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처음 오게 되면 제일 먼저 소개받는 말씀이 요한복음일 겁니다. 간단한 테스트를 해보기만해도, 제일 많이 암송하고 있는 구절은 요한복음에서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이 말씀은 기독교의 중요한 기둥 중에 하나죠.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사실 이 요한복음이 초기기독교 시절에는 거의 인용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90-100년 즈음에, 셈어의 유대교적 바탕으로 구전된 복음서가 헬라문화권인 에베소에서 기록되었다고 말하고 있는데요, 다른 복음서들이 초대교부의 글들에서 인용되었던 것과 달리, 요한복음서는 180년에 와서야 인용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처음엔 기피대상이었다는 거죠. 그 이유는 당시에 등장했던 영지주의 운동과 매우 흡사했기 때문입니다(이러한 논의에 브레이크를 건 사람으로 Charles E. Hill, The Johannine Corpus in the Early Church).
격변의 시기였던 20세기 초중반에 그렇게도 칼빈과 루터가 주목을 받았던 사회학적 원인을 분석한다면, "혼동과 불확실성의 시기엔, 전통주의자들의 강력한 호소가 먹힌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W.D. Davies 1966: 400). 1세기도 그랬다고 하네요. 로마에 의한 평화는 반대로 기존 질서의 붕궤를 의미하는 바, 당시의 철학적 분위기는 지성과 영성이 조화된 혹은 힘과 윤리가 공존하는 세계를 꿈꾸던 새로운 엘리트집단을 양성하였고, 그들은 바로 '헤르메티카(The Hermetica)'로 불리웠습니다. 그들은 그리스의 헤르메스나 이집트의 토트와 같은 지혜신이 과거의 위대한 철학자들(피타고라스, 플라톤)에 하늘의 비밀을 계시해주었고, 그러한 고대의 전통이 자신들에게까지 전수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헤르메티카의 세계관이 (지금 우리에겐 지극히 친근한) '참지식', '참생명', '불사/영생'였으니, 당시 이 해괴한 사상에 어리둥절했던 초대 교회는 경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정경에 들어있지 않은 수많은 복음서들이 비춰주는 영지주의 사상은 학계의 따끈한 감자죠.)
문제는 이렇습니다. 왜 4번째복음서는 이러한 '채널'을 선택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일까요? 그는, 요한복음에서 확인할 수 있던 것처럼 유대교적 지식도 많았고, 많은 신학자들(특히 C.H. Dodd)이 입을 모아 말했던 것처럼 셈족문화권에 뿌리를 두기까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오해받을 짓을 한 겁니다. 예를 들면, 니고데모와의 그 유명한 대화에서(3:3), "거듭난다"라는 말은 헬라어만의 언어유희로, '위로부터'라는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헬라의 이원론을 사용하여) '위로부터' 나야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데, 니고데모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다시' 나는 것으로 오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쉽게 읽혀지지만 실상은 어려운 말씀, 바로 요한복음입니다(6:60-63).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요? '문을 연' 것이라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문을 열고 사람이 되셨던 것처럼, 더 많은 이방인을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더 많은 죄인들을 용서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제자는 (그가 어떠한 차원에서 제자이건 관계없이) 예수님처럼 세상에 문을 열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반발도 있었겠지요: 그래서 복음서가 기록된지 거의 100년 가깝게 '목회자나 성도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못했겠지요. 왜 굳이 그런 방식으로 복음을 전했는지 묻기도 했을 것입니다: "공관복음서가 있잖아! 마태와 누가처럼, 마가를 따라서 쓰면 좋잖아! 근데 왜 이방개똥철학이 하는 모양새처럼 하는거냐고!" (한편, 반셈족주의적 분위기를 언급하면서, 순진한 논리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1)
기독교가 교리학자나 교회사학자나 더 나아가 성서주석학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 답은 예수님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서 자체가 기독교가 가야할 방향을 제시해주기에도 역시 충분합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다른 말씀 뿐만아니라, 요한복음을 통해서 주님께 돌아오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사실 이 요한복음이 초기기독교 시절에는 거의 인용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90-100년 즈음에, 셈어의 유대교적 바탕으로 구전된 복음서가 헬라문화권인 에베소에서 기록되었다고 말하고 있는데요, 다른 복음서들이 초대교부의 글들에서 인용되었던 것과 달리, 요한복음서는 180년에 와서야 인용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처음엔 기피대상이었다는 거죠. 그 이유는 당시에 등장했던 영지주의 운동과 매우 흡사했기 때문입니다(이러한 논의에 브레이크를 건 사람으로 Charles E. Hill, The Johannine Corpus in the Early Church).
격변의 시기였던 20세기 초중반에 그렇게도 칼빈과 루터가 주목을 받았던 사회학적 원인을 분석한다면, "혼동과 불확실성의 시기엔, 전통주의자들의 강력한 호소가 먹힌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W.D. Davies 1966: 400). 1세기도 그랬다고 하네요. 로마에 의한 평화는 반대로 기존 질서의 붕궤를 의미하는 바, 당시의 철학적 분위기는 지성과 영성이 조화된 혹은 힘과 윤리가 공존하는 세계를 꿈꾸던 새로운 엘리트집단을 양성하였고, 그들은 바로 '헤르메티카(The Hermetica)'로 불리웠습니다. 그들은 그리스의 헤르메스나 이집트의 토트와 같은 지혜신이 과거의 위대한 철학자들(피타고라스, 플라톤)에 하늘의 비밀을 계시해주었고, 그러한 고대의 전통이 자신들에게까지 전수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헤르메티카의 세계관이 (지금 우리에겐 지극히 친근한) '참지식', '참생명', '불사/영생'였으니, 당시 이 해괴한 사상에 어리둥절했던 초대 교회는 경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정경에 들어있지 않은 수많은 복음서들이 비춰주는 영지주의 사상은 학계의 따끈한 감자죠.)
문제는 이렇습니다. 왜 4번째복음서는 이러한 '채널'을 선택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일까요? 그는, 요한복음에서 확인할 수 있던 것처럼 유대교적 지식도 많았고, 많은 신학자들(특히 C.H. Dodd)이 입을 모아 말했던 것처럼 셈족문화권에 뿌리를 두기까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오해받을 짓을 한 겁니다. 예를 들면, 니고데모와의 그 유명한 대화에서(3:3), "거듭난다"라는 말은 헬라어만의 언어유희로, '위로부터'라는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헬라의 이원론을 사용하여) '위로부터' 나야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데, 니고데모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다시' 나는 것으로 오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쉽게 읽혀지지만 실상은 어려운 말씀, 바로 요한복음입니다(6:60-63).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요? '문을 연' 것이라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문을 열고 사람이 되셨던 것처럼, 더 많은 이방인을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더 많은 죄인들을 용서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제자는 (그가 어떠한 차원에서 제자이건 관계없이) 예수님처럼 세상에 문을 열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반발도 있었겠지요: 그래서 복음서가 기록된지 거의 100년 가깝게 '목회자나 성도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못했겠지요. 왜 굳이 그런 방식으로 복음을 전했는지 묻기도 했을 것입니다: "공관복음서가 있잖아! 마태와 누가처럼, 마가를 따라서 쓰면 좋잖아! 근데 왜 이방개똥철학이 하는 모양새처럼 하는거냐고!" (한편, 반셈족주의적 분위기를 언급하면서, 순진한 논리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1)
기독교가 교리학자나 교회사학자나 더 나아가 성서주석학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 답은 예수님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서 자체가 기독교가 가야할 방향을 제시해주기에도 역시 충분합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다른 말씀 뿐만아니라, 요한복음을 통해서 주님께 돌아오고 있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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