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aching/[설교: 얻어 먹은 주의 말씀]

삶의 의미(전도서 3장 1-15절)

진실과열정 2006. 11. 27. 10:29
 

삶의 의미

전도서 3장 1-15절



서론


   오늘 저는 전도서 3장의 말씀을 성도님들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계속 마음을 붙잡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삶의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삶의 의미’라고 잡아봤습니다.  ‘삶의 의미’라고 하면, 너무 감성적이고 또한 비장한 감도 듭니다.  그리고 저보다 갑절의 삶의 더 사신 분들 앞에서 ‘삶의 의미’라는 제목을 붙이는 것도 경우가 아닐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저의 생각을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의 세밀한 음성을 전달하고자 합니다.  아무쪼록 오늘도 귀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보다 풍성해 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읽은 전도서는 욥기, 잠언과 함께 지혜서라고 부릅니다.  욥기는 욥이라는 사람의 이유 없는 고난을 통해서, 이성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잠언은 예부터 내려온 짧은 속담들을 묶어놓은 것으로, 실제로 써먹을 수 있는 삶의 법칙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전도서는 조금 독특합니다.  전도자라는 사람이 자신이 깨달은 도에 대해서 아주 길게 얘기하는 형식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잠언처럼 한번 읽으면 깨달을 수 있는 그런 지혜가 아니라, 읽고 또 읽어야 희미하게나마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도서에는 ‘헛되다’라는, 어쩌면 부정적인 단어가 참으로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다보면 허무해지는 경우도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조금은 생소하고, 또 조금은 이상한 것도 같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말씀을 읽고, 깨달아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걸어 가야할 신앙의 길이며, 또한 우리 보다 먼저 걸었던 선배 신앙인들의 길이었을 것입니다.




본론


   1절의 말씀은 누구나 공감하실 것입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습니다.  이 짧은 말씀에서 아마도 여러분들은 수십 년 전의 일에서부터 지금까지 겪어왔던 일들을 다시 돌이켜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떨 때는 웃었고, 어떨 때는 울었고, 또 어떨 때는 찾아 나설 때가 있었고, 어떨 때는 포기할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할 때도 있었고, 미워할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러한 여러 가지 일들을 경험해 오셨다면, 여러분은 인생을 성서가 말하고 있는 대로 잘 살아오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웃었던 적도 있고, 울었던 적도 있으며, 사랑했던 적도 있고, 미워했던 적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혜자는 커다란 원리를 깨닫게 됩니다.  바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알맞은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방금 우리 모두가 경험했던 것들에다가 한 가지 덧붙이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알맞은 때였는가?”라는 물음입니다.  우리는 웃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지혜자는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그때는 웃는 때였는가?”  우리는 울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또한 지혜자는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그때는 우는 때였는가?”  우리는 사랑했었을 때, 성서는 이렇게 묻습니다.  “그때는 사랑해야할 때였는가?”  또한 우리가 미워했을 때, 성서는 이렇게 묻습니다.  “그때는 미워해야할 때였는가?” 


   그렇습니다.  지혜자는 지혜란, 세상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게 다 알맞은 때가 있는데, 우리 사람들이 알맞은 때에 알맞게 반응을 한다면, 그것이 바로 지혜로운 삶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지혜자는 더 나아가, 이러한 지혜로운 삶을 믿음의 삶으로 확장합니다.  바로 11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단순하게 3장 1절의 말씀만을 인정합니다.  ‘모든 일에 때가 있다’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9절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이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신 모든 것’을 억지로 바꾸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6절의 말씀과 같이, 지켜야할 때, 지키지 않고 억지로 버리는 것이며, 버려야할 때, 버리지 않고 억지로 지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모든 것이 제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만드셨다고 인정하는 태도인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의 사람들은 그 때에 지키고,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깁니다.  ‘과연 그 때가 그 때인지 어떻게 아느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때가 지켜야할 때인지, 버려야할 때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입니다.  A라는 사람은 ‘이 때가 지켜야할 때이다’라고 할 수 있고, B라는 사람은 반대로 ‘이 때는 버려야할 때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경우 어떤 사람도 ‘A가 맞고 B가 틀리다’, 혹은 ‘그 반대이다’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11절 하반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는 하나님의 때를 깨달을 수 있는 3가지 지침이 들어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우리는 도저히 측량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기본원칙입니다.  도움이 되도록 전도서 8장 17절의 말씀을 찾아서 읽어봅시다: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해 아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능히 깨달을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궁구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리로다.”  정말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우리는 측량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은 ‘이 때가 과연 어떤 때인가?’라는 하나님의 때를 깨달을 수 있는 3가지 지침 또한 함께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모순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깨닫습니다.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을 평가하거나, 판단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이 말씀은 나 자신을 겸손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1. 11절과 15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역사는 말한다’입니다.  우리말 성경에 11절 중간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되어있는데, 이 말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과거와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감각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즉, 15절의 말씀과 같이, 어떠한 일을 볼 때,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도 있을 것’이라는 뜻과 같은 표현입니다.  그래서, ‘역사는 말한다’라는 것이 첫 번째 지침입니다.  저는 이러한 깨달음이 놀라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신앙인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나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때’에 대한 통찰력을 갖는 사람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시 때때로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지도자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편을 갈라서 대적하고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이 기름부은 모세를 끝까지 세워주심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러한 역사의 통찰력을 깨달았던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부은 사람은 절대로 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왕이 된 것입니다.  다윗은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때’에 대한 통찰력을 가졌던 신앙인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서를 읽으면서 (특별히 구약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셨는지, 하나님의 역사를 깨닫게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러한 통찰력을 가지고 ‘지금 무엇을 해야 할 때인가’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2. 12-13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읽으면 갑자기 긴장이 풀어지는 것 같습니다.  어렵게만 느껴지는 하나님의 때라는 것이, 12-13절의 말씀에서는 전혀 관계없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다시금 놀라게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때를 깨닫는 사람들은 한마디로 ‘사심 없는’ 신앙인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때’라는 말을 듣게 되면, 무엇인가 엄청난 반응을 하곤 합니다.  지금은 전기도 안 들어오는 오지에 선교하는 것이 ‘하나님의 때’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혹은 주님이 곧 재림하실 것이기 때문에, 육적인 삶을 절제하고 금식하는 것이 ‘하나님의 때’라고 합니다.  저는 이 말에 ‘사심’이 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은 반대로 생각해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마치 ‘헛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라고 정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선교하지 않는다면, 헛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지금 무엇인가 거룩한 일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면, 헛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까?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성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기쁘게 산다면, 그게 좋은 삶이다.  살면서 좋은 일을 한다면, 그게 좋은 삶이다.  우리가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고, 또 하는 일에 만족을 누릴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총이다.”  12-13절을 표준새번역으로 읽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때’라고 해서, 무엇인가 거룩한 것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지혜자는 우리의 생각을 바꿔줍니다.  ‘하나님의 때’는 우리의 일상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먹고 싸는 일들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라는 진리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말씀드리는 ‘사심 없는’ 신앙인입니다.  ‘하나님의 때’라는 미명 아래, 내가 교만하게 되어진다면 그것은 잘못된 깨달음입니다.  전적으로 ‘사심 없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마지막으로 14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4절은 가장 기본적이면서 핵심적인 지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나타납니다.  사실 구약성서를 읽다보면, 가장 떠오르는 것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어떻게 이끄시는가를 구약성서에서 아주 자세하게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을 묵상하면 반드시 ‘경외’가 이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쉬운 말로 ‘두려움’입니다.  이 말은 ‘무서움’과 비교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두려움’과 ‘무서움’은 둘 다 ‘거리를 두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무서움은 내게 손해가 되기 때문에 거리를 두는 것을 말합니다.  반대로 두려움, 즉 성서의 경외는 내가 차마 가까이 갈 수 없기 때문에 거리가 생기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마치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이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 신을 벗으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나타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전적으로 겸손해질 때,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때’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


   말씀을 정리해봅시다.  우리는 신앙인입니다.  신앙인은 우리 앞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합당하신 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만드셨다고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그 되어지는 일에 합당하게 반응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첫째로 역사에 대한 통찰력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로, 나의 삶에 아무런 사심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사랑할 수 있는 삶의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최고로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무쪼록 우리 깊은샘수원교회가 되어지는 모든 일들 속에서 ‘하나님의 때’를 발견하고, 합당하게 반응할 수 있는 건강한 신앙인들로 넘쳐나게 되도록 결심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되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