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구약 성서

우리는 여전히 묵시론적 세계관으로 살아가야만 한다.

진실과열정 2019. 11. 2. 21:06

"우리는 여전히 묵시론적 세계관으로 살아가야만 한다."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말(End of history)'이라는 책에서, 헤겔의 역사철학을 배경논리로 잡으면서, 민주주의의 세계보편적 완성이 역사의 종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고 보면, 종말을 앞에 둔 역사의 비장한 저항은 생각보다 원시적이며 역시나 원색적이다.


사실 각 집단의 작은 역사에서 '그들만의 종말'은 언제나 경험적이었으나, 동시에 또 언제나 새로운 묵시를 탄생케하는 뿌리이기도 하였다. 이것은 히브리성서의 예언서형성과정에서 잘 확인할 수 있다.


예언자의 사명은 신탁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고대사회의 신탁이라함은, 대부분, 신의 전쟁을 알리는 일이었다: "우리의 신이 저쪽 나라를 치라한다!" 그것이 사실 예언서 각권의 '열국을 향한 신탁'(Oracle Against the Nation, OAN)이라는 부분이다. 따라서 왕실이 생겨나고 강화되면서, 왕조의 번영을 위한 '정치적 예언자 그룹(왕실예언자)'이 생겨나기 마련이다(왕상 22:5-6).


여기에서 아이러니한 점은, 예언신탁의 중심 메시지였던, '야훼의 전쟁'이 왕실에서는 하나같이 이웃의 도시국가를 향한 것이었다면, 시골의 다름없는 예언자들에게는 하나같이 '야훼의 전쟁'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를 향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마리아 왕은 물 위에 거품같이 멸망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죄된 아웬의 산당은 패괴되어 가시와 찔레가 그 단 위에 날 것이니, 그때에 저희가 산더러 우리를 가리우라 할 것이요 작은 산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리라 하리라"(호 10:7-8)

"너희는 사마리아 산들에 모여 그 성중에서 얼마나 큰 요란함과 학대함이 있나 보라 하라. 자기 궁궐에서 포학과 겁탈을 쌓는 자들이 바른 일 행할 줄을 모르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땅 사면에 대적이 있어 네 힘을 쇠하게 하며 네 궁궐을 약탈하리라"(암 3:9-11)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족속에게 재앙 내리기를 계획하노니, 너희의 목이 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요 또한 가만히 아니지 못할 것이라 이는 재앙의 때임이니라 하셨느니라"(미 2:3)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노를 발하시고 손을 들어 그들을 치신지라. 산들은 진동하며 그들의 시체는 거리 가운데 분토같이 되었으나, 그 노가 돌아서지 아니하였고 그 손이 오히려 펴졌느니라"(사 5:25)


많은 예언서 연구자들은 예언서가 형성되기 이전의 예언선포 단계와 이후에 서기관들에 의해서 집대성된 예언서의 최종단계를 구분하여 연구하는데(가장 간단하면서도 원칙적인 연구는 Robert Coote, Amos among the Prophets가 있다), 그러므로 최종본 이전의 예언의 상황을 본다면, 사실 예언자들의 신탁은 별것이 없었다. 물론 그들의 탁월한 언어유희적 수사법으로 인해(호 1:2-9; 암 8:1-2; 미 1:10-14; 3:3; 사 1:3; 5:7), 고대사회의 대중들은 예언자들의 신탁을 기억하는데 도움이 되었겠지만(그런 의미에서 요즘 랩을 통한 사회비판은 효과적인 방식이 아니다), 결정적인 것은 무엇보다 예언자들의 그러한 심판신탁이 '성취되어 버렸다'라는 역사적 사실이었다.


히브리 성서는 다양한 예언자들이 저마다 야훼의 종으로 보냄을 받아서, 그분의 심판신탁을 선포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국민이 아닌!) 왕조가 벌을 받는다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신학적 통찰인 셈이다. 북이스라엘의 왕조와 함께 남유다의 다윗왕조 역시 '멸망'의 심판 신탁을 받았고, 작게 크게 국가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반전이 있다. 이것은 어쩌면 정치적 숙명의 반전이다. 국가는 어찌되었건 남의 손으로, 아직까지(!), 넘어가지 않았고, 완전히 끝날 것만 같았던 왕조의 위기도 어찌어찌하여 계속 살아있는 것이다! 이것을 왕실의 서기관들이 가만히 두고 있을리 없다. 그들은 예언자들의 선포들을 수집했고, '지나간 심판' 이후의 현재에, 그들의 미래를 위해 책을 기록하게 된다. 호세아 1장 10-11절이 그러하며, 아모스 5장 8-9절이 그러하고, 이사야 4자 2-6절이 그러하다. (비평적 학자들이 아시아를 1-12장으로 우선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과적으로, 예언자들의 신랄한 심판의 신탁은, 신적 공의의 결과로 현실화되었지만, 이후에 그 현실이 다시 정치적 안정기에 다다르면서, 새로운(북이스라엘) 혹은 지속된(남유다) 왕조 서기관들에 의해서 다시 "현재 왕실을 지속시키기 위한" 기록물이 되고 만다. 그런 의미에서 예레미야의 하소연은 상당부분 이해가 된다("너희가 어찌 우리는 지혜가 있고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 말하겠는가 참으로 서기관의 거짓 붓이 거짓되게 하였도다", 렘 8:8).


작은 차원에서 일종의 '장기지속'의 역사관으로 접근한다면, "심판선언과 파괴, 다시 세워지는 권력"이라는 파도는 쉴새없이 팔레스타인의 민중들 위로 쳐왔다(초기 이스라엘의 형성 역시 이것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것이 어쩌면 '회의주의적 세계관'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한국사회의 또 하나의 격동기를 멀리서 지켜보면서, 고대이스라엘의 옛파도와 같이, 우리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대안은, 아니 오히려 성서적 세계관은 처음부터 끝까지 '묵시적 세계관'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도 생각한다. 고대 이스라엘의 세계에서, 야훼의 공평과 정의를 기억하며 그분과 계약을 맺은 백성이라는 현존재 자기 인식은, 예언자들과 소수의 신앙인들에게 야훼를 눈앞에서 섬기는 일상을 만들었다(미6:8). 또한 그리스-로마의 세계에서, 메시아의 오심과 그분의 부활사건으로 인해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은, 예수를 따르는 신앙인들에게 역사의 완성은 다른 것이 아니라 곧 이루어질 '파루시아, 왕의 귀환'이었기에 자신을 준비하며 구원을 완성하는 기다림이었다.


불의 앞에서 우리는 무엇인가 해야만 한다. 그러나 역사는 서기관의 부정한 붓, 아니 테블릿이 다음 타자로 기다리고 있다고 가르친다. 더 큰 관점에서, 서기관의 횡포를 이겨낼 정신력을 키우는 것이, 지금 우리의 운동과 함께 요구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