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의 의미(1)
마 1: 1-17
서론
이제 성탄절이 보름가까이 남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성탄을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실 것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어쩌면 다른 누구보다도 성탄을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작년에 성탄다운 성탄을 보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작년 이맘때에 교통사고로 오른쪽 어깨가 다쳐서 수술을 받았습니다. 목사님과 많은 성도님들의 기도와 관심으로 수술이 잘 끝났지만, 잘 아물 때까지 병원에서 입원생활을 했었지요. 그리고 병원에서 성탄을 보냈던 겁니다. 병원에서 혼자 성탄을 보내면서 저는 큰 깨달음을 배웠습니다. 조금은 서글픈 깨달음입니다. 바로, “병원에는 성탄이 없다”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설교 마지막에 다시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족보의 의미(2)에서 다룸).
아무튼 그런 성탄을 보내고 나서, 맞이하는 성탄은 정말 설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슨 선물을 주고받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회적인 분위기가 들떠서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시면서 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실제적으로 맛볼 수 있는 최고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탄을 기다리면서 더욱 열심히 성서를 보고 기도를 하면서 예수께서 탄생하신 사건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사실 아기 예수에 대한 말씀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도 다 합쳐 봐야 두 세장 정도 밖에 안 되는 짧은 분량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이겠거니 하고 마음을 쉽게 먹었습니다. 그러나 보다 더 깊이 말씀의 세계에 들어가면서 저는 더 새로운 것을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것을 원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제 마음대로 성서를 본 것은 아닙니다. 훌륭한 영성과 지성을 겸비한 학자들이 쓴 여러 가지 주석들과 사전을 보면서 말씀을 파고들었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족보의 의미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제목은 족보의 내용이 아니라, ‘족보의 의미’입니다. 사실, 족보의 내용은 우리와 별 상관이 없습니다. 시험을 보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굳이 외울 필요도 없는 거구요. 그러나 족보의 의미는 차원이 다릅니다. 족보의 의미를 깨닫는 것은 신앙인들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첫째는 마태복음을 받았던 신앙의 공동체였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고 있는 우리 깊은샘수원교회의 신앙 공동체입니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통해서 신앙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세워나가는 성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본론
족보에는 당연히 사람의 이름이 들어갑니다. 우리가 읽은 족보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들어있습니다. 어떤 이름은 우리가 잘 알고 있지만, 또 어떤 이름은 아주 생소하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이 학창시절에 ‘태종태세문단세...’라고 조선왕조의 족보를 줄줄 외웠던 것과 같이, 이스라엘 사람들도 족보 외우기를 좋아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처럼 ‘태종태세문단세...’라고 외웠을지는 모르지만, 구약의 창세기부터 족보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창 5:1), 이스라엘 사람들도 족보를 꽤 좋아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족보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을 기록했던 2000년 전 팔레스타인 땅에도 족보를 기록하는 공통되는 규칙이 있었습니다. 저는 연구를 통해서 두 가지 사실을 새롭게 배웠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의미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습니다. 시간 관계상 오늘은 첫 번째만 나누도록 하고, 다음에 두 번째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규칙은 특정 숫자의 틀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당시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기록하면서 7이나 14의 배수로 기간을 잡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7이 완전수라는 것은 다 아시는 내용일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생활 속에서 7이나 14라는 완전수를 가까이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도 족보가 나오는데(3:23-38), 잘 살펴보시면 7의 배수로 묶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마태는 당시의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이해하는 족보의 법칙을 가지고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잘 보시면, 꼭 14명씩 들어있지는 않습니다. 다윗 왕이 두 번 겹쳐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이고, 다윗부터 11절의 요시야까지 열네 대입니다. 다윗이 두 번 겹쳐졌기 때문에, 정확하게 14명씩 들어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는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마태는 17절에,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러라”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마태는 정확하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족보를 기록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보편적인 14의 배수로 기록하는 원칙을 지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족보는 정확하다고 족보가 아니다. 족보는 사람들이 인정하는 7이나 14의 배수로 잡는 것이 족보다. 어찌 보면 우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점에서 보지 말고 7이라는 완전수를 소중히 여기는 이스라엘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 정확하지 않은 족보로 보이더라도, 이스라엘 사람들의 눈에는 족보로 보였던 것입니다.
저는 깨달을 것을 묵상하면서 한 가지 도전을 받았습니다. 마태는 정확한 것보다 사람들이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마태가 이스라엘 사람이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에게 감동을 주신 하나님은 정확한 분이 아니십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이렇게 결론을 맺었습니다. ‘정확하신 하나님은 마태를 감동하셔서 정확하게 족보를 기록하게 하실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정확하게 기록하는 것보다 그 족보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사람들을 더 중요하게 여기셨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정확하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놀라운 일들을 ‘정확하게’ 기록하게 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어떤 과학자도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일 것이며, 너무 길어서 그 누구도 평생을 걸리더라도 읽어 내려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확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정확성보다 사람들을 더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원리가 바로 성서의 원리입니다.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 21:25)”
이것을 깨달았다면 이제 우리의 삶의 자세는 바뀌어야 합니다. 저는 구체적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시시비비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 올 해 5월에 통계청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불교와 천주교는 성장했는데 기독교는 1.6% 감소했다고 합니다. 기독교에서 빠져나간 사람들이 천주교로 들어가 천주교는 75%나 증가했다고 합니다. ‘왜 기독교에서 천주교로 갔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간단합니다: ‘교회에 질렸다.’ 또 물었습니다. ‘왜 교회에 질렸냐?’ 그 대답은 의외였습니다. “예배에 빠지면 죄인 취급하는 것에 질렸다.” 이것은 11월 23일 한국일보에 실린 기사입니다.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 한국교회가 바리새인들로 넘쳐나고 있구나!’ 무엇 하나 잘못되는 일이 있으면 따뜻한 위로를 받기보다, ‘기도가 부족해서 그렇다’ 혹은 ‘그러고도 네가 그리스도인이냐?’라는 말을 듣게 되니, 당연하게 교회에 질리지 않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저야말로 그런 바리새인이 아니었는지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정말 나 때문에 교회를 옮기거나 교회에 질린 사람들도 있었겠다’라고 성령이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나 때문에 교회에 질린 사람이 있다면, 우리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한해를 정리하며 우리 마음을 다시 돌이키도록 합시다.
그렇습니다. 시시비비보다 사람이 더 중요합니다. 물론 예배에 빠지면 안 됩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예배에 빠지게 된다면, 죄인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들을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우리의 눈에서 정죄의 판단이 비춰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눈에는 긍휼이 흘러나와야 합니다. 우리의 손에는 정죄의 차가움이 느껴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손에는 긍휼의 따스함이 베어 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이 땅위에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시시비비를 따지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그 누구도 논쟁에서 예수님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시비비보다 사람을 더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을 금지한 규칙을 어기면서까지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막 3:2-4)”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를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위에서 참으로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부지런히 예수님을 닮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그 중에서 저는 예수님의 긍휼을 닮아가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냥 물러터진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시시비비는 지키지만, 그것보다 사람을 더 중요하게 여길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 갑시다. 우리 교회는 축구단을 창설했습니다. 아직 혈기가 넘치는 청년들이 주축이 돼서, 이기고 지는 것에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청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합니다: ‘이기고 지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물론 정정당당히 게임에 임해야 한다. 그러나 이기고 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마음을 얻는 일이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사람들과의 계속되는 만남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동안 우리는 그 만남에서 이기고 지는 것을 중히 여겼습니다. 이제는 이기고 지는 것보다 그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에 목숨을 걸도록 합시다. 그러면 통할 것입니다.
결론
저는 오늘 마태가 기록한 족보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정확하게 기록할 수도 있었지만, 마태는 정확성보다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이야말로 정확성보다 우리 사람을 더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나의 잘난 계산속에서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시비비를 따졌던 나의 잣대를 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도 예수님이 품으셨던 긍휼하심의 마음을 나의 마음에 품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긍휼의 사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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