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반응은 성서 안에서도 발견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신앙고백적 경계안에, 신앙인의 다양한 목소리들이 역시 자리를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 좋은 예가 시편입니다. '순수한'(?) 계시로서의 바른 신학이라기보다 오히려 시편의 파토스는 불안의 엄습속에서 한가닥 소망을 붙잡는 절규입니다.
시편의 1권은 1편부터 41편으로 22편이 '두려움'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2권은 42-72편으로 절반 이상이(18편) '탄식'의 장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평적인 학자들은 1권을 유다에서, 그리고 2권을 실로나 브엘세바와 같은 다른 성소의 전통으로 이해하고 있기도 합니다(M. Sweeney 2012: 385). 1권에서는 다윗으로 대표되는 신앙인의 기도가 나온다면, 2권에서는 고라자손이 등장합니다.
시편 44편에서 신앙인은 엄청난 말을 해버리고 맙니다: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영히 버리지 마소서.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고
우리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우리 영혼은 진토에 구푸리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우리를 구속하소서."(23-26절)
학자들은 유다 왕국의 바벨론 포로기로 시편을 이해합니다(R. Albertz 2003: 142). 1차 포로로 바벨론에 끌려간 사람들의 상황이 들어있는데(9, 11절), 문제는 '포로기의 책임'을 놓고 다른 신앙을 표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절대적인 목소리가 소위 '신명기적 역사가'에 의해서 제시된 '계약 불이행'으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신 28). 그러나 시편 44편의 신앙인은 신명기적 신앙관에 도전합니다: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17절). 오히려 시편 44편의 신앙인은 책임을 야훼에게 돌립니다! "주께서 우리를 시랑의 처소에서 심히 상해하시고 우리를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나이다!"(19절)
그 이면에 '야휘스트'와 '신명기 역사가'의 신앙적 갈등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을 확인하는 텍스트이지만(N.P. Lemche 1988: 184), 어찌되었건 시편 44편의 말씀은 '평온한 신앙인'에게는 불편한 말씀임에 분명합니다. 그래서 월터 브루그만은 이 구절이 이스라엘의 반대증언(counter-testimony)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많은 이들에게 선호되지 않은 불편한 신앙 속에 이런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야훼께서 안계실때, 나쁜일이 벌어진다구요!"(W. Brueggemann 1997: 320).
'신앙인의 신음'(groaning)은 간절한 부르짖음과는 무엇인가 다른, 절망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절망의 신음 역시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점입니다. 사사기의 많은 구원은 바로 이 절망의 신음(히브리어, '나아크')에서 시작하였습니다(삿 2:18). 이스라엘이 애굽의 폭정에 '탄식했을' 때, 하나님은 그 고통을 들으셨고 약속을 '기억'하셨습니다(출 2:23-24). 여기에서 사용된 '탄식'은 이후 에스겔에서 신앙인의 행위로 상징화됩니다(겔 9:4):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 히브리어 '타우'(X 표시)가 세상에서 벌어지는 가증한 일들로 인해 탄식하는 신앙인의 이마에 칠해졌습니다. (또한 이러한 '탄식자들'이 계속해서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겠습니다[스 9:4; J. Blenkinsopp 2009: 159].)
하나님을 향한 신앙인의 신음에, 그분은 깨어나십니다(시 78:65).
'Bible Study > 구약 성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Jerusalem (0) | 2019.04.27 |
---|---|
야훼정책백서 (0) | 2019.04.27 |
설교자 (0) | 2019.04.21 |
'장르이해'가 문제다 (0) | 2019.04.20 |
아시리아와 구약성서 (0) | 2019.04.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