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하늘누림이야기]

2016년 이사를 앞두고

진실과열정 2019. 6. 27. 20:29

복음서를 역사적 추적장치가 아닌, '묵시적 예수 신앙'에 대한 각 공동체의 목회적 설교라고 할 때, 마가복음은 그 지리적/시간적 흐름이 또렷하게 나타남에도 불구하고(특별히 마지막 일주일에 대해서), 여러 학자들의 견해와 같이 '묵시론적 제자도'의 반복적 요구로 읽어낼 가능성이 충분하다. 예를 들면, Francis J. Moloney, Mark: Storyteller, Interpreter, Evangelist, 50에서와 같이, 마가는 "(사탄/사람)의 불신+요약구문+제자를 부르심"의 구조로 3번이나 반복하면서 복음서의 전반부를 구성하고 있다(Joel Marcus도 큰 맥락에서 비슷하다).


세번째 구조(막 6:4-6a; 6:6b; 6:7-13)에서, 예수는 제자도의 극점을 제시하신다(G. Theissen은 이 본문을 예수 운동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예수의 권세를 가지고, 예수처럼 (하나님 나라를 위한, 묵시론적 차원에서) 회개를 선포하는 삶이다. 그것이 제자도였다. 제자도는 다른 것이 아닌, 예수를 재현하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삶의 자세는 '무소유'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당시의 사람들은 '견유학파'와 '예수운동'의 질적/존재론적 차이를 확연하게 경험했을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고대의 프로토-포스트모더니스트'가 아닌,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치유하는 권세가들이었기 때문이다.


어제, 그러니까 토요일 오전에 교회 주차장에서 하늘 한쪽이 자꾸만 내 마음을 움직였다. 하늘에 걸려있는 구름은 마치 깃털과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 금방 상해서 먹지 못하는 그런 양식도 필요 없는 깃털. 요란하게 깽깽 거리면서 누가 그 소리를 듣고 빼앗으러 올까봐 한 손으로 단단히 붙잡아야만 하는 그런 돈도 필요 없는 깃털. 단지 바람에 자신을 맡기고 어디서든지 청하는 곳이 있다면야, 한없는 감격과 긍휼을 가지고 현실에 충실하는, 그런 깃털... 그 깃털이 하늘에 걸려있었다.


지난 한주간은 4년만의 이사를 준비하면서, 내 자신이 얼마나 예수의 제자와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었는지 깨달았던 시간이었다. 다 먹을 수도 없어서 차고 넘치는 양식이 여기 저기에 가득했고, 일주일 동안 매일 바꿔 신어도 남을 만큼 다양한 신발들이 넘쳐났다. 옷들이며, 가방들이며... 이런 것들을 다시 내 놓으면서, 단지 그것들이 유행에 지났거나 혹은 제한된 이사박스에 선택되지 못했을 뿐이었다는 사실에, 또 4년후에 이사를 하게 된다면, 역시 반복되겠구나 라는 자조적 한숨을 내쉰다.


한국에서 공부를 오래하면서 자연스럽게 또는 집착스럽게 성서 연구를 위한 책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위편삼절'이란 말처럼, 손에 항상 붙잡고 공격적 읽기를 선호하는 탓에, 빌려 읽기 보다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철 없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미국에 오게 되었고, 주석들을 제외하고 많은 책들을 가지고 오게 되었다. 또한 미국에 와보니, 아마존을 통해서 좋은 중고 도서들을 너무 쉽게 구입할 수 있었다.


이사 짐을 싸면서 너무 많은 책에 놀랐다. '오거서'를 읽어낸 사람이 아니라, 단지 무거운 수레들을 끌고만 다는 것은 아니었는지... 책을 읽으면 도전보다 좌절만 하게 되는데, 여전히 깊이를 모르는 나의 욕심을 채우고자 소금물을 퍼마시는 것만 같다. 이제 모든 방에 있는 짐들을 90%에 가깝게 박스로 포장을 해서 집결을 시켰다. 나의 현실의 무게가 이렇게도 예수의 정신을 따라갈 수 없음을 느끼며, 피곤한 무릎을 위로한다.





'Heaven > [하늘누림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끊어진 어뎁터  (0) 2019.07.25
할머니  (0) 2019.07.20
특별함에 대한 강박에서 자유하기  (0) 2019.04.18
오늘도 나는,  (0) 2019.03.26
ㄱ, ㅎ  (0) 2016.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