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이런일이) 있었다" 성서내러티브는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전형적인 어구를 사용합니다. 이런 표현이 모세에게서(출 2:11), 사사기를 정리하는 대목에서(삿 19:1) 나옵니다. 그리고 사울왕이 전사하는 이야기를 시작하는 글로 나옵니다(삼상 28:1). 그러므로 삼상 28장부터 31장까지 하나의 작은 이야기로 보는 것이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살펴보면 대충 이렇습니다: 블레셋과 전쟁이 임박하자 사울왕이 죽은 사무엘을 찾아가다(28장), 블레셋 진영에서 제외되는 다윗(29장), 아말렉의 복수[?; 27:8]를 되갚은 다윗(30장), 전쟁의 패배와 사울왕의 죽음(31장).
주요한 의도로는, (비록 정황상 다윗은 블레셋의 용병이었지만,)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쟁 사이에 다윗은 전혀 관여할 수 없었으며(29:6), 이스라엘의 패배와 사울의 죽음은 전적으로 사울의 불순종 때문이었음을(28:18-19)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고대근동의 왕실문헌이 말하는 '왕실변증'의 성격이 없다고 할 수 없겠지요.
(필요하기는 하지만, 역사적인 논쟁을 떠나서) 말씀은 두 사람-사울과 다윗-모두 '똑같이' 상황이 좋지 않았다고 보여줍니다: 사울의 경우엔, 블레셋이 군대를 모집하고 달려오는 상황인데, (고대 사회에 전쟁은 사람의 전쟁이 아니라 신의 전쟁이기 때문에, 신의 허락을 받는 것이 필수적이지만)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찾아볼 수 없었던 겁니다.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사울에게 대답하지 않았다"(28:6). 얼마나 답답한 것인지, 히브리어 성서는 '감(also)'이라는 단어를 붙여가며, (개인적 도구) 꿈도 안되고, (물리적 도구) 우림도 안되고, (관계적 도구) 선지자도 안된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삼상 28:15에 사울은 '내가 심히 군급하다'라고 외칩니다(개정판은 '다급하다' 새번역은 '궁지에 몰려있다'). 이것을 쉽게 설명한 말이 바로, '사면초가'라고 생각됩니다. 항우가 사방의 적들에게 둘려쌓여서 답답한 마음으로 적들이 부르는 초나라의 노래를 듣는 심정이 바로, 사울의 마음이겠습니다. 사실 '군급/다급/궁지에 몰리다'라는 이 말은 히브리어로 '짜라르'인데, 신명기 28장 52절에 (성을) '에워싸다'에도 쓰이는 말로, 적들이 자신을 둘러쌀때의 절박한 상황을 말합니다.
똑같은 상황이 다윗에게도 임하게 됩니다: 블레셋 진영에서부터 돌아와보니, 다윗의 마을이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아말렉이 복수를 한 것같이 보이며(27:8), 문제는 마을에 남았던 사람들이 모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분노를 이기지 못한 백성들-다윗을 믿고 따라다녔던 백전노장의 용사였겠지요-이, 갑자기 돌을 들고 다윗에게 달려옵니다. "당신 때문이야!"라고, 하루 아침에 충성된 군인에서, 눈이 뒤집힌 반역자들로 변했습니다. 다윗 역시 앞이 깜깜했겠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다윗이 크게 군급/다급하였다; 곤경에 빠졌다"라고 말씀합니다(30:6). 여기에서 사울의 상황과 똑같은 히브리어 '짜라르'가 사용됩니다. 다윗 역시 사방에 돌을 들고 달려오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울왕은 '신접한 여인'을 찾았던 반면(28:7), 다윗은 에봇을 찾게됩니다(30:7). "하나님이 나를 떠났기 때문에"(28:15)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방법으로(신 18장) 이 곤경을 헤쳐가려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 사울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문자적으로, 사울의 거구가 땅에 곤두박질치는 것처럼!) 힘을 모두 잃어버리며(28:20), 전쟁에서도 패배하여 죽고 맙니다. 이에 대하여 다윗은 정황상 '하나님이 떠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게" 됩니다(30:6). 여기에서 히브리어는, '다윗이 그의 하나님, 야훼로 말미암아 스스로 강하게[하자크-히트파엘] 되었다'라고 말씀합니다. 눈으로 볼 때는, 하나님이 안계시는 것처럼보이지만, 다윗은 그 안에 '살아계시는'(29:6) 야훼 하나님을 불러 일으킨 것입니다. 그래고 힘을 얻은 것입니다.
결국은 놀랍습니다. 다윗은 '사람이나 재물이나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이 도로 찾았던'(30:19) 반면, 사울왕은 자신이 죽었을 뿐만 아니라, (역시 문자적으로!) 그와 함께 있던 모든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31:5-6). 성서는 다윗과 '함께(야크타브, together)' 움직였던 사람들은 모두가 상을 받았지만(30:24), 사울의 무리는 그날에 '함께(야크다브)' 죽었다고(31:6) 말씀합니다. (이렇게 사울과 다윗의 대조는 생각보다 면밀하게 숨어있는데요, 다윗이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전리품을 베풀어주었던 은혜의 사람이었던 반면에[30:23-25, 26-30!], 사울왕은 여인의 생명과 한조각 떡을 대접받고[28:21,22]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베풀어준 옛은혜의 보답으로 장사될 수 있었습니다[31:11; 11:1-11]. 은혜를 베푼 다윗과 은혜를 받는 사울로 대조되겠지요.)
사람이 곤경에 빠질 때, 우리는 진실을 대면하게 됩니다. 많은 경우에 그 진실은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요한의 영광의 십자가 신학이 아직 세워지기 전)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의 마지막 기도의 자리에서 벌벌 떠셨습니다. 아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고,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될" 정도였습니다(막 14:33-34).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내쫓아버렸을 때(막 1:12)도 그에게는 무엇이라도 함께 하였지만, 겟세마네에서는 그리고 십자가에서는 그무엇도 함께 하지 않음을 알기에(막 15:33-34), 예수님의 군급함은 상상을 초월하였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의 소원'을 붙들었고, 그 길을 걸으였습니다.
사울이 보여준 진실은, 우리의 허울좋은 겉모습-그는 왕이었습니다!-이 '곤경 앞에서'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깨닫게해줍니다. 하지만 다윗과 예수님이 보여주신 진실은, 비록 겉으로보기엔 보잘것없고 연약하지만, 득달같이 달려오는 사단의 시험과 유혹을 이기는 신앙의 승리를 경험하게 합니다. '사면초가'일 때, 에봇(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의 원대로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이 신앙의 진리겠지요.
그 이야기를 살펴보면 대충 이렇습니다: 블레셋과 전쟁이 임박하자 사울왕이 죽은 사무엘을 찾아가다(28장), 블레셋 진영에서 제외되는 다윗(29장), 아말렉의 복수[?; 27:8]를 되갚은 다윗(30장), 전쟁의 패배와 사울왕의 죽음(31장).
주요한 의도로는, (비록 정황상 다윗은 블레셋의 용병이었지만,)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쟁 사이에 다윗은 전혀 관여할 수 없었으며(29:6), 이스라엘의 패배와 사울의 죽음은 전적으로 사울의 불순종 때문이었음을(28:18-19)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고대근동의 왕실문헌이 말하는 '왕실변증'의 성격이 없다고 할 수 없겠지요.
(필요하기는 하지만, 역사적인 논쟁을 떠나서) 말씀은 두 사람-사울과 다윗-모두 '똑같이' 상황이 좋지 않았다고 보여줍니다: 사울의 경우엔, 블레셋이 군대를 모집하고 달려오는 상황인데, (고대 사회에 전쟁은 사람의 전쟁이 아니라 신의 전쟁이기 때문에, 신의 허락을 받는 것이 필수적이지만)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찾아볼 수 없었던 겁니다.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사울에게 대답하지 않았다"(28:6). 얼마나 답답한 것인지, 히브리어 성서는 '감(also)'이라는 단어를 붙여가며, (개인적 도구) 꿈도 안되고, (물리적 도구) 우림도 안되고, (관계적 도구) 선지자도 안된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삼상 28:15에 사울은 '내가 심히 군급하다'라고 외칩니다(개정판은 '다급하다' 새번역은 '궁지에 몰려있다'). 이것을 쉽게 설명한 말이 바로, '사면초가'라고 생각됩니다. 항우가 사방의 적들에게 둘려쌓여서 답답한 마음으로 적들이 부르는 초나라의 노래를 듣는 심정이 바로, 사울의 마음이겠습니다. 사실 '군급/다급/궁지에 몰리다'라는 이 말은 히브리어로 '짜라르'인데, 신명기 28장 52절에 (성을) '에워싸다'에도 쓰이는 말로, 적들이 자신을 둘러쌀때의 절박한 상황을 말합니다.
똑같은 상황이 다윗에게도 임하게 됩니다: 블레셋 진영에서부터 돌아와보니, 다윗의 마을이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아말렉이 복수를 한 것같이 보이며(27:8), 문제는 마을에 남았던 사람들이 모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분노를 이기지 못한 백성들-다윗을 믿고 따라다녔던 백전노장의 용사였겠지요-이, 갑자기 돌을 들고 다윗에게 달려옵니다. "당신 때문이야!"라고, 하루 아침에 충성된 군인에서, 눈이 뒤집힌 반역자들로 변했습니다. 다윗 역시 앞이 깜깜했겠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다윗이 크게 군급/다급하였다; 곤경에 빠졌다"라고 말씀합니다(30:6). 여기에서 사울의 상황과 똑같은 히브리어 '짜라르'가 사용됩니다. 다윗 역시 사방에 돌을 들고 달려오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울왕은 '신접한 여인'을 찾았던 반면(28:7), 다윗은 에봇을 찾게됩니다(30:7). "하나님이 나를 떠났기 때문에"(28:15)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방법으로(신 18장) 이 곤경을 헤쳐가려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 사울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문자적으로, 사울의 거구가 땅에 곤두박질치는 것처럼!) 힘을 모두 잃어버리며(28:20), 전쟁에서도 패배하여 죽고 맙니다. 이에 대하여 다윗은 정황상 '하나님이 떠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게" 됩니다(30:6). 여기에서 히브리어는, '다윗이 그의 하나님, 야훼로 말미암아 스스로 강하게[하자크-히트파엘] 되었다'라고 말씀합니다. 눈으로 볼 때는, 하나님이 안계시는 것처럼보이지만, 다윗은 그 안에 '살아계시는'(29:6) 야훼 하나님을 불러 일으킨 것입니다. 그래고 힘을 얻은 것입니다.
결국은 놀랍습니다. 다윗은 '사람이나 재물이나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이 도로 찾았던'(30:19) 반면, 사울왕은 자신이 죽었을 뿐만 아니라, (역시 문자적으로!) 그와 함께 있던 모든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31:5-6). 성서는 다윗과 '함께(야크타브, together)' 움직였던 사람들은 모두가 상을 받았지만(30:24), 사울의 무리는 그날에 '함께(야크다브)' 죽었다고(31:6) 말씀합니다. (이렇게 사울과 다윗의 대조는 생각보다 면밀하게 숨어있는데요, 다윗이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전리품을 베풀어주었던 은혜의 사람이었던 반면에[30:23-25, 26-30!], 사울왕은 여인의 생명과 한조각 떡을 대접받고[28:21,22]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베풀어준 옛은혜의 보답으로 장사될 수 있었습니다[31:11; 11:1-11]. 은혜를 베푼 다윗과 은혜를 받는 사울로 대조되겠지요.)
사람이 곤경에 빠질 때, 우리는 진실을 대면하게 됩니다. 많은 경우에 그 진실은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요한의 영광의 십자가 신학이 아직 세워지기 전)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의 마지막 기도의 자리에서 벌벌 떠셨습니다. 아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고,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될" 정도였습니다(막 14:33-34).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내쫓아버렸을 때(막 1:12)도 그에게는 무엇이라도 함께 하였지만, 겟세마네에서는 그리고 십자가에서는 그무엇도 함께 하지 않음을 알기에(막 15:33-34), 예수님의 군급함은 상상을 초월하였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의 소원'을 붙들었고, 그 길을 걸으였습니다.
사울이 보여준 진실은, 우리의 허울좋은 겉모습-그는 왕이었습니다!-이 '곤경 앞에서'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깨닫게해줍니다. 하지만 다윗과 예수님이 보여주신 진실은, 비록 겉으로보기엔 보잘것없고 연약하지만, 득달같이 달려오는 사단의 시험과 유혹을 이기는 신앙의 승리를 경험하게 합니다. '사면초가'일 때, 에봇(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의 원대로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이 신앙의 진리겠지요.
'Bible Study > 구약 성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9세기 예언자와 8세기 예언자 (0) | 2014.03.06 |
---|---|
480년? 440년? (왕상 6:1) (0) | 2014.03.01 |
사무엘과 목회자 (0) | 2014.02.21 |
누구에게도 자격은 없습니다. (0) | 2014.02.16 |
룻기 읽기 (0) | 2014.0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