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하늘누림이야기]

소유

진실과열정 2013. 5. 9. 01:29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는 당혹스러운 결말로 독자의 안정감을 무너뜨립니다. 태생적으로 인간의 향취를 소유하지 못한 주인공의, 살인귀적인 '냄새소유욕'은 결국 자신 스스로를 완벽한 향취의 소유자로 만들어버리고, 이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파멸(실상 작가는 이런 의도가 없었던 것 같구요)로 이끌고 말았죠. 극상의 아름다움은, 결국 거리의 부랑뱅이들의 저녁거리가 되었으니까요. 인간이 '소유'와의 관계에서 얼마나 부자연스러운지를, 참으로 냉담하게 그려낸 소설로 기억이 됩니다(http://blog.daum.net/prophets/10036049).

최근에 이슈가 되고 있는, 청교도의 '카니발리즘'과 오버랩이 되는 부분이 있을까요? 바로 '청교도'라는 타이틀에서 나타나는, 인간 최고의 삶 혹은 윤리, 다시말해...서 썩어져갔던 시대정신에 역행해서 '순수/정결'을 향해 거슬러 올라갔던 사람들이, 전혀 어울리지 않은 '카니발리즘'과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부분에 전문가가 아니기에, 조심성없게 내 생각을 표현할 수 있지만, '소유'의 측면에서 인간실존의 현주소와 '만들어진 전통'이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어느 사회이건 자신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분하는 생태가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어떤 개인이 사회에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뿌리된 언어, 혈통, 독특한 문화들이 경쟁했기 때문에, (고대사회의 경우) 결국 상류층의 소수 엘리트와 95% 이상의 민중들이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 부분은 산업혁명이 있기 전까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성서는 그러한 엘리트적 세계관을 여과없이 보여줍니다: 시편 29:1은 '너희 권능있는 자들아'라고 되어있는데, 원어로 보면, '베네 엘림'으로, 직역을 하면, '신('엘'신)의 아들들아'입니다. 고대사회의 엘리트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불렀는지 알수있는 표현입니다(그들은 누가보더라도 '신의 아들'입니다!). 시편 2편의 '너는 내 아들이라'(7절) 역시, 왕이 등극할 때 선포되는 것으로(참조 사 9:1-7), 왕족의 세계관이, 21세기 민주화된 우리의 개념과 판이하게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6절) 역시, 거꾸로 읽어보면, 누군가는 취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구약전통에 '아담'이 취했고, 빌립보서의 청중에 입장에서는 바로 '로마의 황제'가 스스로 신이 되면서 취했지요(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를 보면, 처음엔 로마사회가 황제신격화를 부인했지만, 황제의 사후 신격화되었고, 결국 살아있는 황제도 신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고대사회의 세계관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아마도 3%의 왕족들은 자신들이 실제로 '신성'을 '소유'했다고 생각했고, 또한 그러한 세계관을 신화나 건축 그리고 그림을 통해서 프로파간다했다고 봅니다.

그런 '소유'가 다른 차원에서는 어떻게 나타날 수 있을까요? 왕족과 같은 엘리트들의 구별된 의식 말고도, 사회는 조직화되고 갈라지게 마련입니다. 이스라엘의 포로후기 시대에 등장했던 '떠는 자들'(히브리어로 하레딤, 스 9:4) 역시, 귀환 포로민들의 혼란스러운 시대에서 자신들의 소위 '경건한 목소리'라고 자청했던, 또 하나의 사회적 엘리트였을 것입니다.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했다는 경건파죠.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엘리트들에 대해서, 제3이사야는 '참 하레딤'을 소개하죠[사 66:2,5].) 이런 구별된 조직은 (신구약 중간기라고 할 수 있는) 하스몬 시대에, 자신들을 '핫시딤'으로 혹은 '바리새파'라고 부르며, 역시 사회의 대다수 서민들의 세계와 인식적 간격을 세웠습니다. 토라를 '소유'했기에, 그들은 가난했어도 그리고 권력을 가지지 못했어도, 대중의 존경을 받을 수 있었지요.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의 숨은 의도를 찔러보기 전까지는 말이죠(마태복음을 '의'라는 키워드로 접근해서, 새로운 모세로서 예수님의 이미지를 해석해본다면[요셉의 참된 의란(1:19); 침례에서의 의(3:15); 산상수훈의 의(5:19-20) 등등], 허울좋은 거짓경건이란 유대교의 허영이 고스란히 벗겨질 것 같습니다).

현재 종교가 미래를 이끌어갈 비전이 사라져서, 과거에 의지하며 과거의 영광을 꾸미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습니다. 몇년전에 읽었던 슈테판 츠바이크의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가 생각이 납니다(http://blog.daum.net/prophets/13415422). 사실 이책은 불편한 내용입니다. 신앙의 영웅 칼빈이, 아이러니하게도, 개신교계 최초로 화형식을 시행하게 했던 장본인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부분에 대해서 '칼빈주의'는 수정주의자들의 역사라고 반박할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이 책에서 칼빈이 (자의든 타의든) 무엇을 '소유'하려고 했었는지, 비판적인 사고를 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소유'한 사람이 보여주는 과오를 잘 보여줍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거죠. 대부분의 경우,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하게 됩니다. (삼손이 좋은 예가 될 것 같네요[http://blog.daum.net/prophets/13415555].) 사실 누가 이부분에서 자유할 수 있겠습니까?

타락한 시대를 역행하는 것은 신앙인의 중요한 삶의 자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은 무엇인가를 '소유'했기(혹은 했다는 착각) 때문에, 그 소유로 존재적인 차별성을 자랑한다거나 혹은 소유하지 못한 이들에게 부당한 강요를 하는 것은 참된 신앙의 내용이 아닙니다. 반대로 지금까지 내려온 각각의 신앙 전통을 너무나 숭배시하는 현대의 접근도 조심스럽습니다. (이와관련해서 처음복음서인 마가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습이 2차인 마태와 누가에게서 얼마나 미화되고 있는지 주의해야 합니다[http://blog.daum.net/prophets/7752914]). 카니발리즘으로 청교도들의 신앙을 무효화시킬 수 없으며(그렇다고 그들의 신앙이 우리의 모범으로도 작용할 수 없습니다), 화형식으로 칼빈의 목에 칼을 댈수도 없죠(역시 그를 완벽한 모델로도 여길 수 없습니다).

어느시대나 영웅은 없으며, 아쉬움없이 빈자리를 남겨주어야 합니다.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사 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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