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하늘누림이야기]

말씀에 주린자

진실과열정 2013. 5. 9. 01:16

새신자환영회를 가졌던 어제 저녁엔, 정말 배부르게 음식을 먹었습니다. 매콤한 돼지고기 주물럭을 보니 허리띠 풀러놓고 차근차근 꼭꼭 씹어가며 참 많이 먹었습니다. 마지막 고기 한점을 입에 물면서, '이거 며칠 굶어도 되겠는걸~'이란 생각이 들었죠.

하지만, 이게 왠일, 오늘 아침부터 배에서 '쪼르륵 꼬르륵' 하며 밥 달라며 성화를 부립니다. 조용한 도서관이 '꼬륵 꼬륵'하는 소리에 요동이 치는 것 같네요. 배부르게 먹으면, 다음날 더 배고픈 것 같아요.

우리 사람의 '몸'이 이럴진데, '영' 또한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말씀을 먹고사는 사람인데, 이상하게, 말씀을 먹지 못해도 영혼이 '꼬륵'하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하루종일 말씀을 달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복될까요(시 1:2).

언자들을 좋아하고, 특별히 예레미야를 닮고 싶은 저로서, 렘 15:16의 말씀은, 말씀으로 사는 사람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라는 부분에서, 예언자의 본질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참고. 겔 2:8). 예언자는 야훼의 말씀을 '받아 전달하는' 사람이기에, 그 말씀을 '얻어 먹지' 않으면, 그는 공허한 음파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아무것도 없어도, 야훼의 말씀을 '받아 먹는' 사람이라면, 그(혹은 그녀)는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됩니다(사 40).

예언자의 삶은, 비록 하나님의 자녀들이 선망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처절하게 외롭고 슬픈 날들임을 잊지않게 됩니다. '창조, 곧 생명'의 단어로 압축할 수 있는 유대적 신앙전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하지 못하고 그래서 당연히 자녀를 보지 못하는 삶을 선택해야 했습니다(렘 16:2). 야훼께서 내리시는 심판의 결과를 몸으로,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 예언자의 삶이었습니다.

백성을 향한 야훼의 고통을 같이 느껴야만 하는(pathos) 사람이 예언자였기에, 예레미야는 세상에 속고(렘 18:22-3), 심지어 야훼에게 속았다고 슬피 울죠.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patah)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렘 20:17) 위대한 학자 Abraham Joshua Heschel에 의해 새롭게 제시된 야훼의 폭력(!)은, 예언자의 고통을 정확하게 해석한 것임에 분명합니다(The Prophets I. 113: "O Lord, Thou hast seduced me, And I am seduced; Thou hast raped me And I am overcome." 하나님이 받은 아픔의 무게를 알기에, 예언자의 삶, 곧 '말씀을 얻어 먹는' 삶이 너무 싫어도, 다시 돌이켜 그 말씀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20:9).

예레미야는 많은 부분에서 모세를 연상시킵니다(출 4:12; 렘 1:9; 신 18:18). 그들의 소명이 같았고, 백성을 짊어진 무게가 같았습니다. 40년간 광야에서 예언자의 길을 걸었던 모세와 같이, 예레미야는 40년간 왕국 멸망의 속도를 늦추기 위해 눈물을 흘렸습니다(BCE 626-586). 말씀의 사람 모세가 '노래'로 야훼의 역사를 남긴 것처럼(신 32), 예레미야는 슬픈노래로 야훼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말씀에 주린자... 그래서 설령 몸의 양식은 주릴지언정, '얻어 먹은' 말씀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 예수께서 보여주신 삶이 푯대요 목적입니다(마 4:4).

진실과열정(2013.2.25) 

'Heaven > [하늘누림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J: 사람은 사람, 개는 개  (0) 2013.05.09
한영혼의 무게  (0) 2013.05.09
장례식과 웃음  (0) 2013.05.09
설교자  (0) 2013.05.09
지혜로운 대답  (0) 2013.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