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aching/[설교: 얻어 먹은 주의 말씀]

[2007년 10월 23일: 두란노 예배학교 강의안] "함께 가는" 예배자

진실과열정 2007. 10. 20. 16:22
 

두란노 예배학교 강의안


제목: “함께 가는” 예배자

강사: 양지웅 목사


서문

   동네 치과에 미국사람이 왔습니다. 머리가 금발이었고, 눈은 파란색이었으며, 코는 오뚝했고, 한 손엔 방금 산 것 같이 깨끗한 한글사전이 있었습니다. 한 눈에 봐도 이가 많이 아픈 것 같습니다. 한글사전을 막 뒤지고 있는 미국사람을 보고, 간호원들이 갑자기 얼어 붙어버렸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서로 등을 밀어대면서, ‘뭐라고 좀 해봐’라고 합니다. 아무도 나서지 않을 때, 연륜 있는 한 간호사가 미국사람의 손을 잡고 자리에 앉힙니다. 그리고 딱 한마디 합니다: ‘아~’

   미국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아~’ 한 마디였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아~’ 한 마디로 영어가 다 된다 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라는 생각입니다. 이번 강의는 마치 이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예배학교를 통해서 참으로 많은 것을 얻어야 하며, 또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제가 생각해볼 때)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 중에서, 한 가지만을 가지고 왔습니다. 저에게는 바로 이것이 ‘아~’와 같은 열쇠라고 생각됩니다.

   일단 저는 강의를 최대한 쉽게 준비하려고 했지만, 치과 의사가 엉뚱한 부분을 잘못 건드려서, 미국사람이 ‘아!’할 수 있듯이, 여러분들도 어쩌면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끝까지 집중을 하신다면, 의외의 성과도 얻고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강의 중에 생기는 질문이나 기타 의견은 끝나고 제시해 주시거나, 인터넷 리뷰에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들어가며

  1) “ㅂㅅ의 ㅇㄱ” (빙산의 일각)

   제가 거의 빼먹지 않고 보는 TV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바로 KBS에서 하는 우리말달인이라는 프로그램입니다. 매번 방송을 볼 때마다, ‘우리말을 30년 넘게 쓰고 있지만 정말로 우리말의 맛과 멋을 모르면서 살아가고 있었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준비해봤습니다. ‘ㅂㅅ의 ㅇㄱ’ 그렇습니다. 빙산의 일각입니다. 아마도 이번 시간에 전해지는 강의가 바로 ‘빙산의 일각’ 정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제가 다름 아닌 ‘예배’이며, 그 예배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정말이지 우리가 평생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하나님에 대해서 빙산의 일각을 경험할 정도입니다. 하물며 오늘의 이 시간에 ‘예배’와 그 대상인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빙산의 일각’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런 생각이 들 때 마다 바울 사도에게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소망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그렇습니다. ‘그 때’에는 우리는 빙산의 전부를 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때’를 단지 머나먼 미래의 시기로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말한 것을 앞뒤로 살펴보면(고린도 전서를 전체로 보면) ‘그 때’는 사랑이 회복되는 때라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있게 됩니다. 요한 사도도 바울의 이 말을 긍정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다시 한 번,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만큼, 우리는 알게 됩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빙산의 일각’을 조금 보여줄 것입니다. 내용의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을 얼마나 더 사랑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사랑의 무게, 사랑의 깊이가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일 겁니다. 이 전보다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다면, 이번 강의는 대성공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2) 정의하기 어려운 것들: 우리의 일상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서 일상이 되어버렸지만, 나름대로 ‘이런 것이다’라는 정의를 내리기 어려운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일상적인 사소한 것들이 그런 종류인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인터넷(내 컴퓨터에 광랜 끼우는 거? / ‘와이브로’ 기술이라는 표준?): 인터넷의 정확한 정의를 모르지만, 우리는 인터넷을 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게 그거죠. 우리는 인터넷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봅시다. 사랑(눈물의 씨앗? / 가슴이 콩닥콩닥 거리는 거?): 사랑의 정확한 정의를 모르지만, 우리는 역시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게 그거죠. 우리는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예배(묵도에서 최면에 들었다가 축도에서 최면에서 깨어나는 4차원세계?)는 어떨까요? 역시 우리는 예배의 정확한 정의를 모르지만, 역시 우리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바로 엊그제 여러분은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여러분에게 ‘그건 예배가 아니야!’라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내가 예배를 드리면서, ‘나는 지금 예배를 드리는 게 아니야!’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록 잠깐 졸았지만, 비록 잠깐 문자확인했지만, 비록 잠깐 내일 있을 중간고사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나는 예배를 드렸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잠깐 존다고, 잠깐 문자확인했다고, 잠깐 내일 있을 중간고사 생각했다고’ 하나님이 예배를 안 받으셨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떻든 예배를 드렸습니다. 중요한 게 그거죠. 우리는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저는 우리들 대부분의 일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단어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인터넷, 사랑, 예배. 딱히 명쾌하게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전혀 생소한 것은 아닙니다. 차라리 너무나 일상적인 것들이어서 나의 일부분이 되어버린 그런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물론 우리가 전인격적으로 건강한 사람인가 진단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내가 인터넷을 하지만, 정말 잘하고 있는 것인가? 저는 개인적으로 마우스에 손때가 묻은 사람보다 키보드에 손때가 묻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서핑으로만 만족하는 것은 진정한 인터넷이 아닙니다. ‘상호간의 정보전달’이 인터넷이기 때문입니다. 간단합니다: ‘수고했소.’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쌩유~ 퍼갈게요’ ‘중국이네!’ ‘개념탑재!’이런 거 말구요) -> 나의 인터넷 이야기

   내가 사랑을 하고 있지만, 이 사랑이 정말 잘하고 있는 것일까? 저는 개인적으로 사랑은 죽이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쥑이는 거’가 아니라, ‘죽이는 거’입니다. ‘상대’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죽이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연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하루를 정리하고 집에 들어가면서 ‘오~ 오늘 하루 내 뜻대로 다 됐어!’라고 감격했다면 그 관계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오! 오늘 하루 당신 뜻대로 다 됐어!’라고 하는 사랑을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내가 예배를 드린다고 하지만, 내가 드리는 이 예배가 정말 잘 드려지는 예배일까? 만약 성서적으로 우리가 예배를 드린다면 우리는 기절초풍할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처럼 예배를 드린다면 수송아지와 양과 염소를 바치기 위해서 한 달에만 몇 백 만원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가 신약처럼 예배를 드린다면 밤새도록 이어지는 설교 때문에(행 20:7) 매 예배 때마다 졸다가 쓰러지는 유두고 형제를 봐야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렇게 성서의 문자 그대로 예배하지 않습니다. 예배는 문화적인 스타일의 옷을 입기 때문이지요.

   저는 최근에 IVP에서 주관한 마르바 던(Marva J. Dawn) 초청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잘 알고 있는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의 영성에 ‘약함의 영성’이라는 독특한 세계를 표현하고 있는데, 저는 그 중에서 ‘각 시대의 어떤 가치들이 유지되어야 할 것인가?’라는 언급에서 집중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예배라는 독특한 영성의 경험은 수 천 년을 지나오면서, 수많은 옷을 바꿔입어가면서 변화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전해진 독특한 가치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드림’과 ‘받음’이라는 진자운동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기독교 역사 2000년을 통틀어서 볼 때, 설교 중심의 예배는 그 역사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종교개혁이 발생했던 1500년대 이후에 와서야 설교 중심(take)의 예배가 자리를 잡았고(물론 의식적인 행위들도 있었고), 그 이전 1500여년은 의식적인 행위들(give)이 예배의 주류 스타일이었습니다(물론 설교도 있었습니다). 기독교 예배는 이렇게 진자운동을 하면서, 최근에 와서는 무게중심을 찾아서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드림’과 ‘받음’, 이것이 각 시대마다 유지되어온 예배의 가치일 것입니다.

   사실 나이 많은 분들은 ‘드림’에 인색합니다. 그 분들은 설교만을 듣기 위해 온 분들 같습니다. 찬양시간이 다 끝나야지 어슬렁어슬렁 등장하는 분들입니다. 창조주이며 구원자이고 인도자이며 위로자이신 하나님에 대해서, 그 어떠한 영광을 드리기도 전에 찬양은 끝나버리고 맙니다. 반대로 젊은 분들은 ‘받음’에 인색합니다. 그 분들은 찬양을 하기 위해서 온 분들 같습니다. 신나게 찬양하다가 설교자가 단위에만 올라가면 수면모드로 전환합니다(특별히 찬양팀원들이 더욱 그렇습니다: burn out!). 창조주이며 구원자이고 인도자이며 위로자이신 하나님에 대해서, 그 어떠한 메시지를 받기도 전에 이미 메시지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3) ‘드림’과 ‘받음’ 그리고 ‘반응’으로의 예배

   저는 우리가 예배에 대한 몇 가지 키워드를 공유했으면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개인적으로 예배에 대해서 생각했던 것을 나누기 원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배를 ‘드림’과 ‘받음’ 그리고 ‘반응’으로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18장과 이사야 6장의 해석에서 깨달은 바입니다. 창세기 18장은 아브라함이 세 천사(그 중에 계시는 여호와)의 마음을 어떻게 ‘쾌활케’ 했으며, 그 결과를 말해줍니다. 이사야 6장은 이사야가 성전에 가득했던 여호와의 영광을 경험했던 일을 말해줍니다.

   이 두 사건 모두 예배의 관점에서 볼 때, 우선적으로 그들은 ‘드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목숨을 다한 열정[100세 가까운 할아버지가 뙤약볕을 맞으면서까지 ‘급하게’ ‘달려서’ 일하고 있다]과 최선의 선택[정치적 위기 가운데에서 예배의 장소를 찾으며, 스랍들의 행위는 단순한 보여줌이 아니라, 이사야의 갈급한 상황의 빛 아래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받았습니다’: 이들 모두는 하나님의 약속과 뜻을 받았습니다(열방[소돔과 고모라]과 민족[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그들은 ‘반응’했습니다(소돔을 향한 아브라함의 중보기도와 이사야의 헌신). 저는 그래서 이러한 ‘드림’과 ‘받음’ 그리고 ‘반응’으로서의 예배라는 생각이, 예배드리는 우리들에게 언제나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높이는 일에 내가 붉은 악마보다 더욱 열정적으로 땀을 흘렸다면, 당신은 예배자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내 민족과 열방을 향해서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지를 설교자의 선포를 통해서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면, 당신은 예배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당신의 삶의 어떤 부분이 변화될 필요성을 느끼고 과감히 삶을 바꾸겠다고 결단한다면, 당신은 예배자입니다.


2. 하나님을 아는 예배자

  1) 이름: 출애굽기 3장: 야웨(여호와)-“지금 너와 함께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제 강의의 중심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찬양을 한 곡 드리도록 합시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by. Bob Fitts)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이름 높여 드립니다.

           주의 나라 찬양 속에 임하시니 영광의 주께 찬송하네

           전능하신 하나님 찬양 언제나 동일하신 주

           전능하신 하나님 찬양 영원히 다스리네

           (후렴) 나 주의 이름 높이리 나 주의 이름 높이리

                    하늘 높이 올린 깃발처럼, 나 주의 이름 높이리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한 번쯤은 불렀을 영향력 있는 찬양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토를 달기 위한 것은 아니지만, 무엇인가 생각할 여지를 남기고 있기 때문에, 이번 강의를 위해서라도 열린 마음으로 함께 생각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저는 이 찬양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찬양을 통해서 찬양 속에 임하시는 주의 나라와 영광을 경험합니다. 그 이유는 찬양의 내용처럼, ‘우리가 주의 이름’을 높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이름을 높인다’라는 표현이 4번이나 나옵니다. 그런데 그 이름은 실상 정확하게 나와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저는 ‘목사님’입니다. (제 아들이 있는데, ‘아빠는?’하면, ‘목사님’합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저의 이름이 아닙니다. (언젠간 저는 제 아들에게 저의 이름을 가르칠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이름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르지만, 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그냥 ‘하나님’이라고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침례교인입니다. 그래서 신약성서에서 세례라고 되어있는 부분을 굳이 침례라고 읽습니다(마 28:19). 사실 원어는 ‘밥티조’라고 되어있어서 번역하기 쉽지 않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세례와 침례를 나누는 것 자체를 신학적으로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신학공부를 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것만큼 안타까운 일은 없다’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3장은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되는 사건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시면서 다음과 같이 당부하십니다(15절): “나는 여호와라 ...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이름)니라” 히브리어 원어의 표현은 간단합니다: “여호와 이것이 내 이름이다 대대로 기억하라” never forger it!

   그런데 참 아이러니 하죠? 우리는 여호와라는 이름에 참 어색합니다. (하하와 정형돈의 사이처럼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너를~♪’) 차라리 우리는 ‘주’ 혹은 ‘하나님’ 혹은 ‘아버지’라는 표현을 선택합니다. 사실, 그게 더 익숙해서 그럴 겁니다. 혹은 기독교적 전통이나 그 반대의 경우에서 원인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겁니다. 조금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기독교적 전통이란 바로 이런 겁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면 전통적으로 ‘아도나이’ 우리말로 ‘주’라고 읽었기 때문에, 결국 ‘주’라는 말이 더 익숙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번역의 번역 원칙도 이를 따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나중에 더 자세하게 설명하겠지만, 그러한 전통이 신앙을 더욱 화석화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엔 기독교적 전통에 반대되는 경우를 봅시다. 바로 이런 겁니다. 여호와라는 말을 쓰면, 마치 여호와의 증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인식되는 것입니다. 이단들이 쓰는 말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 말이 더욱 어색하고 멀어지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오히려 우리는 적극적으로 여호와의 증인에게서 ‘여호와’라는 귀한 말을 빼앗아 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혹 어떤 분들은 십계명의 말씀을 들고(출 20:7),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했다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만약 그렇다면 십계명의 내용 자체를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밝혀질 것입니다. 이런 저런 것 다 떠나서, 제가 생각해볼 때,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익숙하지 않아서입니다. ‘여호와!’ 어색하잖아~

   사실 우리는 ‘여호와’보다는 ‘여호와 이레’ ‘여호와 샬롬’ ‘여호와 닛시’ ‘여호와 �마’가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서를 조금만 자세히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많이 아는 여호와 이레는 그 땅의 이름입니다(창 22:14). 기드온이 쌓은 단의 이름이 ‘여호와 샬롬’입니다(삿 6:24). 모세가 쌓은 단의 이름이 ‘여호와 닛시’입니다(출 17:15). 하나님이 장차 세울 새 예루살렘의 성읍의 이름이 ‘여호와 �마’입니다(겔 48:35).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이름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3장 15절은 변치 않은 여호와의 명령인 것입니다: “여호와 이것이 내 이름이다. 대대로 기억하라.”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렇게 강조한 것은 반대로 우리가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고 또한 부르지 않을 이름이 될 것을 경고하시기 위함이 아닌가 싶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렇기도 하구요! 정말로 그렇습니다. 시편을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시편은 5권으로 나뉘는데, 1권은 대부분이 다윗이 쓴 것으로 1권만 해도 ‘여호와’라는 이름이 곳곳에 나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 18:1)” 그렇지만 2권은 여호와의 이름은 사라지고 하나님(‘엘로힘’)이 대신하게 됩니다.1) 생생하게 경험되어지는 개인적인 신앙이 종교적인 옷을 입고 조금씩 추상화되면서 공동체를 위한 신앙으로 변화되고 있는 모습입니다. 쉽게 말해서, 이제 많은 사람들은 다윗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마음껏 부르면서 그 개인적인 신앙의 맛과 멋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다윗과 같은 생생한 예배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춤을 추며’ 찬양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다윗과 다른 사람들의 가장 큰 비교는 ‘춤을 추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사귈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저는 다윗과 다른 사람들의 가장 큰 비교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부를 수 있는 예배자’라는 것으로 강의의 중심내용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부를 수 있는 예배자’이십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부를 수 있는 예배자’가 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교회가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부를 수 있는 예배자’가 되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강의를 하려면 이 시간으로 정말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모든 과정들과 설명들을 일일이 나열하지는 않겠습니다. 정말로 필요한 부분들만을 몇 가지 정리하는 수준으로만 설명하겠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서는 질문할 내용들이 수도 없이 많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모든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이 시간에 불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다른 채널을 통해서 여러분들과 의견교환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 여러분들 중에서는 마음이 쉽게 열리지 않은 분도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은 제가 여러분들에 비해서 더욱 전문적인 부분들을 전하는 시간이므로, 여러분의 신앙에 부딪힘이 없이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일단 여러분들이 명심하실 사항은 저의 강의는 저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세계적인 학자들의 걸러지고 걸러진 일종의 합의된 의견이고, 순수하게 성서해석적인 부분이라는 점입니다.)

   아까 우리가 읽은 바와 같이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모세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사실 ‘여호와’라는 발음은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여호와’보다는 ‘야웨’라는 발음이 더 정확합니다. 이것은 히브리어를 연구한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이고, 초대교회 이후의 교부시대의 기록들에도 하나님을 ‘야웨/야베(Iaoue/Iabe)’라고 기록했습니다.2) 사실 ‘할렐루야’하지 ‘할렐루여’하지 않지 않습니까? 저는 어떻게 부르는가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는 누가 뭐래도 ‘성룡’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당사자인 청룽이 못 알아듣더라도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이름의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야웨’라는 이름을, 단지 발음을 위해서만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을 향한 하나님 자신의 핵심적인 의지를 보여주시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3)

   그렇다면, 그 핵심적인 의지라는, 그 이름의 뜻은 과연 무엇일까요? 결론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은 지금 여기에 계신다’라는 뜻입니다. 사실 출 3:14절에 우리말 성경에 있는 바와 같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는 구절의 원어를 보면, ‘스스로’라는 말이 없습니다. 아마 영어성경을 봤던 분들이라면 수긍할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I am that I am이라는 짧은 구절에서 엄청난 고민과 묵상과 은혜와 감격을 누렸습니다.4) 저는 여기에 한 가지만 더 하고 싶습니다. 바로 성서자체의 메시지를 더하고 싶습니다. 사실 14절에 나온 원어는 12절에서 먼저 나옵니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의 뜻은 가장 단순한 의미입니다. ‘시간이 있기 전에 내가 있었다!’라는 형이상학적인 의미도 아니고, ‘모든 신이 있기 전에 내가 있었어’라는 철학적인 의미도 아니며, ‘나는 나야! 내 이름을 알 것 없어!’라는 비인격적인 의미도 아닙니다. ‘야웨/여호와’의 뜻은 가장 간단합니다: “난 지금 여기에 있다!” 그렇습니다. “모세야! 난 지금 여기에 너와 함께 있는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출 4:1(“...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여 ... 이르기를 ‘여호와[여기 함께 있는 분]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이 이해가 되는 겁니다: 여기에서 모세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어떻게 ‘야웨’ 즉 ‘여기에 있는 하나님’이라는 게 말이 됩니까? 라고 묻는 것입니다. 반대로 ‘야웨’를 믿지 못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 하나님이 어디 있단 말이냐?’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성모독이며 바로가 행한 죄입니다.

   무서운 밤길을 걷는 어린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돈 많고 힘이 쎈 외국에 있는 아버지’가 아닙니다. 바로 옆에서 함께 걷는 아버지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도, 이삭의 하나님도, 야곱의 하나님도 모두 동행했던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그게 바로 야웨입니다. ‘지금 여기에 나와 함께 있는 하나님(신)’ 이것이 바로 우리의 첫 단추이자, 가장 중요한 이해입니다.


  2) 성막과 성전: “함께 가심”의 청사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 즉 ‘야웨/여호와’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이름의 의미와 합당한 발음은 알아봤지만, 저는 편의상 여러분들에게 익숙한 ‘여호와’로 진행하겠습니다.) 저는 더 나아가 ‘정말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고 싶어 하시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이, 단지 그 이름으로만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있다’라고 한다면, 그 하나님은 생명 없는 우상에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사 46:6-7).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이, 자신이 직접 가르쳐주신 이름과 같이 정말로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했는가’를 살펴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Yes!’입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철저한 계획과 섭리 가운데 실제로 역사적으로 나타납니다. 이후의 저의 강의의 방향은 바로 이점을 성서 안에서 밝혀내는 것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첫 번째로, 바로 성막과 성전입니다.

   여러분들은 성막과 성전을 직접 눈으로 본 일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서에서 나온 성막과 성전은 지금은 모두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성서를 통해서 나름대로 재구성해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시간에 미니어처를 만들듯이 성막과 성전을 일일이 만들지 않겠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성막과 성전을 그냥 주신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것입니다.

   성막에 대한 설계도는 출 25장부터 31장까지 나옵니다. 이 부분은 모세가 40일을 금식하며 시내산위에서 여호와의 부름을 받은 장면으로, 더욱 놀라운 점은 여호와는 모세에게 7번 말씀하신다는 점입니다(25:1; 30:11; 30:17; 30:22; 30:34; 31:1; 31:12). 조금 힌트를 드리자면, 일곱 번째 말씀에서는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성막에 대한 내용을 말씀하시다가 ‘안식일’을 말씀하시니 조금 생뚱맞죠? 그러나 한 번만 더 생각하면 오싹해집니다. 그렇습니다! 이 부분은 마치 창세기 1장의 창조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좀 더 묵상하게 되면, 하나님의 의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성막의 제작은 천지창조의 사건과 버금가는 사건이라는 의미입니다. 당연하지요!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25:8)”를 가르쳐주시는 상황인데요!

   모든 부분을 다룰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성막과 더 나아가 성전에 여호와의 의지가 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구체적으로 계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부분만 생각해보겠습니다. 출 26장은 성막에 대한 청사진입니다. 성막은 쉽게 말해서 천입니다. 미터법 통일제가 시행되기 전이므로 ‘규빗’이라는 생소한 단위를 쓰겠습니다(사실 규빗은 ‘팔꿈치에서 손끝까지의 길이’로 고대 사회에서 일반적인 단위입니다). 천을 10개를 만드는데, 길이는 28규빗, 넓이는 4규빗입니다. 이것을 다섯 개로 연결해서 두 겹으로 만듭니다. 그러면 길이는 28규빗, 넓이는 20규빗이 됩니다. 이게 바로 성막의 크기입니다. (지금 부터는 약간의 긴장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15절 이하에 보면 나무로 벽을 만들게 되어있습니다. 이 부분이 열쇠입니다. 널빤지가 한 쪽 면에 20개가 필요한데, 그 널빤지가 높이가 10규빗, 길이가 1규빗 반입니다(16절). 그러면 한 쪽 면은 30규빗이 됩니다(18절). 성막 뒤편에는 널빤지가 6개가 필요합니다(22절). 그러면 9규빗이 됩니다. (파워포인트 그림으로 정리) 만약 그렇다면, 나무로 만든 벽과 천으로 만든 성막은 전혀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17절과 23절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널빤지가 20개면 20규빗이 되는 것이고, 8개면 8규빗이 되는 것입니다(사실 그렇게 포개어야 튼튼하게 지탱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무벽과 성막천과는 찰떡궁합으로 옷이 맞는 겁니다. 길이가 20규빗, 높이가 10규빗, 폭이 8규빗! 바로 이렇게 만들어진 성막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는 여호와다!’ 즉 ‘나는 지금 여기에 너희들과 함께 간다!’라는 것을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성막으로 그친 것이 아닙니다. 성전에서까지 이어지신 것입니다. 열왕기상 6장은 성전건축을 말하고 있는데, 20절에 보면 지성소가 나옵니다. 길이가 20규빗, 높이가 20규빗, 폭이 20규빗입니다. 그리고 지성소 안에는 날개달린 그룹을 두 개 만들었습니다(24절). 높이가 10규빗, 날개 길이가 5규빗으로 그룹의 날개가 중앙에서 서로 닿습니다(27절). 이제 열왕기상 8장을 보면 놀라운 표현이 나옵니다(4절): “여호와의 궤와 회막(성막)과 성막 안의 모든 거룩한 기구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6절에 보면 지성소에 여호와의 궤가 그룹의 날개 아래로 들어갔다고 나옵니다. 저는 여기에서 단지 여호와의 궤만 성전에 들어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막의 크기가 그룹들 사이의 공간에 딱 들어맞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허황된 추측이 아닙니다. 시편 27편 4절을 보면, ‘여호와의 집, 그 전’ 즉 성전이 나오고, 5절에 보면 ‘초막, 그 장막 은밀한 곳’ 즉 성막이 이어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시 26:8; 61:5; 74:7 등)

   성막과 성전은 단순하게 외형적으로 하나님이 살 집을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천지를 만드셨던 하나님(창 1장의 일곱 번 말씀하심)이 성막으로 오시면서(일곱 번의 말씀) ‘그 하나님이 바로 여기에 우리와 함께 가신다!’라는 의미를 확실하게 보여주셨고, 또한 성막이 성전으로 바뀌면서 핵심되는 공간에 여전히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라는 것은 변치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이름, 즉 ‘우리와 함께 하심’입니다.

   사실 이러한 깨달음은 이후의 구약 예언자들의 핵심 사상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약간 어려운 내용일지도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잘 따라오셨기 때문에, 여기에서 잠깐 철학적인 질문을 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철학적’이라고 해서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마음’을 만드신 이유가 무엇일까?’라는 질문입니다. 뭐지요? 물론 ‘내가 안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는 모릅니다. 예레미야서는 창조에 있어서 그 생각의 깊이가 상당히 깊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전의 상황과 매우 유사한 본문이 딱 한 가지 있는데, 바로 예레미야서에 있습니다(4:23-26). 그 정도로 예레미야서는, 다른 말씀도 그렇지만, 하나님과 인간의 이해에 깊은 통찰력을 줍니다.

   그러한 예레미야서에서 ‘마음’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과거에 ‘마음’은 반역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왠지 마음이 비뚤어지면 만사가 뒤틀린 것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은 그 마음이 비뚤어져서 결국 나라가 망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마음잡기’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라고 말씀합니다(렘 17:5-8).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단서를 던져줍니다. 이는 반대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마음’을 만드신 이유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웨/여호와, 내가 마음에서 너와 함께 거하리라.’

   비록 역사상 이스라엘은 실패해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나라가 멸망당했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의지가 꺾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의지는 그 누구도 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31장 33절은 이렇게 약속합니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렇습니다. ‘내가 나를 위해서 만들었던 ‘마음’이라는 공간에, 결국엔 들어갈거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그분은 야웨/여호와이시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과 성령님: “함께 가심”의 실제

   이러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더욱 놀라운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바로 예수님과 성령님입니다. 예수님과 성령님은 하나님의 함께 가심의 실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구원의 상태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과 함께 있을 없는 것’, 즉 에덴동산에서의 추방이 바로 죄입니다. 모든 인간이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없는 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긍휼에 뛰어나신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를 비워 사람이 되어서 우리와 함께 있고 하시고자 우리의 죄를 없이 하신 것입니다.

   임마누엘이신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사역이 있다면 바로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 십자가에 대해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엡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더 나아가 바울 사도는 예수님으로 새로워진 우리들의 상태를 이렇게 말합니다(엡 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그렇습니다. 여호와, 즉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얼마나 치밀한 것인지 다시금 발견하게 됩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싶어 하시면,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알기 쉽게 가르쳐주십니다(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사실 성령이라는 표현은 구약에서부터 있어왔지만, 그 의미는 바람/숨과 같이 비인격적인 측면이 강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보혜사’ 즉 ‘파라클레토스’라는 개념으로 성령을 소개합니다. 고대 로마사회에서 ‘파라클레토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법정에서는 변호사, 일상에서는 개인비서와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능이 아니라 ‘실제로 함께 간다’라는 실제성에 있습니다(17절).


  4) 계시록: “함께 가심”의 사명

   제가 이 강의를 처음 준비하면서, 나름대로 정리된 내용은 여기까지였습니다. 사실 이 정도만 다루어도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저는 두 권의 책을 읽고, ‘아! 여기에서 멈추면 안 되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첫 번째 책은 올해 번역되어 출간된 ‘문제작’ [만들어진 신]입니다. 저는 그 책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를 지적할 수 있겠지만, 한 가지가 주목되었습니다. 결국, 현실이 문제였습니다. 도킨스는 종교인들 때문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저는 반대로 생각해봅니다. ‘종교인들 때문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복을 받았다면 어떠했을까?’라고 말입니다. (사실 한 주전에 SBS에서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프로에서 기독교의 일면에 대해서 사회적 비판을 한 적도 있습니다.)

   제가 여기에서 답을 내리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런데 저는 우리의 선배들과 지금의 기독교는 어떤 부분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신약성서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책에서, 저자는 초대교회의 모습이 담겨진 글을 소개합니다(약 130년 어간에, 아리스티데스의 [변증]).

그들은 그들을 압제하는 자들의 마음을 풀어 주고, 친구로 만든다; 그들은 원수들을 선대하며 서로를 사랑하고, 과부들을 무시하지 않고, 고아를 가혹하게 다루는 자로부터 구해낸다. 가진 자는 가지지 않은 자에게 나누어 주면서 조금도 뻐기지 않는다. 낯선 사람을 보면, 그들은 그를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여서 마치 형제처럼 그를 환대한다; 그들은 서로를 육신에 따른 형제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및 성령을 따라 형제라고 부른다. 그들의 가난한 자들 중 한 사람이 세상에 떠날 때마다, 그들 각자는 능력에 따라 그에게 신경을 쓰며 세심하게 그의 장사(葬事)를 돌본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함께하심은 곧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사명으로 다가옵니다. 하나님이 여호와가 되셔서, 즉 지금 여기에 나와 함께 하심이라는 것이, 단지 내가 복을 받고, 장차 천국에 가는 티켓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계시록의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요한계시록을 강의하지 않겠습니다. 단지 앞 서 말한 두 번째 책을 읽다가 우연하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 강의를 마무리하기에 좋은 내용이라고 생각한 것일 뿐입니다.

   계시록 21장은 장차올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저는 21장이 문자 그대로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21장을 문자 그대로 본다면, 천국도 아파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성막과 성전의 개념을 이어서 생각한다면, 우리는 더욱 놀라운 점을 깨닫게 됩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 하늘에서 내려오니(2절), ...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3절) ...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16절) ...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22절) ...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22:5)’ ...” 그렇습니다. 장과 광과 고가 같이 네모반듯한 모양이 된 이유는, 우리를 아파트에 가두기 위함이 아니라, 구약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위함입니다. 성막과 성전에서와 같이, 함께 하셨던 그 하나님이, 지금도 비록 환난을 당하고 아직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삶을 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믿음으로 기다리며 신앙을 지켜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라는 내용입니다. 그렇습니다. 계시록은 성안에 성전이 없다 말합니다. 당연하지요. 이미 안과 밖은 구별이 없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계시록의 말씀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들은 시대적인 사명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함께 가심’이라는 것이 단순하게 나의 자랑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사명, 즉 십자가로 형상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만들어진 신]에 대한 기독교적 대응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런 삶을 여러분들과 여러분의 교회가 만들어 나가시기 바랍니다.


  5) 정리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예배자’에 대해서 이론적인 강의를 마치면서 정리해 봅시다. 저는 하나님의 이름 즉 ‘야웨/여호와’라는 이름의 의미에서 들어있는 하나님의 본질 중의 한 가지를 집어보았습니다. 이 이름은 단순히 구별을 위한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함께 하심에 대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라는 이름이 의지적으로 역사 안에서 다양하게 성취되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성막과 성전, 그리고 임마누엘 예수님과 파라클레토스 성령님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함께 하심은 이제는 계시록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되는 우리들에게 일종의 십자가라는 사명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예배자’라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가는 예배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에게는 마음이라는 공간이 있다고 흔히들 말합니다. 정말 과학적으로 증명되지는 않지만, 마음이라는 공간을 하나님은 태초부터 만드신 것 같습니다(렘 31:33). 시인들은 마음이 연인들을 위한 사랑의 공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마음이 하나님을 위한 공간이라고 믿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예배자이며, 하나님과 함께 가는 예배자’입니다. 내 마음에 지금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음을 자각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예배자인 것입니다.

   

3. “함께 가는” 예배자

   그렇다면 ‘하나님과 함께 가는 예배자’의 삶은 과연 어떠해야 할까요? 사실 이 모든 내용은 구약/신약 성서에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여러분들 모두가 ‘하나님과 함께 가는 예배자’로 살면서 의식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바로 구체적인 그것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몇 가지 실제적인 면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두 부분을 생각해볼 텐데, 우선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먼저 보고, 다음으로 공동체와의 관계성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1) 하나님과 함께 가라:

   ① 말씀의 ‘쨉’을 훈련시켜라;

   시편은 신학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예배자들은 최고의 신학자들이었습니다(대상 9:33). 저는 그래서 ‘예배자들은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신학적으로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것을 아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을 알고 있는가’입니다. 두 가지만 제시하겠습니다: 첫째로, 내가 지금 누구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 하며, 그래야 단순한 열정을 뛰어넘은 예배의 화신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사람들 앞에서 장기자랑을 하고 있는가? 내가 지금 우상 앞에서 살풀이를 하고 있는가? 내가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다면 나와 함께 예배를 드리는 신앙공동체가 어떠해야 할까?

   두 번째로 말씀을 쨉을 훈련시키십시오. ‘나의 신학은 위대한 서적에 나온 것이 아니라, 나의 평생 갈고 닦은 큐티에서 나온 것이다’라는 말을 좌우명으로 만들도록 하십시오. 단 무엇인가 쌈빡한 것을 찾아내기 위한 큐티를 경계하십시오. 어떠한 말씀이든 그 말씀이 내게서 무엇인가 쌈빡한 것을 찾을 수 있도록, 철저하게 말씀 앞에 녹아지는 훈련을 지속하십시오. 고형원의 [부흥 예배자]를 추천합니다.


   ② 기도의 ‘사귐’을 방해받지 마라;

   사실 저는 기도에 대해서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는 절대적으로 필수불가결입니다. 기도는 노동이며 동시에 사귐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동만 있는 기도는 종교인으로 굳어질 수 있으며, 사귐만 있는 기도는 영지주의로 와해될 수 있습니다. 절묘한 조화가 필요합니다. 김영봉의 [사귐의 기도]를 추천합니다.


   ③ 생활의 ‘함께’를 누려라.

   이스라엘의 예배는 ‘실제로 함께 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행동을 높이고 기억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은 정말로 하나님이 여호와로서 나에게 역사했기 때문에, (물론 그럴 것을 기대하면서!) 그러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나의 예배가 추상적이며 이론적인 하나님을 대상으로 드려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나의 예배가 생활 속에 함께 하신 하나님을 높이는 예배가 되도록 하십시오. 때로는 예배인도팀이 모여서, 서로의 간증(좋건/나쁘건)으로 예배의 이유를 계속해서 발견해가는 훈련을 하십시오. (주 여호와는 광대하시도다~♪)


  2) 공동체와 함께 가라:

   ① 시편예배의 공동체성(136편);

   시편 136편은 예배의 공동체를 잘 보여주는 본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창(“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과 후창(“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의 스타일은 공동체에 대한 배려를 의미합니다. 시는 철저하게 쌍을 이룹니다(A A'). 즉 부르기 쉬우며 이해하기 쉽다는 말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볼만 합니다: 나의 예배인도는 배려의 예배인가?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의 예배인가?


   ② 예수님의 비유;

   예수님은 탁월한 교육가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가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가장 많은 부분이 십자가 사건이었지만, 그 다음으로는 비유를 들 수 있을 정도입니다. 왜 비유일까요? 기억이 잘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쉬웠기 때문이겠지만, 그것이 당시의 헬라시대의 사람들의 전형적인 스타일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을 적용해 본다면, 나의 예배인도를 통해서 우리 공동체는 쉽게 하나님과의 ‘드림’ ‘받음’ ‘반응’으로 이어져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드린 예배가 기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예배가 기억되어서 나의 일주일의 삶을 책임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예배인도자라면, 단지 찬양하는 그 시간만 맡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작은 표정, 여러분의 준비된 기도, 여러분의 진심이 담긴 열정 때문에,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공동체는 그 예배를 기억하게 됩니다. 여러분 때문에 일주일이 힘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③ 초대교회의 행동을 통한 예배의 극대화

   초대교회는 행동을 통한 예배의 극대화를 보여주었습니다. (사실 구약시대부터 ‘제사’라는 형식이 그렇기도 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특별히 ‘식사’라는 일상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신앙의 유연성이 있었습니다(행 2:46-47).

   저는 이러한 유연성이 21세기에 참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상을 일상으로 그치지 않고 신앙 안에서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어떤 분들은 신앙의 정통성을 중시해서, 세상의 문화와의 차별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사실 성서 자체는 하나님이 세상을 얼마나 포용하고 계시는 가를 절대적으로 보여줍니다. 예를 들면, 시편의 멜로디 중에는 목자들의 노래도 있었을 정도입니다(시편 22편).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이것은 정말 당연한 것입니다.

   실제로 여러분의 공동체에서 고민해 보십시오. 저는 (청년부 예배이다 보니) 되도록 문화와의 호흡을 중시하려고 합니다(거위의 꿈, 프리허그). 오히려 보수적인 청년들이 저를 막을 정도입니다. 예배에 일상이 얼마나 포함될 수 있는가에 여러분 교회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마치며

   앞서 말씀드렸듯이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제 우리는 보다 건강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공동체가 건강한 예배자가 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물론 이러한 일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반발도 있을 수도 있으며, 기존에 잘해오던 것에 괜한 부담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책임있는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예배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을 아는 예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