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aching/[설교: 얻어 먹은 주의 말씀]

누가의 십자가(눅 23:32-43)

진실과열정 2007. 4. 7. 09:06
 

누가의 십자가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눅 23: 32-43)


십자가 밑에서


        십자가는 늘 울어도 갚을 수 없는 큰 은혜입니다(찬 138장). 그 긍휼하심과 그 큰 은혜를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울 수밖에 없습니다. 왜 우냐면, 십자가를 볼 때에 나의 고통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처절한 고통 속에 있지만, 오히려 우리는 그 고통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죄 없어서 죽을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죄의 대가인 죽음의 잔을 마셨기 때문에 그 분은 십자가에서 서서히 죽어갑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떠나서 죽어 마땅한 죄인인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죽음의 고통과 영원한 심판의 저주가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는 겁니다. 그게 은혜라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내가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는 겁니다. 십자가를 볼 때마다,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그리고 십자가를 설교할 때마다.


        그러나 십자가는 단지 슬픈 감정만 불러일으키는 신파극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슬픈 감정 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에는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주의 운명을 바꾼 능력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십자가를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했습니다(고전 2:7). 저는 이 시간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장소로 여러분을 인도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단지 슬퍼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를 들을 것입니다. 저는 특별히 여러분들에게 두 사람을 소개할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이 십자가에서 무엇을 보았는지를 우리도 볼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반응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 같은 반응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함께 십자가의 장소로 가봅시다(눅 23:32-43):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은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은 우리 죄인을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가 그것을 증거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을 읽으면 그 사랑이 얼마나 철저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상의 일곱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각 복음서가 어떤 것을 기록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면, 각 복음서를 이해하는 눈이 열리게 됩니다. 여기에서 자세한 것들을 말씀드리는 것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간단하게 살펴봅시다: 제일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한 말씀만 기록하고 있습니다(15:34). 이후에 기록된 마태복음은 마가복음을 그대로 따라갑니다(27:46):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가장 나중에 기록된 요한복음은 상대적으로 많은 네 개의 말씀을 보여주는데(19:26,27,28,30) 그 중에 “내가 목마르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28절). 이러한 복음서는 십자가의 영적인 고통과 육적인 고통을 모두 숨김없이 보여줍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고통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자기를 따라오는 무리들을 향해서 위로하십니다(23:28):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복음을 읽으면서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숨겨있는 중요한 메시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고난 자체를 말하기보다는 그 고통을 초월한 그 무엇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라는 극한의 고통까지도 초월하여 계속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십자가에서 완성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에서 한 사람에게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이름 없는 행악자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가복음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십자가의 사랑은 행악자와 함께 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 사람은 32절에서 시작해서 43절까지 등장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강도라고 알고 있는 이 내용은 사복음서에서 오직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사실, 우리는 오른편 강도가 구원받았다고 알고 있는데, 성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볼 때, 오른편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오른편과 왼편을 나누는 것은 본문말씀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해석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이름 없는 행악자


        저는 오늘 누가복음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여러분들에게 풀어드리면서, 두 사람을 소개할 것입니다. 첫 번째 사람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은 이름 없는 행악자이고, 두 번째 사람은 그 이름 없는 행악자에게서 자신을 발견한 누가복음의 기록자 즉 누가를 소개할 것입니다.


        첫 번째로 이름없는 행악자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봅시다. 저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행악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행악자’라고 부르면, 우리의 마음속에는 어찌되었건 그 사람을 ‘행악자’라고 이해하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이 사람이 32절의 말씀처럼 사형을 받아 마땅한 중죄인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죄를 지었기에 사형수가 되었을까요? 그것도 십자가라는 처절한 심판을 받는 그런 몹쓸 사형수가 되었을까요?


        ‘행악자’라는 한 가지 만을 가지고는 더 이상 밝혀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시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학교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를 모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알아두는 것이 모르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간단한 예를 들자면, 바로 이겁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압제를 받았던 것처럼, 이스라엘 역사 지금 로마의 압제를 받고 있다. 그렇습니다. 본문과 관련된 예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안중근이 이또 히로부미를 죽였다. 그가 잡혀서 지금 총살형에 처해졌다. 바로 이겁니다. 이 사건을 두고 대한민국 사람들은 안중근을 ‘의사(義士),’ 즉 의로운 선비라고 칭송합니다. 반대로 이 사건을 두고 일본 사람들을 안중근을 ‘행악자’라고 심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단순하게 행악자라고 알고 있는 그 단어는 그 당시에 쉽게 말할 수 있는 그런 칭호가 아닙니다. 사실 여기에는 조금 어려운 부분이 들어있습니다. 왜냐하면, 원래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행악자’라고 하지 않고, ‘강도’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말씀드린 안중근 의사와 같은 일종의 독립군을 지칭하는 말이 바로 ‘강도’였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강도들은 처음은 로마의 반기를 든다는 원대한 뜻을 품지만, 시간이 지나면 도망 다니면서 마을 사람들을 약탈하는 산적으로 전락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이름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것만 설명하려해도 한 시간 넘게 걸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에서 생각해야할 중요한 점은 이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옆에 달려있는 사람들은 일종의 독립투사였다.


        로마는 십자가 사형을 아무에게나 내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알기에 십자가 형벌이 최고로 무서운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사실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당시 로마에는 세 가지 형벌이 있었습니다. 맹수들의 밥이 되게 하는 형벌, 화형, 그리고 십자가형입니다. 로마 황제 중에 칼리굴라라는 사람은 이 세 가지를 한꺼번에 한 것으로 악명이 높습니다. 밤에 연료를 아낀다고 나무에 죄인을 매달아서 불을 지피우고 원형경기장에서 사자밥으로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유명한 세네카가 십자가형을 지독하게 무서운 형벌이라고 말했던 이유는, 십자가형은 반역죄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저주스러운 것이라고 말했던 겁니다. 십자가형은 가장 효과적입니다. 지배받고 있는 사람들이 들고 일어서려고 할 때마다 독립군을 잡아다가 산위 높은 곳에 십자가로 메달아 놓으면,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잠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월절 전에 로마 군사들이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골고다에 십자가 사형터를 잡은 것도 바로 여기에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것을 기념하는 민족적 해방기념일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자유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는 중요한 명절마다 그 앞서 이렇게 십자가 사형을 집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시무시한 선포입니다: “로마에 반기를 드는자! 이렇게 망하리라!”


        이렇게 무서운 것이 십자가 형벌이었는데, 놀라운 점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계속해서 십자가 형벌을 받았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 중 일부의 사람들은 안중근 의사와 같이 독립을 위해서 로마에게 칼을 들었다는 겁니다. 잡히면 어떠한 죽임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칼을 들고 광야에 숨어 지내면서 민란을 꾸몄던 겁니다(막 15:7).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절대로 자신들의 힘으로는 로마의 강력한 군대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왜 자기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투쟁했을까요?


        그 이유는 당시의 유대인들은 부활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약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즐겨 읽었던 말씀은 이사야와 다니엘이었습니다. 이사야는 포로에서 회복될 것을 약속했기 때문이고, 다니엘은 억압받는 상황에서 부활할 것을 약속했기 때문입니다(12:2-3):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전도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환란 속에서 신앙을 지키는 사람에게 약속되는 부활의 말씀입니다.


        다니엘의 이 말씀이 전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말씀을 외곡하게 될 때, 그 사람은 독립투사가 됩니다. 이제 아시겠지만 그 강도 역시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칼을 들었던 것입니다. 부활의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십자가형이 무섭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의 소신이 옳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그는 십자가 앞에서도 당당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오히려 무기력했던 일반인들과 대조되는 그들 자신들의 명예였습니다.


        그러므로 일반 사람들이 볼 때에나 그리고 로마 군병들이 볼 때에나 예수님은 전혀 십자가에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전혀 로마에 반란을 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칼 쓰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손에 굳은살이 박힌 이유는 칼과 방패를 잡아서가 아니라, 대패질과 톱을 잡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에 대항하는 사람들만 죽을 수 있는 일종의 명예의 장소였던 십자가에 예수님이 달리셨다는 것은, 당시의 사람들이 볼 때에 거지에게 왕관을 씌워준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 말은 달리 말하면, 예수님에게 최고의 수치를 주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입니다. 이 수치는 벌거벗겨지는 육신적 수치가 아닙니다. 당시 고대사회를 움직이는 근본적인 힘은 바로 명예와 수치라는 의식구조에 있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라고 외친 것은 그가 잘나서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 즉 명예와 수치라는 사고방식의 틀 속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받았던 수치는 바로 이것입니다: “아무나 받을 수 없는 일종의 명예스러운 십자가 죽음을 아무 것도 아닌 네가 받다니! 오! 예수여 부끄럽지도 않은가!” 그래서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예수님의 육체적 고통을 보여주기보다는 바로 이 수치를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35,36,39절). 가장 최종적인 수치는 함께 매달린 강도의 비방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나는 여기에 매달릴 명예라도 있지만, 당신은 도대체 왜 여기에 있는 것이냐?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다시 말해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명으로 사형을 당한 다는 말인가? 가당치도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의 상황을 바로 보게 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을 비방합니다. 예수님에게 최악의 수치심을 줍니다. 그런데 놀라운 변화가 나타납니다. 바로 40절에 등장하는 ‘한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님에게 던져지는 모든 수치들이 옳지 않다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42절):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부활 신앙의 표현입니다. 중요한 점은 그는 십자가에서 평생토록 굳게 지켜왔던 자신의 생각을 바꾸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저주한 강도는 자신의 길이 옳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다니엘의 말씀을 이루는 ‘영원히 빛날’ 명예로운 부활을 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비방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강도’는 십자가에서 변화되었습니다. 아마도 그 사람 역시 다니엘의 말씀을 믿으며 ‘의로운 일을 위한 반란’에 자신의 일생을 걸었을 것입니다. 그 길을 위해서 살인과 방화, 약탈과 전쟁을 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길이 하나님의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점차로 그는 깨달았습니다. 이 길은 하나님의 길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40-41절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본문은 왜 이 강도가 마음을 바꾸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본문은 그 강도가 마음을 바꾸었다라고 말합니다. 바로 십자가에서 말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34절의 말씀에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넓은 측면은 자신을 못 박은 (우리를 포함한) 모든 죄인을 용서해달라는 예수님의 끝없는 사랑의 표현일 것입니다. 좁은 측면이라면, 32-33절과 연관해서 볼 때, 놀라울 정도로 소름이 끼칩니다. 32-33절은 철저하게 두 강도가 중심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34절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저는 이 말씀이 좁은 측면에서 엄청난 힘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자신들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했었지만, 그들은 정말 자기가 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도 몰랐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저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한 강도에게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의 메시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강도들에게 십자가는 명예의 장소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전혀 가당치 않은 말입니다. 자신들은 그것을 명예로운 죽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힘써서 의롭다는 일을 했지만 최종적인 평가는 헛된 죽음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명예의 십자가를 수치의 장소로 만든 분입니다.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수치를 받은 장소가 바로 이 십자가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 아래에서 자신의 의지가 180° 전환되는 장소입니다. 십자가는 온 세상 영광으로도 다 품을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최악의 수치스러움을 감당해야하는 장소입니다. 십자가는 변화의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강도 역시 십자가에서 변화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명예라고 붙잡았던 것을 십자가에서 내려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수치스럽게 보이는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곁에서: 누가


        바로 이런 경험을 바울 사도가 했습니다. 그는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을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에게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23). 그러던 그가 십자가의 예수를 만났고(행 9:5), 그의 일생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바뀌게 되었냐면, 십자가가 그의 전부라고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담대하게 자신의 목회 철학을 이렇게 말합니다(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 바울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서 선교를 하게 됩니다. 그 자세한 내용이 바로 사도행전에 나와 있습니다. 이 선교 여행 중에 바울은 누가를 만나게 됩니다(행 16:10). 누가는 의원이었습니다. 그는 엘리트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누가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지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역사적인 사료들을 모아서 꼼꼼하게 정리된 글임에 분명합니다(눅 1:2-3). 다시 말해서 아무나 이런 글을 쓸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정말 누가는 엘리트였음에 분명합니다. 그는 의사로써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던 그가 바울을 만나서 자신의 인생을 바꿉니다. 그는 이제 바울과 함께 선교를 떠납니다.


        저는 그 이유가 십자가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입을 열면 십자가였고, 눈을 뜨면 십자가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변화시킨 십자가의 능력이 누가의 삶도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사람의 몸을 살렸지만, 십자가는 사람의 영을 살립니다. 그렇다고 누가가 의사직업을 그만둔 것은 아니었습니다(골 4:14). 그는 의사를 계속했지만, 주객이 바뀐 것입니다. 그 동안 누가는 자신이 의사이기 때문에 사람의 몸을 고쳐주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만난 누가는 그가 십자가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 십자가의 사랑과 능력으로 사람을 고쳤습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편함이 포기되는 것이 바로 능력입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삶이 포기되어지는 것이 바로 능력입니다. 그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되어진 사건이 바로 바울에게 경험된 것이며, 누가에게 경험된 것이며, 그리고 그 구원받은 강도에게 경험된 것입니다.


다시 십자가 밑에서


        말씀을 정리해봅시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최악의 수치의 장소로까지 기꺼이 내려간 사건을 보여줍니다. 그로 인해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했고,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의 사건은 단지 예수님에게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강도에게 요구했습니다. 네가 그동안 명예스럽게 생각하면서 추구했던 모든 것을 헛된 것으로 여길 수 있는가? 강도는 자신의 십자가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늘 낙원에 있습니다. 십자가는 바울에게 요구했습니다. 네가 그동안 하나님의 일이라고 자부했던 일들을 아무 것도 아니었다고 여길 수 있는가? 바울은 자신의 확신을 더 이상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누가에게 요구했습니다. 네가 남부럽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삶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위해서 너를 희생하겠느냐? 누가는 자신의 편한 삶을 포기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지금 십자가 밑에 있습니다. 십자가는 더 이상 눈물의 장소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는 변화의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삶이 변화되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더 이상 나를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며 살겠다는 결단을 하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더 이상 나의 주장만을 고집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결단을 하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더 이상 나만을 위한 삶을 살지 않고 복음을 위해서 살겠다는 결단을 하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눈물을 흘려도 갚을 수 없는 그 은혜를 나 주님께 몸 바쳐서 주의 일 힘쓰는 것, 그러한 다짐을 하는 곳이 바로 십자가 아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