하는데(15절), 해답은 잠언의 형식으로 전달된다: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18절)

   신부를 쥐어짜서 수수께끼의 해답을 얻어낸 자신의 하객들에 대해서, 삼손은 대답한다: ‘너희가 내 암송아지로 밭 갈지 아니하였더라면, 내 수수께끼를 능히 풀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므로 결혼과 밭 갈기 사이에는 연결점이 있는데, 이 두 개의 행동은 전통적으로 같은 외설적인 암시와 동반해서 나타나는 것으로, 양 쪽 모두의 경우에 다산을 촉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배반에 의해 수수께끼의 해답을 얻어내기는 했지만, 이것은 단지 블레셋 사람들에 대한 잠깐 동안의 집행유예를 보여줄 뿐이다. 야웨의 영은 변함없이 (삼손을) 옭아매고(19절, חלצ), 삼손은 그의 하객들에게 ‘보상하기’ 위해 아스글론 사람 삼십 인을 죽인 다음,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다. 삼손의 신부는 친구에게 넘겨졌고, 더한 대결은 이제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사사기 15장 1-3절: 중단된 화해

삼손은 아내를 만나기 위해서 염소 새끼를 딤나로 가지고 왔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그의 동생을 대신하여 주려고 했다. 여기에서 염소 새끼는, 삼손이 짜디카(Ṣadīqa) 식의 결혼 계약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아내가 아버지의 집에 남아있고 남편이 종종 방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관계는, 이슬람 이전의 아랍인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결혼이 아니라 일시적인 화해일뿐이다. (그러므로) 삼손의 경우, (어근 ברע ‘들어가다’에서 유래된) 에레부(errȇbu) 결혼으로 설명하는 게 더 낫다: 좋은 집안의 남자가 딸과 결혼함으로써 아들이 없는 집에 들어가는 것이다. 사위가 이제는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결혼 지참금은 필요 없고, 여자는 아버지의 집에 머물러 살면서 아버지의 권위 아래에 있게 된다. 둘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도 할아버지의 소유로 남아있게 된다.

   그러나 사사기 14장은 그런 상황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삼손은, 배신을 당해 격노한 채, 단지 결혼 잔치를 떠나버렸다가 아내를 데려오려고 돌아왔을 뿐이다. (그러므로) 염소 새끼는 일종의 선의의 차원에서 언급된다: 그 목적은 삼손을 아주 멋진 모습으로 그려내는데 있는바, 곧 배신당한 것도 잊고 혼인관계를 지속하려고 하는 남자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어떤 특정한 결혼 형태를 기술하려는 것이 아니라, 싸움이 계속되고 있음을 확실히 하려는데 의도가 있다: 삼손의 좋은 의도가, 삼손의 아내를 그의 친구(ערמ)에게 줘버린 장인어른의 끔찍한 실수와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여기서 친구는 아마 최고의 남자로, 결혼을 주관하도록 신랑이 세워둔 사람이었을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법에 의하면, 만약 결혼이 깨어졌을 지라도 그가 신부와는 결혼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런 법이 그 당시의 팔레스타인에서 적용되었는지 여부를 결정하기는 어렵다. 삼손의 대답은 긍정적인 대답을 선호하는 것 같은데, 그것은 바로 삼손이 자기의 아내를 대신하여 어린 동생을 준다는 말에 즉각 거부하는데서 볼 수 있으며(2절), 결국 그는 자신이 블레셋에게 복수하는 것에 무죄할 것이라고 선언한다(3절). 그 어떠한 대체도 이러한 공격을 수습할 수 없었으니, 심지어 여기에서 보듯이 선한 의도인 것처럼 보이는 일에서도 말이다.


사사기 15장 4-5절: 여우가 문제를 유발하다.

아내를 빼앗긴 것에 대한 앙갚음으로 삼손은 여우를 둘씩 묶어 그 꼬리에 홰를 달아놓아서, 블레셋 사람의 밭과 과수원을 모조리 태워버리도록 만들었다. 추수를 목전에 두고 다 자란 곡식들을 불태우는 일은 잘 알려진 전술이다. 고전학자들은 여우를 농작물 보호를 위한 제의와 연관 맺어왔는데, 특별히 오비디우스(Ovid, 기원전 43-기원후 17)가 말한 케리알리아(Cerialia) 축제86를 들고 있는데, 이 축제는 전차경주와 함께 로마에서 실시되던 것이었다. 여우들이 그 꼬리에 횃불을 매단 채 경기장 안에 풀어놓는다. 그런 다음에 오비디우스는 친구로부터 들었던 한 일화를 말해주는데, 그것은 제의의 본래적인 의미와 그 어떠한 명백한 관련성도 보여주지 않는다:


소년이 여러 농장의 닭들을 해친 암여우를 잡았다. 사로잡은 짐승을 짚과 건초로 싸매어가지고, 거기에 불을 붙였는데, 여우가 자신을 불태워버리려는 손에서부터 도망쳐 나왔다. 여우가 도망가는 중에, 밭을 뒤 덮었던 농작물에 불이 옮겨 붙었고, 바람이 불어 활활 타오르는 화염으로 만들었다.


   오비디우스가 기록했을 시기의 로마에서는 여우 경주의 의미가 잊혀진 것 같다. 이는, 그것과 연결된 신화가 잊혀진 이후에도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던, 제의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비소바(Wissowa)는 케리알리아 동안 이뤄지는 여우 경주가 너무나 뜨거운 태양을 상징하고 있다고 믿었는데, 즉 삼복더위 기간 곡식의 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뵈머(Bömer)는 오비디우스가 케리알리아를 다른 축제, 즉 로비갈리아(Robigalia)87와 혼동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상당히 중요한 정보들을 제공해주고 있다:


4월이 끝나기까지 여섯 날이 남아있을 때, 봄이 한창일 때, 당신은 아다마스(Athamas)의 딸인 헬레(Helle)에게서 양을 찾고 있지만 헛된 일이군요; 내리는 비가 당신에게 징조가 될 것인데, 개자리가 떠오를 것입니다. 그 날에, 나는 노멘툼(Nomentum)에서 로마로 돌아오는 중에, 흰 옷을 입은 무리들이 길 중앙에서 막아섰습니다. 사제(flamen)가 고대의 곰팡이(Mildew, Robigo) 숲으로 가던 중에, 개와 양의 내장을 불에 던져 버렸다. 나는 곧장 그에게로 가서 그 제의를 알려달라고 했다. 그대 사제여! 오 퀴리누스(Quirinus, 전쟁의 신)여! 당신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 더러운 곰팡이, 작은 곡식의 싹은 남겨놓고, 지표면에 작고 부드러운 떨림이 있게 하자. 오! 곡식으로 하늘의 자비로운 별들로 돌봄을 받게 하고, 그것들이 낫으로 벗겨질 때까지 자라게 하자. 그 어떠한 연약한 힘도 그대는 쓰면 안 됩니다: 당신이 당신의 것이라고 표시한 곡물 때문에, 슬픈 농사꾼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포기해버립니다. 바람도 안 되고, 소나기도 안 되고, 반짝 추위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그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곡식들을 해칠 것이며, 태양이 젖은 줄기를 따뜻하게 할 때 해를 끼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무시무시한 여신이, 분노를 터뜨릴 시간입니다. 오 남겨두세요, 내가 간구합니다. 수확물에서 당신의 더러운 손을 치우세요! 경작지에는 해를 가하지 말아주세요; 당신이 해할 힘이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미약한 곡식을 쥐어짜지 마세요, 대신 단단한 철을 붙잡으세요. 파괴자에게 미리 손을 써주세요. 당신은 칼과 치명적인 무기를 갉아 못쓰게 하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더 이상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세상은 평화롭습니다. 이제 시골의 도구와 갈퀴, 그리고 곡갱이와 굽은 보습칼이 반짝 빛나게 만듭시다; 반대로 무기는 녹이 슬게 하고, 누군가가 칼집에서 칼을 빼어낼 때, 그로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서 마치 막대기를 만지는 기분을 가지도록 합시다. 그러나 당신은 곡식을 모독해서는 안 됩니다. 더 나아가 농사꾼이 당신이 사라지는 것을 이유로 당신에게 맹세한 것을 값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그의 오른손에 약간 보풀이 일어난 냅킨을 들고서, 그는 한 컵 포도주와 한 개의 향통을 들고 있었다. 향과 포도주, 그리고 양의 창자, 그리고 더러운 개의 내장을, 그는 길바닥에 놓아버렸고 - 우리는 그가 하는 일을 보았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는 나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위에서 말한) 이례적인 산 제물이 이러한 제의들에 왜 필요한지를 물었습니다.’ 정말로 나는 그렇게 물었습니다. ‘그 이유를 들어보시오.’ 사제가 말했습니다. ‘(저돌적인 개[Icarian dog]라고 불렸던) 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별자리가 떠오르게 되자, 지구는 바싹 말라 붙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곡식은 곧 곪게 되어버렸지요. 이 개는 하늘의 개를 대신해서 제단위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 개를 죽이는 유일한 이유는 단지 이름이 같기 때문이지요.’


   오비디우스는 질병의 여신 로비고(Robigo)를 위해 바쳐진 희생제사에 대해서 말하는데, 이는 봄철의 온난 다습한 환경에서 발생하는 병균으로부터 농작물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희생 제물이 된 개와 숫양 모두는, 그 의식이 별 자리와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개는 시리우스(천랑성, the Dog Star)로 해질녘의 양자리와 매우 근접할 즈음에 떠오른다. 그러므로 로비갈리아(4월 25일)를 위해 희생된 암컷은 본래 4월 말과 6월 중순 사이에 지켜졌던 아우구리움 카나리움(Augurium canarium)이라는 이동축제와 연관된 것일 수 있다. 이 축제기간동안, 황갈색의 암컷이 삼복더위의 어려운 시기로부터 수확물을 보존하기 위한 목적으로 희생되었다. 아우구리움 카나리움은 희생제물의 이름을 땄는데, 그것이 가장 큰 개자리인 시리우스와 연관된 것은 나중에 발전된 것일 뿐이다. 오비디우스의 혼동은 개를 희생제물로 바치는 것이 농작물을 보호하는 제의기간 동안에 영향을 받았다고 볼 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로비갈리아와 아우구리움 카나리움을 동일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데, 그 이유는 두 개의 잔치가 서로 다른 곡물의 성장 단계와 연관되어있기 때문이며, 또한 로마에서는 여우가 희생제물로 바쳐진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식들은 카르타고에서나 잘 어울리며, 카르타고 사람과의 연관성은 로마 제국에서부터 영향을 받았거나 혹은 페니키아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고, 더 나아가 기원전 6세기 팔레스타인까지도 갈 수 있다. 그러므로 페니키아와 직접적인 연결이 있었다고 설명할 방도는 없다. 로마 경기장에서나 풀어놓았던 여우와 삼손의 여우 사이의 연결은, 아무래도, 성립되기 어려운 것 같다. 이 둘의 사례가 공통점으로 보여주는 것은 단지 여우 꼬리에 단단히 묶여있는 횃불일 뿐이다. 더 나아가, 오비디우스는 사사기 15장을 이해하는데 더 이상 도움이 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기록했을 시기에, 제의의 기원에 대한 의미는 잊혀진지 오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레반트 지역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동양과 관련해서 두 개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이슬람교이전 아랍인들과 관계되는 것으로, 이들은 가뭄에 대처하기 위한 제의를 실시했었다. 세란투스(Saelanthus)와 아셀에피아스(aselepias) 가지를 모아 소의 꼬리에 묶은 다음에 낭떠러지로 밀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의는 사사기 15장 5절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질문은 곡식 보호 제의가 잘 알려졌던 메소포타미아로 돌아가야만 할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의 토지 예방 제의: (기원전 8세기의) 수메르 농사시(詩)를 보면, 농부가 곡물이 성장하는 각 단계마다 알맞은 제의를 바쳐야한다고 간청하고 있다. 이들 제의 중 몇몇은 알려졌고, 사사기 15장 4-5절을 읽어낼 수 있는 그럴듯한 정황을 제공해줄 수 있을 정도이다. 어떤 제의 목록에서는 유충이 곡식을 멸절시키지 못하도록 주문 방법을 언급하기도 한다. 다른 본문들은 제물 목록을 기록하면서 농경지의 사면이 보호받기를 기대하고 있다. 앗수르바니팔 도서관에서 나온 어떤 명판에는 귀뚜라미를 쫓아낼 수 있는 방법들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그 제의는 밭의 일부를 태워야만 했다. 다른 신들 가운데, 닌누르타(Ninurta), 즉 엔릴의 농부가 그 본문에서 불려지는데, 이 닌누르타는 삼손의 원형으로 다시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닌킬림(Ninkilim)이, 즉 신성시되는 몽구스의 종류로, 주요한 역할을 맡고, ‘닌킬림의 개들’이라고 일반적으로 칭하는 것에 대한 응답으로써 일연의 역병들을 퇴치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로 명백하게 나타난다. 여기에서 ‘닌킬림의 개들’이란 다시 말해서, 애벌레, 귀뚜라미 그리고 다양한 설치동물들이다.

   그러므로, 메소포타미아에서 들판을 태우는 것을 포함하는 제의가 그 들판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토지의 일부 혹은 근방에서 실시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역병은 개들로 불렸다. 이러한 증거에서 볼 때, 삼손이 여우의 도움으로 밭에 불을 놓은 것이 이러한 만연된 제의에 대한 힌트로서 이해되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생기게 된다. 연관성이 있다면 그것은 명백하게 풍자가 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분노한 단 자손(삼손)이 제의의 논리에 역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병(개들)을 막기 위해서 곡식의 상징적인 부분을 태우는 것을 대신해서, 삼손은 여우(개들)를 사용해서 블레셋 사람들의 곡식 전부를 파괴해버렸기 때문이다.


여우들: 만약 삼손이 블레셋 사람의 수확물을 파괴한 것과 마지막으로 블레셋의 곡물신인 다곤(Dagon, 삿 16장)을 도말한 일이 분명하게 연관되어 있다면, 삼손이 여우를 사용한 일에 대한 만족할 만한 설명은 아직 나온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그러므로 여우가 고대 근동에서 어떻게 여겨져 왔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여전히 있어 보인다.

   마갈릿(Margalith)는 삼손 이야기가 여우를 사용한 것이, 단지 회색 여우(Canis aureus)만을 알고 있는 셈어권에서 ‘횃불-꼬리’ 여우를 칭하는 일반적인 그리스 단어 ‘람퓨리스’(λáμπουρις)를 설명하기 위한 어원론적인 차원에서 의도된 것이라고 제안한다. (다시 말해서) 삼손 이야기는 그리스에서는 잘 알려져 있는 빨간 여우라는 말을 단지 회색 여우에 익숙해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이러한 이상한 명칭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뼈에 대한 연구 결과, 레반트 지역에서는 구석기 시대 이래로 빨간 여우(Vulpes vulpes)가 존재했음을 밝혀내고 있다. 그러므로 자연주의적인 설명은 내버려두고 다시 신화론으로 돌아가는 게 더 안전한 것 같다.

   여우는 멸망의 전조로도 여겨져 왔었다. 한 때, 여우가 아시리아 수도에 들어가서, 우물 안으로 떨어진 일이 있었는데, 즉각적으로 서신을 통해 왕에게까지 알려야 할 정도로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 수메르 본문에서, 여우는 밤에 잠든 도시에서 남몰래 꼬리를 땅에 질질 끌며 돌아다니는 악마와 비교되기도 한다. 신들의 특징 목록에서 여우는 독특하게 불린다.

   여우는 그 본연의 속이는 기질에서도 유명한데, 중세의 여우 이야기(Roman de Renart)는 수메르의 여우 이야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는 신-아시리아 명판을 통해서 잘 입증된 문학작품이다. 비록 산산 조각나있기는 하지만, 그 이야기의 대체적인 개요는 분명하다. 심각한 가뭄동안에, 엔릴은 세상의 일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는데, 거기에서 한 개가 가축을 죽이는 늑대와 여우를 고소한다. 그러자 여우는 모든 비난을 늑대에게 덤터기씌우면서 자신이 죄 없다고 한다. 불이 여러 번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신화적인 창작물임을 암시하는 대목으로 지금은 소실되어버렸다. 횃불은 이야기 말미에서야 나온다:


반대편 B열 7 줄 [...] 제발 열어주시오! 8 [...] 내가 횃불과 물주전자를 성전 안에 가져오겠소. 9 [...] 그것을 당신에게서 치워 없애게 해주시오, 10 [그리고 내는] 나의 주이신 엔릴에게 나의 전 가족[과 함께] 제사드릴 것이오. 11 [...] 여우는 엔릴에게 간구했다.


여기에서 나오는 횃불(gizillû)은 언제나 제사에서 사용된 것으로 정결예식 상황에서 쓰인다. 여우는 엔릴에게 희생제사를 드리겠다고 약속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개의 자만에 대해서 늑대의 어리석음을 이용해서 가까스로 대결하고 있는데, 결과적으로는 최고 심판자의 호의를 얻어내고 있다. 이것은 여우 이야기가 신랄한 사회 풍자문학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경우에, 개가 간섭할 것으로 보이는 여우의 선택이라는 것이 이야기의 얄궂은 방향으로 전환되는 신호였던 것이다.

   신화적인 소재에서 등장하는 여우는 바벨론의 풍요제의에서 횃불과 연결해서 나오는데, 이 제의는 아시리아에서부터 번성되었던 것이다. 명판이 깨어져버려서 확실하게 읽어낼 순 없지만, 여우는 알려지지 않은 신화의 단편에서 막 휘둘러진 횃불의 상징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누스쿠(Nusku)가 벨(Bêl) 앞에서 밝은 횃불을 들어 올렸을 [때에], 울부짖으며 나타난 여우는 네르갈(Nergal)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볼 때, 삼손의 여우와 횃불 이야기와 가장 근접한 메소포타미아의 이야기이다. 여우는 분명하게 누스쿠와 연관되어 있으니, 누스쿠는 엔릴의 아들이자 시종으로, 빛과 불에 연결되어 있다. 누스쿠는 미지의 악령과 사악한 마법을 물리치는 수르푸(Šurpu)와 마크루(Maqlû) 제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제사장은 수르푸 제의에서 깃질루(Gizzilu)를 밝히고, 환자들에게 비취면서 ‘나는 횃불을 들고 있으니, 악에서 벗어나라’라고 읊조린다. 축귀를 위해 환자는 갈대 다발을 가지고 누스쿠를 불러야만 한다. 그는 하나를 꺾고, 자신의 옷에서 취한 한 조각과 함께 묶어서 누스쿠 횃불로 태워버린다. 누스쿠는 신-아시리아 시대 동안 하란에서 성행했고, 신의 아들이 되기까지 한다. 앗수르바니팔은 누스쿠를 심판자 샤마쉬의 동반자이자, 참된 정의의 집행자로 부르기도 한다. 우가릿에서, 샤파쉬(Shapash) 자신은 일종의 선각자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숨겨진 것을 밝히 드러내야만 하는 정의의 신을 위한 명백한 별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누스쿠의 횃불은 삼손이 복수를 달성한 것과 매우 잘 들어맞는다. 마크루 제의에서, 누스쿠는 ‘적들을 태워 소멸하는 누스쿠’로 불리운다.

   혹자는 벧엘과 같은 주변 지역의 학자들이 수메르-바벨론의 광대한 저작물을 읽어볼 수나 있으며, 또한 그것을 자신들의 목적에 맞도록 사용할 수나 있었는지에 의문을 던질 것이다. 그러나 이 문학은 기원전 7세기에 일반적으로 신-아시리아 왕들이 인용했을 정도로 충분히 잘 알려졌다. 아시리아 문학의 최고봉인, (기원전 691년, 엘람-바벨론 거대 연합군과의) 할룰레(Halule) 전투의 업적 기록문에서 산헤립은 여우 이야기와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를 몇 번이고 인용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은 이미 사르곤의 연대기에도 나타나있기 때문에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산헤립의 경우는 좀 더 흥미로운 면이 있는데, 왜냐하면 아마도 유다에서는 보다 더 잘 알려졌을 법하기 때문이다. 여우 이야기와 에누마 엘리쉬가 대중에게 알려져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왕궁의 선전물로써 그것을 사용했다는 것은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는 말이 된다. 모든 유다의 농부들이 쐐기문자를 읽었다고 단언할 필요는 없지만, 공직자들은 메소포타미아 문화와 글들에 정통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이는 먼저 후기 청동기 시절부터 그들의 전임자들이 그러했던 것과 같은 이유이다. 성서 자체가 이러한 지식에 대해 풍부한 증거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삼손 이야기 내에서 이러한 신화적인 소재들이 재사용되고 있으며, 이는 절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횃불을 여우의 꼬리로 묶어버리는 것은, 그러므로, 조약한 전술 이상의 것일 수 있다. 이러한 사건은 곡식 보호 제의와 연관되며, 신적 여우와 횃불을 포함하는 신화적인 소재들과도 연관이 있다. 입다의 딸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시도해보았던 유사한 방식으로 비신화화 작업을 적용시켜본다면, 곡식을 보호할 목적으로 실행되었던 의식은 사실 수확물과 과수원을 완전히 파괴해버리는 것으로 일종의 모방범죄일 뿐이며, 작은 샤마쉬에게 복수한 셈이다.

   만약 삼손 이야기가 바벨론 시기에 벧엘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여우 사건은 팔레스타인에서 아시리아 신화를 없애버리려는 문학적인 시도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실제로, 아시리아 종교 대부분의 자료는 바벨론에서부터 나온 것이며, 바벨론의 속주들이 메소포타미아를, 즉 주로 바벨론 신화를 대항할 정도로 무모하지는 않았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그러나 고고학에 의하면 바벨론은 블레셋, 예루살렘 그리고 아마 갈릴리를 파괴한 이후 팔레스타인 남부 지역을 버려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벧엘과 미스바가 그들이 아시리아의 행정기관 아래에 있었을 때보다 더 자유롭게 그들의 명목상의 종주권을 비판할 수 있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고 하겠다. 구원자 책을 가지고서, 벧엘은 아시리아 제국 프로그램을 선전해왔었다. 갑작스러운 아시리아의 멸망으로 벧엘에는 일종의 지적 부작용이 생겨났다. 충성스럽게 섬겨왔던 행정기관은 사라져버렸으니, 그런 것(멸망)을 내놓았던 황홀한 문화를 가지고 과연 무엇을 더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버려진 자신들의 산에서, 벧엘은 자신들이 메소포타미아의 문화에 세뇌되었음을 깨달았으니, 그들은 천년이나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래된 수메르의 경이적인 작품에 중독되었으며, 점성학과 수학, 마술과 약학 그리고 점술에 이르기까지 (그런 것들을 극복하기보다는) 모든 과학적 전문 기술에도 심취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벧엘은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라며 다짐했고, 해독작업에 착수했다. (결국) 블레셋의 수확물, 그리고 심지어 헛간과 감람나무까지(5절), 전부를 불태워버렸던 삼손의 이야기는 팔레스타인에서 이루어놓았던 아시리아의 업적들에 대한 느부갓네살의 말살정책을 묘사하는 상황인 셈이다. 그런 목적을 위해 여우와 횃불을 사용하는 것은 군사적 원정에 종교적인 의미까지 부가할 수 있었는데, 이는 혐오스러운 아시리아 통치의 모든 자취들을 청결케 하는 일종의 제의라고 말하는 것이다. 한 때 친-아시리아 사상의 종교적 중심지였던 벧엘은, 이제 바벨론 지배의 열정적인 선동자로서 자신을 보여주기 위해서 다시 작업할 필요가 생겼다.

   삼손이 저지른 방화의 결과를 다루고 있는 계속된 일들을 볼 때, 삼손의 파괴적인 여우는 아마도 굴라(Gula)를 생각나게 하는데, 굴라란 치료의 여신이다. 굴라는 항상 자신의 개를 옆에 둔 상태로 인장에 나오며, 기원전 7세기에 와서 그녀는 닌누르타의 배우자로 아시리아에서 매우 유명한 존재이기도 했다. 여우 사건의 결과로 자기 민족의 손에 삼손의 아내가 산채로 불태워졌다는 것을 고려해볼 때(다음 단락에서 볼 것이다), 블레셋에 불을 놓기 위해 (굴라의 개를 상징하는) 여우를 사용했다는 것은 충격적인 풍자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아시리아 사람들은 닌누르타의 배우자(굴라)를 치료의 여신으로 숭배했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번 사건은 다양한 신화적 소재들을 끌어 모아서 새롭게 작성한 것처럼 보이는데, 그러한 소재들은 기록할 당시엔 충분히 이해되어지지는 못했던 것 같다: 치료의 여신, 굴라의 개를 대신한 여우, 그리고 정결을 위한 횃불. 이러한 미드라쉬적인 작업은 느부갓네살이 팔레스타인을 파괴했던 원정을 묘사하고 있다.


사사기 15장 6-8절: 이에는 이

블레셋 사람들은 사사기 15장 3절에서 언급된 메소포타미아 법률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들은 자기 아내를 친구에게 줬다는 이유로 삼손이 곡식을 태웠다는 것을 듣자마자 삼손의 아내와 장인어른을 불사렀다(6절). 그들은 삼손의 분노가 정당하다는 것을 숙지하고 있었는데, 이는 삼손 자신이 3절에서 외쳤던 바와 같았다. 그러나 삼손은 자신의 아내를 불태운 일을 새로운 차원의 복수를 정당화하는데 이용한다: םכב יתימקנ־םא יכ תאוכ ןושׂעת־םא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원수를 갚고야 말리라’(7절). 다음으로 그는 복수를 위한 마지막 행동을 보여준 다음에, 그들도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며 그래야 자신의 분노를 멈출 수 있을 것(לדחא רחאו)이라고 선포한다(7절). 삼손은 엄청난 펀치를 날리고 에담 바위에 지쳐 쓰러진다(8절).


사사기 15장 9-17절: 삼손이 낫을 발명하다.

삼손에게는 더 이상 싸울 이유가 없었지만, 계속되는 복수는 다른 이들을 끌어들이게 되어서 멈출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한 가족의 극적사건은 이제 국제문제가 되었으니, 삼손이 유대 지역에 몸을 숨겼기 때문이다. 에담 바위는 베들레헴과 드고아(아인 아탄[‘Ain ‘Aṭān]) 사이에 있거나 혹은 예루살렘 남서쪽의 아라크 이스마인(‘Araq Ismā’īn)에 있다. 아마도 두 번째 장소가 맞는 것 같은데, 이야기의 지리적인 틀에 들어맞기 때문이다. 와디 이스마인(Wādī Ismā’īn)은 수 킬로미터 길이의 와디로 벧세메스에서 4 킬로미터 상류인 소렉(Soreq) 강과 만난다. 에스다올은 와디 이스마인과 와디 엘-기랍(el-ğirab) 사이의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다. 레히(Lehi, 4절)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는 ‘턱뼈(יהל)’와 아카드어 리투/레툼(lītu/lētum) 즉 ‘턱뼈’ 혹은 ‘지형적 끝자리인 경계’라는 말 사이의 언어유희로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볼 때, יחל의 발음은 관사를 보여줌과 동시에 레히가 고유 명사가 아니라 일반적인 칭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블레셋 사람들은 유대 국경에 배치되었고(שׁטנ의 니팔형), 특별한 성읍을 상대로 하지는 않았다(삼하 5:17,22을 보라). 블레셋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유다가 삼손을 넘겨주기 전까지 협상은 계속되었다. 삼천 명의 유다 사람들이 에담 바위에서 삼손을 붙잡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블레셋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그(=삼손)가 모두를 위험에 직면하게 했다고 비난했다: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םיתשׁלפ ונב םילשׁמ־יכ תעדי אלה (11절). 김지찬은 동사 עדי의 독특한 사용법을 언급하고 있는데, 단지 여기에서만 문제가 되고 또한 부정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내포된 의미를 둔 수사적인 질문이라는 것이다: ‘너는 모두가 아는 것처럼, 블레셋이 우리를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질문은 또한 청중을 향한 편집자의 솜씨였을 수도 있다: 실로 우리는 여전히 외국의 주권 아래에 있지 않은가? 정말로, 기원전 586년 이래, 유다 왕국에 남겨진 것이라고는(즉 베냐민 지역) 더 이상 블레셋 저지대에 대한 추종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느부갓네살은 그곳을 아무도 살 수 없는 땅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삼손은 흔쾌히 새 밧줄 둘에 묶였고,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겨졌다. 다음에 그는 한 번 더 야웨의 영에 얻어맞았는데(חלצ, 삿 14:6을 보라; 개정: 갑자기 임하다), 이로서 밧줄은 불에 타버린 것처럼 녹아져 내려버렸다(14절). 삼손은 나귀의 새 턱뼈를 취해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쓰러뜨린다. 다음으로 삼손은 턱뼈의 노래를 부른다:


םיתרמח רומח רומחה יחלב

나귀 턱 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שׁיא ףלא יתיכה רומחה יחלב

나귀 턱 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


첫 번째 부분은 ‘당나귀’ 혹은 ‘더미’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일종의 추수의 노래를 연상하게 하는데, 보통 낫을 만들 때 부르는 것처럼, 여전히 철기 1시기에도 통용하는 바, 턱 뼈의 이빨 부분은 날카로운 칼에 잘 어울린다. 어떤 종류의 턱 뼈라도 문제없다: 당나귀가 여기에서 선택된 것은 ‘더미’와(합 3:15), 그리고 곡식의 중량 단위인 ‘호멜(רמח)’과 동음이의어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 부분은 같은 턱 뼈를 말하지만 그 두 번째 사용에서는 무기로 변한다. 게세(Gese)는 당나귀의 턱 뼈와 삼상 17:6에서 골리앗의 손에 든 만곡도(彎曲刀, ןודיכ, 개정: ‘놋 단창’) 사이에 유사한 모양을 그의 글 말미에서 지적하고 있다. 한편, 이 만곡도는 청동기 시대에는 무기로, 철기 시대에는 왕권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었다. 만곡도는 인장에서 닌누르타를 상징하고 있는데, 특별히 그것은 전사의 팔꿈치에 걸려있다.

   이 단락에서, 일종의 원시 단명화(proto-ephemerism?)가 작동한다. 낫과 만곡도 모두를 발견해낸 사람은 다름 아닌, ‘기껏해야’ 이스라엘의 영웅인, 삼손인 것이다. 그는 닌누르타의 무기(만곡도)를 사용해서 피투성이의 수확을 했으니, 비록 신화에서는 낫이 크로노스(Kronos)가 발명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말이다. 마치 필로의 페니키아 역사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괭이는 기원전 이 천년 전경에 엔릴에 의해서, 쟁기는 다곤에 의해서 발명되었다고 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것들은 민간전승으로 격하되었고, 본래의 종교적인 경향의 상당 부분은 소실되어 버렸다.


사사기 15장 18-20절: 구원자를 위한 죽음의 소리

목말라 죽을 것 같자, 삼손은 야웨께 간청한다. 이에 야웨는 바위를 갈라서 물이 나오게 만들고 그의 종을 소생시킨다. 청원의 말은 어떤 일을 예고하고 있다:


תאוה הלדגה העושׁתה־תא ךדבע־דיב תתנ התא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나이다.

םילרעה דיב יתלפנו אמצב תומא התעו

그러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이 구절은 일반적으로 수사적인 질문으로 번역되었다: ‘주께서 당신의 종의 손에 이 위대한 구원을 주셨건만, 이제는 나로 목말라 죽어 무할례자들의 손에 떨어지게 하시겠나이까?’ 내포된 대답은 ‘물론 나는 너로 죽어 블레셋 사람의 손에 떨어지지 않게 하겠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오역은 그 구절의 요점을 놓치고 있다. 의문 불변화사가 없기 때문에 의문 문장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의문 불변화사는 히브리어에서 의문문을 위해서는 매우 다방면에서 사용하고 있다. 심지어 문장에 질문을 시사하고 있지 않더라도 말이다. 이러한 긍정문을 수사적 의문문으로 바꿔버리는 것은, 그러므로, 그럴듯하지 못하다. 본문은 매우 기술적으로 삼손의 입에다가 자기 자신의 죽음 예고를 놓아버렸는데, 이는 다음 장의 중요 주제를 소개하는 대목이다. 그러므로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은 불길한 기운이 덮고 있으며, 청자는 이것이 영웅의 마지막 위업임을 자각하고 있어야만 한다. 즉, 영웅의 능력은 피할 수 없는 자신의 운명에 의해 높여진 셈이다. 그러나 편집자에 의하면, 삼손 역시 이스라엘의 영웅 선집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으며, 그는 이스라엘의 마지막이자 미약한 구원자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삿 13:5). ‘이 큰 구원’에도 불구하고(18절), 삼손은 반드시 죽을 것이며, 그의 죽음과 동시에 구원자와 사사의 시대는 종언을 고할 것이다. 아시리아 제국과의 통합으로 부풀어진 소망(구원자 책)뿐만 아니라, 요시야 아래에서 이스라엘의 자유와 이스라엘 왕국의 회복을 꿈꾸었던 것(사사기서)도 결국 헛된 것으로 드러나고 말았다. 바벨론의 침략에 정신을 차린 벧엘은, 남은 생존자들이 죽은 자들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수 없음을 알게 되면서 생긴, 그들의 냉소적인 견해를 받아들이게 된다.

   마지막 장면의 막을 열기 전에, 사사들에서나 볼 수 있었던 첫 번째 결론으로 이야기의 중심 부분은 이제 막을 닫는다: ‘블레셋 사람의 때에 그는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다’. 혹자는 옛 벧엘의 제사장의 소리를 들을 수도 있겠다. 즉 앗수르바니팔의 축복을 받던 시기 동안 교육을 받는 특권을 가졌던 자들 말이다: ‘그렇다. 블레셋 땅에 아직도 싸워야 할 블레셋 사람들이 있었던 그런 날이 있었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국면과 삼손 이야기에서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은, 그 성격에 있어 이전과 매우 다르다. 더 이상 이스라엘의 영웅을 옹호하지 않는다.



사사기 16장 1-3절: 태양의 문을 통과하는 삼손

가자(Gaza)의 무희(舞姬)는 한 밤 중에 자신을 찾아오는 손님을 보고 있다. 그 남자는 마을 성문을 헤브론으로 옮기고 있는데, 지척의 거리에서 수비대는 그를 기다리며 숨어 있었다. 그들은 그가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 갈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제 작은 태양(Little Sun)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정확히 한 밤중에 일격을 가하더니, 수비대가 지키고 있음에도 성문을 통과해서 자기 갈 길을 가는 것이다. 완전히 과장된 이야기는 (몇 톤이나 되는 것을 수십 킬로미터나 떨어진 산꼭대기로 운반하고 있다2!) 급격한 반전을 보여주는데, 바로 삼손은 매일 아침 샤마쉬가 통과하는 신화적인 관문을 통해서 우주적 실체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태양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궤적을 따라 움직이다가 밤이 되면 신비롭게 지하세계로 들어간다. 그런 다음 어떤 배가 밤중에 그를 옮겨서 반대 방향에서 다시 나타나게 해준다.

   삼손에게는 그러한 장치(배-역주)가 필요치 않다. 그 자신이 밤의 문을 가자(서쪽)에서부터 헤브론(동쪽)까지 거꾸로 옮기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가자에서 일출을 관망하게 된다면, 헤브론이 바로 태양이 떠오르는 곳이 된다. 여기에서 비신화화를 말하는 것은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님을 의미하기 위함이다. 삼손은 문자 그대로 우주적 질서를 전복시키고 있다. 그러나 태양이 느부갓네살이 있기 전이나 후나 계속해서 같은 장소와 같은 시간에 뜨고 지고하기 때문에, 삼손이 태양의 문을 옮겨놓은 것은 정치적인 의미로 보아야 한다. 블레셋 왕국이 황폐화된 이래로, 가자는 이집트의 관문으로서 그 위치를 상실하고 말았다. 가자는 에살핫돈이 성공적으로 이집트를 정복할 때까지 이집트의 전진기지였었다. 아시리아가 이집트를 정복한 이후, 가자는 같은 역할을 성공적으로 지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 차례 바벨론이 이집트 정복에 실패하게 되자, 블레셋과 예루살렘 그리고 유다 남부를 파괴함으로써 이집트와의 모든 관계를 끊어버리고 만다. 가자는 더 이상 태양신 레(Re) 왕국의 통로가 되지 못한 것이다(26왕조의 모든 바로들은 ‘레’가 포함된 이름을 부여받는다. 예를 들면, 네페리브레[Neferibrê] 즉 ‘아름다움은 레의 마음이다’라는 이름은 프삼메티쿠스 2세의 이집트식 표현이다). 중심지는 다시 산으로 후퇴에서 자리를 잡게 되었는데, 이는 국가나 제국의 세력이 쇠약해지면 당연히 옛 부족적 과두정치로 회귀하는 것을 보여주는 식이다. 그러므로 헤브론을 언급한 것은 아마도 바벨론의 공식 수도인 미스바의 영광을 이제 유다의 오랜 중심지로 돌리려는 것일 수 있다. 비록 자료가 부족해서 정치적인 상황을 재구성하는 것이 충분치는 않지만, 누구라도 헤브론과 유다 남부에 대한 미스바의 간섭이, 설령 존재했다 하더라도, 유명무실한 것이었다고 확언할 수 있을 것이다.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파괴했던 일련의 사건들 이후 남겨진 영역은 명백히 에돔인들이 지배했다. 미스바가 압살롬(반왕조운동-역주) 지지자들의 후손들과 연결을 시도하려고 했었을까(삼하 15:7-10)? 확실하지는 않지만, 유다가 경험했던 온갖 잊지 못할 사건들 이후, 유다를 재건할 방도를 찾기 위해서라도, 미스바는 가능한 모든 지지를 필요로 했을 것이다.


사사기 16장 4-23절: 태양을 묶다.

수비대가 실패한 곳에서 여인은 결국 성공하게 된다. (어근 ללד, ‘약하게 하다’에서 파생한?) 들릴라는 태양의 파괴적인 힘을 없앨 수 있는 방도를 찾았다. 분명하게, 그 어떠한 종류의 끈도(삿 15:13; 16:12에서는 밧줄, 삿 16:7에서는 활줄) 불(삼손-역주)을 묶을 순 없었다. 그러나 사랑의 끈은 예외였다(4절). 이야기는 13절에서 머리를 묶는 장면에 집중함으로써 기술적으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데, 결국 들릴라가 다시 속아 넘어갈 뿐이었다. 마지막에 와서야, 들릴라는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어버리고, 삼손은 눈이 빠져 못 보게 되며, 곡식을 태우는 대신에 감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되었다(21절).


들릴라, 배신자에서 여사제로: 성서 본문은 놀랍게도 들릴라와 관련해서는 중립적인 자세를 보여준다. 그녀는 그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녀가 블레셋 사람이라는 증거는 없고, 그녀는 단순히 와디 소렉(4절) 출신일 뿐이다. 비록 그녀가 블레셋 군주의 제안을 받아들였기는 했지만, 그녀는 절대 거짓말하지 않았을 뿐 더러 이중 플레이도 하지 않았다.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꾀어내라고(יתפ) 명령했음에도 불구하고(5절), 들릴라는 놀랍게도 솔직하게 접근한다. 그녀는 삼손에게 그를 묶을 수 있는 방법을 세 번씩이나 묻는데(6, 10, 13절), 심지어 처음 구절엔 ‘당신을 굴복하기 위해서(ךתונעל)’라고 할 정도였다. 16절은 딤나 사람(전처)이 했던 것보다(삿 14:17) 더한 방식으로 재촉하고 졸라대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네 번째 시도에서도 그녀는 정확히 똑같은 방식으로 시도했고, 삼손은 세 번째 이후에 나타난 결과를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었다. 마타 하리(Mata Hari, 1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무희이자 첩자)라 하더라도 그런 방법으로 성공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만약 여기에 거짓말쟁이가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삼손 자신일 것이다. 노골적으로 여색을 밝혀서 스스로 넘어갔던 사람이 바로 삼손 아니었던가? 그 이상의 고상한 것이 그들에게 있었던가? 들릴라는 당연히 여주인공이다. 그녀는 얼간이들의 마음에 불을 질러 놓는다. 이는 전체 이야기에서 등장했던 첫 여자, 즉 삼손 자신의 어머니와 유사하다. 이어지는 구절들은 그녀의 솜씨가 단지 침대위에서 남자를 홀리는 것 이상임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그녀는 신화적인 인물을 단지 한 남자로 만들어 버리는데, 다름 아닌 그를 희생제물로 만들기 위함이다.


비신화화하는 들릴라: 세 번이나 삼손은 들릴라에게 자신이 ‘(그) 아담과 같아질 것(םדאה דחאכ יתייהו)’이라고 말하는데(7, 11, 17절), 이것은 심지어 그녀가 그의 머리털을 밀어버리기 전에도 말했던 것이었다. 삼손이 그녀의 무릎위에서 잠들자마자, 그녀는 ‘’ 남자(שׁיא󰗚� ארקתו)을 불렀는데, 이 사람은 면도칼을 가져오려고 기다리던 시종이 아니라, 바로 자기 심중에 있는 바를 모두 털어놔버린 삼손 자신인 것이다(18절). 삼손의 머리에 마법적인 힘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힘은 야웨에게서 온 것으로, 야웨가 그를 떠나버리자마자 그는 보통 사람이 되고 말았다(20절). 길가메쉬 서사시에 나온 창녀와 같이, 들릴라는 삼손을 인간으로 만들었으니, 반신반인(半神半人)은 범인이 되었고, 결국 모든 사람의 종말인 죽음을 당하고 만다. 이것이 바로 내러티브가 목적하고 있는 바다. 바벨론이라는 정황아래, 벧엘과 미스바에 있던 유대 왕국 남은자의 지도자들은 메소포타미아 신화가 잘못되었음을 증명하려고 했는데, 즉 그것은 단지 인간의 창작물이고 그러므로 사라져버리게 되어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삼손의 머리는 다시 자라기 시작했으니(22절)...


사사기 16장 23-31절: 야웨의 승리

삼손은 다곤 신을 경축하는 잔치에서 블레셋 회중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 옥에서 끌려나왔다. 삼손은 두 개의 기둥을 끌어안았고, 집은 그와 난봉꾼들 위로 붕궤했다: 죽음으로써 그는 자신의 생애 동안 이룩했던 것보다 더 많이 적들을 죽일 수 있었다(30절).


다곤: 이 신은 마리와 다음으로 우가릿에서 잘 알려져 있다. 기원전 5세기 경, 에쉬무나사르(Eshmunasar) 비문에 의하면, 샤론 평야를 ‘다곤의 풍요로운 땅(‘rṣt dgn h’drt)’으로 부르고 있다. 비블로스의 필로는 페니키아 종교를 세밀하게 검토한 결과 다곤이 매우 중요한 신이었다고 말한다: 다곤(혹은 시톤[Siton])은 곡식을 만들고 쟁기를 개발한 신이다. 사무엘상 6장에서 보듯이, 두 마리의 어린 암소가 법궤를 끌고 돌아오는 모습은 아마도, 쟁기질과 추수를 축하하면서, 다곤을 기념하는 제의 의식을 흉내 내는 것일 수 있다. 금쥐는, 이는 확실히 곡식의 최대 적임에 분명한데, 다곤의 본래 모습을 대신하는 것이다! 삼손 이야기는 곡식의 대적들 중에서 또 다른 하나를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매우 뜨거운 태양으로, 이는 곡식이 완전히 자라기도 전에 이삭을 완전히 말려버린다.

   사무엘상의 법궤 이야기와 삼손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다곤은 블레셋에서보다 페니키아 지역에서 더 숭배되는 것 같은데, 벧-다곤이라는 지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블레셋에서는 다곤 숭배를 보여주는 그 어떠한 유물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성서 본문이 블레셋을 코드명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즉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의 신화 전체 영역을 통칭하는 그런 코드명인 것이다.


세메스(Shemesh): 비블로스의 필로는, 최초의 페니키아 정착민이었던 아에온(Aeon)과 프로토고노스(Protogonos)가 가뭄 동안 태양을 향해서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렸다고 보고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태양을 하늘의 주인으로 여겼고, 유일신으로 믿었으며, 그래서 그(태양)를 벨사멘(Beelsamen)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블로스에서 바알 샤밈(Shamim)과 세메스의 동일화 과정이 있었던 분명한 증거가 된다. 이러한 과정은 기원전 7세기부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엣살핫돈이 두로의 바알과 조약을 맺을 때 신들의 목록에서 제일 먼저 등장한 신이 바로 바알-샤멘(Shamem)이었다: 그러나 태양 숭배는 페니키아에서만 있던 것은 아니다. 예루살렘에서도 실시되었었다. 열왕기하 23장 11절과 에스겔 8장 16절은 야웨 제의가 기원전 7세기에 유행했던 태양신교의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삼손 이야기는 페니키아의 두 신이자, 또한 아마도 블레셋의 주요한 두 신인 다곤과 샤마쉬에 대한 맹공으로 보아야 한다. 삼손은 다곤 숭배자들과 함께 죽기 위해서 들릴라의 무릎위에 누운 남자가 된 것이다. 샤마쉬와 다곤과 관련된 다양한 신화들은 이제 민간전승으로 변해버렸고, 더 이상 회자되지 못했다. 삼손 이야기는 생생한 이야기 모음이 아니라 신화의 힘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된 민간전승이다. 세메스와 다곤은 둘 다 처음부터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었던 야웨에 의해 그 자리를 빼앗긴 셈이다(삿 13:25; 14:4, 19).

   첫 눈에, 이러한 신화의 해체작업은 요시야의 통치기간에 더 잘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최고의 창조신의 자리에 야웨를 끌어올리기 위한 목적으로 ‘다른’ 신들을 제거했던 일련의 과정 말이다. 그러나 이전에 이미 말했던 것처럼, 이것(열왕기의 이데올로기-역주)은 그 당시에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요시야 궁정이 만들어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유다는 바벨론화된 베냐민이 가졌던 때늦은 지혜조차도 가지지 못했으니, 요시야의 시대는 여전히 아시리아가 세계의 최고점에 있었고, 요시야는 기껏해야 아시리아를 흉내낼 뿐이었다. 그는 입다와 삼손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비통한 비신화화를 끌어들이기보다, 차라리 야웨에게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옷을 입히려고 했던 것 같다. 이들 두 명의 등장인물에게는 독자가 단순히 이들을 바보로만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비극적인 심연이 있다. 저자가 의도한 당황스러움은 그 내러티브를 통해서 드러난다.


삼손과 메소포타미아의 신화

삼손은 삼손 이야기의 연대로 헬라 시대를 선호하는 사람들의 선입견에 의해서 헤라클레스와 종종 비교된다. 그러나 그렇게 늦은 시대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삼손과 헤라클레스 모두 메소포타미아의 선조에 근간을 두고 있으니, 즉 엔릴의 농부인 닌누르타로, 그는 이미 기원전 18세기의 수메르 농경시(Sumerian Georgics)라는 글에서 조언자로 등장한다. 인장과 비문들도, 어떤 것들은 기원전 삼천년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는데, 후에 헤라클레스의 특징으로 여겨지는 몇몇 업적들을 묘사하고 있다. 비록 최근에 와서 헤라클레스의 위업에 대한 기원으로 닌누르타의 중요성이 연구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한 것이 삼손의 업적에 대해서만큼은 그렇지 못하다. 닌누르타가 그리스와 로마의 신만큼은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몇 장에 걸쳐 닌누르타를 설명해야만 할 것이다.


팔레스타인에서의 닌누르타: 닌누르타는 신화적인 악당을 물리치는 승리의 사냥꾼으로 알려졌고, 성서에서는 니므롯, 즉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으로 나오는데(창 10:8-12), 이것은 단명화(evhemerism?)와 유사한 민간전승화 과정 이후에 기록된 것이다. 닌누르타/니므롯의 업적은 팔레스타인에서 알려져있다: 기원전 8세기와 7세기경의 인장들에서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특별히 닌누르타는 사자를 상대로 싸우고 있다. 이러한 고대 수메르의 그림이 팔레스타인에 나타나기 위해서 신-아시리아 시대를 기다려야만 할 필요는 없다. 후기 청동기 시대에, 닌누르타는 우가릿에서, 엘-아마르라 서신에서, 그리고 므깃도에서 출토된 길가메쉬 단편에서 입증되었는데, 한결같이 그는 강제노역꾼의 우두머리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닌누르타는 심지어 청동기 시대 팔레스타인의 지명 철자법(URUBît-dNIN-URTA[EA 290.16])에서도 나오는데, 아마도 벳-호론(Beth-Horon) 성읍이거나 벧-아낫(Beth-Anat)일 것이다. 닌누르타는 후기 청동기 시대에 서부 유프라테스 지역에서는 유행했었는데, 그가 아낫과 함께 이집트 통치를 날려버리고 아무루(Amurru) 왕국을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닌누르타-아낫 커플 사이에서, 아낫은 ‘국가’ 독립을 위해서 폭력적인 수단을 옹호하고, 반면에 닌누르타는 토지와 경작에 필요한 안정성을 선호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상징한다.

   에말(Emar, 기원전 14세기 아스타타[Astata]의 수도)에서, 닌누르타는 다간의 아들로, 엔릴의 북쪽 상대자가 되었다. 연대기적으로 볼 때, 이러한 과정은 우리의 7세기 삼손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다간과 닌누르타와의 연결은, 사사기 16장에서 다간과 삼손간의 연결이 고대의 신화적인 방식에서 가져왔다고 볼 수 있게 한다. 기원전 14세기와 6세기 사이에, 닌누르타는 시리아-팔레스타인에서 잊혀진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기원전 755년 어간에 바르가야(Barga’yah)와 마티엘(Mati’el) 사이의 조약에 증인으로 참석한 신들 가운데 스피레(Sfire)에서 인용되고 있다. 유대의 학자들이 닌누르타 신화에 관해서 알고 있으며, 삼손이라는 인물을 창안해내기 위해서 그것을 사용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억지는 아닌 것 같다. 그러므로 닌누르타에 관한 메소포타미아의 저작물들 중 몇을 살펴볼 가치가 있다.


닌누르타와 돌들, 혹은 LUGAL-E: 이것은 가장 잘 알려진 작품 중에 하나로, 무려 200개도 넘는 증거본문이 기원전 이천년 초반부터 셀류시드(Seleucid) 기간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있었으며, 그것들 중 대부분은 물론 헤라클레스 이야기에 들어있었다. 자신의 대적을 물리친 후에, 닌누르타는 왕권과 도시, 관개와 경작 그리고 상업을 소개함으로써 문명을 세웠다: 그가 바로 닌.우르타(NIN.URTA), 즉 ‘경작지의 주인’이다. 이러한 숭고한 문명화 작업을 완수하기 전에, 닌누르타는 42 종류의 돌을 명명했는데, 각각에 기능과 원인론, 그리고 복과 저주를 부여했다. 이러한 긴 명세서와 함께(전체 730줄 가운데 1/3을 차지한다), 닌누르타는 닌.기르수(NIN.GIRSU)의 특색을 이어 받았는데, 이 닌.기르수는 메소포타미아 동부와 북서부의 전쟁신으로 이 지역은 산악지대의 사람들이 종종 평야를 위협했던 곳이었다. 아시리아에서, 닌누르타는 앗수르나시르팔 2세(기원전 883-859년) 통치 기간 중에 앗술(Ashur)과 동등한 자리에 오르기까지 했는데, 한편 앗수르나시르팔 2세는 그 수도를 앗술에서 칼후(Kalḫu)로 옮겼고, 닌누르타를 위한 성전과 지구라트를 세우기도 했다. 산헤립이 살해당한 성전이 아마도 이곳일 것이다(왕하 19:37).


안주(ANZU) 신화: dZU 신화는 아카드어로 짧은 판본(기원전 1600년, 한 개의 증거)과 이천년 후반기의 긴 판본(열개 남짓의 증거)들로 보급되어왔다. 이런 저작물은 닌누르타가 어떻게 안주(ANZU), 즉 메소포타미아 건너편의 산의 위협을 표출하는 기괴한 새인 ‘산지 사람’을 정복했는지 말한다. 닌누르타의 위대한 업적을 짧게 모아 놓은 다음, 닌누르타가 안주와 싸우는 주변상황을 보여준다: 안주, 즉 엔릴의 시종은, 운명의 서판을 훔치고 우주를 마비시킨다. 어느 누구도 안주를 맞닥뜨릴 수 없게 되자, 닌누르타의 어머니에게 접근해서 그녀의 아들이 안주와 맞붙도록 치켜세웠다. 영웅의 어머니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니, 삼손 이야기에서와 같았다.

   닌누르타가 활과 화살을 가지고 안주를 맞닥뜨릴 때, 안주는 자신을 보호하려고 주문을 왼다:


오! 나를 향해 날아오는 갈대-화살이여! 너의 숲으로 돌아갈 지어다! 활도 너의 숲으로! 가죽끈도 양의 궁둥이로 돌아가고, 깃털은 그 새에게로 돌아가라!

   결국엔, 에아(Ea)가 승리의 비결을 제안한다: 괴물은 강력한 바람을 맞으면 지치게 되므로, 땅에 내려와 쉬려하자마자 괴물의 날개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그 날개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상당히 안주를 불안하게 하는 것이어서, 그는 마법을 외는 것을 잊어버리게 될 것이고 화살은 과녁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삼손이 관용적 어구를 사용했던 것은 이와 같은 방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비록 삼손이 마법사용을 피하고 대신 수수께끼와 경구로 대체했기는 하더라도 말이다.


의기양양한 닌누르타의 유혹과 형벌: (기원전 이천년 경의) 우르에서 나온 짧은 본문은 안주를 물리친 닌누르타의 승리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 같은데, 그래서 의기양양한 닌누르타의 유혹과 형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가 승리한 이후 닌누르타가 위대한 왕들 사이에서 칭송을 받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닌누르타는 운명의 서판을 엔릴에게 건네주었던 일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다. 만약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모든 신들을 지배할 수 있었을 텐데 라고 말이다. 압수(Apsȗ)의 주인인 엔키(Enki)는 안주의 완벽한 상대자로 바다거북을 창조하는데, 이 안주는 닌누르타의 오만에 벌을 주려고 그를 구멍 안으로 억지로 끌어들었다. 비슷하게, 야웨는 삼손이 지나치게 자만하게 된 것 같으니, 그를 버리고 만다.


네르갈과 에레쉬키갈(Nergal and Ereshkigal): 네르갈과 에레쉬키갈에 대한 아카드 신화는 엘-아마르나에서 출토된 짧은(85줄) 판본과 (기원전 7세기의) 술탄테페(Sultantepe-하란 근처 위치), 그리고 (기원전 5세기의) 우르크(Uruk)에서 출토된 긴 판본을 통해서 알려졌다. 네르갈은 남타르(Namtar)에게 경의를 표하기를 거절했는데, 남타르는 지하세계의 악명 높은 여신인 에레쉬키갈의 대리인이었다. 네르갈은 자신의 머리를 밀어서 에레쉬키갈의 앙갚음을 위해 사방으로 돌아다니고 있는 남타르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했다. 언젠가는 계속해서 자라고 있는 자신의 머리카락 때문에 들통 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네르갈은 복수를 위해 14명의 귀신들과 함께 지하세계로 내려간다. 그가 다시 지상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받아들여서는 안 되었지만, 그는 에레쉬키갈의 마술에 넘어가서 그녀와 결혼할 것에 동의하고 만다. 그를 죽이기를(ana mȗti) 원했던 여자가, 이제는 그를 남편으로 맞이한 것이다(ana muti). 격정적인 여섯 날이 지난 후에 (일곱 번째 날은 숙명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네르갈은 에레쉬키갈의 품에서 벗어나서 생명의 영역인 고향으로 가까스로 돌아오게 된다. 결국, 네르갈은 다시 에레쉬키갈에게 돌아가서, 그녀와 함께 지하세계의 지배자가 된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유서 깊고 널리 퍼진 신화에서 삼손 이야기의 소재들을 발견한다. 물론 머리를 민다는 소재는 삼손과 네르갈에게 같은 기능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복병을 피하기 위해 한 밤 중에 일어났다는 점은 두 개의 이야기 모두에서 다소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신화적 잡동사니로서의 삼손: 그러므로 메포소타미아 신화와 삼손 이야기가 정확하게 병행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 같다. 비록 닌누르타가 삼손의 원형이고, 또 삼손 이야기 전체가 메소포타미아 문화와 상당히 유사하다는 점은 살펴볼 수 있었을지라도, 삼손의 제작자는 자신의 제작 동기를 상당히 많은 자료들에서부터 가지고 와서 삼손이라는 인물에 짜 맞추었다. 아시리아는 위대한 수메르-바벨론 신화 전승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기여했고, 자신들의 의도대로 그것을 마음껏 사용했다. 그러한 전통은 기원전 6세기경 팔레스타인에도 여전했다. 그러므로 사사기서에서 삼손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헤라클레스와 그 수집된 작품들을 기다려야할 필요는 없는 셈이다. 7세기에 이르면, 유다는 입다와 삼손과 같은 정교한 인물을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의 지식과 전문성을 보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앗술바니팔 사후, 20년이 지나자 아시리아 제국은 사라져버렸다. 세계의 주인이었던 아시리아가 이렇게 급격하게 종말을 고하고, 더군다나 자신들의 가장 뛰어난 왕의 통치가 끝나자마자 그렇게 된다는 것에 대해서, 모든 사람들은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했다. 하박국서는, 기원전 7세기의 안정과 번영을 누렸던 남부 팔레스타인의 경제 중심지가 모조리 파괴된 일로 인한 유다의 충격을 잘 보여준다. 전쟁의 충격은 즉각적인 재건의 노력으로도 상쇄되지 못했는데, 그것은 아시리아의 경우에서도 그러했다. 미스바와 베냐민은 바벨론화된 유다의 중심지가 되었지만, 장기적인 퇴보의 길을 걷게 된다. 비록 그곳이 바벨론의 싹쓸이 정책에서 훼손되지 않은 유다 왕국의 유일하게 남은 부분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벧엘에는 아시리아와의 통합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벧엘과 미스바는 여전히 바벨론에 충성했지만, 그들의 충성심에 대한 대가는 그들이 아시리아 아래에서 받았던 것과 비교해 볼 때, 상당히 만족스럽지 못했다. 결국 바벨론에 대한 환멸이 점점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시리아가 절대 끄떡도 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을 때 사라져버렸고, 갈데아인들은 실망스러운 존재였음이 입증되었다. 자연스러운 대응은, 새로운 현실을 마주하기 위해서, 기반이 되는 고대의 전통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메소포타미아의 모든 신화적인 언급들을 거짓된 것으로 여기는 것이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와 이스라엘의 구원자-패배자 모두는 거부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벧엘의 학자들은 아마도 너무 교육수준이 높아서 간단하게 열왕기서가 말하는 전형적인 반-바알 수사학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배적인 신화적 문화의 비축물에서부터 두 명의 애처로운 인물(입다/삼손)을 만들어내려고 모티브가 선택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들이,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세계에서, 가장 약한 자리에 있다고 하면서 자신의 청중들에게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길르앗 자손과 단 자손과 같은) 주변 인물들을 패배자로 만들어버리면서, 독자들과는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입다는 속아 넘어간 신실한 사람들의 황당함이 반영되어 있다. 구원 행위의 개시 그 이상을 해낼 수 없었던 삼손의 무능력은 요시야의 때 이른 죽음을 생각나게 한다. 그가 블레셋에서 광포했던 것은 느부갓네살의 원정에 의한 파괴를 반영할 뿐이다. 참으로, 야웨가 종국에 가서는 승리한다. 그러나 그 승리는 씁쓸할 뿐이다. 그의 백성은 예레미야 40-44장에서 밝혀진 대로, 어려운 상황에서 애를 쓰고 있는 중이다. 그달랴와 그의 후계자들은 맨 땅에서, 버려진 농장과 방랑하는 무리들에 대처해야만 했다. 그리고 오랜 경쟁자인 예루살렘에 관해서는 단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이제 예루살렘은 지도에서 지워져버렸다.






1. W. Richter, ‘Die Überlieferungen jm Jephtah, Ri 10, 17-12, 6,’ Biblica 47 (1966), pp. 485-556.


2. Noth, ÜS, pp. 48-49.


3. ‘패배자’라고 제안한 데니스 스테파누스(Denise Stephanus, Geneva, 1999)에게 감사한다.


4. 입다는 삿 15:43(유다에서)와 19:14(스불론)에서 지명으로 나온다. 사사기에서, 입다(어근 חתפ, ‘열다’)는 그의 입을 연 사람이다(삿 11:35, 36을 보라): B. Webb, The Book of Judges: An Integrated Reading (JSOTSup, 46; Sheffield: JSOT Press, 1987), p. 74. 한편, J. Classeens, ‘Notes on Characterisation in the Jephthan Narrative’, JNES 22 (1996), pp. 107-115 (111)는 입다의 연설에 사용된 360개의 단어에 비해서 그의 행동은 단지 129단어만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5. M. C. Astour, ‘Tamar the Hierodule: An Essay in the Method of Vestigal Motifs’, JBL 85 (1966), pp. 185-96 (187); 그리고 리핏-이쉬타르 법전(Lipit-Ishtar Code)에 대해서, M. T. Roth, Laws Collections from Mesopotamia and Asia Minor (Atlanta: Scholars Press, 1994), pp. 23-35를 보라.


6. ןיצק과 שׁאר 사이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H. N. Rösel, ‘Jephthah und das Problem der Richter’, Biblica 61 (1980), pp. 251-556을 보라.


7. 길르앗은 종종 얍복강 남쪽 지역을 지칭하기도 한다: B. MacDonald, ‘Ammonite Territory and Sites’, in B. MacDonald and R. W. Younker (eds.), Ancient Ammon (Studies in the History and Culture of the Ancient Near East, 17; Leiden: E. J. Brill, 1999), pp. 30-66 (35).


8. 사하브(Saḥāb)에 대해서 E. A. Knauf, ‘Abel Keramim’, ABD 1, p. 10-11을 보라. 다른 견해에 대해서는, MacDonald, ‘Ammonite Territory’, p. 34를 보라.


9. S. Mittmann, ‘Aroer, Minnith und Abel Keramim (Jdc 11, 33)’, ZDPV 85 (1969), pp. 63-75 (66); E. A. Knauf, ‘Aroer’, RGG, 1 (Tübingen: J. C. B. Mohr, 1998), p. 795.


10. 반대 의견으로는, M. Wüst, ‘Die Einschaltung in die Jiftachgeschichte’, Biblica 56 (1975), pp. 464-79.


11. 그리스의 테스모포리아(Thesmophoria) 축제의 첫 번째 날과 관련 맺는 것도 가능하겠다(ἄνοδος: N. M. P. Nilsson 과 M. H. Jameson, ‘Thesmophoria’, OCD, p. 1509).


12. ‘처녀성(virginity)’ 즉, (결혼 전 마지막 월경이라는 뜻으로) 임신을 할 수 없는 본래적인 의미에서부터 너무 떨어진 개념보다는 처녀막(intact hymen)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낫다: E. Cassin, ‘Virginiteé et stratégie 여 sexe’, in idem (ed.), Le semblable et le différent: symbolismes du pouvoir dans le Proche-Orient ancien (Paris, La découverte, 1987), pp. 338-57.


13. J. Bottéro and S.N. Kramer, Lorsque les dieux faisaient l'homme (Paris: Gallimard, 1989), p. 290.


14. 인안나의 저승으로의 하강(Inanna's Descent to the Nether World)에 대해서: S.N. Kramer, Sumerian Mythology (Philadelphia: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2nd edn, 1972), pp. 83-96; 그리고 두무지의 꿈(Dumuzi's dream)에 대해서: B. Alster, Dumuzi's Dream: Aspects of Oral Poetry in a Sumerian Myth (Mesopotamia, 1; Copenhagen: Akademisk Forlag, 1972). F. Bruschweiler, Inanna: La déesse triomphante et vaincue dans la cosmologie sumérienne (Cahiers du CEPOA, 4; Leuven: Peeters, 1987).


15. Bottéro and Kramer, Lorsque les kieux, pp. 288-310.


16. W.R. Sladek, Inanna's Descent to the Nether World (J. Hopkins University Dissertation 1974, Ann Arbor, MI: University Microfilms, 1979), p. 181; Bottéro and Kramer, Lorsque les dieux, pp. 290, 388-304


17. 하란(Harran)에서 제의는 중세 시대까지 사바(Sabaean) 여인들에 의해서 지켜져 왔었다: D. Chwolson, Dei Ssabier und der Ssabismus (Amsterdam: Oriental Press, reprint of St. Petersburg 1856 edn, 1965), p. 27.


18. R. Kutscher, ‘The Cult of Dumuzi/Tammuz’, in J. Klein and A. skaist (eds.), Bar-Ilan Studies in Assyriology: Dedicated to Pinhas Artzi (Ramat Gan: Bar-Ilan Univ. Press, 1990), pp. 29-44.


19. J. Lassøe, Studies on the Assyrian Ritual and Series Bît Rimki (Copenhagen: 1955), p. 13.


20. הנת는 히브리어 הנשׁ(반복하다)의 아람어적 표현으로, 입다 이야기의 저자가 삿 5:11에서 직접 인용한 것이다.


21. G. Didi-Huberman, ‘Celui par qui s'ouvre la terre’, in g. Didi-Huberman, R. Garvetta and M. Morgaine (eds.), Saint Georges et le dragon (Paris: Adam Biro, 1994), pp. 19-124 (20).


22. C. Lévi-Strauss, ‘Comment meurent les mythes’, in idem (ed.), Anthropologie strucutrale deux (Paris: Plon, 1973), pp. 301-318.


23. H.L. Ginsberg and N.M. Sarna, ‘Jephthah’, in C. Roth (ed.), Encyclopaedia Judaica (Jerusalem: Keter, 1971), p. 1341-1344.


24. 불트만(Bultmann)의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와 혼동하지 말라.


25. G. von Rad, Theologie des Alten Testaments (München: Chr. Kaiser Verlag, 1957), 1.32,36-37; 2.351,355,361.


26. W.H. Schmidt, Königtum Gottes in Ugarit und Israel: Zur Herkunft der Königsprädikation Jahwes (BZAW, 80; Berlin: Töpelmann, 1961), pp. 75-76.


27. Von Rad, Theologie, 1.31.


28. Von Rad, Theologie, 1.33.


29. J. Heller, ‘Die Entmythisierung des ugaritischen Pantheons im AT’, in idem (ed.), An der Quelle des Lebens (Frankfurt am Main: Lang, 1988), pp. 173-83.


30. W. Herrmann, ‘Das Aufleben des Mythos unter den Juäern während des babylonischen Zeitaliters’, BN 40 (1987), pp. 97-129 (127-28).


31. 민간전승은 구전 전승으로 오랫동안 동일시 되어왔다: P.G. Kilpatrick, The Old Testament and Folklore Study (JSOTSup, 62; Sheffield: JSOT Press, 1988), pp. 13-72, 116-17. 다음을 보라: Knauf, Umwelt, pp. 269-72, idem, ‘Der Exodus zwischen Mythos und Geschichte: Zur priesterschriftlischen Rezeption der Schilfmeer-Geschichte in Ex 14’, in R.G. Kratz, T. Krüger and K. Schmid (eds.), Schriftauslegung in der Schrift (BZAW, 300; Berlin: W. de Gruyter, 2000), pp. 73-84.


32. A. Lelièvre, ‘YHWH et la mer dans les Psaumes’, RHPR 56 (1976), p. 275.


33. O. Lipschits, ‘Benjamin Region under the Babylonian Rule’, TA 26 (1999), pp. 155-90(159-65).


34. A. de Pury, ‘Situer le cycle de Jacob: Quelques réflexions, vingt-cinq ans plus tard’, in A. Wénin (ed.), Studies in the Book of Genesis: Literature, Redaction and History (BETL, 155; Leuven: University Press, 2001), pp. 213-41.


35. L.L. Grabbe, Judaism from Cyrus to Hadrian 1 (Minneapolis: Fortress, 1992), pp. 126-29.


36. Blenkinsopp, ‘Judean Priesthood’, p. 34 n. 26은 파괴가 기원전 540년과 450년 사이에 있었다고 말한다! 다음을 보라: Lipschits, ‘Benjamin Region’, pp. 171-72 n. 31.


37. 반대 견해로, Th. Römer, ‘Why Would the Deuteronomists Tell about the Sacrifice of Jephthah's Daughter?’, JSOT 77 (1998), pp. 27-38.


38. E.A. Knauf and S. Maáni, ‘On the Phonemes of Fringe Canaanite: The Cases of Zerah-Udruh and “Kamashalta”’, UF 19 (1987), pp. 91-94; G.A. Rendsburg, ‘The Ammonite Phoneme /Ṯ/’, BASOR 269 (1988), pp. 74-75는 어근 ṯbl의 존재를 가정하고 있지만, 어디에도 사용되지는 않았음을 인정하고 있다.


39. S. Niditch, ‘Samsons as Culture Hero, Trickster and Bandit: The Empowerment of the Weak’, CBQ 52 (1990), pp. 603-624.


40. H. Gese, ‘Die ältere Simsonüberlieferung (Richer c. 14-15)’, in idem (ed.), Alttestamentliche Studien (Tübingen: J.C.B. Mohr, 1991), pp. 52-71.


41. G. Mobley, ‘The Wild Man in the Bible and the Ancient Near-East’, JBL 41 (1997), pp. 217-33.


42. O. Margalith, ‘Samson's Foxes’, VT 35 (1985), pp. 224-28; idem, ‘More Samson's Legends’, VT 36 (1986), pp. 397-405; idem, ‘Samson's Riddles and Samson's Magic Locks’, VT 36 (1986), pp. 225-34; idem, ‘The Legends of Samson/Heracles’, VT 37 (1987), pp. 63-70; and A. Meissner, ‘Alles oder Nichts. Die Tragik des Helden Simson (Richter 13-16)’, in D. Bauer and A. Meissner (eds.), Männer weinen heimlich: Geschichten aus dem Alten Testament (Stuttgart: Katholisches Bibelwerk, 1993), pp. 59-75.


43. Richter, ‘Jephtah’, pp. 555-56; idem, Bearbeitungen, pp. 129, 131.


44. J.L. Crenshaw, Samson: A Secret Betrayed, a Vow Ignored (Atlanta: John Knox Press, 1978), p. 64.


45. Gese, ‘Simsonüberlieferung’, pp. 279-80.


46. Kim, Structure, pp. 1-114.


47. 왕하 14:11; 대하 11:10.


48. 기원전 597년에 3,023명의 유다인들, 기원전 586년에 832명의 예루살렘 사람들, 기원전 582년의 745명의 유다인들을 말하는 렘 52:28-30과 비교하라; 그리고 Knauf, ‘Exil’을 보라.


49. S. Stohlmann, ‘The Judean Exile after 701 B.C.E.’, in W.W. Hallo, J.C. Moyer and L.G. Perdue (eds.), Scripture in Context. II. More Essays on the Comparative Method (Winona Lake: Eisenbrauns, 1983), pp. 147-75.


50. 디글랏-빌레셀은 393,000명이고 사르곤은 239,000명이다: B. Oded, Mass Deportations and Deportees in the Neo-Assyrian empire (Wiesbaden: L. Reichert, 1979), p. 21. 이러한 숫자들은, 강제이주를 기록하고 있는 몇몇은 어떠한 숫자도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실제보다는 낮게 잡고 있는 듯하다. 신-아시리아 제국이 있었던 3세기 동안에는 157번의 군사원정이 있었는데, 단지 43번만이 강제이주자들의 숫자를 말하며, 그 수를 모두 합하면 1, 2백만까지 나온다. 오데드(Oded)는 그 수가 총 4, 5백만까지 갈 것이라고 믿고 있다.


51. Luckenbill, Sennacherib, p. 33.


52. Luckenbill, Sennacherib, p. 25.


53. Fuchs, Inschriften Sargons, pp. 197, 344 (Prunk 23-24).


54. Millard, ‘Large Numbers’, pp. 213-22는 웅나드(Ungnad, ‘Zahl’)를 반대하는데, 웅나드는 기원전 701년의 200,150명의 강제이주 수자가 백배나 높이 잡혔다고 생각한다. 예루살렘 프리즘은 같은 수를 보고한다: P. Ling-Israel, ‘The Sennakerib Prism in the Israel Museum’, in J. Klein and A. Skaist (eds.), Bar-Ilan Studies in Assyriology: Dedicated to Pinhas Artzi (Ramat Gan: Bar-Ilan Univ. Press, 1990), pp. 213-48 (228).


55. Kim, Structure, p. 300.


56. J. Wellhausen, ‘Einleitung in das Alte Testament von Friedrich Bleek’, in J. Bleek and A. Kamphausen (eds.), Einleitung in das Alte Testament von Friedrich Bleek (Berlin: G. Reimer, 1878), pp. 183-86에 따르면, 모세 40년 + 여호수아 30년(Nöldeke를 보라) + 평화 200년 + 억압 71년 + 입다 6년 + 삼손 시대에 블레셋 통치 40년 + 사무엘에서 사울까지 50년 + 다윗 40년 + 솔로몬 3년 = 480년이 된다.


57. 뇔데케(Nöldeke, Undersuchungen zur Kritik, pp. 173-98)는 억압의 기간을 제외한 통치 연대만을 계산한다. 그러므로 그는 여호수아와 사무엘을 위한 기간과 함께 사울의 통치에 2년을 더한 상태로 연수를 정리한다. 노트(Noth, ÜS, pp. 18-27)는 구원자들, 처음 세 명의 사사들, 삼손을 위한 20년, 엘리에게는 0년, 사무엘을 위한 40년, 패배와 정복을 위한 45년, 사울에서부터 솔로몬의 통치 4년까지 46년으로, 총합 481년이지만 다윗의 마지막 연수가 솔로몬의 첫해와 겹치기 때문에, 480년으로 보았다. 볼본(W. Vollborn, ‘Die Chronologie des Richterbuches’, in J. Herrmann (ed.), Festschrift Friedrich Baumgärtel (EF A, 10; Erlangen: Universitätsbund, 1959), pp. 192-96)은 모든 인물들, (LXX을 따라서) 엘리는 20년으로 줄이며, 삼손을 위한 20년과 기르앗-여아림의 법궤를 위한 20년으로, 총합 481년에 이른다. 리히터(Richter, Bearbeitungen, pp. 132-41)는 다음과 같이 계산한다: 출애굽에서부터 갈렙의 헤브론 접수까지 45년(수 14:10 그러나 민 14:33; 32:13; 신 1:3 = 40년 또는 신 2:14 = 38년) + 군주 통치 46년(사울 2년 + 다윗 40년 + 솔로몬 4년) + 사사들 136년(엘리 40년 + 삼손 20년 + 압돈 8년 + 엘론 10년 + 입산 7년 + 입다 6년 + 야일 22년 + 돌라 23년) + 구원자들 253년(억압과 평화를 함께 봐서, 기드온 47년 + 바락 60년 + 에훗 98년 + 옷니엘 48년)으로, 총합 480년에 이른다. 리히터는 에스바알의 2년과 아비멜렉의 3년, 기르앗-여아림에 있는 법궤를 위한 20년, 길르앗에서 암몬 자손의 억압을 위한 18년(삿 10:8), 삼손의 날에 블레셋이 억압했던 40년, 헤스본에서 이스라엘이 다스렸던 300년(삿 11:26), 총합 383년을 포함하지 않고 있다. 리히터는 블레셋에서 법궤가 머물렀던 7개월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58. 이집트 모델을 기반으로 한 연구에 대해서 다음을 보라: W.J. Chapman, ‘Zum Ursprung der chronologischen Angabe I Reg 6,1’, ZAW 12 (1935), pp. 185-89.


59. 다음의 표를 보라: Lemaire, Inscriptions hébrïques I, p. 281; 시각적인 예들로는 다음을 보라: B. Porten and A. Yardeni, Textbook of Aramain Documents from Ancient Egypt (Jerusalem: 1986), p. 72 (Cowley 31.19) and p. 84(Cowley 16.6); 다음의 연구도 보라: Y. Aharoni, ‘The Use of Hieratic Numberals in Hebrew Ostraca and the Shekel Weights’, BASOR 184 (1966), pp. 13-19; A.R. Millard, ‘The Signs for Numbers in Early Hebrew’, in K. van Lerberghe and A. Schoors (eds.), Immigration and Emigration within the Ancient Near East: Festschrift E. Lipinski (OLA, 65; Leuven: Peeters, 1995), pp. 189-94.


60. L.C. Jonker, ‘Samson in Double Vision: Judges 13-16 from Historical-Critical and Narrative Perspectives’, JNSL 18 (1992), pp. 49-66 (51-55); Gese, ‘Simsonüberlieferung’, pp. 261-80. 이미 노박(Nowack, Richter, pp. 116-17)은 나실인 지위에 대하여 다른 관점을 규정했다: 전쟁을 위해 바쳐진 덥수룩한 전사 유형(삿 13:5); 후에 발전된 모습이 나실인과 그 어머니에 대한 법칙(술과 불결한 음식 그리고 시체와의 접촉 등을 금지)으로 삿 13:3b-4, 7, 13-14에 제시되었다.


61. 다음을 보라: Jonker, ‘Samson’, pp. 52-53.


62. Kim, Structure, pp. 412-15. 가장 놀라운 점은 삿 13:24-25와 16:19에 있는 ךרב와 ללח 사이의 언어유희이다: 야웨는 삼손에게 복을 주고 그의 영이 삼손에게 감동된다. 반면 삿 16장에서 야웨는 삼손을 떠나는데, 바로 그가 여자의 무릎(היכרב)위에서 잠이 들 때였으며 이제 여자는 그를 평범한 사람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63. Richter, TU, pp. 140-41.


64. K.F.D. Römheld, ‘Von den Quellen der Kraft (Jdc 13)’, ZAW 104 (1992), pp. 28-52 (47-52). 민수기 6장의 연대와 나실인에 관한 다른 본문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H.-J. Stipp, ‘Simson, der Naziräer’, VT 45 (1995), pp. 337-69 (343-44, 355-63).


65. Römheld, ‘Quellen’, p. 44.


66. Stipp, ‘Simson’, pp. 364-65; T.W. Cartledge, ‘Were Nazarite Vows Unconditional?’, CBQ 51 (1989), pp. 409-422 (411).


67. Stipp, ‘Simson’, p. 365.


68. 삼손은, 아이의 출산으로 음식규정이 끝나버렸기 때문에, 어머니에게 꿀을 줌으로 인해 그녀의 서원을 깨트리도록 만들었다는 점에 대해서 비난받을 순 없다: Stipp, ‘Simson’, p. 349.


69. 역시 Römheld, ‘Quellen’, pp. 44-47.


70. Stipp, ‘Simson’, p. 369.


71. 스팁(Stipp, ‘Simson’, pp. 348-49)은 삿 13장이, 삼손 이야기가 기원전 586년 바로 전에 신명기적 역사 안에 통합되었을 때에(그러므로 삿 14-15장이거나 삿 14-16장),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사사기 13장 1절은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야기의 본래적인 서론에 속했을 것이다. 포로기 동안 혹은 그 이후에 삿 13:5, 25이 첨가되었다.


72. A. Calmet, Commentarius literalis in librum Judicum, latinis literis traditus a J.D. Manci (Wirceburgi: 1790), pp. 465-66.


73. 다음을 보라: A. Reinhartz, ‘Samson's Mother: An Unnamed Protagonist’, in A. Brenner (ed.), A Feminist Companion to Judges (Sheffield: JSOT Press, 1993), pp. 157-71.


74. 신 22:24-27과 중기 아시리아 법전 §12.14.15.16.56: M. Roth, ‘The Middle Assyrian Laws’, CoS 2, pp. 353-60.


75. Reinhartz, ‘Samson's mother’, pp. 166-68; L.R. Klein, The Triumph of Irony in the Book of Judges (JSOTSup, 68; Sheffield: JSOT Press, 1988), p. 114. 그러나 스�(Stipp, ‘Simson’, p. 366 n. 79)는 אוב를 성관계로 해석하는 것을 거부하는데, 왜냐하면 그에 따르자면, 마노아의 하나님의 사람이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올 것(ונילא דוע אנ־ואבי, ‘wäre kurios’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76. 창 4:1; 16:4; 29:23,30; 30:3-4, 16; 38:2; 삼상 1:19.


77. 메소포타미아에서, 부정한 아내의 남편이 그의 아내를 향하여 용서가 표현된다면, 그것은 자동적으로 그녀의 간통 상대자에게까지 확대된다: 함무라비 법전 §129, 히타이트 법전 §198. 성서는 간음한 여인에 대한 그 어떠한 용서도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는데, 잠 6:34과 Soṭ 6.1은 심지어 그것을 명시적으로 금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금지는 아마도 남자가, 일단 격분한 처음 상태가 누그러진 다음에, 도덕을 유지하기 위해서 두 명의 죄인들을 죽인다는 것이 다소 값을 치루는 일이라고 계산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78. B.R. Kittel, Studien zur Hebräischen Archäologie und Religionsgeschichte (Leipzig: 1908), p. 106; H. Greßmann, Die Anfänge Israels (Göttingen: 1992), p. 240; P. Kübel, ‘Epiphanie und Altarbau’, ZAW 83 (1971), pp. 225-31; Y. Zakovitch, ‘The Sacrifice of Gideon and the Sacrifice of Manoah’, Shnaton I (1975), pp. 151-54, 영어 요약인 Y. Zakovitch, ‘Assimilation in Biblical Narratives’, in J.H. Tigay (ed.), Empirical Models for Biblical Criticism (Philadelphia: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985), pp. 175-96.


79. Kübel, ‘Epiphanie’, p. 229; 다음의 참고문헌을 보라: D. Grimm, ‘Name des Gottesboten in Richter 13’, Biblica 62 (1981), pp. 92-98 (93-94).


80. 여기에서 독수리는 바로 그 뱀과 함께 심판신의 주재 하에 평화의 약속을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뱀의 새끼들을 죽이고 만다. 샤마쉬는 야생 수소를 때려눕히고 뱀에게 주검 속에 숨어서 독수리가 (그 죽은) 고기를 먹으러 올 때까지 기다릴 것을 조언한다. 그러자 뱀은 그 적을 붙잡음으로 아이들의 복수를 쉽게 갚게 된다.


81. 해 질 때, 사자는 한 낮의 열기를 상징하는 수소를 죽이게 된다.


82. 편지에서, 하인은 자기가 사로잡은 암사자가 왕이 와서 그 손으로 죽이기도 전에 먼저 죽어버린 것에 대해서 사죄하고 있다.


83. 나는 알타쿠(Altakȗ)와 탐나(Tamnȃ)를 포위했고, 나는 점령했으며 전리품을 모조리 빼앗았다. 나는 에그론에 가까이 나아가서 죄를 지은 통치자들과 귀족들을 죽였다.


84. 헬라어로 ‘황소 탄생’의 의미로 죽은 황소 주검 안에 벌들이 생겨나는 신화적 풍습을 일컫는 말(참조: http://en.wikipedia.org/wiki/Bugonia)


85. 꿀풀과의 여러해살이 풀로 백리향이라고 함.


86. 4월 12일에 실시되는 로마의 축제일로, 수확과 관련이 있다.


87. 4월 25일에 실시되는 로마의 축제일로, 충해의 여신 로비고를 기리는 축일로, 기도하고 개를 바치는 일과 관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