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God Became King이란 책에서 N.T.Wright는 '처음 이벤트의 역사성'과 동시에 '처음 교회에 있어서의 그 의미'를 모두 균형있게 들어야, 복음서의 핵심메시지-하나님의 왕되심이 예수를 통해 이땅에서 실현됨-를 온전히 감상(라이트가 '스피커 볼륨 조절'이란 모티프를 사용했기때문에)할 수 있다고 제안했습니다. 해석학적 '지평의 융합'은 어느 지점에서건(사건과 기록; 정경과 교회; 교회와 세계) 이루어지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통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조금 다른 차원이긴 하겠지만) 이러한 볼륨조절은 히브리 성서 내에서도 지속적으로 작업되어왔었으며(Michael Fishbane, Biblical Interpretation in Ancient Israel), 특별히 마소라본문(MT)과 칠십인경(LXX)과의 관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디에도 순수한/순진한 역사는 찾아볼 수 없겠으나, 누구라도 역사의 자기충족적 의무와 기능을 백분 활용했기 때문에, 모든 역사(적 내러티브)는 기록당시의 '지평의 융합'을 위해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MT를 활용했던 LXX의 '역사가'들 역시 다르지 않았겠지요. 사실 무엇이든지 대부분의 경우, 처음 것은 (지금의 관점에서) 조악하기 그지 없습니다. 1990년대의 잡지광고와 지금을 비교하면 어떨까요?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고등학교시절 친구집에서 '따끈따끈한'(?) 영화를 보았습니다: '배트맨'(1990년)입니다! 원조 '조커'였던 잭 니콜슨이 허리춤에서 엄청나게 긴 권총을 꺼내는 장면에선, 왜 그리 열광을 했었는지! 그런데 지금, '다크나이트'를 보고난 후로, 원조는 코메디로 기억될 뿐이었습니다(아마 팀 버튼과 크리스토퍼 놀란의 세계관의 차이때문이겠지만 말입니다). 어찌되었건, '처음 것은 조악하게 보입니다'. 예를 들면, 사무엘상 17장의 대결투 장면이, 신앙의 스폰지기능에 물들인 사람이라면 하나의 온전한 그림이겠지만, 사실 MT의 세밀한(혹은 불필요한?) 부분에 대하여, LXX는 가위질을 하게 됩니다(John Collins는 야예 두개의 이야기라고 제안합니다[Introduction to the Hebrew Bible, 2004: 227]). 그래서 LXX을 읽어야했던 사람들은 지금 우리와는 다른 '역사'에 직면하게 됩니다: 사울의 병거를 맡은 다윗이 왜 전쟁의 시기에 '형들을 위한 도시락 배달꾼'이 되어야 했는가를 말하는 난점(삼상 17:12-31), 사울의 총애를 받았던 다윗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사울의 단기기억상실증의 문제(삼상 17:55-18:5) 그리고 다른 소소한 부분들(17:41, 48b, 50)이 LXX에는 나와있지 않습니다. MT의 조악한 '역사'를 LXX가 세련된 '역사'로 바꾼 것입니다.
열왕기상 6장에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성전건축의 '역사'가 나옵니다. 왕상 6:1은 그 시기가 출애굽한 이후 480년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이에 대한 여러 해석중에서 이스라엘의 '시대generation' 이해가 40년이 한세대로 12세대(일종의 한 텀term)가 지나갔다고 보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헬라시대의 최종편집을 주장하는 최소주의자들은 (혹은 문자숭배자들은) 480년주기로 4000년의 역사관을 시종일관 개진하고 있습니다:
..... 창조-출애굽: 0 - 2,666년 (P: 출 12:40-41; K.Schmid 2010:18)
..... 출애굽-제1성전: 3,146년 (+ 480년; 왕상 6:1)
..... 제1성전-포로기: 3,626년 (역대상 6:8-15; J.Blenkinsopp 1995:84)
..... 포로기-마카비: 4,000년 => BCE 164 (마카비의 성전재봉헌).
이것에 대하여 '한 세대가 40년이며, 12세대가 한 텀이라는 증거는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역대상 6장의 제사장 족보를 보면 또 생각이 달리집니다(MT와 장절이 다릅니다). 같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루면서, 열왕기의 '역사'와 역대기의 '역사'는 그 내용과 표현방식, 의도와 신학 자체가 다릅니다(역대기에서 중심은 성전이고, 자연스럽게 예배이며, 예배의 시작자인 다윗에 대하여 안좋은 부분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제사장의 입장에서 '세련된' 표현에 따르면(대상 6:1-15), 레위부터 사독(제1성전 건축) 사이에 12대가 있으며, 사독과 여호사닥(그 아들 여호수아의 제2성전 건축)사이에도 12대가 있습니다. '의미있는' 시대에 성전이 세워졌음을, 고로 하나님의 섭리가 있으며 신성함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음을, 역대기는 말해줍니다. 사무엘서와 열왕기의 역사기록 자체가 가질 수 밖에 없는 모순과 혼동을, 역대기는 오직 하나의 키워드(제사장의 논리/신앙)로 정리했기 때문에 훨씬 깔끔하게 보입니다.
이러한 역대기의 세련됨이, 아마 LXX의 신앙인들과 맞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역대기의 기록자들과 같이, 일차사료수집가들이 아니라, 역사의 해석자들이기 때문입니다. LXX의 기록자들 역시 또 하나의 '해석자'로서 그들의 '역사' 기록에 충실하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열왕기상 6장 1절에서 나타납니다. MT에서는 480년으로 되어있지만, LXX에서는 440년으로 되어있습니다. MT가 구축했던 4000년의 큰 그림이 깨지는 판이지요. 그러나 LXX는 그런 큰 그림보다는 현실적인 역사적 논리가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왕상 6:1은 출애굽이후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는데, 그것을 생각해보면, '아론'부터 '사독'(왕상 4:4)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역대상 6장의 족보와 비교하면, 11대입니다. 그러므로 ('한 세대가 40년이라는 증거는 없다'라고 한 것과는 달리) 자연스럽게 왜 440년이 나오게 되었는지 계산이 됩니다. 11대 * 40년입니다. 아론부터 시작해서 사독에게서 성전이 건축되려면, LXX의 입장에서는 440년이어야했습니다(Mordechai Cogan, 1 Kings [2001]: 236).
열왕기상의 MT와 LXX의 비교연구를 진행한 한 학자는 LXX의 번역자들이 상당히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창조적 활동을 집어넣었다고 평가하면서, 이것이 그들만의 독특한 것이 아니라,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문화적 종교적 유산을 포용한 작업이었다고 주장합니다(Andrzej S. Turkanik, Of Kings and Reigns [2008]: 209). MT의 형성자체가 그러했던 것처럼, LXX 역시 '해석된 역사' 혹은 '필요한 신앙'을 하나의 보다 완성된 '내러티브'로 구축했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으론, 모든 것을 쉽게 팩트로 연결지으면서, 초대교회가 LXX를 팩트/이벤트로 이해했으므로, 우리도 그러해야한다는 논리는 햄버거가 처음부터 빵과 고기가 합쳐진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겠지요.)
(조금 다른 차원이긴 하겠지만) 이러한 볼륨조절은 히브리 성서 내에서도 지속적으로 작업되어왔었으며(Michael Fishbane, Biblical Interpretation in Ancient Israel), 특별히 마소라본문(MT)과 칠십인경(LXX)과의 관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디에도 순수한/순진한 역사는 찾아볼 수 없겠으나, 누구라도 역사의 자기충족적 의무와 기능을 백분 활용했기 때문에, 모든 역사(적 내러티브)는 기록당시의 '지평의 융합'을 위해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MT를 활용했던 LXX의 '역사가'들 역시 다르지 않았겠지요. 사실 무엇이든지 대부분의 경우, 처음 것은 (지금의 관점에서) 조악하기 그지 없습니다. 1990년대의 잡지광고와 지금을 비교하면 어떨까요?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고등학교시절 친구집에서 '따끈따끈한'(?) 영화를 보았습니다: '배트맨'(1990년)입니다! 원조 '조커'였던 잭 니콜슨이 허리춤에서 엄청나게 긴 권총을 꺼내는 장면에선, 왜 그리 열광을 했었는지! 그런데 지금, '다크나이트'를 보고난 후로, 원조는 코메디로 기억될 뿐이었습니다(아마 팀 버튼과 크리스토퍼 놀란의 세계관의 차이때문이겠지만 말입니다). 어찌되었건, '처음 것은 조악하게 보입니다'. 예를 들면, 사무엘상 17장의 대결투 장면이, 신앙의 스폰지기능에 물들인 사람이라면 하나의 온전한 그림이겠지만, 사실 MT의 세밀한(혹은 불필요한?) 부분에 대하여, LXX는 가위질을 하게 됩니다(John Collins는 야예 두개의 이야기라고 제안합니다[Introduction to the Hebrew Bible, 2004: 227]). 그래서 LXX을 읽어야했던 사람들은 지금 우리와는 다른 '역사'에 직면하게 됩니다: 사울의 병거를 맡은 다윗이 왜 전쟁의 시기에 '형들을 위한 도시락 배달꾼'이 되어야 했는가를 말하는 난점(삼상 17:12-31), 사울의 총애를 받았던 다윗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사울의 단기기억상실증의 문제(삼상 17:55-18:5) 그리고 다른 소소한 부분들(17:41, 48b, 50)이 LXX에는 나와있지 않습니다. MT의 조악한 '역사'를 LXX가 세련된 '역사'로 바꾼 것입니다.
열왕기상 6장에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성전건축의 '역사'가 나옵니다. 왕상 6:1은 그 시기가 출애굽한 이후 480년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이에 대한 여러 해석중에서 이스라엘의 '시대generation' 이해가 40년이 한세대로 12세대(일종의 한 텀term)가 지나갔다고 보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헬라시대의 최종편집을 주장하는 최소주의자들은 (혹은 문자숭배자들은) 480년주기로 4000년의 역사관을 시종일관 개진하고 있습니다:
..... 창조-출애굽: 0 - 2,666년 (P: 출 12:40-41; K.Schmid 2010:18)
..... 출애굽-제1성전: 3,146년 (+ 480년; 왕상 6:1)
..... 제1성전-포로기: 3,626년 (역대상 6:8-15; J.Blenkinsopp 1995:84)
..... 포로기-마카비: 4,000년 => BCE 164 (마카비의 성전재봉헌).
이것에 대하여 '한 세대가 40년이며, 12세대가 한 텀이라는 증거는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역대상 6장의 제사장 족보를 보면 또 생각이 달리집니다(MT와 장절이 다릅니다). 같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루면서, 열왕기의 '역사'와 역대기의 '역사'는 그 내용과 표현방식, 의도와 신학 자체가 다릅니다(역대기에서 중심은 성전이고, 자연스럽게 예배이며, 예배의 시작자인 다윗에 대하여 안좋은 부분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제사장의 입장에서 '세련된' 표현에 따르면(대상 6:1-15), 레위부터 사독(제1성전 건축) 사이에 12대가 있으며, 사독과 여호사닥(그 아들 여호수아의 제2성전 건축)사이에도 12대가 있습니다. '의미있는' 시대에 성전이 세워졌음을, 고로 하나님의 섭리가 있으며 신성함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음을, 역대기는 말해줍니다. 사무엘서와 열왕기의 역사기록 자체가 가질 수 밖에 없는 모순과 혼동을, 역대기는 오직 하나의 키워드(제사장의 논리/신앙)로 정리했기 때문에 훨씬 깔끔하게 보입니다.
이러한 역대기의 세련됨이, 아마 LXX의 신앙인들과 맞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역대기의 기록자들과 같이, 일차사료수집가들이 아니라, 역사의 해석자들이기 때문입니다. LXX의 기록자들 역시 또 하나의 '해석자'로서 그들의 '역사' 기록에 충실하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열왕기상 6장 1절에서 나타납니다. MT에서는 480년으로 되어있지만, LXX에서는 440년으로 되어있습니다. MT가 구축했던 4000년의 큰 그림이 깨지는 판이지요. 그러나 LXX는 그런 큰 그림보다는 현실적인 역사적 논리가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왕상 6:1은 출애굽이후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는데, 그것을 생각해보면, '아론'부터 '사독'(왕상 4:4)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역대상 6장의 족보와 비교하면, 11대입니다. 그러므로 ('한 세대가 40년이라는 증거는 없다'라고 한 것과는 달리) 자연스럽게 왜 440년이 나오게 되었는지 계산이 됩니다. 11대 * 40년입니다. 아론부터 시작해서 사독에게서 성전이 건축되려면, LXX의 입장에서는 440년이어야했습니다(Mordechai Cogan, 1 Kings [2001]: 236).
열왕기상의 MT와 LXX의 비교연구를 진행한 한 학자는 LXX의 번역자들이 상당히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창조적 활동을 집어넣었다고 평가하면서, 이것이 그들만의 독특한 것이 아니라,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문화적 종교적 유산을 포용한 작업이었다고 주장합니다(Andrzej S. Turkanik, Of Kings and Reigns [2008]: 209). MT의 형성자체가 그러했던 것처럼, LXX 역시 '해석된 역사' 혹은 '필요한 신앙'을 하나의 보다 완성된 '내러티브'로 구축했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으론, 모든 것을 쉽게 팩트로 연결지으면서, 초대교회가 LXX를 팩트/이벤트로 이해했으므로, 우리도 그러해야한다는 논리는 햄버거가 처음부터 빵과 고기가 합쳐진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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