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구약 성서

Christine Hayes, Introduction to the Bible, 400-402 번역

진실과열정 2015. 1. 28. 10:38

Christine Hayes, Introduction to the Bible (The Open Yale Courses Series), Yale University Press, 2012: 400-402.

 

    히브리 성서라는 문학은 이스라엘이 걸었던 긴 여정과 관계가 있는데, 그것은 지역신을 숭배했던 개별 족장들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하여 하나의 나라로 성장하기까지 그들 자신의 지평과 관심사를 뛰어넘어 경험했던 역사에 의해 움직여갔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설령 계획했더라도, 그보다 더 위대하게 성장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세상을 위한 야훼의 종으로 바라보았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들은 자신의 신과 다투며 논쟁을 하기도 했고, 그들 자신의 나약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간됨 때문에 스스로를 비판하였다.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성서는 다양한 저자들에 의해 기록된 일종의 작품집(anthology)이라고 여겨질 수 있으며, 이들 저자들은 엄청나게 이상한 사건들 속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신인 야훼와 계약관계를 지속해나가도록 부단히 애를 썼다. 실제와 종교-도덕적 이상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는데, 즉 선은 흥하고 악은 망한다는 종교-도덕적 이상과 그렇지 않은 실제 때문에 성서 저자들은 곤란스러워했고 혼란을 느꼈다. 엄연히 존재하는 악, 의인의 고난, 야훼가 선택한 사람들의 패배 -- 이 모든 것들은 일종의 근간을 이루는 유일신론적 개념에 기본적으로 부합하지 않는다. 야훼가 우주에서 최고 권력을 잡고 있으며, 야훼가 본질적으로 선하고 의롭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가 창조 이래로 모든 것을 돌보신다고 한다면 말이다. 어떻게 그러한 신을 믿으면서 악과 고통의 문제를 대면할 수 있단 말인가?

 

    비록 모든 고대 문화들이 악의 문제와 씨름해 왔지만, 이 문제는 특히 이스라엘에게 제일 통렬한 것이었다. 다른 고대 근동 문학들을 보면, 우리는 그 속에서 과연 어떠한 도덕률을 찾을 수나 있는지에 대해서 회의적이지만, 오직 이스라엘만큼은 도덕률의 부재와 악의 문제가 신의 본질과 종교적 신앙심에 가장 토대를 이룬다는 측면에서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다른 문화권에서는 원시적인 악한 세력이나 신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으며, 그래서 악과 고통의 문제가 좋은 신들의 위치를 위협하지 않는다. 이후, 성서에서부터 뻗어나간 종교적 체계는 점차 세상에 존재하는 악을 해결하기 위해서 악마나 귀신들의 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예기치 않은 고통은 분노를 일으키게 하거나 좌절하게 하므로, 그것은 인간의 운명에 무관심한 악한 신들이나 귀신들의 질투나 변덕으로 가능한 한 설명될 수 있었다. 그러나 성서가 표방하는 종교에서는, 독립된 악이라는 것이 원칙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예기치 않은 고통과 만연하는 악은 신 스스로의 선함과 정의를 깎아버리는 셈이 된다.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야훼가 정의를 세워줄 것이라는 믿음 말고는 악과 고통에서부터 그 어떠한 보호장치를 가질 수 없었다. 그리고 만약 그러한 정의가 늦어진다고 할라치면, 절망과 의심이 위협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정론은 상당한 연민의 정을 품고 있는데, 왜냐하면 위험수준이 꽤 높아졌기 때문이다 -- 만약 누군가가 본질적으로 도덕적인 세계 속에서 자신의 믿음을 상실했다고 한다면, 그는 그의 신을 잃어버린 셈이 되는 것이며, 혹은 최소한, 우리가 욥기에서 살펴보았던 것과 같이, 그는 극명한 도덕적 기준에 의해 세상을 다스리는 그 신을 상실한 것과 같은 결과가 되는 셈이다.

 

    성서의 기록자들은 그러한 문제를 철학자나 신학자들이 풀이했던 것처럼 접근하지 않았다. 철학자들에게 있어서, 신정론은 주로 논리적인 문제로, 일종의 모순이라고 할 수 있으며(어떻게 옳고 선한 신이 악과 고통이 존재하도록 내버려두는가?), 다른 논리적인 문제들과 같이, 그것은 주의 깊게 쌓아올린 조직적인 논증을 통해서 가장 잘 해결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것은 성서의 기록자들의 방법이나 접근이 아니다. 그들에게, 문제는 철학적이지 않다 -- 그것은 육체적이고, 정신적이며, 또한 영적인 것이다. 뜨거운 감자는 사실 이것이다: 국가적인 재난과 개인적인 고통을 직면하고서 어떻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향한 헌신을 지킬 수 있단 말인가? 예기치 않는 고통과 혼동이 닥쳐왔으며 또 다시 그러한 것이 오는 것을 알고서도 어떻게 이러한 신을 받아들이고, 신뢰하며, 사랑할 그런 힘이 생기는 것일까?

 

    다양한 기간을 걸쳐 수많은 저자들은, 악과 고통의 현장에서 신앙을 지켜내는 문제를 다루었던 이스라엘의 역경 속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집어넣었다. 이들 저자들의 목표는 신정론이라는 철학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데 있지 않았고, 야훼와 맺은 관계를 통해서 받은 충격을 극복하는 것이며, 야훼와 맺은 언약 안에서 삶을 생존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이며, 악과 고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에 있었다. 성서는 이러한 문제를 처리하는 데 있어 단 하나의 모델을 제공해주지 않는다. 살아있고, 인격적인 신과의 역동적인 관계는 (철학자들의 정적인 신과는 달리) 너무나 복잡한 것이어서 하나의 일차원적인 신학으로는 간파해낼 수 없다. 조직 신학은 국가와 개인의 변화무쌍한 경험들을 다루기에 적합하지 않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모델들이 제시된다 -- 그러한 것들은 서로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각 모델들은 해당 공동체의 특정한 부분을 위해 기능하며, 특정한 기간에 특정한 해법으로 작용한다. 각 모델들은 이스라엘과 야훼와의 관계를 깨뜨리는 상황에 직면하여 오히려 그러한 관계를 유지하려는 시도인 셈이다. 성서의 저자들은 이야기를 말해주고 역사를 해석함으로써, 다양한 개인들과 국가 전체가 그들 자신이 야훼와 계약 관계에 놓여있음을 다양한 방식으로 그려낸다. 여기엔 다양한 모델들을 위한 여지가 있으며, 다양한 모습의 야훼가 있고, 그러한 야훼와 이스라엘과의 관계가 있다. 그리고 오늘날 성서를 읽는 사람들의 경우와 같이, 이 고대의 작품집이 말하는 풀리지 않는 다양한 소리들에 대해 우리는 단지 경탄할 뿐이다.

 

    이러한 수집물을 이후에 정경화했던 랍비들이 코헬렛(지혜자)의 말--모든 것에는 때가 있으며 하늘 아래에 모든 것에는 목적을 위한 시기가 있다--에 들어있는 진리를 보았던 것처럼, 이 책에는 이스라엘 사람뿐만 아니라 인류까지도 포함하여 고대 이스라엘이 직면했던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너무나 다른 접근들이 포함되어 있다. BCE 586년 이후, 신명기적 역사가는 이스라엘의 고통은 야훼의 약속이 신실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믿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논증으로, 다른 나라들이 자신의 패배한 종교에서 떠나는 방식으로부터, 야훼신앙을 지켜낼 수 있었다. 이것을 통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비록 성소가 파괴되며, 선택된 도시와 왕권이 무너졌어도, 자신들의 신께 대한 신앙을 지켜낼 수 있었다. 예언자들은 계약이 말하는 도덕적이며 공동체적인 측면을 강조하였고, 오히려 희생 제사는 경멸의 대상이 되었으니, 이것은 디아스포라와 이후 유대교 안에서 희생 제사 없이 예배가 가능하게 되는 길이 무의식적으로 열리게 된 셈이었다. 시편은 개인적인 절망을 극복하거나 혹은 믿음과 즐거움에 넘친 예배자의 깊은 감정을 표현한다. 욥기는 우리가 부당한 고통의 문제에 닥칠 때 느끼게 되는 분노를 표출하는 반면, 전도서는 인간의 모든 노력이 헛되다는 것을 위로하기 위해서 현재의 쾌락과 노력을 누리라고 설교한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과 동화되고 있는 실제적인 문제에 직면하여 그들이 폐쇄적이 될 것을 말해주는 반면, 요나와 룻기는 유대인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신이 우주를 돌보시는 분임을 확인시켜준다. 에스더와 다니엘은 핍박과 학살이라는 위협 아래의 유대인들에게 극단적으로 다른 방법으로 격려한다 -- 하나는 자기 방어와 결속할 것을 호소하고, 다른 하나는 묵시적으로 신이 개입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

 

    이러한 책들이 서로 모순되지 않은가? 어떤 사람이 오늘은 행복하지만 어제는 불안했다고 한다면 그는 모순된 것일까? 이들 책들은 한 나라가 지축을 흔드는 역사적인 격정의 시기 속에서, 서로 다른 현실들과 순간들 그리고 경험들을 포착해내고 있다. 이스라엘과 그 하나님의 관계는 언제나 역동적이었고 복잡한 것이었다. 이러한 책들 각각은 과거에 특정한 시기와 특정한 목적이 있었고, 성서를 읽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 동안 발견해왔던 것처럼, 이들 책들은 어떤 시대이건 변화의 순간에서 가르침과 영감을 지속적으로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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