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2.26)
공관복음을 살펴보면 편집자의 독특한 신학을 발견할 수 있는데, 누가의 '체험 삶의 현장'이 바로 그러한 것 같다. 특별히 '목자'와 관련해서, 누가는 마가(와 그를 따르는 마태)의 '목자'를 거부하고 새로운 '목자'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가(마태)는 '목자'를 지도자로 사용하고 있지만(막 6:34//마 9:36; 막 14:27//마 26:31), 이에 대하여 누가는 일절 침묵하고 있는 반면, 오히려 누가-행전에 걸쳐 오직 한 부분에서만 '목자'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바로 예수의 탄생 내러티브이다(눅 2:8-20). 그 이유는 무엇일까?
(자세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요아킴 예레미야스의 [예수시대의 예루살렘]이란 책을 보면, 당시 랍비들의 문헌들에는 절대 자녀에게 시키면 안되는 직업 몇가지가 나오는데, 그 블랙리스트 가운데 '목자'라는 직업이 순위를 다투면서 등장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실, 그 일은 '내 놓은 자식들'이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목자'라는 이름은 사기꾼이고, 도둑들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의 자료들을 살펴본(눅 1:2-3) 누가의 입장에서, 히브리 전통의 '목자' 이미지(민 27:17; 슥 13:7)를 이해할 수 없었다. 오히려 초대교회의 삶의 현장을 체험한 누가에게, '목자'는 'outsider'의 또 다른 말이었다. 고로, 눅 2:8의 목자들은 정말 '밖에서'(딱 한번 등장) 살았던 외인들이었다.
세상살이 혹은 사회생활과 전혀 상관 없는 이들에게, 세상의 중심이 변하였다고 선포되고 있는 것이다. 당시 '팍스 로마나'의 실천사항으로 대도시(예; 가이사랴 빌립보)에는 개선문에 이런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좋은 소식! 세상의 구주! 신의 아들 가이사! 그의 평화 영원하라!" 누가에 의하면, 세상과 동떨어진 이들에게, 그 세상이 전복됨을 선언하는, '로마의 이데올로기에 정확히 반대되는' 반복음(anti-gospel)이, '허다한 천군(army)!'과 함께 선포되는 것이었다.
세상의 아웃사이더들이 먼저 복음을 누릴 수 있는, 진짜 '좋은 소식'이 누가의 이데올로기이다. 나는 이러한 누가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인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아니라, 정말 '가난한 자'가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다는 메시지를 받아들인다(눅 6:20). 적은 무리들에게 그 나라가 주어진다(눅 12:32). 하나님의 기쁨은 이런 것이다.
세상의 황제[오늘날 누구도 선거판에서 이런 것을 누린다고 들었다]가 스스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였지만'(빌 2:6), 예수는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 나는 여기에서 말하는 사람이란, 누가의 '목자'들이 아닌가 싶다. 예수는 정말 outsider로 오셨다. 그들의 친구로 와서, 그들의 아픔을 체험하셨고, 그들을 구원하사,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주셨다.
그래서 정말 엎드려 절하고만 싶다.
정말 엎드려 절하고만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정말 엎드려 절하는 것 뿐이다.
(자세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요아킴 예레미야스의 [예수시대의 예루살렘]이란 책을 보면, 당시 랍비들의 문헌들에는 절대 자녀에게 시키면 안되는 직업 몇가지가 나오는데, 그 블랙리스트 가운데 '목자'라는 직업이 순위를 다투면서 등장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실, 그 일은 '내 놓은 자식들'이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목자'라는 이름은 사기꾼이고, 도둑들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의 자료들을 살펴본(눅 1:2-3) 누가의 입장에서, 히브리 전통의 '목자' 이미지(민 27:17; 슥 13:7)를 이해할 수 없었다. 오히려 초대교회의 삶의 현장을 체험한 누가에게, '목자'는 'outsider'의 또 다른 말이었다. 고로, 눅 2:8의 목자들은 정말 '밖에서'(딱 한번 등장) 살았던 외인들이었다.
세상살이 혹은 사회생활과 전혀 상관 없는 이들에게, 세상의 중심이 변하였다고 선포되고 있는 것이다. 당시 '팍스 로마나'의 실천사항으로 대도시(예; 가이사랴 빌립보)에는 개선문에 이런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좋은 소식! 세상의 구주! 신의 아들 가이사! 그의 평화 영원하라!" 누가에 의하면, 세상과 동떨어진 이들에게, 그 세상이 전복됨을 선언하는, '로마의 이데올로기에 정확히 반대되는' 반복음(anti-gospel)이, '허다한 천군(army)!'과 함께 선포되는 것이었다.
세상의 아웃사이더들이 먼저 복음을 누릴 수 있는, 진짜 '좋은 소식'이 누가의 이데올로기이다. 나는 이러한 누가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인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아니라, 정말 '가난한 자'가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다는 메시지를 받아들인다(눅 6:20). 적은 무리들에게 그 나라가 주어진다(눅 12:32). 하나님의 기쁨은 이런 것이다.
세상의 황제[오늘날 누구도 선거판에서 이런 것을 누린다고 들었다]가 스스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였지만'(빌 2:6), 예수는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 나는 여기에서 말하는 사람이란, 누가의 '목자'들이 아닌가 싶다. 예수는 정말 outsider로 오셨다. 그들의 친구로 와서, 그들의 아픔을 체험하셨고, 그들을 구원하사,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주셨다.
그래서 정말 엎드려 절하고만 싶다.
정말 엎드려 절하고만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정말 엎드려 절하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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