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aching/[설교: 얻어 먹은 주의 말씀]

룻: 사람의 의리, 하나님의 의리

진실과열정 2009. 8. 14. 13:07

제목: 사람의 의리, 하나님의 의리

본문: 룻기 2장 10-12절


“룻이 땅에 엎드려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어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주시기를 원하노라.”



 

몇 년 전에 이러한 유행어가 TV광고에서 히트를 쳤습니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그때가 2002년 즈음으로 기억합니다. 그러고 보니, 그때 참 좋았지요.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가 전 세계 경제를 흔들어 놓은 지도 한 참 지났지만, 아직도 세계는 우울한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캉스를 마음 놓고 떠나는 일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뉴스를 보니, 바캉스를 위해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프랑스 사람들조차도, 경제가 어려워서 피서를 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가까운 공원을 피서지 비슷하게, 모래 뿌려놓고 선탠을 하는 사람들이 해외토픽에 나온 것을 기억합니다. 자세한 신문기사는 여기를 클릭해보십시오.) 우리나라만 해도 비정규직이다, 정리해고다 해서 없는 사람들 더 비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가까운 평택에서 벌어진 쌍용자동차 사건은, 사람 사는 사회가 과연 이런 것인가 하는 뿌리 깊은 후회까지도 나오게 만듭니다.

 

 

        여러분, 어디 좋은 곳으로 피서 가셨습니까? (아쉬운 대로 우리는 ‘일박이일’이나 ‘패밀리가 떴다’라는 주말프로그램에서나 간접적으로 피서를 다녀오게 됩니다. 이러한 대리만족, 다시 생각해 보면, 뭔가 아주 심하게 잘못된 일임에 분명합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과 성서 속 피서 여행을 떠나보려고 합니다. 피서지라고 하면, 보통 때는 안가는 특별한 곳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아름답고 상쾌하지만 일상에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 그런 곳 말입니다. 성서의 피서지가 있을까요? 사실 어떻게 생각해보면, 모든 말씀이 피서지처럼 아름답고 상쾌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조금 엄격하게 생각해서 평소에 다루지 않았던 말씀들, 그 중에서도 아름답고 상쾌한 그럼 말씀을 찾아보겠다는 겁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룻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전체 4장으로, 총 85절밖에 되지 않는 아주 짧은 글입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금방 넘어가고 말 정도로 얇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도 매우 쉽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나라의 무인도에 가보면, 그곳이 보잘것없이 작은 곳이라고 할지라도, 거기에서 보이는 참으로 멋지고 아름다운 장관들로, ‘전 세계 어느 것보다도 여기가 최고다!’라고 할 정도로, 바로 룻기가 그러한 말씀이라는 것을 먼저 명심해두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세계 최고의 성서 주석가들의 연구서들이 있는데, 한 결 같이 룻기서가 구약에서 최고로 아름다운 글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내용이 쉬운지!’ ‘쉬우면서도 얼마나 잘 짜여 졌는지!’ ‘긴장도 있고, 등장인물들도 탄탄하다!’ 그렇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룻기의 이야기를 쉽게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룻기는, 이방 여인 룻이 이스라엘 사람의 며느리가 되어서 겪었던 어려움을 신앙으로 이겨낸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베들레헴에 기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한 가정이 모압이라는 곳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이 가정은 아버지 어머니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두 아들은 각각 모압 여인을 아내로 맞게 됩니다. 그러다가 비극이 시작됩니다. 모든 남자들이 죽게 된 것입니다. 왜 비극이냐 하면, 손자를 보지 못한 상태에서 남자들이 모두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남은 사람은 여인들뿐입니다. 시어머니와 두 명의 며느리입니다.

        시간이 지나서 베들레헴의 상황이 좋아지게 되자, 시어머니는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당연히 문제가 생깁니다. 며느리를 데려갈 것인가? 아무리 며느리라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당연히 고향인 모압에 남아서 자신들의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 백번생각해도 이치였습니다. 큰 며느리는 자기의 고향인 모압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작은 며느리인 룻은 시어머니를 따르기로 결심합니다. 시어머니는 참으로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시어머니를 따른다는 것은 며느리에게는 아무런 이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자녀를 낳아서 가문을 이어가는 일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신들의 대대로 이어받은 토지(유산)를 후손에게 전해주는 일이 더 이상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조금 복잡하지만, 아들에 의해서 가문의 재산인 토지가 대대로 이어져 내려가야 합니다. (당시의 법에 따르면) 아들을 낳지 못할 경우, 가까운 친족에게서 아들을 낳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시어머니가 재혼을 해서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과 이 며느리가 합하여 손자를 낳아, 재산을 이어받을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어디에서 아들을 낳아, 며느리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 (1:11) 그런데도 이방 여인 룻의 결단이 완강합니다(1:16). 그러니 시어머니 입장에서, 작은 며느리의 선택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시어머니와 함께 모압 여인 룻이 베들레헴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비난과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상황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룻의 이야기가 가슴 찡한 감동 스토리가 되어서 베들레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유한 사람들이 추수를 하고 남은 이삭을 주워 모아서 나름대로 끼니를 때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어머니에게 지혜가 생겼습니다. 가문의 재산을 이어나갈 방도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아까 일차적으로는 시어머니가 아들을 낳아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에, 조금 확장된 친족에게로 영역을 넓혀서 가문의 재산을 지켜나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책임이 있는 사람을 전문적인 용어로, ‘고엘’이라고 합니다(2:20). 그 사람이 바로 보아스였습니다. 이 보아스는 부유한 사람이었고, 룻의 행동에 감동했고 좋은 느낌을 가졌습니다. 사실 룻이 이삭을 줍던 곳이 바로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이 둘의 관계는 비록 손은 잡지 못했지만, 무엇인가가 통하는 말 그대로 ‘첫눈에 반하는’ 그런 관계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법적으로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딱 한 사람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 사람이 룻을 책임지겠다고 하면, 보아스와 룻의 러브스토리는 운명의 장난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그 사람은 룻을 포기합니다. (사실 이방 여인을, 그리고 이미 사별한 여인을 책임지는 일은 썩 매력적이지는 못합니다.) 결국 보아스는 룻을 책임지고, 더 큰 가문에 소속이 되어서 아들을 낳을 수 있게 됩니다.

        룻기는 이렇게 멋진 장면으로 끝이 납니다. 그래서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또 아들을 낳았더라. 그래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이 다윗이었더라 라고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정말 아름답고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한편으로는 가슴이 무너지는 것도 느껴지고, 또 한편으로는 희미하게나마 희망이 보이기도 합니다. 어떨 때는 가슴 설레는 사랑의 감정도 느껴지고, 또 어떨 때는 이 사랑이 사라져 버릴까하는 불안감도 다가옵니다. 결국 해피엔딩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할 때면, 정말 멋진 피서지를 다녀온 기분입니다.


자, 이 정도면 충분히 피서를 다녀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조금 다르게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피서지로, 아주 좋은 곳을 선택 했는데, 그래서 나름대로 이곳저곳 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피서지의 전문가가 아닙니다. 그래서 어쩌면 진짜로 멋진 곳을 놓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곳의 전문가이드가 있다면, 보다 알찬 피서지의 진면목을 누릴 수도 있을 거란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룻기를 한 번 살펴보았는데, 여러분은 성서의 전문가는 아닙니다. 저는 전문가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룻기의 진면목을 이제부터 보여주려고 합니다. 왜 학자들이 룻기라는 이토록 짧은 이야기에 열광하고 감동하며 위안을 얻고 도전을 받는지,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가장 중요한 핵심으로, 룻기는 한 가지 평범한 진리를 말해줍니다. “신앙인은 밥 없이는 살아도, 의리 없이는 못산다.”

 

여기에서 말하는 ‘의리’는 삼류 깡패드라마에서 나오는, 말 그대로 아무렇게나 툭툭 내던지는 그런 가벼운 말로 생각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 ‘의리’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만이 사용하는, 일종의 속된 말로도 생각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의리’라는 말이야말로 가장 그리스도인을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라고 생각하는 목사입니다. 다시 말해서 저는 우리 기독교가 ‘의리’라는 말을 세상에서 다시 가져와야하는 성서적인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이 룻기라는 이야기는 ‘인간의 의리 그리고 하나님의 의리’를 보여줍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매우 단순한 이야기 구조를 통해서, ‘인간의 의리와 하나님의 의리’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순합니다. 룻기는 이 세상에서 ‘의리’가 실종된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룻기는 정말 치밀하게 그것을 보여줍니다. 1: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사사시대가 바로 ‘의리’의 실종 시대입니다. 여러분 중에 조금이라도 성서를 열심히 읽은 분이 있다면, 여호수아서가 보여주는 탄탄대로의 신앙인의 모습과 180도로 대조되는 시대가 다름 아닌 사사기의 시대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떠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삿 2:16-17) 사실 히브리어에 대한 지식이 있으면,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다는 말 자체가 충격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베들레헴은 말 그대로 ‘떡집’이기 때문입니다. ‘수원’에 가뭄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듯이, 베들레헴에 흉년이 있다는 말은 ‘의리’가 실종된 이스라엘의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결과인 셈입니다. 사실 룻과 보아스를 제외한, 모든 등장인물들은 ‘의리의 실종’을 반영합니다. 큰 며느리가 선택한 길이 바로 ‘의리의 실종’입니다. 사실 이것을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큰 며느리에게 돌을 던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히브리어를 생각해보면, 오브라라는 이름의 뜻이 ‘목을 뒤로 돌리다’ ‘돌이키다’라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룻기 자체가 의도하고 있는 분명한 목적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 오브라가 1장에 나온다면, 4장엔 이름 없는 남자가 나옵니다. 이 사람은 보아스보다 룻을 책임져야할 사회적 책임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의리’보다 ‘손익’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4:6). 이렇게 룻기는 1장과 4장, 처음과 끝에 ‘의리가 실종’된 세상을 설정해 놓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룻기가 볼 때, 이 세상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의리가 실종’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제 룻기는 ‘의리가 실종’된 세계에서 회복된 의리를 보여줍니다. 말 그대로 흑암 속에서 작은 빛을 비추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과연 ‘의리’라는 빛을 비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돈 많은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힘도 세고 지혜도 뛰어난 남자여야 하지 않을까? 혈통이 좋은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스라엘이라는 특수한 세계를 배경으로 본다면,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의리’있는 사람은 ‘이스라엘의 순수혈통을 가진 남자’여야만 했습니다. 이게 바로 완벽한 조건입니다. 여러분, 이건 매우 중요한 기준입니다. 순수한 혈통의 남자, 이것이 바로 영웅의 조건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가 바로 이것이어야만 합니다. ‘순수한 혈통의 남자’ 바로 이것이 당시에, 혹은 지금도 그토록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상식’이었으며, ‘전통’이었으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 즉 ‘신학’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룻기는 그러한 통념을 완전히 박살냅니다. 룻기의 ‘의리’는 모압 여인입니다. 순수한 혈통이 아닌 모압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구약에서 모압이 의미하는 것을 잘 모르실 것입니다. 모압은 롯(룻이 아닌!)의 딸이 근친상간을 통해 생겨난 민족입니다(창 19:37 <- 이 구절은 민족적으로 완전히 '개' 취급하는 조롱입니다). 이 모압은 영원히 이스라엘의 모임에 들지 못하는, 영구 제명된 민족이기도 합니다(신 23:3). 더구나 남자도 아닌 여자가, -오해하지 말고 들으신다면, 당시엔 여자는 사람의 축에도 끼지 못했습니다- ‘의리’를 대표한다는 것은 이중으로 충격을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아마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룻기를 읽었을 때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을 겁니다. 비교하자면, 우리가 땅을 사서 새집을 샀는데, 그 땅이 공동묘지이고, 더군다나 지독한 병에 걸린 사람들만 묻힌 그런 곳이라고 말할 충격입니다. 여러분 그 집에 계속 사시겠습니까? 여러분이 만약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이스라엘의 순수한 혈통의 남자라면, 룻기를 계속 읽으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룻기는 우리의 통념을 박살냅니다. 그러나 룻기는 일방적으로 모압 여인을 편들지 않습니다. 모압 여인 룻이 ‘의리’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도 역시 그에게 ‘의리’를 베풀 수밖에 없었다고 솔직한 평가를 내린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2:10-12). 그렇습니다. 룻기는 사람의 의리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비록 룻기 자체에는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등장해서 활동하지 않지만, 오묘하게 행동하시는 하나님의 의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12절, “하나님의 보응, 하나님이 베푸시는 온전한 상”이 곳곳에 나와 있습니다. 10절에 룻은 놀랍니다: “왜 저에게 은혜를 베푸시나요?” 바로 하나님의 의리 때문입니다. 2:2에 룻은 소원합니다: “누군가가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놀라운 점은 이제 하나님의 섬세한 보응이, 하나님의 의리가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3절과 4절에 우리는 놀라운 단어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연히’ ‘마침’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누구도, 이 두 단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완전히 우연히, 완전히 마침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모든 일이 룻의 의리에 대한 하나님의 의리였다는 진리가 바로 룻기의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처음부터 활동하신 하나님은 끝까지 역사하십니다. 그 결과가 바로 다윗입니다. 물론 ‘우연히’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윗이 룻을 통해서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리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단순한 메시지입니다. “신앙인은 밥 없이는 살아도, 의리 없이는 못산다.”


 


   

     여러분 의리가 무엇일까요? 룻기는 관계 속에서 ‘의리’를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서, 어떠한 상황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하나님 안에서 맺어진 관계를 끊지 않겠다는 것이 의리입니다. 1:16-17, 인간적인 차원을 뛰어 넘어서 신적인 관계에서 맺어지는 것이 의리입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는 것이 바로 의리입니다.” (1:15의 놀라운 표현에 주목해보시기 바랍니다.) 죽음도 가르지 못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 의리입니다: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완전히 전설의 고향같지요?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 볼 때, 완전히 전설 같은 일을 이루어 내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됨됨이입니다.)


사실 우리 하나님이 '의리'의 하나님이지 않습니까? 우리와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시겠다는 약속을, 하나님은 결국 지키셨습니다. 독자 예수까지도 우리에게 내어주시면서까지, 그분은 '의리'를 지키셨던 겁니다. 그래서 많은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의리를 배우고, 그 의리로 살아갈 것을 선언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이러한 확신으로 이 세상에서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의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말씀이 여러분의 의리 선언문입니까? 사실 성서는 하나님의 의리 선언문으로 가득 찬 글입니다. 또한 우리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또한 사람들 사이에서 의리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글이기도 합니다. 단순하게 성서의 한 구절을 읽고 천당에 가는, 그러한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잃어버린 신적인 가치인 ‘의리’를 배우고 살게 하는 참으로 의식 있는 글이 바로 성서인 것입니다. 성서를 읽으십시오. 피서를 가지 못해도, 부채질하면서 성서를 읽으십시오. 성서에서 ‘의리’를 배우십시오. 하나님의 의리를 발견하십시오. 여러분이 바로 룻이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