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구약 성서

박효신의 야생화 때문이었다

진실과열정 2019. 11. 9. 20:15

<박효신의 야생화 때문이다>


모든 것-아래의 유머-은, 박효신의 야생화를 어떻게든 해석해야만 했던, 우리의 불완전한 국제정치의 상황을 반증하는 블랙코미디이다.


1) 신 30:11-12 -------------------------------------------------

히브리사상('히브리신학'이라고 부를수있을까?)에 '토라'만큼 절대적인 것은 없다. 그들에게는 오직 '토라만' 있고, '토라를 위한 것만'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Jeffrey H. Tigay는 신명기주석(JPS)에서, "토라가 완전하며 충분한 신의 명령이라는 점을 인정하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라는 논쟁점에서, 유대교와 기독교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신 30:11-12절을 논하면서). 다시 말해서, 이미 토라가 주어졌기 때문에, 다른 어떤 초월적인 방법으로 해석의 시도가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게, 신 30:11-12이다. 신 30:11의 "어려운"이라는 말은, '이해의 차원'으로 한정된다.


그런데 사실, 티게이의 주석 자체에서, 히브리사상의 핵심이 나온다. 다시 말해서, 히브리전통은 초월적인 차원의 해석이 원론적으로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일상적인 해석이 끝도 없이 요구되었다는 점을 반증하는 셈이다. 즉, 히브리전통은 토라를 계속해서 묻고 또 묻는다. "그건 왜 이럴까?" 그리고 그에 대하여, 초월적이지 않은 차원에서 설명을 한다: 미드라쉬! (James L. Kugel [2007]은 미드라쉬의 좋은 사례연구집이다.)


2) 노타리콘 -------------------------------------------------------

약간은 신비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히브리어에는 몇가지 재미있는 읽기방식이 존재한다. (a) 히브리어엔 각각의 알파벳이 고유한 숫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단어는 특정한 숫자를 나타낸다. 이것을 '게마트리아'라고 하며, 어떤 학자들이 구약에서 메시야(358)를 찾으려고, 창 49:10; 민 21:9의 게마트리아를 주장하는 것과 같다. (b) 히브리어 알파벳이 22개이므로, 11개씩 짝을 맞출 수 있다. 즉, '알렢'은 '타우'가 되고, '쉰'은 '베트' 그리고 '커프'는 '라메드'가 된다. 이것을 테무라라고 하는데, 렘 25:26; 51:1에 나오는 '시샄'는 히브리어 알파벳을 서로 대칭시켜놓으면, '바벨'이 된다.


(c) 알파벳을 사용하는 언어문화권에서는, '이니셜 장치'가 있다. 시편 119편이 좋은 예이다. 그런데 여기에 더 나아가서, 히브리어 단어의 제일 앞/뒤의 알파벳을 떼어내어 하나의 단어로 만들어낼 수 도 있다. 이것을 '노타리콘'이라고 부른다. 바로 신명기 30장 12절에서 이렇게 찾아내기도 한다.


아래의 첫번째 그림은, 신명기 30장 11-12절을 번역해본 것이다. 히브리인의 정체성인 '토라'라는 것이, 다른 집단에게는 '불가능한 신의 고집' 정도라고 공격당하게 되었을때, (혹은 히브리인의 민족적 정체성에 대해서 타집단에게 배척받게 되었을때,) '약간 특이한' 사람들은 신 30:12에서, "본문의 질문 자체가 답을 가지고 있다!"라고 '약빤 미드라쉬'를 해대는 것이다: "누가 우릴위해 하늘로 올라가지?" 바로, 그 문장의 단어들 마지막 알파벳들을 모아서, "야훼"를 만들고, 또한 그 문장의 단어들 첫번째 알파벳들을 모아서, "할례"를 만들었다. 앞서, 신 30:6에서, '야훼'는 히브리인 대대로 그들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3) 마할살렐하스바스 --------------------------------------------

오직, 트럼프와 문재인 대통령 앞에서 불려진 야생화 때문에, '약빤 미드라쉬'는 멈출수가 없다. 이사야 8장 1절에, 야훼는 이사야(1인칭)에게 대자보를 하나 크게 만들라고 하신다. 모두가 읽을 수 있을 수준으로,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것은, "마헤르*샬랄*하스*바즈"이다. (합리적인 이해는, 이사야 7장 10-17절과 8장 1-4절이 내용적으로 평행하다는 Joseph Blenkinsopp의 Anchor Bible 주석을 보면 되겠다.)


'약빤 미드라쉬'는 합리적으로 묻지 않는다. 오히려 왜 그것을 쓰게했을까?라고 묻게 한다. (임마누엘은 귀로 듣게 했다; 사 7:14; 8:8) 사실, 이사야서가 처음부터 끝까지 한자리에서 쭉 기록된 것이 아니라, 주제별로 편집된 방식이기 때문에, 작은 달락들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냥 연결해서 보면 안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8장 이후의 내용들에서, 소위 '기록물'이 잘 숨겨져야 했음을 알게 된다(사 8:16).


기원전 730년대에 남유다는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바로 주변의 나라들이 모아서 반-아시리아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그 연합전선에 남유다를 끌어들이려고 했던 것이다. 남유다의 아하스는, 일찌기 9세기부터 북이스라엘의 속국과 같은 위치로 국력이 전락해버렸기 때문에, 그러한 연합전선 합류 요구에 고집을 부릴수만은 없었다. 반-아시리아 연합전선의 쌍두마차였던 르신과 베가는, 이미 무관들이었던고로, 말 안듣는 아하스를 폐위시키고 두로의 왕자를 유다의 왕좌에 세우려고 했다(사 7:6).


아시리아에 SOS를 칠까? 르신과 베가의 꼬봉이 될까? 이도저도 못하는 아하스에게 야훼는 이사야를 통해서, "두려워말고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해서 도전을 한다: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사 7:9b) 여기에는 히브리어 '아멘'이 '믿다'와 '서다'란 의미로 언어유희되고 있다. 아하스는 먼나라 아시리아에 병력을 요청한다(Amélie Kuhrt 1997는 강대국에 공납하는 방식으로 구호를 청하는 것이 고대근동의 일반적인 생리라고 말한다).


약자의 일반적인 생리였음에 분명했지만, 야훼는 그것을 가만두지 못하셨다. 일찌기 왕은 야훼의 아들이었다(시 2). 그러나 아하스는 정치공학적 입장에서 '아시리아의 아들'이라고 선언한다(왕하 16:7). 아시리아의 아들이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야훼는 이사야에게 붓을 들게 한다. 써라! "마헬살랄하스바스"


4) 촛불의 혁명가 ----------------------------------------------------

일차적으로는 '속전속결', 즉 르신과 베가는 눈깜짝할 사이에 아시리아에게 멸망할 것이다 라고 기분좋은 내용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약빤 미드라쉬'를, 노타리콘의 방식으로 해본다면, 조금 이상한 내용이 가능할 것 같다. (거듭, '야생화' 때문이다...)


"짤라내라! 아하스를!"




듣는 언어와 보는 언어는 약간의 차이점을 보인다. 듣는 언어는 반복이나 강세가 중요하다. 보는 언어는 위치가 중요하다. 어떤 이는 '마헬살랄하스바스'가 써있는 것을 보고서, '짤라내라! 아하스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마치, 몇달전에 MBC에서 "김장겸은 물러나라"라고 했던 것처럼...


이사야가 촛불혁명의 원류라고, 약빤 미드라쉬를 해본다.  


(2017,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