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aching/[설교: 얻어 먹은 주의 말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마태복음 25: 31-46)

진실과열정 2005. 8. 25. 10:36
제목: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제목: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청년부 설교)

본문: 마태복음 25: 31-46


1. 서론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다섯 개의 설교(가르침)를 통해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설교는 5-7장의 산상수훈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실제적인 땅덩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현장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성육신하심으로써 하나님의 통치가 예수님으로 인해 지금 이루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앞에 병든자, 귀신들린자, 심지어 죽은자들까지도 고침을 받습니다. 사람들은 과거에는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임재에 순종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의 눈앞에 있는 예수님의 통치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의 말씀에는 “이러이러하라고 모세오경을 통해서 너희가 이렇게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이른다”라고 새로운 권위를 선포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설교는 10장으로 선교파송 설교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려는 제자를 향하여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이러한 복된 소식에 반응해야만 합니다. 세 번째 설교는 13장으로 천국설교입니다. 복음의 씨가 뿌려졌지만, 그 복음에 반응하지 못한 사람들은 천국에 합당치 못한 사람들입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은 듣는 사람이 아니라, 듣고 깨달은 사람입니다. 네 번째 설교는 18장으로 교회에 대한 설교입니다. 16장에 와서야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비로소 깨닫게 되어집니다. 깨달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새로운 사회인 ‘교회’를 말씀하십니다. 절대로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받은 빚진 자들이 서로 섬기는 곳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교회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를 듣습니다. 이 마지막 설교는 교회의 미래에 관한 것입니다. 교회가 붙잡아야 할 미래의 핵심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마태복음이 말하는 예수님의 다섯 설교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단지 복받는 말씀만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저주받는 말씀보다 복받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복일까요? 돈 많은게 복일까요?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이 복일까요? 건강한 것이 복일까요? 물론, 복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나은, 더 가치있는 복을 제시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는 제자의 삶을 사는 것이 복이다! 나를 위해서 기꺼이 네 목숨까지도 잃어버릴 수 있는, 그런 삶을 사는 것이 복이다!(마 10:38-39)” 사도바울이 복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도바울이 날마다 했던 말이 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초대교회가 복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십자가를 졌으며, 실제로 죽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히브리서 11장 36-37절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던 것입니다(행 2:47). 이 초대교회의 신앙을 이어받았던 기독교 역사의 신앙인들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 바로 ‘복’이라고 믿고 기뻐했습니다. blood가 바로 bless의 어원임을 깨달을 때, 우리의 신앙은 보다 성숙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에서 오늘의 교회와 비교해 본다면 신앙의 하늘과 땅의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과연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정말로 소중히 여기지 않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특별히 오늘 말씀드릴 다섯 번째 말씀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있기 때문이 아닌지, 다시금 신앙의 반성이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됩니다.


2. 본론

   우리 인간의 삶은 70이요, 강건하면 80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마치 수백년을 살 것처럼 행동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언된 말씀처럼 겸손의 모습으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비록 예수님은 겸손하셨지만, 돌들도 승리의 왕으로 오시는 메시야를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10절에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했다”라고 그 때의 상황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승리의 입성이 지난 후에, 제자들은 그 기분이 끝나는 것이 못내 아쉬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 성전 건물들을 자랑스러운 듯이 여겼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 정말로 멋진 성전이지 않습니까?” 어떤 제자는 자신의 미적 감각을 이렇게 표현했을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에 이 성전보다 더 크고 더 웅장한 성전은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것 입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이 성전은 이방인 왕, 헤롯대왕이 유대인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이전 성전보다 갑절로 더 크게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나무로 성전을 지었다면, 헤롯대왕은 대리석으로 지었던 것입니다. 마치 수천년동안 거대하게 남겨질 멋진 성전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의 마음을 돌이키십니다. 더 멋진 세상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종말의 때가 되면, 하나님의 나라가 실제로 임하게 되면, 너희가 보고 있는 이 건물이 돌 하나도 제대로 얹혀 있지 않고 다 무너져 내릴 것이다. 왜냐하면 그날은 새 하늘과 새 땅만이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24:2).”   

   자신있던 제자들이 이제는 조용히, 겸손히 예수님앞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주의 날을 듣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는 시작됩니다. 그 설교가 바로 24-25장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는 종말에 관한 설교입니다. 서로 섬기는 교회가 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다음으로 “하나님의 날을 기대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눈앞의 화려한 세계, 마치 헤롯대왕이 만든 화려한 성전에 온 마음이 팔려있는 제자들처럼, 이 세상에서의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되, 장차올 새하늘과 새땅을 기대하며, 사모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종말을 사모하는 신앙이 있고 없고가 초대교회와 오늘의 교회의 큰 차이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새하늘과 새땅을 사모하며 살고 있습니까?


1) 종말의 징조

   예수님은 세가지로 종말의 징조를 말씀하십니다. 첫째, 사람의 미혹이 있을 것이다(24:5). 사람을 미혹시키는 것을 세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첫째로 거짓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거짓 그리스도는 표적과 기사를 보일 능력이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24:23-24).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바로 전과 돌아가신 후, 유대땅 곳곳에서도 거짓 그리스도, 거짓 메시야가 등장하기도 했습니다(행 5:35-37). 그러나, 결국은 멸망입니다. 오늘날에도 문선명같은 거짓 그리스도에 미혹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그들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결혼하지도 못합니다. 문선명에 의해 짝지어진 사람과 결혼해야 합니다. 일본은 이것을 불법이라고 현명한 판결을 내렸습니다. 얼마전에 있었던 ‘피스컵 축구대회’가 바로 문선명이 교주로 있는 통일교에서 후원한 대회였습니다. 결국에는 문선명이 영웅으로 드러나서 신격화하게 되는 계략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신앙인은 지혜롭고 적극적인 방법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을 미혹시키는 것은 둘째로 잘못된 교리 때문입니다. 앞서 말한 문선명에게는 잘못된 교리가 있습니다. 그중에서 참으로 웃기는 것으로, 여자들은 문선명과 잠자리를 같이해야 정결해질 수 있다는 교리입니다. 그들은 첫 인간인 여자가 뱀에게 유혹당한 것이 뱀과 성교했다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모든 여자들은 불결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 문선명이 여자들과 잠자리를 해서 여자의 불결을 정결케해야지 남자들과 결혼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도 안되지 않습니까? 또한 잘못된 교리들 중에서, 기독교라고 불리우지만 이단적인 교리들을 가진 교회들도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기쁜소식선교회’라고 알려진 ‘구원파’는 구원론에 대하여 이단적입니다. 그들은 초대교회에서 발생했던 영지주의적인 신앙관을 이어받은 사람들입니다. 즉, 인간은 영과 육으로 되어있으며, 영과 육은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진정한 구원은 영의 구원이라고 말하면서, 육적으로는 아무리 범죄해도 구원과는 무관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살인을 한다해도 구원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구원받으면 미래의 죄까지 용서받는다라는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원받으면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다는, 율법을 폐기하는 차원까지 나가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구원파인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종말에 대한 미혹입니다. 벧후 3:4에는 종말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그러나 종말은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종말의 날은 아무도 모릅니다(24:36). 지금으로부터 10여년전 우리나라를 혼란하게 했던 다미선교회를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1992년 10월 28일에 종말이 온다고 했던 사람들 말입니다. 그때 저는 고3이었고, 이 일로 한창 공부해야할 학생들이 공부에 손을 놓으려고 했던 일을 기억합니다. 요즈음에는 ‘휴거’라는 소재를 가지고 등장한 책들이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주제들은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아둘 필요는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을 부정하게 하는, 다시말해 도피적인 반응을 유발케 하는 것은 성경적인 것이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종말의 징조입니다. 그것은 재난과 환난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8). 특별히 이는 믿는 자들에게 닥쳐진 시련입니다. 재난과 환난이 과연 어떠한 것이 될 것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볼때에 순수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당했던 고난과 환난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신자들은 십자가에 달려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야수들의 가죽에 꿰매어졌습니다. 그리고는 그들 위에 큰 개들을 풀어 놓았습니다. 희생자들은 갈기갈기 찢겨 죽임을 당했던 것입니다. 어떤 여자들은 미친 황소들에게 매어 달아 끌고 다니다 죽임을 당했으며, 밤에 신전을 밝히기 위해 산 사람에 기름칠을 해서 살아있는 등불이 되기까지 했습니다. 당시에 일반사람들은 만약 자기네 신들을 제대로 섬기지 않으면 각종 재해가 엄습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약 로마의 강이었던 티베르가 범람하거나, 농작물의 공급지인 나일 강에 물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리고 혹시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그리고 지진이나, 기근이나, 전염병이 발생한다면, 사람들은 즉각 소리질렀습니다: “기독교인들을 사자들에게 먹이라!” 21세기에 들어와서도, 기독교는 그리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편협한 사람들로, 어울리지 못하는 못난 이들로 오해받고 있습니다. 누구나 신이 될 수 있다는 종교다원주의 시대, 뉴에이지 시대에서 기독교인들은 비난을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피흘린 발자취,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기록하고 있지 않음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당할 핍박보다 더 중요한 것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바로 요한복음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세 번째 종말의 징조로는 사랑이 식어집니다(12). 이는 다른 설명을 안드려도 체험하실 것입니다. 10년전만해도 김치한포기 만들면 옆집에 나누어주었는데, 요새는 김치한포기 만들어도 옆집에서 냄새난다고 고소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사랑이 식어지는 것을 보다 실제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하니하며, 배반하며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딤후 3:2-4)


2) 종말은 무엇인가?

   종말의 징조가 사람을 미혹시키는 것, 재난과 환난, 사랑이 식어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종말은 무엇일까요? 종말은 다섯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종말은 말 그대로 끝입니다(24:14). 둘째, 종말은 하나님만이 아십니다(36). 셋째, 종말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이 최종적으로 마쳐진 날입니다(14). 하나님의 사랑이 최고조에 오르는 날이 바로 종말의 날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세가지 비유(충성된 종의 비유, 열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를 통해 중요한 두가지를 더 발견하게 됩니다. 넷째, 종말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세가지 비유에서 하나님은 주인과 신랑을 상징합니다. 다섯째, 종말은 결산의 날이며, 분별이 있는 날입니다. 세가지 비유에서 모두 주인앞에 평가를 받게 됩니다.


3) 종말을 준비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지난 8월 8일이 입추였습니다. 입추가 되면 가을을 준비하게 됩니다. 입추가 되면 가을을 준비하고 입동이 되면 겨울을 준비하듯이, 예수님께서 종말의 징조를 말씀해주신 이유는 우리가 이 징조를 보고 종말을 준비하는 지혜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준비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럼, 종말을 준비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깨어있는 것입니다. 이 “깨어있으라!”라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모두에서 강조되고 있습니다(마 24:42; 25:13; 막 13:37; 눅 21:36).

   ‘깨어있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밤에 잠들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깨어있으라’라는 말은 종말이 오니까, 여러분의 재산을 모두 팔아 교회에 바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깨어있으라’라는 말은 곧 종말이 오니까,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을 하지말고 성경만 읽고 기도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깨어있으라’라는 말은 곧 종말이 오니까, 아무도 없는 무인도나 산에 가서 도를 닦으며 살아라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깨어있으라’라는 것은, “우리가 매일 해야할 일들을 마땅히 해나가는 일상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의 요약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양과 염소의 분별이 아닙니다. 성경은 32절에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매일 해야할 일들을 마땅히 해나가는 일상의 삶을 살았던 사람과 그렇지 못했던 사람들의 분별인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에서 종말을 오해하여 일상의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호되게 꾸짖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럼, 우리가 매일 마땅히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요? 여러분의 삶을 위해 열심히 돈을 버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종말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종말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종말은 그 주인되신 하나님께서 결산하는 날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매일 해야할 일이란, 나의 주인이 하나님되심을 인정하며 하나님앞에 영광을 돌려드리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일상의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과 비그리스도인의 삶의 질적 차이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생각의 주인이 하나님이 되시고, 여러분의 눈의 주인이 하나님이 되시고, 여러분의 입의 주인이 하나님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앞에 영광을 돌려드리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노력하는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일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기쁘게하기 위해 사십시오. 그것이 바로 종말을 기다리며 ‘깨어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말씀을 통해서 ‘깨어있는 삶’의 비밀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며 사는 삶’인지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 가운데 우리는 어디에서도 ‘예수영접’이라는 단어를 찾을 수 없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예수만 영접하면 된다’라는 말씀이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영접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영접’은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마태복음 16장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미 예수님의 몸인 교회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오른팔이 되었고, 예수님의 왼팔이 되었으며, 예수님의 오른발, 왼발이 되었습니다. 종말을 기다린다는 것은 예수님의 오른팔로 ‘실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움직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적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요,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살아 움직이는 삶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것은 그 생명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내용으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21:43) 그렇습니다! ‘깨어있는 삶’이란, 예수님의 생명력을 가지고 실제로 움직이는 여러분의 거룩한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종말을 기다리며, 오늘 하루를 어떻게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아갈까?’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것은 40절에 있습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이렇게 성경은 예수영접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영접한 사람의 생명이 어떠해야 함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형제, 우리 자매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지금 주려있습니다. 우리 형제, 우리 자매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지금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우리 형제, 우리 자매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지금 갈곳없는 나그네되었으며, 벗은 몸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 형제, 우리 자매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지금 병에 고통받고 있습니다. 깨어있는 삶이란, 예수의 사랑으로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입니다. 깨어있는 삶이란, 예수의 사랑으로 목마른 자에게 마시게 하는 것입니다. 깨어있는 삶이란, 예수의 사랑으로 나그네를 영접하며, 벗은 자에게 옷을 입혀주는 것입니다. 깨어있는 삶이란, 예수의 사랑으로 병든자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깨어 있으십시다! 내일은 주일입니다. 일주일만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만나게 됩니다. 한 형제, 자매안에서 지극히 작은 자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에게 ‘깨어있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주에 저에게는 아주 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저의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일일이 연락하지 못해서 참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원시 연화장에서 장례식을 3일장을 치뤘는데, 정말로 정신이 하나도 없고 누가 찾아와도 위로가 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이틀째 저녁에 소식을 접해들은 교회 성도님들이 찾아와서 기도를 해주었을 때,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요! 그렇습니다. 그러한 것이 바로 ‘일상적인 깨어있는 삶’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변에 아주 사소한 일이지만, 작은 사랑의 관심을 보여줄때, 그 사랑의 관심을 받는 형제, 자매에게는 엄청난 힘과 격려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극히 작은 자에게 베푼 사랑인 것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7-10) 종말을 준비하는 신앙인은 난리 법석을 떨며 공포의 눈으로 조바심내는 속물들이 아닙니다. 종말을 준비하는 신앙인은 삶의 소망을 모두 버려버리고 실생활을 나 몰라라하는 인생패배자도 아닙니다. 종말을 준비하는 신앙인은 바로 이러한 사람입니다: 종말이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는 것임을 인정하는 사람이 종말을 준비하는 신앙인입니다. 하나님께 결산받는 날을 겸손하게 기다리는 사람이 종말을 준비하는 신앙인입니다. 날마다 마땅히 당연히 해야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지극히 작은 자에게 몸으로 실천하는 움직이는 행동가가 바로 종말을 준비하는 신앙인인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이 종말을 준비하는 참 신앙인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깨어있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이 음성을 기쁨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그리고 깨어있는 사람만이 예수님께 이런 믿음의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