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구약 성서

설교자

진실과열정 2019. 4. 21. 21:41

설교자는 청중의 주위를 환기시키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시작이 절반'이라고 할만큼 출발이 중요하기에, 첫단추를 잘끼우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합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예언자들만큼 설교에 이골이 난 분들도 없겠지요. 그들의 셀수없이 많은 설교들이, 짧건 길건간에, 기억되고 구전으로 이어져서, 때론 (적게는)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혹은 (대부분의 경우) 서기관들에 의해서 수집/편찬되었습니다.


예언자들 스스로가 자신의 이름으로 편찬된 예언서의 최종저자가 아니었기에, 예언자들에게 각 예언서의 구조를 묻는 일은 말이 안되지만, 후대의 편집자들은 각 예언서의 생생하고 풍성한 신학적 메시지를 충분히 파악하였고, 특별히 ‘신정론’에 관련하여 유대왕국이 겪어야 했던 국가적 난관을 ‘유대의 심판과 열방의 심판(OAN) 그리고 최종적인 우주적 구원’이라는 신학적 틀로 편집할 수 있었습니다.


예언서에서 발견될 수 있는, 독자들을 위한 주위 환기의 노력이, 오늘날 설교자의 그것에 못지 않음을 느끼게 됩니다. 특별히 문서로 남겨진, ‘고전예언자’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8세기 예언서의 구성은, 그 초반부에서 설교자들의 고민이 어떻게 전개되어야 하는지 좋은 사례들을 주는 것 같습니다.


실상 독자들은 작은 유다왕국의 위정자들이었건만(사 1:10), 이사야는 ‘들어봐라, 하늘아! 잘들어봐라, 땅아!’라고 법정고소의 형식으로, 법의 정신을 상실한 유다의 엘리트들을 고소합니다(사 1:2). 소와 나귀만도 못한 이스라엘은, 오늘날로 치면, “개, 돼지만도 못한” 종교인의 영적 어두움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지요(사 1:3).


아모스는 종교의 껍데기만 남아있고 공의와 정의가 상실한 북이스라엘의 거품을 향해, “부르짖는” 사자처럼 호통을 칩니다(암 1:2). 처음엔 열방(아람-블레셋-두로-에돔-암몬-모압)을 심판하시는 것 같더니, 실상은 그들은 ‘이스라엘’을 치기 위한 곁가지일 뿐이었고, 핵심은 ‘벧엘’이었음을, 아모스는 먹이를 노리는 사자가 치밀하게 준비해서 ‘한방’ 날리듯이, 청중들에게 무서운 심판을 경고합니다.


호세아는 급격한 8세기 경제/정치의 변화 속에, 출애굽의 신앙 유산을 빼앗겨버린 이스라엘의 영적/정치적 간음을, ‘아내의 남자들’이라는 B급 드라마로 패러디해버립니다.


미가는, 저 시골의 이름없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을 떠난 위정자들이 종교와 정치를 망쳐놓을 때, 세계질서가 쉬 무너짐을 독특한 언어유희로 보여줍니다(미 1장): 10절의 ‘베들레아브라에서 티끌(히.아파르)에 굴지어다’는 레아브라와 티끌(아파르)가 발음이 같고, 11절의 ‘사아난 거민은 나오지 못하고’에서 사아난과 나오다가 발음이 유사하며, 13절에 ‘라기스’와 ‘준마’가 유사하고, 14절에 ‘악십’과 ‘속이다’가 유사합니다. 결국, ‘루이빌’이란 이름과 같이, 베들레아브라는 ‘Dust-ville’이고, 라기스는 ‘말동네(Horse-ville)’이며, 악십은 ‘사기촌(Deceit-ville)’인 것입니다. 그런 이름있는 동네들이 1장에서 모두 망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름없는 ‘베들레헴’(빵집)을 일으키실 것이라는 5장의 예언은 잘못된 가치관을 가졌던 청중들의 헛된기대를 일소에 무너트리고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각성시킵니다(6:8).


무엇보다도 원조 설교자들이었던 예언자들은, 억지로 혹은 미사려구나 책상위에서 만들어진 어려운 말로 설교의 시작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채워져 있었고(미 3:8),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으며(암 5:21-24; 사 1:11-17), 하나님이 그들을 변화시키실 수 있음을 확신하였고(호 11:8-9), 결국 청중들로 하나님이 베푸실 회복의 길로 돌이키도록 하였습니다(사 1:18,26).


멋진 설교가를 꿈꾸며, 그들을 닮아가려고 부단히 애를 씁니다. 점잖지만 박력있게, 진실하면서도 용기있게, 신령하면서도 지혜로운 설교자를 오늘도 그려봅니다. 청중들이 놀라는 설교, 울고 웃으며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아무도 모르는 그런 설교.


예수님의 권세있는 가르침은, 말에만 있지 않았고, 악령을 제어하는 능력에서 참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증명되었습니다(막 1:22,27). 하나님의 말씀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의 말씀을 얻어 먹는 설교자로 세워지기를 기도합니다(렘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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