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신약 성서

[Book] 로버트 펑크, 예수에게 솔직히(1996)

진실과열정 2009. 1. 17. 14:21

 

(*보는 각도가 같군요: 이 책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것을 반영하고 있는듯^^*)

 

Robert W. Funk, [예수에게 솔직히: 새로운 밀레니엄을 위한 예수], 김준우 역 (한국기독교연구소, 2006) 

 

2008년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날인가... [다음]의 내 계정에 6천원가량 적립금이 생겼다. 어찌할까하다가, 생각해두었던 본 서를 구입했다. 새해를 맞이해서 처음 손에 잡은 책인지라. 많은 생각을 함께 하면서 좋은 읽기를 할 수 있었다. M.Div 시절에 "예수의 비유" 수업을 들으면서 박노식 박사는 틈틈히 펑크(자꾸 '뻥크'로 들렸다)를 언급했다. 따라서 이 책의 다소 모호한 제목에서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를 조심스럽게 묻곤 했었다. 이 책은 '역사적 예수'라는 특별한 학문 분야에 집중하고 있는 책이다.

 

    이미 '역사적 예수' 분야에서 저자가 포함되어 있는 '예수 세미나' 집단은 특유의 색깔논쟁(신약성서의 진위를 파악하는데 쓰이는 학자들의 학문적 '솔직함'의 상징)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 중에서 N.T. Wright가 대단히 경계하고 있는 것 같다.) 일전에 J.D. Crossan의 책도 읽었는지라, 이성적으로는 그리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을 통과하고 난후, 내가 '정말로 정치적 종교인'이었음을 뼈져리게 인정하게 되었다.

 

    간단하게 저자의 주장을 정리해보도록 하자: 한마디로 말하면,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뒤엎으려고 한다. 그것의 중심은 예수이지만, 궁극적 목적은 우리라고 해야겠다(43). 이를 위해서 3단계 전략을 짠다. (1) 냄새나는 종교의 비판, (2) 진실에 대한 솔직한 대면, (3) 걸래낸 것을 마시라. 비유적으로 표현했기에 조금 자세하게 풀어보도록 하자. 우선 저자는 (1)부에서 '너무나 길게, 정말로 너무나 길게' 연구자의 마음 가짐을 훈련시킨다. 수많은 장애물들(89,93)과 오랜 연구사와 사본학의 분야에까지(174,186)! (사실 왠만해서는 예수를 대면하기도 전에, '관둬!'라고 할 정도이다!) 하지만, 시시콜콜한 잔소리로 들리지 않는 이유는, 저자가 적확하게 문제를 지적하고 대안적인 방법론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탁월한 연구서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연구자료자체"의 설정에서 목소리를 높인다. 192페이지에서 저자는 간단하게 그림으로 설명해주고 있다(확인해보시길!). 결국, 저자의 주장은 우리가 역사적 예수를 대면하기 위해서는 덧칠해진 부분들을 과감하고 솔직하게 털어낼 수 있는 학자적 양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복음서의 아주 작은! 부분인 말씀(어록) 부분이 나오고, 그러므로 더욱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는 (가상적) Q, 혹은 (실체적) 도마복음이 선택된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그래서 본질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내러티브'의 옷을 완전히 발가벗긴, '말씀의 예수'가 저자가 택한 역사적 예수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사실, 저자에게 도마복음이 '제1순위'이다(209,215,476).

 

    (2)부에서 저자는 역사적 예수를 대면시켜준다. 다름 아닌, 예수의 어록 연구이다. 그의 행위는 기록자의 다양한 의도로 인해서 때가 묻었기에 선택할 수 없다. 이 말은 예수의 어록의 앞부분에 흔히 붙어있는 '설정'까지도 배제해야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내가 볼 때) 저자의 새로운 천년을 기다리는 휴머니스트의 랜즈로, 약간의 상상력을 가미하고, 기존의 도덕률을 제3의 길로 비틀 수 있는, 해학! 바로 그 해학을 끄집어 내는 것이 저자의 진면목이라고 하겠다. 저자는 예수의 수사학이 분명히 있다고 주장한다(220,223,230). 그것은 바로 상투성의 격파이며, 문자 그대로가 아닌 내면의 도전이다(239). 저자가 계속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성서로 고착화되면서 현실을 떠난 것에 한탄하며) 예수 말씀의 "사실주의적이며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현실감이었다(228). 따라서, 저자가 분석한 예수의 풍자, 비유는 탁월하다. (그래서 '비유' 세미나에서 펑크가 간과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저자에 의해서 그동안 주장되었던 '묵시적 예언자' 상은 사라지게 되었고(258), 그렇다고 크로산처럼 당시의 견유학파(cynic) 교사는 주장하지 않는다. 너무나 익숙했던 사마리아인(260-75)과 탕자의 비유는 완전 새로운 읽기 그 자체이다. 저자는 비유는 "새로운 현실"의 이야기라고 이해한다(271). 보편적으로 세명의 편이 있고 두개의 장면이 나온다. 여기에서 편을 가르고, 자리를 역전시키며, 그래서 결국 전복시키는 것이 예수의 비유이다(296). 예수는 원수까지 포함하는 대가족으로서의 새가족을 말한다(304). 예수는 모든 곳이 하나님의 현존 장소라고 이해시키며 새장소를 말한다(309,329). 저자에 의하면, 새로운 현실은 새로운 해석에서 가능한 것이다(263,281).

 

    (3)부에서 저자는 기독교를 와해시킨다. 예수만 남고 교리-신학이 와해된 기독교를 마시라는 것이다. 사실 (많은 학자들이 숨기면서 인정하는 것처럼) 성서는 정치적 성격의 글임에 분명하다(340). 따라서 저자는 문제의 근원에 과감하게 메스를 댄다. 그것은 목사가 아니다. 그것은 교황이 아니다. 놀랍게도! 아주 놀랍게도! 그것은 예수였다. (신약의 저자들에 의한!) 비전의 예수가 아니라, (갈릴리의 현자로서!) "예수의 비전을 보는 것"이다(367). 이것을 구분하는 능력을 이 책에서 배우게 된다면, 가치있는 독서라고 생각된다. 아무튼 저자는 수난, 부활, 탄생과 같은 내용(내러티브!)을 신성화작업으로 일축한다(369,371,384,391, 408, 426,449). 저자는 간단하게 이러한 부분을 고대지중해의 영웅설화전철을 밟았던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430). (한편, 이 책이 대중들을 위한 읽기라서, 증거자료를 직접적으로 제시하지 않은 것은 실망적이다. 421의 주장[몸의 부활]은 N.T. Wright와 대조된다.) 결국 저자는 예수를 솔직하게 보는 것을 막았던(?) 종교/정치적 작가들의 대단한 솜씨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헛박수를 날림셈이다. 기독교 운동은 이제 새로운 시대에서 먹히지도 않고 소용도 없었다. 저자가 든 메스로 인해서 신약성서는 사망했고, 예수는 살아났다.

 

    후기에서 저자는 21개의 신앙선언을 말한다. 어떤 것은 공감이 가고, 또 어떤 것은 아직도 동의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부시가 물러간 역사적 타이밍에!) orthodoxy가 아닌 orthopraxis의 시대를 우리의 손으로 열어가야 한다는 점이다. 바로 다양성의 세계를 열어가는 것, 그 속에서 '함께 함'의 매력을 누리는 것이 저자가 그렇게 원했던 '솔직함'이라고 생각한다(481).

 

 

 

 

*저자는 예수를 보지말고, 예수가 보았던 것을 보자고 말한다. 그런 면에서 너무나 익숙한 휴머니즘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사실, 휴머니즘[<-여기엔 신의 자리가 없다!] 밖에 또 뭐가 필요하겠는가!) 그런데 그게 무엇인지? 그래서 저자는 많은 학자들이 양심고백을 하듯이, 결국 윤리로 선회하는 것 같다(460). 예수와 윤리를 구분하는 나의 자세 자체가 문제일 수 있겠지만, 저자는 이것을 동치시키면서, 역사적 예수의 역사성을 신화화했다. 예수가 보았던 것을 보려고 했던 1세대(즉, 성서의 기록자)는 실패했다. 많은 부분에서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저자는 여러 곳에서 베드로와 바울의 긴장 관계를 설명한다). 니케아를 포함한 공의회의 2세대 역시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예수가 보았던 것을 바로 볼 수 없었다. 우리 세대가 예수가 보았던 것을 보려면, 먼저 '정치적 이해관계'에 대한 '솔직한' 입장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과연 그게 가능하기나 할까?).