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독서] 좋은 책 이야기

Katherine M. Stott, Why did They Write this way?

진실과열정 2014. 3. 29. 04:26

 

 

Katherine M. Stott, Why did They Write this way? (LHB/OTS; 2008)

 

이 책의 첫인상은, B. Ehrman의 Forgery and Counterforgery(2012)의 '구약판'입니다. 스토트나 어만의 공통점은, 저자의 정체는 둘째로 치고, "보다 진실하게 보이기 위한 수사적 효과를 위해 이들은 이런 방법을 사용했다"라는 논점입니다. (음.. 자료의 양이나 논의 과정은 확실히 바트 어만이 좋은 것 같구요.) 스토트의 장점이라고 한다면(일차적으로 간략하고! 그러나 어만 역시 대중을 대상으로 간략하게 제시하기도 했습니다[Forged, 2011]), 비록 그녀 역시 거인의 어깨위에서 작업을 했지만(C.C. Torrey 1909), 최근 역사비평적 접근방법의 성과라고 할 수 있는 재구성(reconstruction)의 자아도취를 무색하게 하는, 성서 본문에 대한 관점의 변화를 근원적으로 이끌었다는 점을 들겠습니다.

 

사실 요즘 영화 '노아'가 기독교계에서는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이 그동안 알고 있던 노아와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보다 넓게 고전을, 그러니까 '구약외경'과 '구약위경'이라고 불리는 중간기문헌들을 살펴보면, 여러 부분들에서 '왜 영화가 그렇게 만들어졌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토대가 세워지게 됩니다. 사실 성서를 공부하면서, 성서가 정경으로 닫혀지는 순간까지(기원후!), 신앙공동체에 영향을 끼쳤던 문헌들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과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좋은 예가 James H. Charlesworth가 편집한, Old Testament Pseudepigrapha라는 2000페이지를 넘는 책이지요.) 한편으론, 고대서아시아(예전에는 고대근동이라고, 유럽중심사관의 표현을 사용했지요)의 문헌들은, 시기적으로 성서텍스트보다 수천년 앞서 있습니다. 한가지 좋은 예가 '길가메쉬 서사시'이지요. (우리말로, 김산해씨가 쓴 길가메쉬서사시라는 책이 있습니다.) 길가메쉬서사시를 읽어보면, 성서의 모티프와 유사한 점들을 상당히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죽음의 기원; 홍수와 관련해서도 수메르버전은 '아트라하시스'라는 다른 '노아'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소재의 유사성과 상이성이 이런 부분에서 튀어오르는 것 같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스토트가 제기한 문제는 이런 면에서 평행합니다. (개인적으로 풀어보자면) '우리의 것에만 고유한 이야기가 있다라는 편견에서 벗어날 때, 더 나아가 다른 문화권(시간/거리를 초월하여)의 이야기들을 같이 본다면, 우리의 것이 과연 어떠한 것인지 새롭게 열리는 눈을 갖는다.'

 

저자는 고전문학(Herodotus, Thucydides 등)과의 비교연구를 통해서, 두가지 면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첫째는, 잃어버렸던 책의 발견이고, 둘째는, 발견된 책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종교 개혁입니다. 특별히 성서내러티브에서 어떠한 문서의 제작, 상실 그리고 발견과 개혁이라는 소재가, 다른 문학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말합니다(차이가 있다면, 헬라의 역사가들은 구전자료이고 히브리성서는 문서전통입니다). 그러나 사실 다른 문학들에서 말하고 있는 '그 문헌과 관련된 일들'이, (복잡하고 논리적인 검증을 통해서 볼때) 결국 '그들의 의도적 연출'이었음을 지적합니다. 그러므로써 저자는 어떠한 텍스트에서 주장되고 있는 '문서와 관련된 언급'을 역사적으로 고증하는 일보다, 오히려 그러한 과정으로 기록하면서 어떠한 수사적 목적과 기능을 보여주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합니다("[I]n this study the focus shifted to the roles that these references play in the text and in shaping the message of the text, regardless of whether they provide insight into the historical world external to the biblical narratives," 140).

 

특별히 저자는, 구약성서학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한, 신명기적 역사의 기초가 되는 열왕기하 22장의 '율법책의 발견과 이후의 개혁'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고 말하면서, 드 베테로 시작한 역사비평학계의 재구성을 원천적으로 무너뜨리면서, 결국 일종의 '유즈얼 서스펙트'로 만들고 말았습니다(pp. 103-8). 사실 이 대목이 신학적네러티브 읽기를 고집하는 보수적 진영과 불가능한 역사적 재구성에 집착하는 진보적 진영 사이에 '제3의 길'('신문학비평'이되겠지요)을 제시하는 것 같습니다(p. 121-2). (더 나아가 비록 간단한 제안이기는 하지만, 렘 36장에서 출발하는 예레미야서의 제작과정 비화나, 시내산의 깨어지고 다시 만들어진 율법, 에스라서, 그리고 마카비하가 말하는 잃어버린 느헤미야서의 발견의 이면에 숨은 수사적 기능들을 발견하는 재미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왜 이런 방식으로 썼는가?"

 

재미있고 필요한 질문을 던졌고, 그 대답은 (다른 이들이 인식하지는 못했지만 통상적으로 가지는 것처럼) "그래야 진짜같으니까"이고 더 나아가서 "(진짜같으니) 이제는 내 말대로 하렴"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셰필트(JSOT)의 주축이었던 David J.A. Clines의 Interested Parties가 (그 이데올로기 배후까지도 긁어낸다는 면에서) 보다 더 날카로운 것 같습니다. 또한, 역시 저자가 서문에서 밝혔던 것처럼 논문의 지대한 영향을, 대표적 최소주의자인 Thomas Thompson과 Philip Davies에게서 받았던 바, 이들이 보여주는 새로운 차원의 '기능적/이념적 문학읽기'의 새로운 방향이 어떠한지를 살펴보는 데에는 그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


예전에 읽은 책에서(아마 한길사에서 출간된 '지식의 최전선'인 것 같은데), 각주와 참고문헌의 '권력'에 사로잡힌 학자들의 종속을 깨뜨린다는 반동적 움직임의 일환으로, 어떤 저명한 학자가 소논문을 발표하면서 정말 처음 들어보는 학자들과 책 제목, 소논문들을 각주에 기재했더랍니다.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단 한명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단지 '오! 이런 글들이 있었구나! 그래서 이것을 근간으로 이렇게 논지를 진행하고 있구나!'라고만 감탄했다는 거죠. 그런다가 마지막에 와서야, 발표자가 말하길, "사실 이것은 모두 가짜입니다!"라고 말했답니다. 각주가 있고 참고문헌이 있어야, "진짜처럼 권위있게 보인다"라는 허영이 그 장소에서 처절하게 고발되었다고 기억에 남습니다.

 

변화를 일으키거나 이론을 세우는 것은, 그 출발이 혁신적인 근거본문을 찾는 일에서부터가 아니라, 자신이 먼저 흠뻑 젖어드는 것이 아닐까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