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10장부터 12장은 묵시적인 세계관의 '끝판'으로,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후의 유대묵시문학의 기원이 되는 '초판'으로(M.Fishbane 1985: 516), 기능합니다. 현재 세상이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현실이해와 그 현실이 자신들의 어떠한 힘으로도 바꿀 수 없다는 현실도피가, 신앙의 자리에서 만나는 위치가 바로 묵시입니다: "하나님, 이젠 당신이 하십쇼!"
다니엘 10장 1절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다니엘 1장 1절로부터 '70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한편, '70년'에 대한 일종의 '고대근동적 모형론'은 엣살핫돈 비문에서도 발견될 수 있습니다[사 23:15-17; J.J.Collins 2004:342]). 이것은, "70년만에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그치리라"(렘 25:11; 29:10)라고 했던 예레미야의 예언이었지만, 실상 유대민족 그 어느시대에서--특별히 헬라문화의 첨병이었던 셀류시드왕조에서--도 예루살렘의 회복은 요원하기만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70년 이후의 회복은, 말씀의 독자들에게 성취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던 겁니다.
그래서 다니엘의 깨달음(단 9:2)은 '70년 회복'에 대한 묵시적 재해석이라고 할 수 있지요. 단 9:2의 '70년', 곧 히브리어로 '쉬브임(70) 사나흐(년)'가, 모음을 변화시켜서 '70이레', 곧 히브리어로 '샤부임(weeks) 쉬브임(70)'으로 해석한 거지요(히브리어 자음은 똑같습니다). 결국, 과학적이거나 수학적인 계산을 목적으로 두기보다(굳이 따져본다면, 단 9:26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마카비하 4:1-38을 보면, '오니아스 III'임을 쉽게 알 수 있지요; 다른 견해로, M.Sweeney[2012:455-6]는 Alexander Jannaeus를 지칭합니다), 묵시적 현실에서 예레미야의 예언을 자신들의 것으로 다시 받아들인, 영적-해석적 전통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예레미야가 회복을 바라는 자신들의 공동체에 하나님의 회복의 예언을 선포했던 것처럼, 다니엘 역시 더 극단적으로 달려가는 역사적 현실에서 자신들의 공동체에 하나님의 또 다른 회복의 예언을 선포한 것입니다.
결국, "역사는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신앙을 주기 위해, 다니엘은 10장에서 (단 1:1로부터) '70년'이 지난, 묵시적 세계를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바라는 것처럼, 예루살렘의 평화는 오지 못했고, 대신 '큰 전쟁'이 연속적으로 다가오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런 모든 일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단 10:14)"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헬라군(알렉산더,10:20; 11:3)'이 오든, 남방의 왕(프톨레미 I, 11:5)이 오든, 북방 왕(셀류커스 I, 11:6)이 뭔 일을 하든(단 11:6에 대해서, D.Martin 2012:61의 중간사참조), 그래서 프톨레미왕조와 셀류커스 왕조가 전쟁을 해서(11:13; L.Perdue 2008:222), 결국 '한 비천한 사람(Antiochus IV 에피파네스, 11:21,28)'이 집권해서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을 성소에 세운다 한들(11:31), 우리 "지혜로운 자들(11:33-5)"은 이 마지막 때에 신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늘의 지혜를 가진 자들은, 다니엘서가 보여주는 것처럼, 그 어떠한 제국에서도 또 그들의 어떠한 핍박에서도 살아남았기 때문에, 마지막 핍박인 '에피파네스'의 탄압도 신앙으로 이겨낼 수 있는 겁니다(12:2-3)!
마지막으로 의미심장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단 12:4에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반대로 생각하면, 이 글이 열리고, 읽혀질 때는 '마지막 때'임을 간파하는 것입니다(P.Fredriksen 1999:85). 예수님께서, 막 13장에, 마지막 때를 말씀하시며,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14절) 그 때야말로 하나님의 묵시적 종말이 시작되는 때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가가 독자들을 겨냥해서,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라고 했는데, 바로 다니엘 11:31의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이, 단 12:4의 '마지막 때'와 연결됨을 '깨달으라'고 한 것이지요. 다니엘과 예수님의 종말강화 사이에는 유사점과 차이점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인정하며 깨닫고/깨어서 기다리는 삶이 유사점이라면, 마지막 때를 '1290일'(왕대일 2001:145) 혹은 더 기다려서(사 8:17a) '1335일'로 명시했던 다니엘과는 달리 예수님은 모든 것이 전적으로 아버지께 달려있음을 인정했던(막 13:32) 차이가 느껴집니다.
다니엘서와 그 이후 묵시를 둘러싼 '장르이해'의 부족은 현대신학이 극복해야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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