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aching/[설교: 얻어 먹은 주의 말씀]

[감사 2] 다윗과 아비가일

진실과열정 2007. 11. 17. 15:44
 

감사 2.


제목: 다윗과 아비가일

본문: 사무엘상 25장



1. 신앙인과 종교인


   비슷하지만 다른 뜻을 가지고 있는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르다’와 ‘달다’가 있겠지요. 이것은 일본어에 익숙한 분들이라면 많이 느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달라요’와 ‘달아요’가 꽤 비슷하기 때문이지요. 또 ‘다르다’와 ‘틀리다’도 있겠습니다. ‘너와 나는 다르다’와 ‘너와 나는 틀리다’ 중에서 우리는 되도록 앞에 것을 많이 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다르다’라는 말은 상대방을 인정하는 태도가 들어있지만, ‘틀리다’라는 말은 상대방을 부정하는 태도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녀가 이성교제를 한다거나, 혹은 어떠한 회의가 있을 때, ‘넌 틀렸어!’라고 말하기보다 ‘우린 좀 다른 것 같아’라고 말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 입니다. 이제부터 우리의 생각이나 말이 똑같지 않더라도, ‘우린 좀 다르네’라고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줄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비슷하지만 다른 뜻을 가진 말 중에서 ‘신앙인과 종교인’을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과연 다른 뜻이 있을까요? 물론 너무나 익숙한 말이어서 정확한 뜻을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만, 이 시간에만 잠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먼저 신앙이라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를 믿고 받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믿음’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리고 종교라는 말의 뜻은, ‘신을 믿음으로써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행복을 얻고자 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요? 저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목적에 있습니다. 신앙, 즉 믿음이라는 말은 그 목적이 ‘관계’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은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에서 그 목적을 둡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창조주이자 구원자로 따르는 일에 집중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종교는 그 목적이 ‘문제해결’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종교는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보다는 나의 삶에 연관되어있는 문제에 집중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과 종교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과 종교는 다릅니다. 내가 하나님과 아버지와 자녀(아들/딸)라는 관계에 집중하고, 어떻게 하면 그 관계를 더욱 깊고 뜨겁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바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어떻게 우려먹어서 나의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에 집중하다면, 그것은 바로 종교인의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과 종교인은 겉모양은 비슷하지만, 그 중심은 전혀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뭐가 신앙인이고 또 뭐가 종교인일까요? 저는 다윗과 사울의 모습에서 좋은 예를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대로 사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최우선의 목적으로 잡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왕의 자리를 유지하는 것, 즉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굳건하게 유지하는 것을 최우선의 목적으로 잡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삼상 15:1), 백성들에게 전리품을 나누어 주어서 자신의 왕의 자리를 더욱 굳건하게 하려했던 것입니다(삼상 15:15). 결국 사울은 하나님을 따른다고는 했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려고 했던 ‘종교인’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점에서 정말 사울과 대조됩니다. 다윗은 철저하게 하나님에게 이용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왕으로 삼기 위해서 기름 부었다는 사실을 믿고, 철저하게 그 운명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었을 때, 자신의 칼을 도로 집어넣었던 수많은 일들을 압니다(삼상 24; 26). 다윗도 사울과 같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떤 일이 만나더라도 자신의 목적을 최우선으로 두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철저하게 하나님과의 관계만을 최우선적인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심지어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나서 도망가는 중에서 조차, 다윗은 자신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삼하 15:25,30,32). 우리가 조금만 더 신경을 써서 성서를 읽게 된다면, 다윗이 지금 감람산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놀랍게도 1000년 후에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즉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했던 것과 같은 내용이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정말로 다윗은 우리에게 신앙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줍니다. 바로 여러분이 다윗과 같은 신앙인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렇게 신앙인과 종교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차이를 보여주지만, 사람을 대하는 모습에서도 차이를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종교인은 사람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울은 자신의 목적에 맞지 않으면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죽입니다. 여러 번 그런 일이 있었지만(삼상 14:29), 특별히 삼상 22장에서 사울은 다윗에게 떡을 주었다고 놉 땅의 제사장들을 85명이나 죽이고 맙니다(18절). 종교인 사울에게 사람이란 단지 자신의 성공을 위한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을 어떠했을까요? 다윗은 사울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은 사람을 수단으로 보지 않습니다. 다윗은 사람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서로 연합해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나가는 공동체로 생각합니다. 즉, 다윗은 자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이 미리 자리를 정해주신 것으로 여겼다는 겁니다. 이것은 굉장한 생각입니다. 사실 고대사회에서 아직 인간의 가치가 오늘날처럼 높아지지 않았을 시절에 다윗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혁신과도 같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사울과 같이 사람을 다루는 일이 보편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부분에서 신앙의 힘을 다시 느끼게 됩니다.

 

 

   2. 다윗과 아비가일


   저는 지금까지 신앙과 종교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비슷하게 쓰는 말이지만, 우리는 신앙인이 되어야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신앙인의 특징이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독특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신앙인은 만나는 사람들을,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신앙인은 만나는 사람들을,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없으면 안 되는 그런 공동체로 생각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저는 이런 측면에서 우리의 감사가 그 폭이 더욱 넓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인으로서 우리의 감사가 단지 하나님에게 드려질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 안에서 감사하는 것으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이것이 신앙인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생생한 예를 성서에서 찾아서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바로 다윗과 관계된 인물로 삼상 25장에서 너무도 자세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25장을 찾아봅시다. 일단 우리는 25장 앞뒤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24장과 26장의 내용은 같은 내용입니다. 즉,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살려준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내용을 가르쳐줍니다. 다윗은 자신이 만나는 사람을, 즉 사울을 수단으로 두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 안에서 움직이는 ‘공동체’로 여겼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25장 1절은 새로운 상황을 보여줍니다:


사무엘이 죽으매 온 이스라엘 무리가 모여 그를 애곡하며 라마 그의 집에서 그를 장사한지라 다윗이 일어나 바란 광야로 내려가니라


사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냥 읽는다면, 사무엘의 죽음은 24, 25, 26장에서 전혀 상관이 없는 내용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다윗이 지금 사울에게 쫓기는 상황 속에서 1절을 읽게 된다면, 왜 25장에 사무엘이 죽은 것이 기록되고 있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사무엘은 다윗의 후원자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 안에서 다윗이 움직이도록 직/간접적으로 공동체가 되어서 함께 일했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다윗도 그렇게 사무엘을 생각했기 때문에, 사무엘의 죽음은 다윗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움직였던 중요 인물이 빠져버린 것입니다. 톱니바퀴들이 세밀하게 움직이다가 핵심적인 톱니바퀴 하나가 쑥 빠져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25장은 사울의 위협을 말하는 24장과 26장 사이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 가를 잘 보여주는 중요한 본문이 되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실까요? 다름 아닌 한 명의 미련한 남자와 한 명의 아름답고 지혜로운 여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이루십니다. 우리 함께 삼상 25:2-3을 읽어봅시다:


마온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업이 갈멜에 있고 심히 부하여 양이 삼천이요 염소가 일천이므로 그가 갈멜에서 그 양털을 깎고 있었으니,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사가 악하며 그는 갈멜(갈렙) 족속이었더라


그렇습니다. 그 두 사람은 나발과 아비가일입니다. 저는 오늘 아비가일을 중심으로 하나님은 감사의 사람을 쓰시며, 이 아비가일이라는 여자가 사무엘이 죽은 다음에 그 빈자리를 채워주는 역할을 맡았음을 여러분들에게 설명할 것입니다.

   내용은 비교적 간단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서 이리저리 도망 다니게 되자, 먹을 것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비록 다윗은 도망자 신세였지만, 도적떼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도망을 다니면서도 주변의 사람들의 물건을 빼앗거나하는 그 어떠한 폐도 끼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유목생활을 했던 사람들의 양떼를 지켜주고 보살펴줄 정도로 친절을 베풀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다윗이 보호해주었던 나발의 양 무리를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부하들을 보내서 이리저리하니 우리에게 먹을 것을 좀 달라고 부탁합니다(5-8절):.


다윗이 이에 열 소년을 보내며 그 소년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갈멜로 올라가 나발에게 이르러 내 이름으로 그에게 문안하고 이같이 그 부하게 사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평강하라 네 집도 평강하라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 네게 양털 깎는 자들이 있다 함을 이제 내가 들었노라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들을 상치 아니하였고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그들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 네 소년들에게 물으면 그들이 네게 고하리라. 그런즉 내 소년들로 네게 은혜를 얻게 하라 우리가 좋은 날에 왔은즉 네 손에 있는 대로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노라 하더라 하라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소위 오늘날의 깡패조직을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조직원들이 보호비라는 명목으로 돈을 뜯어내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시대착오적인 것입니다. 고대사회에서 이러한 것은 일종의 질서였으며, 가장 합리적이면서도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성서 본문 자체가 매우 자세하게 지적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6절에, ‘평강하라’라는 말이 세 번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나발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하나님과 다윗 그리고 나발이라는 관계 속에서 다윗은 접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발이 어떻게 대답해야만 하는가를 알게 됩니다. ‘오! 당연하지요! 어서 가져가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그러나 나발은 앞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어리석은 길을 선택합니다. 나발의 대답을 읽어봅시다(10-11절):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이 말이 무엇입니까? 나발은 다윗에게 한 마디로 ‘No’를 외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히브리어 원어는 그 이유를 잘 설명해 줍니다. 나발이라는 이름의 뜻이 있습니다. 바로 ‘미련하다’입니다(잠 17:21). 나발, 즉 미련한 사람의 특징은 무엇이냐면, 자기가 지금 누리고 있는 삶을 전적으로 자신의 노력의 결과로만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그것이 히브리어 원어로 잘 드러납니다. 11절에서 나발은 세 번이나 자신의 소유를 분명하게 말합니다: ‘내 떡’ ‘내 물’ ‘내 고기’ 다윗이 세 번이나 ‘평안하라’라고 한 것에 대해서 나발이 세 번이나 부정한 것을 보면, 얼마나 지독한 이기주의에 빠져있는가를 알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나발, 즉 미련한 사람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도 없고, 또한 이웃도 없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17절을 보면, 심지어 나발의 하인조차도 나발을 싫어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주인은 불량한 사람이라 더불어 말할 수 없나이다’). 결국 다윗은 공의로운 심판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13, 21-22절):


다윗이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칼을 차라 각기 칼을 차매 다윗도 자기 칼을 차고 사백 명 가량은 데리고 올라가고 이백 명은 소유물 곁에 있게 하니라.


다윗이 이미 말하기를 내가 이 자의 소유물을 광야에서 지켜 그 모든 것을 하나도 손실이 없게 한 것이 진실로 허사라 그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는 도다.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것 중 한 남자라도 아침까지 남겨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이제 아시겠지만, 다윗이 심판을 하는 13절이 얼마나 놀랍게 기록하고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나발이 세 번이나 다윗을 부정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다윗 역시 세 번이나 ‘칼을 차라’라는 말을 통해서 공의로운 심판을 다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미련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칼뿐입니다.

   그러자 지혜로운 여자, 아비가일이 등장합니다. 그 이름의 뜻이 ‘내 아버지가 기뻐하신다’입니다. 그 이름의 뜻과 같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아비가일이 합니다. 그녀는 다윗이 없어서는 안 될 친절한 이웃이었음을 듣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아비가일은 내가 지금 이렇게 살 수 있게 된 일이, 자기들이 잘나서 된 것이 아니라, 다윗과 같은 이웃 덕분이었음을 인정하게 되었던 것입니다(15-16절):


우리가 들에 있어 그들과 상종할 동안에 그 사람들이 우리를 매우 선대하였으므로 우리가 상하거나 잃은 것이 없었으니, 우리가 양을 지키는 동안에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어 밤낮 우리에게 담이 되었음이라.


이에 아비가일은 칼을 들고 쳐들어오고 있는 다윗에게 찾아가 꿇어 엎드립니다. 이것은 단순하게 아비가일이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미봉책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비가일은 하나님이 하실 일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자 나발이, 10절에서와 같이, 다윗을 모른다고 했지만, 아비가일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비가일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다는 것을 알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아비가일은 지혜로운 여인일 뿐만 아니라, 신앙인이었던 것입니다. 아비가일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자신도 하나의 톱니바퀴로 움직이도록, 자신을 내어드린 여자였기 때문입니다. 아비가일이 하나님의 섭리를 얼마나 신뢰했는지 한 번 그녀의 말을 들어봅시다(28-29절):


주의 여종의 허물을 사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그렇습니다. 결국 나발은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다윗이 칼을 내리치지 않았지만, 나발은 죽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칼을 내리쳤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나발이 끝까지 어리석었다고 말합니다. 나발의 결과를 보십시오. 36절에 자신이 스스로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왕처럼 잔치를 열었지만, 37절에 다음날 아침 돌과 같이 되어서 죽었다고 말합니다. 감사할 수 있었던 지혜로운 아비가일은 다윗의 아내가 됩니다(42절):


급히 일어나서 나귀를 타고 따르는 처녀 다섯과 함께 다윗의 사자들을 따라가서 다윗의 아내가 되니라.



   3. 나와 이웃


   할렐루야!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를 깨닫고 감사합시다! 우리는 이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즉, 신앙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대로 살겠다는 도전을 가져야 합니다. 다윗과 계속된 아비가일을 통해서 깨닫는 신앙의 모습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에게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주변 사람들을 하나님이 보내주신 하나님의 톱니바퀴로 믿고, 그 주변 사람들에게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이것은 매우 쉽지만,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는 중요한 깨달음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만 감사와 사랑과 같은 신앙적 요소들을 쌓아나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서는 우리에게 전인격적인 신앙을 가르쳐줍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나와 나의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감사와 사랑을 발견하고 그것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이라는 톱니바퀴 대신에 하나님이 아비가일이라는 톱니바퀴를 집어 넣어주신 것을 보면,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할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당연시 여겨서는 안 됩니다. 특별히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 한사람 각각에게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른 새벽, 예배를 위해서 차량 운행을 해주시는 분들에게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새벽마다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분들을 위해서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남몰래 매 주일 예배당의 지저분한 곳을 깨끗하게 청소해주시는 분들을 위해서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매일 주옥같은 하늘의 말씀을 준비하고 선포하시는 목사님을 위해서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아침마다 주차를 위해서 봉사하는 분들을 위해서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곱게 입은 옷으로 웃으면서 주보를 나누어 주시는 분들을 위해서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이른 아침부터 어린 아이들의 신앙 성장을 위해서 헌신하는 교사들을 위해서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힘들게 연습을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양대를 위해서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매 주일마다 정성껏 식사를 준비하신 분들을 위해서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더러운 쓰레기를 분리해서 청소하는 분들을 위해서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예배 후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까지 차로 모셔다드리는 분들을 위해서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서로가 서로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것이 단지 우리만의 목적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위해서 우리가 하나의 작은 톱니바퀴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당신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당신이 움직였기 때문에 내가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감사합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 모두에게 감사하는 것이고, 결국 우리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것이 됩니다. 할렐루야!

   로마서는 아시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를 마무리하는 16장은 바울의 감사로 끝을 맺습니다. 바울은 단지 자신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감사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에 그들 모두가 하나의 작은 톱니바퀴처럼 역할을 충실히 담당했기 때문에, 감사했던 것입니다. 바울의 감사는 결국 하나님께 대한 감사였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우리가 계속되는 롬 16장을 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수원교회를 통해서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신앙공동체 안에서 서로에게 감사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실 것입니다. 우리 수원교회의 오늘과 내일이 바로 로마서 16장 28절이 될 것입니다.

 

 

 


2007.11.17

진실과열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