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독서] 좋은 책 이야기

William M. Schniedewind, A Social History of Hebrew (2013)

진실과열정 2014. 3. 25. 00:58


일상생활 속에서 사용을 위해 만들어진 말이, 시간이 지나고 환경이 바뀌면서 어떤 것들은 점점 사라지거나 변형되거나 보다 더 다양하게 발전하기도 합니다. 언어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생명과 걸음을 같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 인간의 크기로는 변화되는 언어의 세계를 담아내기 역부족이라는 겁니다. 한두세대 전에 사용되었던 말이 현재 세대에는 어색하여, "그 말 뜻이 뭔데?"라고 묻지 않을 수 없고, 혹은 "그 말을 어떻게 사용해야하는 거야?"라고 궁금하게 합니다. 아마 글쓰기에 공을 들이고 우리말에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만이, 생명있는 언어의 호흡을 따라갈 수 있을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심을 두지 않거나 혹은 '언어의 용례를 모르고, 그 말이 어떤 차원에서든 필요해서, 자기 차원에서 오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오용'의 차원이 성서에 나타나있다고, W. Schniedewind(A Social History of Hebrew, 2013)는 말합니다. 이것을 위(pseudo)-고전주의라고 부릅니다. 좋은 예가 사극에 나타나는 어색한 옛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옛말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어색할수도 있지만,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언어 전문가들이 집어낼 수 있는) 옛어법에 맞지 않게 사용할 때, 위고전주의가 들통나게 되는 겁니다. 단순하게 단어만 가져가 붙인다고 고풍스러운 옛말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거지요. 슈니디윈드는 "후대의 저자가 옛 본문을 부지런히 연구해서 옛사람의 언어와 문체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고 말하면서(149), 이러한 현상이 '역대기, 느헤미야, 다니엘'에서 발견된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왕상 13:33의 "제사장을 삼았/임명하다"라는 표현입니다. 원래 히브리어의 표현은 '헤핰페쯔 예말레 에트_야드 위히 코하네 바모트', 곧 '(여로보암이) 즐거이원하는 자라면 그 손을 채워, 산당의 제사장이 되게하였다'입니다. 우리말로 그리고 대부분의 영어성서에서도 '제사장을 삼다/임명하다'라는 표현의 원어는 '그 손을 채우다(말레[피엘형] 에트_야드)'입니다. 유사한 표현이, 출 28:41에 "기름을 부어, 위임하고/그들의 손을 채우고(마레 에트_야드)"로, 레 8:33에 "칠 일동안 위임을 하다/그들의 손을 채우다(예말레 에트_야드)"로, 삿 17:5에 "(한 아들을) 제사장으로 삼았다/손을 채우다(예말레 에트_야드)"로 나옵니다.

 

언어는 생리적으로 모든 것을 다 말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성서의 중요한 모티프인 '계약하다'에서, 본래는 계약하는 두 당사자 사이에 소나 양같은 값진 생명을 두고, 둘 '사이에서' 그것을 '가르고/쪼개고' 그 사이를 지나가면서, 서로간에 세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 깨뜨린 자의 운명이 죽은 소처럼 될 것이라는,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대수롭지 않겠지만, 삶의 지극히 작은 부분까지 신과 함께하는 고대사회에서는 이러한 약속은 말그대로 '삶을 두고' 깨뜨릴 수 없는 맹세였습니다(자세한 사항이 렘 34:16-21에 나오지요). 그래서 원래표현은 (약속하는 둘) "사이를 가르다"로 '카라트 베리트'입니다: 카라트(자르다)+베리트(사이를). 그런데, 언어의 생리처럼, 결국 '베리트'만 남았고, '계약/언약'이라는 (사회적, 종교적) 의미가 함축된 단어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제사장을 삼다'라는 말의 본래 뜻은 멋 옛날의 관습 속에 뭍혀버렸을 것입니다. 출 28:41의 전통을 따라서 상상해보면, 머리에 기름을 부어서, 흘러내려진 거룩한 기름이 임명된 제사장의 손에 채워지지 않았을까 합니다. 결국 남은 것은 '손에 채우다'(마레 에트_야드)인 것이고, 그 말로도 충분히 '원하는 소통'이 가능했던 것이지요.

 

문제는 한세대 두세대 지나면서, 특별히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적 정황에서 볼때, 바벨론 포로시대라는 '사회언어학적인 단절'을 겪을 경우에 발생하는 "언어의 상실"을 간파하는 일입니다. 사실 당시부터 아람어의 영향으로 히브리어는 (실생활과 관련없는) 서기관들에 의한 문서언어로 굳어지게 되지요(물론 슈니디윈드는 고대 팔레스타인에서도 '동막골'은 분명 존재했으리라고 여지를 남기기는 합니다만, 사실 동막골의 사회적 영향력이라는 것이 그 존재자체로 미비한 것이라 그들의 지속된 히브리어 사용은 논지의 큰 반론이 되지 못합니다). 과거 세대의 언어사회를 경험하지 못하고 상실한 서기관의 경우에, 문서적으로 남겨있는 '마레 에트_야드'를 어떻게 풀어갈 수 없었을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왕상 13:33의 여로보암의 일을 말하면서, 포로후기의 역대기를 기록했던 서기관은 '위고전주의'를 보여주게 됩니다. 역대하 13:9에 의하면, 한글성서와 영어성서에서는 (열왕기의 선이해가 있기 때문에!) "무론 누구든지 수송아지 하나와 숫양 일곱을 끌고 와서 장립/임명을 받고자 하는 자마다"라고 되어있는데, 원어를 보면 '말레 야도 베파르 벤_바카르 웨에림 쉬브아흐'라고 하면서 "제물을 드리기위해 소나 양을 '손에 잡고' 끌고오는" 모양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진화된 언어의 간략화 현상 때문에 '에트'는 상실하여 '마레 야드'가 되었지요.) 사실 역대기를 기록했던 서기관들은 출,레,삿의 리얼리티를 몰랐던 겁니다. 단지 언어의 흔적만 남았기 때문에, 본래 그 어휘의 용례에서 벗어나서, "제물을 이끌고 오다"라는 오용을 하고 말았던 것이지요. 그렇지만, 열왕기의 기록은 알고 있기 때문에, '옛것처럼 보이기'를 위하여 흉내를 내었고, 결국은 '위고전주의'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리러니한 것은, 저자는 말하지 않았지만, 역대기 '언어'의 위고전주의의 오해에도 불구하고, 한글/영어의 번역자들은 "제사장 임명"이라는 놀라운 번역을 만들어내었다는 점입니다. (신학적 선이해가 끼치는 영향력을 느끼는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의 저자는 2004년에 'How the Bible became a Book'(성경은 어떻게 책이 되었을까? 2006년 번역)란 책을 통해서, 기원전 8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고대 유다왕국에 문서화가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되었음을 주장했는데요, 2013년에 발표된 'Social History of Hebrew/히브리어의 사회사'라는 책을 읽어보니, 원래는 이 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2004년 작품을 먼저 발표하게 되었다고 알려주더군요.

 

'히브리어의 사회사'라는 책은 말 그대로, 언어사회학적인 관점에서 히브리어의 '생명'의 과정을 추적합니다. 사실 '히브리어가 거룩하다'라는 생각을 가질법도 한데(생각을 해보는 거죠: 창세기 1장 3절에 '빛이 있으라!'라는 말씀을 과연 '히브리어'("예히 오르!")로 하셨을까? 재미있는 것은 구약위경인 희년서(Jubilees 12:25-27)에 의하면, 창조의 언어는 히브리어라고 말하며,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고 제일 처음 한 일이 6개월동안 히브리어를 공부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하스모니안 시대의 민족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당시의 세계관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종교/정치의 상징을 위한 히브리어의 사용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었는지도 가늠하게 해주는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의 언어라는 일종의 탐욕과 우월감을 벗어내고, 냉철하게 히브리어의 발자취를 따라 걸을 수 있는, 그러면서 '사회학'의 매력까지도 새롭게 배움을 주는 좋은 책입니다. "[T]he history of language and culture move along parallel lines. ... The language was shaped by the emergence of a state, by the centralization of political power, and by the rise of empires, beginning with Assyria. ... Hebrew was shaped by the languages of the foreigners who dominated the land - first the Egyptians, later the Assyrians and Babylonians, and finally the Persians, Greeks, and Romans."(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